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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의 철학 사상
가치론(價値論)
묵자는 모든 사물의 시비선악(是非善惡)을 판단할 때 하느님의 뜻을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하느님의 뜻이란 인민의 겸애(兼愛)와 교리(交利) 이다. 즉, 모든 인간은 인종 ·빈부 ·귀천에 상관없이, 심지어 적국민이나 오랑캐까지도 하느님의 신민이며, 하느님께서 평등하게 사랑하시기 매문에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이롭게 해야 한다(莫若法天. 以其兼而愛之 兼而利之. 人無貧富貴賤皆天之臣也 是以天欲人相愛相利也 ‥‥ 法儀)
그러나 부모는 법도로 삼을 수 없다. 부모는 자기 자식을 남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평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스승은 법도로 삼을 수 없다. 스승은 하느님보다 지혜로울 수 없으며, 스승의 학문은 다른 스승의 학문과 다를 수 있어 보편성이 없으므로 가치의 표준이 될 수 없고, 스승의 이념은 살아있는 사랑이 아니고 죽은 관념이므로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어서 평등한 사랑을 배반하기 때문이다. 또한 군주도 법도가 될 수 없다. 군주는 인민의 의(義)를 하느님의 뜻과 화동일치 (和同一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는 수단일 뿐, 그 자신이 가치의 표준이 될 수 없다(故父母學者君 三者 莫可以爲法 ‥‥‥ 法儀) .
하느님께서는 온 인민을 똑같이 사랑하므로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제도나,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전쟁을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본받을 표준은 하느님뿐이다 이 점에서 묵자는 좌파의 시조이면서도 좌파로부터 비판받는다. 맑스는 실존적 개별생명 외에 국가, 세계 또는 그 어떤 절대자에게도 전체 생명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묵자는 개별생명 외에 하느님을 전체 생명으로 인정한다. 그러므로 묵자는 지배자인 군주나 이데올로기까지도 가치판단의 척도로 삼을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은 하느님 앞에 절대 평등하였던 것이다.
묵자가 말하는 하느님은 중세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을 소외시키고 절대자로 군림하여 경배를 강요하는 금기의 신이 아니다. 그가 말한 하느님은 전체 인민의 뜻이었다.
묵자는 가치판단은 사실판단의 기초위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한다. 사실판단의 재료인 지(知/지각)는 가치판단의 재료인 의(意/마음)와는 다른 것이다. 의(意/마음)는 무지(無知)한 백지이다. 지(知)는 경험이며 의(意)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지각과 경험이 없으면 마음과 관념은 망상에 빠지며 (意未可知, 若楹輕於萩 其於意也洋然 ‥‥‥ 經說下下一七) , 마음의 관념이 없으면 지각과 경험만으로는 사실을 일컬을 수 없다(有文實也, 而後謂之, 無文實也, 則無謂之‥‥‥經說下上五) .
그러나 마음의 시비선악에 대한 가치판단이 참 또는 진리에 대한 사실판단과 다르다면 어떻게 선악미추는 참을 기초로 할 수 있는가?
묵자는 우리가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두 가지 (존재 · 당위)를 아울러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묵자는 하느님의 뜻인 겸애(兼愛)와 교리(交利)에 맞으면 옳고 그것에 반하면 그르다고 할 때, 그것을 가려내는 판단을 변론이라 하였다. 변론에는 세 가지 표준을 지켜야 한다고 한다.
첫째, 역사에 비추어 타당성 여부를 판단한다. 즉, 성왕(聖王)의 역사적 경험에 의하여 비교 · 검토되어야 한다.
둘째, 인민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사실판단에 비추어 그것을 판단해야 한다. 셋째, 그것을 사회에서 실천할 때 인민에게 이익이 되는가를 판단해야 한다. 실용적이면 옳고 비실용적이면 그른 것이다. (言必有三表 上木之於亥古者聖王之事, 下原察百姓耳目之實 發以爲刑政 視其中人民之利‥‥‥‥ 非命) .
