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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가에서도 꽤나 고급스럽다고 이름 난 음식점들은 드물게 귀족 손님들도 받는다. '오래 머무는 자리'란 이름을 가진 이 음식점-숙박도 겸한다-도 그런 부류에 속하는지(하긴, 그러니까 숙식료가 비싸겠지), 널찍한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오케스트라의 은은한 연주 소리와 적지 않은 귀족들이 보였다.
"이런."
그 덕분에 이르젠은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아무리 저들끼리 즐기는 공간이고, 지금 자신의 꼴이 엉망이어도 귀족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꼴이 엉망이라 눈에 띄일 가능성이 높았다. 후줄근한 차림새로 이런 고급 음식점에 들어오는 이라면 충분히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르젠은 자리를 안내하는 지배인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손님?"
"위층에서 먹을 수는 없을까요. 아무래도 귀족 분들이 계시니…."
"아, 물론 되지요. 이리로 오십시오."
돈이 많아도 신분은 어쩔 수 없는 거로군-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지배인의 측은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이르젠은 머리를 최대한 숙인 채 귀족들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2층 발코니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시장하실테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지배인에게 금화 한 닢을 내밀고 턱을 괸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환하게 보이는 1층, 쉬지 않고 감미로운 음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와 옹기종기 모여 자신들만의 이야기로 음악을 흘려버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와닿았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두 사람에게 닿는 이르젠의 시선은 유독 차가웠다.
"늙은 고양이들이 여긴 무슨 일이려나."
바싹 마른 입술에 물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수분을 보충한 이르젠은 차가운 시선에 조소까지 담았다. 그의 시선이 난도질하는 두 사람- 아자르 후작과 사디자엔 백작. 오늘 이 소모임의 주최자임이 분명해 보이는 두 사람은 홀의 한 가운데, 아마도 이 음식점에서 가장 좋은 의자와 테이블이지 싶은 호화로운 장식물에 비대한 몸을 기대고 있었다. 탁, 물잔을 테이블의 가운데에 놓고 이르젠은 냅킨으로 손장난을 치면서 친밀함을 과시하려는 듯 이따금 서로의 귀로 온갖 음모들을 흘려넣는 후작과 백작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르젠은 그들이 싫었다. 세력이라고 불릴 만한 외척이 없는 그를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려 하는 그들이 미치도록 싫었다.
그의 어머니이자 지금의 황후 루시아르는 원래 황비였다. 세루스 남작가의 영애로 남작가가 몰락하기 직전 간신히 황제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기적처럼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영원히 빛날것만 같던 이셀리나 황후가 어린 딸만을 낳고 타계하자 황후가 되었다. 덩달아 그도 황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서자에서 단숨에 황태자에 봉해졌다.
시작은 그 때부터였다. 언제든지 아우스탄디의 편에 붙을 준비를 하던 귀족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던 것은. 제 1황위계승자를 상징하는 찬란한 금관과 짙은 붉은 색의 비단 망토가 자신을 무겁게 짓눌러 올 때, 아우스탄디 대공을 누르고 권력의 정점을 호시탐탐 노리던 아자르 후작과 사디자엔 백작은 그를 손에 쥐었다. 그들의 힘으로 어머니는 여동생의 어머니의 자리를 앗아갔고, 자신은 여동생의 왕관을 앗아갔다. 그들이 하는 행동은 아무것도 막지 못했다. 자신의 존재는 황궁에도 자리를 두지 못하게 여동생을 바깥으로 내몰았다.
"멍청한 놈."
이르젠은 햇살에 부서지는 붉은 머리카락을 떠올렸다. 또 언제나 한 걸음 물러서 경계하는 붉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라나는 언제나 오빠에게 누가 되지 않을 경계선 바깥에서 조심스럽게 애정을 표했다. 이르젠 역시 마음껏 아끼고 토닥여주는 은발의 여동생을 대하는 것과는 달리 타인에 가깝게 라나를 아꼈다. 그게 라나와 이르젠 남매가 가족을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서로에게 가장 무관심한 것이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기에.
"빌어먹을 황위, 빌어먹을 귀족들, 빌어먹을, 아버지는 하필이면 왜 황제여서."
때때로 이르젠은 생각하곤 했다. 만일 그들이 평범한, 정말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비옥한 논밭을 일구는, 같은 어머니와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면. 자신은 출세해서 호강시켜 드리겠다며 부모님 속을 썩이는 샌님이 되었을 것이다. 라나는 동네 아이들을 호령하는 골목대장이 되었을 것이고, 소녀이기보다는 소년이길 원하는 막내 여동생은 전쟁놀이에는 관심없는 여자아이들의 남편노릇을 훌륭히 해 주었을 것이다. 서로를 아끼기 때문에 무관심하다는 쓰레기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매일 저녁, 매일 아침, 어머니의 사랑을 서로 더 받기 위해 아옹다옹하고 때로는 서로의 허물을 가려주며 살아갔을 거다. 그렇다면 강탈한 것을 되돌려 주기 위해 이런 미친 짓을 하고있지는 않겠지.
