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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 데 있고
제3부 복직 이후
복직의 기쁨
94년 초봄, 복직 직전, 광주 박물관 앞. 모두 표정이 밝고 신수가 훤하다. 4년 반 동안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 드디어 밝은 세상으로 나왔다. 기념으로 순창 강천사 여행. 장본인들보다는 가족들의 고통이 훨씬 컸다.
94년 여름방학 때였던가. 문병태 선생이 복직한 강진도암중학교에서 목포 복직교사들의 가족 모임이 시끌벅적 화려 찬란하였다. 해직 기간 고생한 사람은 남자들이 아니라 가정 살림을 떠맡은 사모님들이었다.
도암에서 김대중 선생과 바둑을 두는데 김 선생의 어린 따님이 날더러 ‘할아버지’라고 불러서 큰 충격을 받았다. 아저씨 때 잘려서 할아버지 때 복직한 셈인가?
해남중학교
수학여행도 다니고, 수업을 하면서 학생들과 부대끼고, 배구 감독을 맡아 동료교사들과 해남군 직장인 배구대회 나가 우승도 하고....... 4년 반 동안이나 꿈속에서도 그리던 학교로 돌아가자 구름을 탄 듯 몸이 붕붕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출퇴근 시간에 맞춰 바쁘게 조창익 선생 차를 타고 다니고, 학교에 옷 무엇 입고 갈까 궁리하고, 동료들과 테니스 치고, 쉬는 시간이면 따끈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아 참 그렇지, 무엇보다도 봉급이 꼬박꼬박 나오고.......
해직 동지 조창익 선생의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 기뻤다. 우체통에 쌓인 눈이 예쁘다. 내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이 조창익 선생 학교 캠코더. 우연히 한 번 만져보고는 그 매력에 폭 빠졌다. 그 후로 나는 가는 학교마다 캠코더를 수업에 많이 활용했다. 다 조 선생 덕분이다. 지금은 캠코더가 주머니에 담고 다닐 만큼 작아졌다.
김현국 선생 부인 염경숙 선생과 함께 차 타고 다니는 것도 반가웠다. 마리아회고의 동지 김현근 선생의 부인 이영순 선생과 함께 근무하는 것도 반가웠다.
목포와 해남의 중간 지점인 계곡면에 영흥 수퍼가 있었다. 거기가 우리의 휴게소였다. 거기에서 자판기 커피도 뽑아 마시고 퇴근 할 때에는 막걸리도 한 잔 걸쳤다. 젊은 시절 고압선에 감전되어 수족이 불편한 영흥 수퍼 주인은 왼손으로 붓글씨를 잘 썼다. 아주머니는 요리 솜씨가 훌륭해서 내가 김장김치를 부탁할 정도. 그 내외분은 어느 날 우리를 초청해서 맛이 기가 막힌 쥐오리로 육회를 뜨고 탕을 끓였다. 조합원보다 더 다정하고 살뜰한 준조합원이었다.
(부록 12 참조)
우수영중학교
해남중학교 3년 만에 국어과 정원 감축으로 우수영중학교로 옮겼다. 지역 인심도 좋고, 학부모님도 좋고, 학생들도 좋고, 동료교사들도 좋고, 교장까지도 좋았다. 내 40년 교단생활 중에서도 가장 의욕적이고 활동이 활발하고 즐겁고 찬란한 시기였다.
이 학생은 국어시간만 되면 도서실로 와서 출석부와 내 교과서를 챙겨 들고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고 저희 반 교실까지 걸으면서 뭐라 뭐라 쫑알거렸다. 교실 들어가는 기분이 참 편안했다. 옛날에 보았던 페스탈로치 그림이 생각났다. 고아들이 페스탈로치의 등이랑 어깨에 잔뜩 매달려 있는 그림이었다. 사실은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선생한테 매달릴 수 있다면 좋을 터인데.......
내 오른쪽이 ‘우리교육’ 기자. 김진수 선생이 월간 ‘우리교육’에 기고한 글이 빌미가 되어 EBS 교육방송에서 스승의 날 특집으로 고영의 선생님을 찍었다. 당신께서는 극구 사양하였지만 우리가 적극 강권했다.
“선생님 아니면 누가 찍습니까?”
피디와 구성작가. 피디는 서울사람이라는데도 꿈틀거리는 생낙지를 젓가락으로 냉큼 냉큼 잘도 주워 먹었다.
학교 신문반 학생들과 박태근 교장선생님. 우수영 장날이면 새벽같이 행정실장과 함께 시장에 나가 팔팔한 생선을 사다가 고영의 선생님과 함께 회를 떠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퇴근 무렵 교사들을 과학실로 불러 먹였다. 먹고 나면 모두 벙어리가 되었다. 무슨 말이든 고분고분 잘 들었다.
해직 동지 김진수 선생은 충무횟집 사장과 절친한 사이였다. 목포 동지들까지 불러 덤장 가는 횟집 배를 탔다. 충무횟집에 앉아서 먹으면 유료였지만 덤장에서 끄집어낸 고기를 배 위에서 썰어먹으면 무료였다. 우리는 거나하게 취해서 시원한 해풍을 맞으며 노래를 불렀다. 뱃놀이가 따로 없었다. 복직의 기쁨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배 뒤쪽에서 키를 잡은 박 사장은 시원시원하고 똑 부러지는 쾌남아였다. 우리 뱃속을 든든하게 채워주는 또 다른 준조합원이었다.