그리고 그 판단의 주체는 인민 자신이어야 한다. 그래서 인민은 그가 보고 들은 시비선악에 대하여 누구나 말할 수 있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시비선악에 대하여 상과 벌을 내리는 도덕적 규범을 집행하는 통치자를 자신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尙賢 참조)
이와 같이 묵자의 가치판단은 하느님을 본받을 표준(法儀)으로 삼고 역사적 점증과 경험적 사실판단 그리고 실천 ·실용을 표지로 판단하며, 그 주체는 인민 자신이었다. 즉 묵자의 가치는 가치판단의 재료인 관념 자체가 아니고 인민의 선택이었던 것이다(天下之君子 不知仁者 非以其名也 亦以其取也 ‥‥‥ 貴義五) .
오늘날 서구세계는 실증주의, 실용주의, 과학주의, 반증주의, 상대주의 등으로 이데올로기는 종언되고 사실만이 승리를 외치고 있어 가치가 실종 되었다. 이성과 목적과 실천이 실종되었으므로 인간의 선택은 필요 없으며 형식과 수단과 절차와 능률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즉 신은 죽었으며 인간도 소외당한 것이다. 한편, 동구세계는 물질세계의 뉴턴적 자연결 정론이 역사를 지배하고 그러한 유물사관이 이데올로기로 교조화 되어 물질만이 참된 것이며, 또 참된 것만이 도덕적이기 때문에 인간의 선택은 실종되었다. 다시 말해, 이성을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으로 치부하고 물질세계의 상보적인 대립을 인간사회의 모순으로 대치시키는, 기계화된 경제의 변증법인 물질발전론이 이성을 실종시키고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다.
오늘날 과학은 물질세계의 극소 단위인 소립자를 관찰하기에 이르러 물(物)의 물질성 (物質性)이 소별되었고, 이성 (理性)은 물질의 불완전한 반영이나 노예가 아니며 도리어 독립적임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유물주의 (唯物主義)와 경제결정론(經濟結定論)의 교조주의는 쇠퇴하고 또 다른 이데올로기며 보편성인 신(神)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한편 과학에 의해 물질세계의 불확정성(不確定性) 이 증명됨으로써 과학은 도덕화 되고 사실의 승리는 종언되었다. 가치를 떠난 사실은 인식할 수도 없고 판단되지도 않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주의와 실증주의는 좌초되고 가치와 이데올로기가 부활되어 正義哲學(정의철학)으로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오늘날은 기치와 사실의 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묵자의 선악과 참의 통합은 모순이 아닌 것이다. 어쨌든 오늘날 인류는 가치의 맹목성을 극복하고 보편성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인식론(認識論)
묵자는 가치의 판단과 사실의 인식을 엄격히 구분한다. 묵자는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보고 들은 사실을 근거로 판단해야 된다고 말한다.
(必以衆之耳目之實 知有與亡 爲儀者也 ‥‥‥ 明鬼) . 또한, 운명론을 비판하면서 운명의 존재에 대하여 자고로 인간이 탄생한 이래 운명의 색깔을 보거나 운명의 목소리를 들은 일이 있는가라고 반문하고, 그런 일이 없으므로 운명은 없다고 주장 한다
(自古以及今 生民以來者 亦嘗見命之色 聞命之聲予 則未嘗有也 ‥‥‥ 非命).
장님은 흑백을 말할 수는 있으나 흑백을 가릴 수는 없다. 그러므로 장님은 명(名)을 알 뿐 실(寶)을 모른다고 말하며 관념과 사실을 엄격히 구분한다.
(瞽不知墨白者 非以其名 以其取也 ‥‥‥ 貴義).
이상과 같이 묵자는 관념과 경험,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을 구분한다.
그러면 인간은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모사할 수 있는가?
묵자는 지(知)와 의(意)를 구분한다(知與意異 ‥‥大取篇十二) 지각은 재료에 불과하다. 즉 지혜에 도달하는 수단으로써 시각과 같다(知材也 知也者 所以智也 ‥‥‥ 經說上).
반면 마음(意)으로는 들보를 회초리같이 가볍게 생각할 수 있다.