"그렇겠지."
자신의 생각에 느릿한 어조로 동의하며 이르젠은 비어버린 웃음을 흘렸다. 어느새 테이블 위에 주욱 늘어선 음식들이 어서 먹으라고 시각과 후각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손이 가지 않았다. 맑은 사파이어 빛이던 푸른 눈동자가 흐릿한 초점으로 허공을 맴돈다. 사고할 수 없는 무생물처럼, 이르젠은 온 몸을 늘어뜨린 채 아래에도 시선을 주지 않고 멍하니 허공만 보고 있었다.
-지배인이 그를 부르다, 부르다 못해 그의 몸에 손을 대기 전까지.
툭. 약한 반동에 반사적으로 이르젠의 고개가 조금 돌아갔다. 2층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불러도 무엇에 그리 골몰한 건지 꿈쩍도 않는 괴이한 손님에게 질려있던 지배인은 그가 자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말했다.
"잠시 숨어계시겠습니까?"
물론 이르젠은 당황했다. 뇌리를 천천히 파고들던 지난 기억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반문하지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이르젠에게 지배인은 최대한 간결하고 납득 가능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후작님과 백작님께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이야기를 나눌 장소가 필요하다 하셔서 2층을 제공해드렸습니다. 손님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이지만, 잠시만 숨어계십시오."
"뭐, 그러지요."
"-예?"
이번에는 지배인이 당황했다. 이르젠은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의심하는 지배인에게 사람좋게 웃어보였다.
"이 테이블보 밑에 숨어있으면 됩니까?"
"아, 아아, 예."
"귀족 나리들이 화내십니다. 어서 가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사실 지배인이 감사할 일은 아니었다. 이르젠은 지배인이 돌아서자마자 테이블보 끝을 잡고 두 눈에 온화함 대신 싸늘함을 담으며 아래를 흘끗 보았다. 아자르 후작과 사디자엔 백작이 앉아있던 자리 주위에 음식점까지 끌고 들어온 사병들이 둥글게 배치되어 있었다. 위에서야 테이블에 두 사람이 없다는 것이 확연히 보이지만 홀에 있는 사람들은 결코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인지는 몰라도 솜씨는 좋았다. 물론, 그들이 비밀스럽게 이야기를 끝낼 수 있을거라 믿는 점에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아마도 지배인은 이쪽으로 그들을 안내하겠지. 입술이 잠시 호선을 그렸다. 누군가의 허점을 찌르는 것은, 특히나 그 대상에게 썩 좋은 감정을 가지지 않은 경우 상당히 유쾌하다.
"자자, 이쪽으로 오십시오."
뚜벅뚜벅, 날듯이 가벼운 지배인의 발소리 뒤로 무거운 발걸음이 이어졌다. 이르젠이 짚고 있던 대로 지배인은 후작과 백작을 그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안내했다. 갓 나온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으니 그들이 이야기하기 편한 자리를 미리 만들어 둔 것처럼 보일 수 있을테다. 또한 이르젠의 예상대로 지배인을 칭찬하고, 그 칭찬에 감사해하는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갔다. 슬며시 늘어진 테이블보 밑을 비집고 들어오는 까만 구두를 발견한 이르젠은 그 발을 짓이겨버리는 상상을 하다 그만두었다. 일단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아야 했다. 뭐, 예상하고 있는 주제는 뻔했다. 황궁, 황위, 권력- 다시 황궁, 황위, 권력. 끝나지 않는 악순환.
"이제 둘만 있으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무슨 말을 꺼낼지는 백작도 알고 있지 않소?"
"폐하께서 과로로 쓰러지신 것 말씀입니까?"
"그렇소. "
과로? 이르젠은 들키지 않기위해 자조적인 웃음을 소리죽여 터뜨렸다. 그의 아버지는 절대로 과로로 쓰러질 인물이 아니다. 그런 소문이 돌면, 그건 정말 말 그대로 소문이며 누군가를 골탕먹이기 위한 수단이 분명하다. 그로서는 심각하게 말을 이어가는 아자르 후작과 사디자엔 백작이 우스울 수 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들이키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자르 후작이다.
"내일 쯤에는 다시 정무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공문이 내려와서 다행이지만, 나는 다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소."
"하지만 1황녀에게 제왕학을 배우라는 하명도 거둬졌잖습니까."