학교 정원에 벚꽃이 만발하였다. 조그만 학교여서 교사 수도 적었지만 늘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함께 테니스 치고 탁구 치고 진도대교 부근 바위에서 굴 따 먹고, 풍광명미한 섬과 바다를 돌며 드라이브 하고, 함께 식사하고. 행복! 나는 번번이 술에 취해 곤드레만드레였다.
오른쪽이 김성기 선생. 70년대 완도여중, 80년대 목포제일중, 그리고 90년대에 또 우수영에서 만났다. 항상 시원시원하고 솔직하다. 교사협의회 시절에 이용원, 나성태, 오한종 선생과 함께 항도여중의 4인방.
왼쪽이 우홍주 선생. 탁구도 잘 치고 테니스도 잘 쳤다. 내 앞에 우수영 근무한 전운기 선생으로부터 테니스 레슨을 받아 일취월장 해남을 평정하고 전남을 평정했다. 학생과 맡아 흡연 학생 금연 지도하면서 자기도 줄담배를 끊었다.
안화수 선생. 그의 차에 카풀하면서 신세를 많이 졌다. 테니스, 탁구를 잘 쳤다. 내가 분에 못 이겨 여러 번 도전하면 마지못해 한 번씩 져주었다. 명랑소년, 통쾌무비.
처음에 조합원이었는데 무슨 일론가 마음에 안 들어 빠졌단다. 그러려니 했다. 나중에 보니 다시 가입했단다.
목포 우미아파트에서 살던 김영갑 선생. 나는 가끔 그의 차도 타고 다녔다. 그토록 미남 선생은 처음 보았다. 탤런트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외모만 고운 게 아니라 마음씨도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고왔다. 컴퓨터에도 일찍 통달해서 시도 때도 없이 선생들이 구원을 청하면 흔쾌히 도와주었다.
모든 면에서 가히 교사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뿔뿔이 우수영을 떠나면서 해체되었지만 고영의 선생님을 비롯한 일곱 명이 ‘우조모’를 만들었다. ‘우조모’는 우수영을 좋아하는 모임의 약자였다.
함께 모여 식사하고 노래방도 가고, 때로는 여행도 다니면서, 우리들은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충무공의 기백이 울돌목으로 세차게 흐르는 우수영에서 함께 교사를 하면서 축복에 가득 찬 삶을 누릴 수 있게 한 인연에 감사했다.
우수영중학교에 막 부임해서 도서실을 맡았다. 공간이 넓으니 어학실로 개조한다 해서 교장실 옆 교실로 옮겼다. 다음 해에는 또 가사실습실을 만든다 해서 이층 끝 교실로 이사했다.
학생들이 놀려댔다.
“선생님, 맨날 쫓겨 다니고 배경이 시원찮은 거 아녀요?”
쫓겨 다녀도 좋았다. 나는 순수하고 순박하고 수말스러운 시골 학생들과, 재주 많고 유능하고 씩씩하고 격조 높은 교사들과, 부지런히 회를 떠서 교사들 먹이는 교장 선생님에 둘러싸여 축복 받은 시간을 감사하고 있었다.
한국교육신문에서 교단수기를 공모했다. 우수영중 도서실 생활 1년을 ‘즐거운 도서실’로 써서 냈더니 덜컥 최우수상에 뽑혔다. 150만 원인가 받았다. 술벗들에게 한 잔이나 대접했던가 어쨌던가.
우수영중학교 있을 때 그 동안 틈틈이 쓴 글을 모아 ‘잠들지 못하는 나무들’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책은 1,2,3부로 나누어 1부에서는 전교조와 관련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2부에서는 목포 해직교사의 이야기를 쓰고, 3부에서는 뜻 깊은 분들의 이야기를 썼다.
출판기념회에는 고맙게도 내 이야기의 주인공 되시는 분들이 모두 참석하여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감개가 무량했다. 모두 헌신적이고 봉사적이고 자기희생을 마다하지 않은 분들이었다.
바야흐로 이 시대는 미국을 필두로 한 천민자본주의가 전염병처럼 창궐해서 내남없이 돈에 허겁지겁하는 판국인데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주에서 오종렬 선생님 윤광장 선생님이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나는 오 선생님만 뵈면 죄송한 생각이 앞선다. 노익장, 나보다 훨씬 더 자셨는데도 중국까지 미국까지 뛰어다니면서 초지일관 억압 받는 자들의 대변인으로 사자후를 토하시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상하이 여행
복직하자 신세가 쭉 늘어졌다.
2003년 1월, 우리 부부는 조창익 선생 가족과 함께 상하이로 갔다. 목포에서 처음 열린 뱃길을 따라 상하이크루즈 호를 타고 25시간 걸려 상하이에 도착했다.
우리 부부의 첫 해외 나들이는 순전히 조창익 선생 덕택이었다. 전교조 목포지회가 목포의 여행사와 제휴한 행사였는데 조 선생이 처음부터 끝까지 도맡아 추진했다. 조 선생은 카투사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여행 경험도 많고 행사를 이끌어가는 기획력과 추진력과 참을성과 섭외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뱅뱅 돌아가는 중국식 식탁, 처음 먹어 보는 중국 요리의 강렬한 향신료 냄새. 전교조를 처음 만났을 때의 요상하고 헷갈리는 느낌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나는 고관절이 아파서 오래 걸을 수 없었다. 조금 비탈진 곳에서 난생 처음 가마를 타 봤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천만에. 사람 아래에서 가마꾼이 셋이나 땀을 뺐다. 조금 미안하기도 했지만 구름을 타고 동동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무석에선가 13중학교를 구경했다. 살벌하고 무식하게 13중학교가 뭔 말이여. 인구가 너무 많아 골머리를 앓는 중국에서는 중학교 이름을 붙이기조차 귀찮은 모양인가.