(意未可知 若楹輕於秋於意也洋燃 ‥‥‥ 經說下 下十六)
즉 마음은 지각할 수 없고 무지한 것이다. 그래서 지각에 기초하지 않은 마음은 물들이는 대로 물드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지각은 사물을 접촉하여 그것을 본뜬다(知也者 以其知過物而能貌之 若見‥‥‥經說上上五). 그것이 완전한가 불완전한가의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지만 묵자는 불완전하다고 보았다(焉摹略萬物之然 ‥‥‥ 小取) . 이러한 재료를 가지고 과거의 경험과 비교하고, 경험을 관념(名)으로 차례 지워 이름을 붙인다. 이같이 명(名)으로 사실을 드러내고 이러한 명(名)을
연결한 명제로 마음을 나타내고, 이 명제를 연결한 변론으로 일(事)을 나타낸다.
(焉摹略萬物之然 論求群言之뇌 以名擧實 以辭指意以說出故 ‥‥‥ 小取).
이와 같이 지각을 재료로 경험과 비교하고 관념으로 이름을 붙여 실(實)을 나타내면 그 이름(名)을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관념의 보편성). 실(實)을 이름(名)으로 꾸미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일컬어 말할 수 없다.
(有文實也 而後謂之, 無文實也則無謂之 ‥‥‥經談下上五) .
그러나 사물에는 같은 이름이 있을 수 있고(物盡同名‥‥‥經說下上三), 또 사물과 그 지각한 것, 그것을 명(名)으로 전달한 것은 다를 수도 있다.
(物之祈以然, 與祈以知之, 與所以使人知之 不必同 ‥‥‥經誠下上十-)
중국에서 옛 부터 전해오는 말에, 사람에게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는데 여섯 개의 구멍은 지각의 구멍이고 한 개의 구멍은 생각하는 구멍이라고 한다(列子 ·莊子). 그 마음 구멍이 막히면 사물의 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所謂內隱而外閉與心母空牙 內霧而不解也‥‥‥‥小取).
그래서 묵자는 마음 구멍을 열고 생각하는 법칙을 정립하기 위하여 논리학을 중시하였고 참된 지(智)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묵자는 경험을 기초로 하여 사실의 '참'을 인식하고 관념이 그것을 꾸며 차례 지움으로써 보편성을 얻게 된다고 주장한다.
유가의 유심론적 관념론과, 불가지론적 은둔 주의자들인 노 · 장 사상의 중심 주제인 渾沌(혼돈) 즉, 원초적 자연 질서로의 회귀사상에 숨어있는 반인간적, 반동적 기만성이 정면으로 부정되는 것이다. (장자는 혼돈의 자연은 인간의 마음속의 질서라는 관념으로 파악하는 순간 그 자연은 죽어 버린다고 주장한다) . 이러한 경험론적 인식론에서 한 발 나아가 이천 년 후의 맑스에 이르러서는 인간의 사유가 대상의 진리를 파악하는 것이 이론적인 문제가 아니고 실천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의식은 순수의식이 아니다. 정신은 애초부터 물질에 붙잡혀 있었다. 그러므로 의식은 처음부터 이미 하나의 사회적 산물이다.
따라서 맑스에게 있어서 의식은 의식된 존재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었다. 맑스의 이 같은 철저한 유물론적 경험론에 비하여 묵자는 경험론적인 기초에 서 있었지만 물질적 관계에서 탄생한 관념 사상이 다시 분리 · 독립하여 자기 규정력을 가지고 역사를 지배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계급적 가치를 예외로 한다면, 맑스에게는 물질적 진리가 가치였으므로 만인의 보편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나 묵자는 공동체와 세계의 보편적 가치로써 전체생명인 하느님을 인정한다.
인성론(人性論)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공자(孔子)와 맹자 (孟子)는 인성 (人性) 이 선하다고 한다. 그들은 성왕(聖王) 이나 귀족의 인성이 악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공자는 무너지려는 봉건제도를 지탱하고자 지배계급인 귀족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군자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선단(善端)을 잘 발전시켰고, 피지배 민중인 천민과 노예는 그것을 상실했다고 공자는 주장한다. 그 사단(四端)이 발전하여 사덕(四德)이 된다. 즉, 측은한 마음이 인(仁)의 싹이며, 부끄러운 마음이 의(義)의 싹이며, 사양하는 마음이 예(禮)의 싹이며, 시비를 가리는 마옴이 지(智)의 싹이다. 그들에겐 인, 의, 예, 지, 모두가 마음이었다. 즉, 유심주의적(唯心主義的) 관념론이었다. 이러한 관념론에 따르면 인성은 선험적인 것이므로 신분제도와 노예제도가 정당화된다.