"폐하께선 알 수 없는 분이오, 백작."
아자르 후작은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갈색 눈동자를 첫째가는 동지로 꼽은 이에게 밀착시켰다. 후작은 머리가 좋았다. 관직에 있는 자로서 그 머리를 자신의 이익을 증대시키는 것에만 쓰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자신에게 해 되는 일들은 놀라운 통찰력으로 알아내곤 했다. 후작은 백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했다.
"아우스탄디 대공이 황도로 돌아왔소. 어쩌면 그 곁에 태자전하도 계실지 모르지."
"그렇다면 잘 된 일이 아닙니까? 그 분께서 세달동안 출궁하셨다지만 영지 순회를 위해 그러신 거라고 하면 끝입니다. 지방 영주들 몇명 압박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황녀가 제왕학을 접했다는 사실이오. 태자전하는 성인이지만 황녀도 곧 성인이 되잖소. 폐하께서 마음만 먹으시면 황위 계승자를 갈아엎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니.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닭 쫓던 개가 되질 않소?"
사디자엔 백작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건 이르젠도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성인이 되면, 황위 계승자를 갈아엎는다?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다. 언제나 라나에게 그 자신이 직접 왕관을 건네주리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도 강제로 그것을, '갈아엎는' 식으로 빼앗긴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어어?
-빼앗긴다니? 그것은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니다. 당연히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서 빼앗긴다는 생각을 한 거지? 갑작스레 찾아온 생각의 모순 속에서 갈팡질팡하는 이르젠의 귀에 또다시 감당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렸다.
"크, 큰일이군요. 더구나 황녀의 곁에는 듀르한 공작도 있습니다. 피의 맹약까지 맺었으니 그를 회유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더불어서 그는 글라디올러스의 기사단장이 아닙니까? 군권까지 황녀에게 집중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이대로 폐하의 주선에 황녀와 공작이 맺어지기까지 한다면 당연히 다음대의 여제 탄생이 확정되는 겁니다."
"다음대의 여제라니! 태자께서 돌아오셨지 않소!!"
"좌시할 일이 아닙니다! 아자르 각하, 듀르한 공작은 이미 혼인 적령기이고 황녀 또한 성년식을 치루면 혼인이 가능하게 됩니다!"
쾅!
별안간 테이블 아래에서 광풍이 휘몰아쳤다. 이르젠은 바람에 우쭐거리는 테이블을 아예 엎어버렸다. 그는 뒤로 나동그라진 두 사내에게 한 걸음 가까이 갔다.
"저, 전하!"
"태자전하!!"
황제의 자식임을 완연하게 보여주는 찬란한 금발, 깨끗한 사파이어색 눈동자. 비명과도 같은 외침소리가 2층에 메아리쳤지만 칼날같은 바람소리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이르젠의 눈동자에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파란 불, 시리도록 차가운.
"말하라."
아자르 후작과 사디자엔 백작은 급히 이르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잘 정돈된 머리와 값비싼 옷이 미친듯한 바람에 엉망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아자르 후작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전하, 무, 무엇을?"
"내가 들은 말이 모두 사실인가? 1황녀에 대한 모든 말들이, 한점의 거짓도 없이 사실인가? 말하라!"
"사, 사실입니다."
콰아아아앙!!!!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굉음이 울렸다. 후작과 백작의 육중한 몸이 마치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마냥 데구루루 굴러 난간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이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들은 지배인이 헐레벌떡 뛰어올라왔지만 그조차도 휘몰아치는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이르젠은 바람의 힘을 빌어 힘들이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에 은은한 오케스트라 음악이 울리던 1층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찢어져나가는 옷을 사수하려 애쓰며 너도나도 밖으로 달음질쳤다.
"혼인? 개소리."
-그렇게 두지 않아. 사람들 틈에 섞여 나온 이르젠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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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시험 크리가 너무 커서(.....)
하지만 다시 성실연재 들어갑니다> <
아좌!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 로맨스 판타지가 맞지만 조금 진지한 감도 있답니다 ㅋ.ㅋ
즐감입니다~ㅋㅋ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ㅋㅋㅋ 이르젠은 왜 화가 났을까요~??ㅋㅋ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ㅋㅋㅋ
오랜만이에요 ㅠ.ㅠ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왔죠? 당분간은 성실연재 하겠습니다 > <!
드디어 돌아 오셨군요 ㅎㅎ 혼인한다는 소리에 이르젠이 화가 난것같은데...다음 내용이 더 궁금해지는군요!!
감사합니다 ㅋ.ㅋ! 다음편 얼른 올려드릴게요!
재밋어요ㅋㅋ건필하세요ㅋㅋ
감사합니다 > < 성실연재하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