교훈인가 보다. 문명인, 총명인, 건강인, 현대인. 다른 점이 많겠지만 중국도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입시 경쟁이 치열하단다. 참교육을 하기에는 턱없이 어려운 분위기로 보였다.
백두산 여행
2005년 8월, 우리 부부는 또 조창익 선생이 목포지회에서 모집한 백두산 여행에 참가했다. 인천에서 요동반도의 잉커우 항까지 스물다섯 시간 배를 타고 건너갔다. 여름피서에는 배가 딱 그만이었다. ‘자정향’ 호의 7층 옥상에서 쏘이는 해풍에 내장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예전의 국내성 흔적이 남아 있는 ‘찌안(집안)’시 부근의 광개토대왕비. ‘옛 땅 찾아 고구려 가자’라는 구호를 내건 여행길에 웅장하고 위대한 호태왕의 비석을 구경한 것만으로도 본전을 뽑은 심정이었다. 옛날 고구려 사람들은 지금 우리 같은 좀생이가 아니라 스케일이 호방하였던 모양이다.
염경숙 선생은 사정상 아들만 데리고 왔다. 고구려의 옛터 환도산성에서 그 아드님이 찰칵.
해남여중으로 조창익 선생 차를 함께 타고 다니면서 학교 현장의 문제점에 대하여 교무회의보다 훨씬 더 길고 심도 깊은 의견을 나누었다.
졸저 ‘잠들지 못하는 나무들’ 출판기념회 때에는 첼로로 축하 연주를 해주었다.
장윤심 선생은 친구 선생 두 명과 함께 왔다. 장수왕릉 앞에서 한 장. 내가 청호중에 근무할 때 유달중 테니스장에서 함께 운동하고 나중에는 유달중에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 테니스장 라인도 열심히 긋고 공도 열심히 치고 학생들도 열심히 가르쳤다.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당찬 선생님이었다.
두만강 푸른 물이 아니라 노랑 황토 물에서는 뗏목놀이가 한창이었다. 유달중 정대지 선생 부부는 전번 상하이 여행에도 동행했는데 백두산 여행도 함께 했다. 동갑. 흰머리 하얀 음악 선생님이 늦게나마 전교조에 동참하기는 여간 큰 결심이 아니면 안 되었다.
덕인주점
목포 오거리 주막. 정말 추억이 많이 쌓인 곳이다. 해직 시절, 지회 사무실이 명륜동에 있었다. 걸핏하면 가까운 덕인 주점으로 달려가 홧술을 마시고 밥도 먹었다. 낮에는 사무실이 본부고 저녁에는 덕인이 본부일 정도였다. 마음씨 좋은 주인은 우리와 함께 어지러운 시국을 한탄하고 교육의 장래를 걱정하는 또 다른 조합원이었다. 나보다 한 살 위였다. 스무 해 이상을 사귀다 보니 말을 트고 친구로 지내기로 했다.
김진수 선생이 광주에서 놀러왔을 때 덕인주점에서 정태석 선생과 한 잔. 정 선생 인연이 이채롭다. 해남 현산중학교 근무할 때에는 김진수 선생과 친하더니 목포여중 와서는 조창익 선생과 단짝이 되었다.
학교 현장에 환멸을 느껴 사표 던지고 이탈리아로 성악 공부를 떠났다가 다시 복직했다. 행사 때마다 명곡으로 내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내가 주례를 맡았던 서병수 사장이 덕인에서 한잔 거창하게 냈다. 내 오른쪽이 김종국 씨. 89년 9월 28일 전교조 합법화 국민대회가 열렸다. 오거리에서 최루탄이 터지고 화염병이 난무했다. 목포대 다니던 오창현 씨와 함께 화염병 던진 주모자로 붙잡혀 옥살이를 했다. 어찌 그 은공을 잊으리오. 지금도 나는 그리울 때면 가끔 그들과 술잔을 나누며 어렵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꽃피운다.
오창현 씨. 화염병을 던진 죄목으로 그가 김종국 씨와 함께 재판 받던 날을 잊지 못한다. 그가 재판장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예, 나 죄 많이 지었소. 벌 많이 많이 주시오.”
나는 안경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그 당당함에 얼마나 감탄했던가. 그 무모할 만한 용맹이 얼마나 놀랍고 슬펐던가. 세상에나! 재판장한테 자비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대학생이 제도권과 재판장을 훈계하다니. 주먹으로 바위를 깨던 청년은 잘 나가는 자동차 외판원으로 변신했다. 나는 아내의 아반떼를 그에게서 샀다.
짚불구이
덕인주점 못지않게 단골로 자주 다닌 곳이 무안 사창의 짚불구이 집. 얇게 썬 삼겹살을 석쇠에 얹어 짚불로 구워내는데 짚불의 은은한 향기가 어린 시절의 향수를 자극한다.
한 번은 함께 갔던 여선생이 고기를 딱 한 점 먹고 난 후 밖으로 나가기에 어디 가느냐고 물었더니, “한 접시 더 시킬라요.” 성질도 급하기는! 사창 짚불구이가 전국적인 맛 집으로 유명해지자 요즘은 광주 서울까지 짚불구이가 생겼다.