공자는 인성론에 대하여 명확한 언급을 하지 않고 다만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익힌 습관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했을 뿐이다.(性相近也習相遠也 ‥‥‥ 論語/陽貨). 그러나 순자(筍子)가 귀족계급을 반대하고 신흥 자본가 계급을 옹호하면서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자 그를 이단이라 비난하면서부터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이 유가의 정통으로 굳어진다.
묵자는 인간의 행동은 욕구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며 그 욕구는 후천적으로 '물들여진 것'이라고 주장한다(爲, 窮知而縣於欲也‥‥‥ 經說上下二六).
마음이란 아무 것도 없는 백지와 같아서, 그것이 행동을 할까 하지 말까의 의심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意未可知 ‥‥‥ 經說下下十六 · 所爲與不所爲相與疑也 非謀也‥‥‥ 經說上下二六). 그 백지와 같은 마음이 마땅하게 물들여져야 도리에 맞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行理生於染當‥‥‥所染). 물들여진 습관이 나의 행동을 결정하며 따라서 본성은 본래부터 선천적으로 바른 것이 아니고 바르게 물들일 수 있을 뿐이다. (陳執因吾所爲也 而性不可正而正之‥‥‥ 大取三). 서로 인도하고 따르는 것은 습관으로 물들여진 것이 같기 때문이다.(唱和同串心‥‥經談下下二八).
묵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意)과 성품(性)과 욕구(欲) 뿐만 아니라 국가까지도 물드는 것으로 본다.(國亦有染, 故染不可不愼也 ‥‥‥ 所染). 즉, 전쟁을 하는 것도, 불의한 나라가 되는 것도 대중을 물들여 놓았기 때문이다.(殷戈使殷不義亦使殷 ‥‥經說下下十四). 인간의 행동과 대중의 심리는 학습에 따라 물들여져 습관이 되고 문화로 정착되는 것이다.
묵자의 제자인 고자(告子)는 인성에 대하여 맹자와 논쟁하였다.
고자가 사람의 성(性)은 사회 환경과 교육을 통해 다듬어진다고 주장한 것을 맹자가 비난한다. 고자는 말한다, 사람의 인성은 버드나무와 같고 인의(仁義)는 그 버드나무로 만든 고리와 같은 것이다.(性猶杞柳爲也 義猶桮棬也. 以人性爲仁義猶以紀柳爲桮棬 ‥‥‥孟子/告子上) 고자는 또 인생이란 흐르는 물과 같아, 물길을 내는 대로 동쪽으로도 흐르고 서쪽으로도 흐르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決諸東方則東流決諸西方則西流 ‥‥‥孟子/告子上). 고자의 이 말은 스승인 묵자의 주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묵자는 인성이란 파란 물감으로 물들이면 파랗고, 노란 물감으로 물들이면 노랗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染於蒼則蒼染於黃則黃 ‥‥ 所染). 그래서 사람들은 재화를 쓸모없는 곳에 낭비하는 것을 고귀하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전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을 의롭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辭過, 非攻 ) .
이에 대하여 맹자는 이렇게 비난한다. 그렇다면 개의 본성은 소와 같고 소의 본성은 사람과 같은가 (然則犬之性猶牛之性, 牛之性猶人之性歟‥‥告子上)?
마치 기독교와 다윈의 논쟁과 같다. 그러나 최근 인류학자들은 원숭이가 키운 갓난 아기와 늑대가 키운 갓난 아기가 성장하여 원숭이와 늑대의 행동을 하는 것을 인간 행동으로 바꾸려코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래서 캐롤은 학습이론을 통해 인간의 행동은 학습으로부터 나온다고 결론을 내렸다.
반면 , 최근 동물학자들은 실험을 통하여 새의 알을 인공부화하여 키운 후 울게 하였더니, 제 어미 소리뿐만 아니고 어떠한 소리도 듣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제 어미 비슷하게 운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학습이론이 수정되어야 할 처지에 있으나 그들의 논쟁은 지금도 유효하다.