유달중 국어과 선생님들과 짚불구이 집에 갔다. 그들은 모두 분회원이기도 하다. 나도 국어과이지만 왜 전교조에 국어과가 유독 많은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영어과나 체육과가 가장 적던가 어쩌던가. 괜히 나 혼자 생각해보는 편견이겄제.
전교조는 지도부도 중요하지만 학교 현장도 그에 못지않게, 그보다 훨씬 중요하다. 학교 현장은 전교조의 시발점이자 종착역이기도 하다. 요컨대 분회 활동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분회 활동 중에서도 먹는 활동은 이데올로기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야 맞겄제.
짚불구이를 맛나게 먹고 나오면 누구 차든 영산강변으로 차를 몬다. 거기가 내 단골 촬영장이다.
아기를 보듬은 이정미 선생. 경남 남해 물건리 출신. 그미가 임신했을 때 우리 집 비파를 따다주었다. 아이도 잘 낳아 기르고 항상 씩씩하고 당당하고 매사에 차분하면서도 치밀하고 정교하고 정통했다.
최혜진 선생. 정대지 선생의 안좌중학교 제자. 1980년생. 우리 셋째아들과 동갑. 학생들 가르칠 때만 야무지지 얌전하고 수줍기 짝이 없는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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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교사대회 1
2006년 5월 27일, 서울 보라매공원에서인가 전국교사대회가 열렸다. 5월 28일이 창립기념일이었다. 처음 창립 선언 때부터 몇 년 동안은 행사장마다 전경이 쳐들어와 최루탄이 터지고 연행을 당하는 난장판이었다. 그래도 그 때가 더 팽팽한 긴장감으로 동지들을 단결시켰던 것 같다.
해직교사들이 복직되고 전교조가 불법 단체에서 합법 단체로 인정을 받고 해직교사들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변신하면서 대회장에서는 최루탄 터지는 일이 없어졌지만 내게는 평화로운 대회장이 오히려 조금은 싱겁다는 느낌도 들었다.
버스에서 내려 대회장에 들어갈 무렵 축제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목포에서는 전세버스 석 대였던가. 그래도 평화가 좋기는 좋다. 가는 도중 고속도로 휴게소 광장에 자리를 깔고 주먹밥을 먹어도 축제로 향하는 들뜬 마음에 밥맛이 좋고 최루탄이 안 터져 편안하니까 소화도 잘 된다.
세월이 많이 흐르기는 흘렀다. 지회 사무실 ‘독서사랑방’에 드나들던 영흥고등학생 차용훈이 어느덧 국어 교사가 되어 정식 조합원으로 버스에서 주먹밥 상자를 나르고 있다.
그가 우수영중학교 근무할 때 내게 주례를 부탁하였다. 괜찮다지만 평교사 주례는 모양새가 좀 그래서 사양했다. 결국 정해숙 위원장이 주례를 맡으셨다.
김광헌 선생, 이주탁 선생, 임정선 선생. 그 날 유달중 분회에서 교사대회에 참가한 사람들이다. 이주탁 선생은 광주 전남여고에 근무하다가 가정 사정으로 교환교사로 잠시 유달중학교에 온 젊은 교사였다. 예의 바르고 젊고 씩씩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와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었다.
맨 오른쪽이 박춘환 선생. 나는 그를 ‘상하이 박’이라 부른다. 함께 ‘상하이 크루즈’ 호로 상하이에 여행 갔다. 남경 호텔에서 둘이만 살그머니 거리로 빠져나와 허름한 주막에서 배갈을 마셨다. 잉어찜이 맛있었고 술값도 쌌다. 오래오래 두고두고 꼬소롬한 추억이 되어주었다.
나는 목포여중에서 잘렸기 때문에 목포여중 선생들이 반갑다. 잘 알지도 못하는 목포여중 교사들과 사진을 찍었다. 맨 왼쪽이 배은미 선생. 이 사진을 찍은 지 몇 년 후에 그미가 유달중으로 왔다. 나를 잘 모르겠다기에 이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때문에 더 친해졌다. 나는 술 못 마시고 운전하는 기사를 좋아하는데 배 선생은 그 뒤로 훌륭한 기사가 되어주었다.
내 왼쪽이 강분희 선생. 그미의 시숙이 위대한 고 김남주 시인. 복직 후 해남중학교에서 나와 근무했다. 그 옆이 장미경 선생. 복직 후 청호중학교에서 나와 근무했다.
최성 선생, 목포 초등을 견인하는 기관차. 부인까지 초등지회장으로 수고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자전거로 제주도를 일주했다던가, 전국 일주를 했다던가. 그의 자녀 교육방식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호 선생. 남평 어느 사립학교에서 전교조 문제로 해직되어 법정투쟁을 벌이느라 무던히도 고생했다. 청호중에서 만나 짝짜꿍이 맞았다. 함께 테니스 치고 탁구 치고 술 마시고....... 나는 자가용이 없지만 목포에 여남은 대 준 자가용이 늘 대기하고 있다. 그 중 이호 선생 차가 ‘2호차’다. 어떻게 아이들을 원만하게 부드럽게 가르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은 이호 선생을 따라서 하면 된다.
물론 대회장도 중요하지만 잔칫날 술이 빠질 수 없제. 대회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나는 부근의 술판을 어슬렁거리기 일쑤다. 윤석우 선생이 나를 보러 찾아왔다. 국어과. 내가 해남중학교로 복직했을 때 만나서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목포 근무하다 일산으로 옮겼다. 소설가이자 시인.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 그가 전교조 가입하겠다고 하자 내가 말렸다. 사람에 따라서는 외곽지대가 좋은 경우도 많다.
술자리 가까이에서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이는 선생님을 발견했다. 나는 괜찮겠다 싶으면 아무리 모르는 사람도 일 분 안에 친해질 자신이 있다.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광주에서 해직 당했다 했다. 우리 나이에 해직 당하기가 쉬운 일이 아닌데....... 함께 술잔을 나누고 기념 촬영을 했다. 우리 조합원들은 어디에서 만나도 무조건 마음 놓고 반가운 동지였다.
왼쪽이 전 진도 지회장, 오른쪽이 화순에서 해직 당했다가 진도로 복직한 국중화 선생.
나는 ‘온나라 걷기’ 때문에 진도를 잊지 못한다. 목포에서 ‘온나라 걷기’를 하다가 진도에서 참가한 현직교사들이 경찰서로 연행당하여 그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게 하려고 이름을 숨기다가 결국 들통이 나고 말았다. 그 때의 참담함과 무안함이란.......
깃발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전교조 깃발만 보면 가슴이 쿵쾅거린다.
‘온나라 걷기’ 때 유치장에 들어간 목포지회 깃발은 경찰에 뺏길까봐 미역국 먹고 난 그릇에 담겨 밀반출했다. 그 국물찌꺼기 때문에 얼룩덜룩 희부옇게 탈색했다. 그 얼룩진 깃발이 휘날릴 때마다 나는 미소를 머금는다.
그래, 우리는 끝까지 깃발을 지켜냈어!
전국교사대회 2
2007년 5월 20일, 전국교사대회가 전남 나주시 영산포 영산강 둔치에서 열렸다. 전국대회가 전남에서 열린 것은 처음이었다.
산업혁명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인류의 전통적인 농경사회는 돼지털인가 디지털혁명인가 굴뚝 없는 산업이 융성하면서 쇄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인구가 대도시로 빠져나가면서 현저하게 학생 수와 교사 수가 감소하는 전남에 ‘농어촌 교육여건 개선을 위한’ 힘을 실어주기 위하여 전국대회가 전남에서 열렸다. 정부는 늘 예산타령이지만 마음만 먹으면 농어촌에 특별한 지원을 한다 해도 전혀 무리하다거나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강변 축제라 아무데나 주차하기가 쉬워서 좋았다. 야외에서 거행하니 한가롭고 자유로워서 더욱 좋았다. 앞으로도 전국교사대회는 비좁은 서울만 고집할 게 아니라 여기저기 넓은 야외에서 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또 취미생활인 사진 찍기를 시작했다.
촬영 기술이 서툰 탓인지 인물들이 모자로 그늘이 가려서인지 사진들이 어둡게 나와서 유감이다. 유달중 버섯 판매원 임정선 선생, 역시 유달중 분회원 김희현 선생이 일요일에 아이들만 떼어놓을 수 없어서 소풍 겸 자녀들을 데리고 행사장에 참석했다.
학습 중에서 가장 중요한 학습을 꼽으라면 현장체험학습이다. 저 아이들은 커서도 어머니와 함께 가보았던 전국교사대회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아주 건강하고 소중하고 가치 있는 추억이 될 것이다.
모자 벗고 찍을 걸. 햇빛이 강할수록 그늘이 짙은가 보다. 초등 정 선생이 너무 반가웠다. 경기도 쪽으로 가더니 다시 전남으로 내려왔다. 안좌도 근무할 때 목포 해직 동지들이 놀러갔는데 정 선생 학부모 제사 지낸 집에서 아침을 얻어먹었다. 먼 경기도로 떠나서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이렇게 또 만나게 될 줄이야. 참 야릇한 해후였다. 교사대회는 해묵은 동지들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문경환 선생. 예전에 우수영중학교에서 윤석우 선생과 함께 근무했다. 학교 학예회 때인가 듀엣으로 ‘향수’를 불러 갈채를 받았단다. 우연찮게 유달중 테니스장에서 다시 만나 함께 경기를 즐겼다.
그의 부인 이송미 선생. 유달중에서 함께 근무했다. 염치없이 남의 데이트 장소에 용감하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그들은 웃었다.
창립 초기 전남 초대 지부장을 맡아서 감옥에까지 다녀온 고진형 선생님, 역시 탄압 정국에서 지부장으로 수고하신 박종택 선생님. 해직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나와 고진형 선생님은 꺼떡꺼떡 고흥 시골의 박종택 선생님 댁까지 놀러가서 통닭과 생낙지에 술잔을 기울이며 망중한을 즐겼다.
내 왼쪽이 미술과 김진수 선생, 진수 선생 왼쪽이 지부장으로 고생했던 체육과 김영효 선생, 맨 왼쪽이 영광에서 굴비 장사를 했던 김옥태 선생.
추석이면 목포지회에서도 영광지회의 굴비를 떼어다가 팔았다. 바람이 좋고 소금이 맛나다 했다. 아무리 작아도 영광굴비는 영광굴비였다.
교사대회 출발하려고 목포공설운동장에서 찍었던가 보다. 정춘순 선생, 김선화 선생, 장미경 선생, 강분희 선생, 모두 목포지회의 여전사 아마조네스들이다.