봉건귀족들의 세습적 지배와 선천적 차별을 반대한 점에 있어서 묵자와 같은 입장인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반대하코 성악설을 주장하며 역시 인간의 선성(善性)은 학습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순자는 말한다. 시정잡배도 우 임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학습환경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즉, 후천적 환경이 자기를 결정하는 것이다(途之人可以爲禹 使然也, 摩嬅而已矣‥‥‥商子/性惡) 나무는 먹줄을 본받아 곧고, 바퀴는 그림쇠를 본받아 둥글다(薄子/勸學) . 따라서 순자에게 있어 군자란 날 때부터 다른 것이 아니며 바깥 사물을 잘 빌렸을 뿐이었다.
묵자는 인간의 사회화 요인이 학습이라는 점과 국가사회의 습관과 문화도 물들여진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이것을 논거로 비전론(非戰論) , 절용론(節用論) , 운명론(運命論) , 장례론(葬禮論) 등의 비판을 전개한다.
묵자는 말한다. 장례라는 것은 그러한 습관을 편리하고 옳은 것으로 여기도록 오랫동안 물들여진 결과이다. 그래서 지배자는 이것을 문화로 하여 통치수단으로 이용하고, 인민은 습속이라 여기며 이것을 그치지 않고 시행함으로써 이제는 신념이 되어 붙잡고 버리지 못한다.
묵자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한다. 개술국이란 곳에서는 맏아들을 낳으면 잡아 먹으면서, 이것은 다음 태어나는 동생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또 할아버지가 죽으면 할머니를 져다 버리면서, 귀신의 처와는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담인국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시체의 살을 모두 발라내서 버리고 뼈만 묻어야 효자라고 한다(節葬下) .
묵자는 정치, 사회, 경제 등, 모든 이론 전개에 있어 이러한 인성론과 행위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즉, 묵자에게 있어 인간의 행동은 마음이 아니고 욕구로부터 나오며, 그 욕구를 담는 마음은 물들여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물들여진 습관의 노예가 되지 말고 세계의 평등한 주권자로써 자기 자신이 자기를 부려야 하며 , 자기 자신이 자기를 부리지 않으면 남이 나를 부리고, 지배자가 나를 부리는 것이다 (我使我 我不使亦使我 ‥‥‥ 經說下下十四) .
맑스는 유물론자들 (포이엘 바하 등) 이 인간을 추상적이고 비역사적으로 보는 것을 반대하고, 인간성을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로 본다. 그에게 있어 인간의 본질은 이미 어떤 개개인에 내재하는 추상이 아니었다. 이에 대하여 독일의 사회주의자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공산주의 안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의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조잡한 물질에의 의존으로 타락해버린다. 결국 노동과 향유는 분리되고, 그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자유로운 윤리적 활동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외적인 사물들에 규정되지 않는 활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수이성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적 토대와 물적 결과를 가지지 않는 순수사상이란 그 주체가 오직 사유하는 정신일 뿐 현실의 감각적인 인간 실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묵자의 소염론(所染論)의 경우는 인성의 물적토대를 생산관계가 아닌 소비관계에서 찾으므로 물적 의존성 외에 문화전통의 의존성을 더 강조하는 듯하다.
과시소비론(過示消費論)
묵자는 노동착취의 원인을 과시소비(過示消費)에서 찾는다. 묵자는 노동을 인간의 특성으로 중시한다. 하늘에 나는 날짐승과 들에 뛰노는 들짐승과 물 속에 기어다니는 벌레와 물고기들은 숫놈이 밭갈고 씨뿌리지 않고 암놈이 길쌈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이 입혀주고 먹여주지만 인간만은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非樂). 이러한 노동은 재화의 생산을 위한 것이나 그 생산의 목적은 소비이다. 인간이 재화를 소비하는 것은 노동을 소비하는 것이다.
묵자는 소비를 둘로 나눈다. 첫째, 이용후생을 위한 소비이다. 이러한 소비는 재화를 본래 목적대로 사용하여 인민의 이용후생에 이롭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짐승으로부터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창과 칼을 사용하며, 사람의 몸을 따뜻하게 또는 시원하게 하는 데 옷을 사용하는 것이다.