안 보이지만 교회와 사람 사이에 영산강이 흐르고 있다. 60년 전 초등학교 1학년 때에는 이곳 부근까지 목포에서 돛단배가 올라와 사람과 짐을 풀어놓았다.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선창가에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렸을까. 친구들 따라 선창가에 닿으니 돛폭에 바람을 가득 실은 돛단배 두어 척이 두둥실 강심에 떠 있었다. 선창가에 수북이 쌓인 옹기 단지에서 번쩍이던 햇빛, 생선을 사라고 외치는 장수들의 외침소리, 넋이 나간 소년은 그만 친구들 손을 놓쳐버려 어쩔 줄 모르고 훌쩍거렸다.
돛단배는 다 어디로 갔을까. 갈치 병어를 팔던 장수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60년 후 교사대회 행사장의 복잡한 인파에 휩싸여서도 나는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농어촌 중심도시 영산포가 쓸쓸하고 허전해졌다.
영산포에서는 그냥 곱게 지나갔느냐고? 아니제, 잔치에 소주가 빠지면 안 되제. 나는 또 반가운 김진수 선생을 끌고 임시 포차로 들어갔다. 어제도 내일도 내 술벗의 9할 9푼은 그립고 반가운 동지들이었다.
똘레랑스
홍세화 선생은 목포에 여러 번 오셔서 강연을 하셨다. 운명에 이끌려 만리타향 프랑스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처럼 목포에서 맛난 민어 낙지 홍어에 술잔을 기울이지도 못하고 가까운 말벗도 없는 곳에서 그 긴긴 세월 동안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을까. 나와 연배가 비슷한 홍 선생을 보면 편하게 살아온 내 세월이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래도 홍 선생은 한국에 베스트셀러를 통하여 프랑스의 똘레랑스를 퍼뜨렸다. 인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 관용쯤으로 번역되는 똘레랑스가 사실은 우리 한국에 가장 필요하고도 부족한 미덕이 아니었을까. 사실은 우리 전교조 안에서도 지금 똘레랑스가 절실한 과제가 아닌지 걱정된다.
2007년 11월 29일. 연제가 대학평준화! 프랑스는 파리1대학이나 파리2대학이나 별 차별이 없단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 평준화, 고등학교 평준화를 이루었으니 이제 대학 평준화만 남았네? 그러고 보니 우리 아들들은 목포의 대학에도 다니고 서울의 대학에도 다녔으니 그 실정을 잘 알겠네? 그렇고말고. 한국에서는 목포의 대학과 서울의 대학이 하늘과 땅만큼 멀다. 사랑의 연리지를 하자해도 팔이 안 닿을 만큼 멀다. 전교조가 주장하는 입시 점수 위주의 교육 반대, 자율학습 보충수업의 폐지, 인간화 교육, 민주시민 교육의 핵심 고리를 대학 입시가 쥐고 있으니 그 우상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달리 해결책이 없다.
해는 저물고 길은 멀다. 나는 살아생전에 제발 홍 선생과 함께 한국에서도 대학평준화가 실현되는 날을 보고 싶다. 금메달 동메달뿐 아니라 1등에서 꼴찌까지 모조리 상을 주는 학교를 보았으면 싶다. 아예 등수를 매기지 말고, 너는 노래 잘 부르니 노래 부르고 살고, 너는 요리 잘 하니 요리하고 살고, 그러면서도 다들 불평 없이 낙낙하게 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담양골
하당 담양골 식당에서는 맛난 훈제 오리고기가 나온다. 나는 훈제 요리를 참 좋아한다. 2007년 어느 날 담양골 식당에서 꽤 중요한 모임이 있었던가 보다.
가운데가 서한태 박사님. 목포환경운동연합 의장 서한태 박사님은 목포가 배출한 세계적인 환경운동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영산강, 유달산, 삼학도가 오염 훼손되지 않도록 수십 년간 심혈을 기울이셨다. (부록 13 참조)
왼쪽이 박광웅 의장님, 오른쪽이 서창호 교수님.
목포민주화사업계승발전회 박광웅 의장님은 5.18때부터 지금까지 민주시민운동을 꿋꿋이 이어오신 분이다. 서한태 박사님에 이어 벌써 팔순을 넘기셨다.
목포대 서창호 교수님은 정년퇴직을 하고 이제 칠순을 넘기셨다. 연설을 잘 하시는 것 보면 대학 강의도 잘 하셨을 것이다.
90년이던가. 전교조가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을 때 힘을 실어주고자 결성한 모임이 ‘목민협(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이었다. 작고하신 임기준 목사님이 상임의장을 맡았고, 서한태 박사님, 박광웅 의장님, 서창호 교수님이 공동의장을 맡으셨다. 나는 나이가 한참 아래였지만 전교조 몫으로 공동의장을 맡았다. 그 때부터 분야별로 움직이던 목포 민주화운동은 체계가 잡히고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 뒤로 목포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하면 공동의장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대열의 맨 앞줄에 섰다. 최루탄이 난무했고 한 번은 전투경찰이 군홧발로 연좌시위 중인 내 엉덩이를 걷어차서 하늘이 노래져 쓰러진 적도 있었다.
박승희 열사 아버님 박심배 의장은 조금 늦게 공동의장에 참여했다. 정명여고의 딸 박승희 열사가 떠나자 따님의 몫까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기로 단단히 작정하신 모양이었다.
다른 분들은 내가 공동의장을 그만 두고 학교에 복직한 뒤에도 열심히 목민협 활동을 계속하셨다. 지금까지 여전히 고생하시는 것을 보면 나만 태만한 것 같아서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나주에서 해직된 정연국 선생은 세월이 좋아지자 완도 청산중학교 공모교장으로 부임했다. 나는 정 선생만 보면 내 자신이 미워 죽을 지경이다. 비록 삼류라고는 하지만 글은 좀 되는데 대중 연설은 영 젬병이다. 정 선생은 타고난 연설가다. 어쩌면 그렇게 분명한 음성으로 조리 있게, 사리에 딱 들어맞게, 청중들이 잘 공감할 수 있도록 청산유수로 흘러가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오른쪽이 청산중 근무하면서 우연찮게 정 교장을 따라왔다가 모임에 참석한 분이다. 미술과라던가. 언젠가 이 선생님의 활동상이 텔레비전에 방영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공부방을 열었던가. 대단한 열성이었다. 예전부터 지역사회 학교라는 말이 돌아다녔는데 바로 이 선생님이 학교와 지역사회가 연계되었을 때 얼마나 좋은 성과와 효험을 거둘 수 있는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왼쪽이 문태중고등학교 조시균 선생. 나이로 따져 자기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나로도 초등학교 교사였다고 항상 우대주었는데, 지회장까지 맡아 고생했는데, 광주로 떠나서 섭섭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여주어서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오른쪽이 조시균 선생 다음으로 지회장을 맡았던 문태중학교 김홍수 선생. 늘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밀고 당기기에 능란하다. 그러고 보니 해직 기간 동안 지회 조직을 가장 튼튼하게 뒷받침해준 학교가 신명학원과 문태학원이었다. 나는 비교적 문태학원의 회식 자리에 부지런히 쫓아다닌 덕분에 그 학교 동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셈이다.
정명여고 해직교사 김대중 선생은 목포시의원에 시의회 의장까지 역임했으니 목포 해직 중에서는 가장 출세한 편이다. 열린우리당으로 국회의원에 입후보했으나 후광 김대중 선생의 민주당 입김이 센 목포인지라 애석하게 낙선했다. 김대중 선생은 김대중 선생 때문에 떨어진 셈이다.
오른쪽이 문태학원 최현우 선생. 어째 이상하게 안 웃을 때 사진이 찍혔다. 평소에는 최기종 선생보다 더 자주 발동기 돌아가듯 와그르르 웃음을 쏟아내는 낙천가다. 스무 해 동안 변함없는 조직의 대들보.
옛 선비들이 왜 ‘세한도’를 좋아했는지 이해가 간다. 사람은 추워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3부 끝)
부록12 영흥슈퍼 (졸저 ‘잠들지 못하는 나무들’ 중 ‘갤로퍼 교주’ 일부)
내가 조창익 선생에게 ‘교주’라는 별명을 선사한 이유는 ‘옴 진리교’ 사건 말고도 또 있었다. 영흥 슈퍼의 ‘도사님’과 대비하는 뜻으로 ‘교주’라고 부
른 것이다.
‘도사님’도 내가 지은 별명이다.
목포에서 독천에 이르러 우회전해서 한 때 세발낙지로 유명했던 미암 문수포를 지나 오른쪽으로 간척지를 끼고 왼쪽으로 흑석산을 쳐다보며 한참 달리면 해남군 계곡면 가학리 영흥 슈퍼가 나온다.
도사님의 본명은 조영준. 영흥 슈퍼라는 이름의 ‘영’ 자는 이름에서 따오고, ‘흥’ 자는 불같이 일어나라는 뜻에서 붙였단다. 일찍이 청년 시절에 성남에선가 전공으로 일했는데 그만 고압선에 걸려 지상으로 추락했단다. 모두들 죽는다고 했는데 오른팔과 왼다리는 떼어 내고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제 그분은 오른발과 왼손만 가지고도 이 세상을 아무 불평없이 여유롭게 살고 있다. 슈퍼를 지키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틈이 나면 왼손으로 붓글씨를 쓰면서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죽을 목숨인데 하느님이 수명을 연장해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는 것이다. 해방둥이, 나보다 한 살 위다. 성한 몸으로도 불평불만이 너무나 많고 억울한 마음이 너무나 많은 나로서는 달관에서 오는 온화한 표정의 그분 앞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수그러진다. 내가 가게 주인아저씨에게 지리산에서 도를 닦고 내려온 ‘도사님’ 같다고 했더니 왜 자꾸 도사라 하느냐고 팔팔 뛰었다. 칭호에 어울리는 인품을 갖추었더라도 그런 대접을 받기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도사님’의 미덕이다.
나는 그 ‘영흥 도사님’을 떠올리며 ‘갤로퍼 교주’라는 별명을 붙였다. ‘도사’나 ‘교주’나 모두 수양이 부족하거나 참을성이 없거나 겸허하고 경건하지 않으면 부지하기 어려운 칭호다.
부록 13 영산강의 파수꾼 (주간 목포시민신문)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자주 찾아뵙지 못하다가 꽤 오랜만에 ‘목포환경운동연합’을 방문하여 서 박사님을 뵈었다. '목포환경운동연합‘ 사무실은 목포문화원(옛 조흥은행 자리) 맞은편에 있다. 시민운동을 어찌 한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까마는 목포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드물 만큼 서 박사님은 환경운동의 최전방에서 푸른 목포 푸른 국토 가꾸기에 심혈을 기울여 오신 백전노장이다.
나는 스무 해 전에 전교조 운동을 시작하면서 서 박사님을 처음 뵈었다. 목포민주시민운동협의회가 구성되자 서 박사님은 환경운동 대표로 나는 전교조 대표로 공동의장을 맡았다. 자연히 그분을 뵐 기회가 많아졌다. 서 박사님을 흠모한 나머지 나는 1994년에 목포 환경보전운동의 역사와 그분의 활약상을 담은 원고지 300장 분량의 ’영산강과 목포녹색운동‘을 쓰기도 하였다.