둘째, 이롭지 않은 소비 즉, 과시소비이다. 이것은 재화의 본래 목적을 떠난 소비를 말한다. 예컨대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창과 칼을 사용하고, 사람의 몸을 보호하는 본래 목적을 떠나 사람의 행동을 거추장스럽게 하고 쓸모없는 것을 덧붙여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옷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같이 재화와 노동력을 쓸모없는 곳에 낭비하는 것을 과시소비라고 한다(當今之主其爲衣服則與此異也 單財勞力畢歸之於無用也‥‥辭過). 재화, 즉 노동력이 인민의 이익을 배반하여 인민을 죽이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용도로 낭비되므로, 인민은 더 많은 노동을 해야 하고 지배자는 지배를 재창출, 합리화시킨다.
묵자는 과시소비의 예로 궁궐, 옷, 음식, 수레, 배, 장례, 음악 등의 낭비와 전쟁을 들고 있다. 과시소비는 재화를 가장 쓸모없는 것(사치), 인민에게 유용하지 않는 것(전쟁), 노동에 지장이 되는 것(음악), 그냥 버리는 것(장례) 등 인민의 생활과는가장 먼 것이 특징이다. 묵자의 과시소비(過示消費)는 미국의 경제학자 Thorstein Veblen의 과시소비(誇示消費)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유한 계급론 참조). 이러한 비유용적인 낭비가 아름답고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문화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물들여 놓았기 때문이다. 문화란 꾸미는 것[文] 변화하는 것(化)을 말한다. 그런데 그 문화가 인민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면 인민을 배반한 것이며, 도리어 인민을 착취하는 것이다. 묵자가 음악을 비난한 이유는 악기가 본래 목적인 인민을 즐겁게 하고 인민의 노동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지배자의 과시와 통치수단으로 전락하여 과시소비가 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순자는 이러한 사과론 (辭過論)을 비판한다. 묵자는 실용에 눈이 가려 문화를 모른다는 것이다. 문화라는 소비가 생산을 더욱 확대한다는것이다(墨子蔽於用而不知文 ‥‥‥ 筍子/解蔽).
그러나 생산의 확대가 인민을 이롭게 하지 않는 한 노동착취일 뿐이다. 이와 같이 묵자는 정치·사회· 문화 등 상부구조를 재화의 소비관계에서 찾는다. 이 점에 있어 맑스는 소비관계 대신에 생산관계까지를 상부구조를 규정하는 토대로 본다. 묵자의 시대에는 재화의 생산이 자연적인 농업을 위주로 했고, 직물 및 기타 수공업적 생산에 있어서도 근대자본제 생산과는 달리 자본은 자본소유자의 노동과 분리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생산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대립 즉, 역사적 관계가 아니라 자연과의 투쟁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노동은 자본과의 대립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도 노동의 생산물은 신분적인 지배로 착취되었다. 그러므로 묵자는 재화의 소비관계를 주목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때의 노동은 자신의 정신적·육체적 충족을 위해 정신적 물질적 관계 속에서 자연을 인간의 지배 아래 두려는 의식적 활동이었다. 즉, 나의 특수한 삶과 자연의 보편적 생명과의 대립과 상호작용에 기초를 둔 의식적 투쟁이었다.
그러나 맑스에게 있어서 노동은 삶의 목표를 충족시켜주는 물질수단의 산출임과 동시에 물질적 생활 자체의 산출인 인간 최초의 역사적 행위였으며 노동의 현실적 조건은 자본제적 생산양식이라는, 역사 속에서의 노동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상부구조는 자본과 노동과의 관계, 즉 생산관계에까지 조응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산관계로까지 소유가 침입하여 생산자인 노동은 자기를 위한 생산이 아니고 물신(物神)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다. 소유란 다름 아닌 타인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력이었다. 맑스가 공장제 생산에서 본 생산관계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가 아니라 인간대 인간의 투쟁과 착취였던 것이다. 결국 좌파의 이상은, 좌파의 시조인 묵자나 몽상적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자 등 누구를 막론하고, 노동은 토지·자본등의 소유관계 또는 그 어떤 보편자에게도 지배되지 않는, 자기 생명의 자유로운 발로여야 하며, 능력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어야 하고, 생산은 자기를 위한 것이 되어 노동이 착취되지 않고 노동자의 행복을 위해 향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펌] 묵자의 철학 사상 작성자 누리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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