내친 김에 드러내놓고 ‘목포환경운동연합’을 광고 선전해보자. 왜냐하면 환경보전운동은 이 시대의 화두이자 모든 시민이 함께 풀어야 할 숙제이며 그 심각성과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환경보전운동에서 자유로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마땅히 후손들에게 살기 좋은 땅을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1층에 들어서니 서 박사님께서 반갑게 맞이해주신다. 팔순을 넘기셨지만 피부도 탱글탱글하고 목소리도 여전히 우렁차다. 벽에 구호처럼 크게 쓰인 글자들이 눈을 파고든다.
- 핵발전소 이제 그만 핵이 없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다.
- 물 관리는 환경부로 일원화하고 강을 살리기 위해 환경오염물 실명제를 실시하라.
- 못된 사람은 역사가 심판하고 우리의 바보짓은 자연이 심판한다.
그 밑에는 구체적으로 건강식품 광고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 우리밀 살리기 무안공장 -국산콩으로 만든 학동네 메주 된장 간장 - 길농원 곡성사과 - 무안 고절 1리 도레미 콩나물
그 광고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서 박사님이 웃으신다.
“환경 강연을 다녀보니까 아주머니들이 이론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데 좋은 업소라면 부지런히 적어요.”
요컨대 환경운동의 첫 번째 비결은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구체적인 장소나 시간, 구체적인 상황은 환경운동의 출발점이자 종착역이다. 그런 관점에서 방사선과 의사로 출발한 서 박사님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목포라는 구체적인 공간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질 뻔한 환경오염을 앞장서서 몸으로 막아낸 분이다.
영산포주정공장설치반대운동(영산호보존회1983)삼학도시멘트사이로설치반대운동(삼학도보전회1986)유달산케이블카설치반대운동(유달산보전회1987)목포녹색운동단체협의회(1987)목포녹색연구회(1988)목포식생활연구소(1992)목포물문제해결을위한시민회의의장(1994)푸른전남21이사장(1996)목포환경과건강연구소(1996)지속가능발전위원회대통령자문위원(2000)
무등문화상(1984)동아의료문화상(1987)올해의호남인상(1991)교보환경문화대상(1998)환경의날국민훈장동백장(2000)
서 박사님은 또 기회 있을 때마다 지칠 줄 모르는 글쓰기와 강연을 통하여 환경보전운동에 전념하셨다.
도랑살리기, 샛강살리기, 물관리일원화, 바다살리기, 습지살리기, 난개발방지, 골프장시설반대, 온천개발반대, 그린벨트훼손반대, 식생활개선운동, 케이블카설치반대, 비무장지대생태공원화, 지리산댐반대, 경인운하반대, 새만금간척사업반대, 환경호르몬, 바다쓰레기, 골채채취반대, 수돗물불소화반대, 쓰레기효율적처리, 반핵운동, 자동차증가억제정책, 에너지절약, 삼림훼손반대, 수입식품검역강화, 학교급식제도개선, 산불방지, 지구온난화방지, 환경오염물질실명제, 자전거타기.
2층에 올라가니 사무실 직원들이 목포환경운동연합의 현안사업을 알리는 팜플렛을 내어준다.
-사업타당성은 물론이고 절차적 정당성조차도 의심받고 있는 해양음악분수 설치사업의 중단과 재검토를 촉구한다!
-4대강 개발 사업을 하면 안되는 이유( 1.강 파고 물길 막으면 생태계가 파괴되고 수질은 급속하게 악화된다. 2.국민 대다수의 식수원을 포기해야 한다. 3.홍수 예방은 산간계곡지대와 중소하천 대책이 우선이다. 4. 국민혈세 22조 원의 투자효과는 없다. 5.운하건설의 전초단계임이 확실하다. 6.법과 절차도 없이 졸속으로 추진하고 있다.)
“박사님께서 뿌리를 깊이 내려 놓으셨으니 당장은 힘들더라도 앞으로 좋은 열매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작별 인사를 올리고 사무실을 나서는데 바깥 유리창에 쓰인 글씨들이 눈에 들어온다.
- 생태계 파괴, 국고 낭비, 4대강 사업 철회하라.
- 목포의 하늘을 푸르게, 목포의 물을 맑게.
‘프레온가스로 오존층이 구멍 나고, 이산화탄소 배기가스 지구온난화로 북극 남극 빙산이 녹아 바닷물이 넘치면 목포가 물에 잠길지도 몰라. 쓸데없는 걱정이겠지.’
문득 하늘을 우러러본다. 유월 하순의 탱글탱글한 태양이 목포 상공을 바짝 숨 가쁘게 조여 온다. (2009. 06. 29)
첫댓글 으헝~~ 제가 다 눈물이 납니다.
아는 분들 등장에 손도 덥썩 잡습니다.
참 대단하신 선생님들입니다.
참 장하신 선생님들, 우리 딸들 다닐 학교 이 만큼 발전시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제 문재인 후보가 전교조 출신이랑 친하다고 물고 늘어지려다 자충수 둔 어떤 아줌마한테 이거 꼭 한번 읽어보라고 알려줘야 겠네요.
회장님도 고맙습니다.
"전교조 탄압하는 노@@ 찢#♥이자!"
이후 폭풍감동을 안겨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