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례기(15)마지막회: 열린 포구(開浦)에 다시 서다!
아주 옛날 얘기긴 하다. 중국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내겐 묘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중국이 본래 고사성어, 사자성어의 진수가 아니던가. 그래서 중국을 떠날 때 사자성어 하나씩으로 그 여행을 요약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면 뭔가 지식인 비슷한 느낌이 드니 참 나도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긴 없나보다. 그런데 워낙 오랜만에 중국엘 가다보니 사자성어를 다 까먹고 까맣게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도 심양공항에서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물병을 압수하는 걸 보고 간신히 생각해낸 말이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다는 상선약수(上善若水)였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이 기억날 리 있나? 그래서 집에 온 뒤 인터넷으로 긁어 올렸다. 그리고 마치 원래 내가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올려본다.
“물은 온갖 것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도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도(道)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성경을 중국어의 아름다운 시로 번역했고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바티칸주재 전권공사(중화민국 초대 바티칸 공사)를 역임했던 오웅경박사(John Wu)는 중국의 도교와 불교, 유교가 결국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들이게 만든 선(先) 복음적 지식이었다는 평가를 한다. 노자가 말하는 도를 보면 확연히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도(道)란 곧 물과 같은 것이고 물이 바로 도인 이유는 낮은 곳으로 가기 때문이 아닌가?
예수님의 말씀은 칼처럼 명확하다.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임을 그토록 강조하고 또 강조하셨다.
-.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오 20:28)
-.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코 9:35)
브뤼기에르 주교님이 걸어가신 길은 상선약수의 도였다. 낮은 곳으로 거기서 더 낮은 곳으로만 걸어가신 길이었다. 마카오를 거쳐 중국 대륙에 들어온 뒤 그의 십자가는 이방인으로서 얼굴도 가리고 거지 옷을 입고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한 채 그저 낮은 곳으로만 헤매고 다녔다. 더 낮은 곳만을 찾아서...
그 자취가 만리장성에 적봉에 그리고 서만자에 남아 있다. 그리고 마가자에서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 마침내 우리 주님이 그를 하늘로 불러올리신 것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은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인 첫째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이의 종이 되었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었던 주교님을 첫째로 끌어올리는 일에 나서고 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방식으로 일하실까? 왜 하느님은 직접 나서시지 않고 못난 인간의 손을 통해 일을 하실까? 나는 그 대답을 미시시피의 트라피스타 수녀원 원장인 게일 피츠패트릭 수녀님이 쓴 『은총의 계절』(바오로딸)이란 책의 한 장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게일 원장수녀님이 묵상한 성경은 탈출기 17장 9절에서 13절의 말씀이다.
<그러자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말하였다. “너는 우리를 위하여 장정들을 뽑아 아말렉과 싸우러 나가거라. 내일 내가 하느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언덕 꼭대기에 서 있겠다.”
여호수아는 모세가 말한 대로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후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우세하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우세하였다. 모세의 손이 무거워지자, 그들은 돌을 가져다 그의 발아래 놓고 그를 그 위에 앉혔다. 그런 다음 아론과 후르가 한 사람은 이쪽에서, 다른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두 손을 받쳐 주니, 그의 손이 해가 질 때까지 처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여호수아는 아말렉과 그의 백성을 칼로 무찔렀다.>
게일 원장수녀님은 다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이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계곡 아래에서 전투를 하고 있는 여호수아입니까? 기도를 하고 있는 모세입니까? 모세의 팔을 받치고 있는 아론과 후르입니까? ”
게일 수녀님은 그 대답을 이렇게 하셨다. “일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전투를 벌이고 있는 여호수아와 탄원하는 모세, 그리고 모세의 팔을 받치고 있는 아론과 후르가 없다면 그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전투는 하느님의 일이지만 하느님은 유한한 인간을 통해서 그 일을 하셔야만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지만 그 일을 하실 때는 반드시 유한한 인간을 통해서 하신다는 사실. 하느님은 처음도 그러셨고 지금도 그러하시며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다. 왜 그렇게 하실까? 자신이 만든 인간을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닐까?
미국 Fox 방송의 <Nanny 911>이란 프로그램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내니(Nanny)는 보모란 뜻이고 911은 우리말의 119이다. 문제아의 행동을 교정해주는 프로그램인데 이 포맷이 요즈음 한국에서도 <우리아이 달라졌어요!>로 비슷하게 방송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특징은 아이들이 결국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깨달아 자신의 힘으로 힘든 상황을 극복하게 만든다는 데에 있다. 부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주게 되면 아이는 결국 독립성을 상실한 채 비참한 상황에 이르고 만다.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사랑도 바로 이와 같을 성싶다.
게일 수녀님의 해석에 따르면 이 장면의 등장인물도 허점투성이들이다. 여호수아는 자신 안에 있는 질투, 성급함, 신경과민과 싸운 불완전한 존재였다. 모세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를 보내면서도 때론 지치고 낙담했다. 그래서 유한한 우리 모두에겐 기도가 필요하다. 그 역할이 바로 아론과 후르였다. 게일 수녀님은 오른쪽에 있던 아론이 ‘개인기도’를 통해 받는 도움을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왼편에 있던 후르는 ‘전교회와 함께 드리는 공동체 기도’를 떠 올린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여호수아든, 모세든, 아론이든 그리고 후르든 모두 불완전한 존재다. 바로 하느님은 그런 유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합하고 기도하며 통회할 때 우리에게 크나큰 은총을 베풀며 온전히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우리처럼 부족한 인간들에겐 얼마나 큰 축복일까?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현양하기 위해 우리 부족한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보시기에 흠집투성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몫을 다 하라고 불러 모으셨고 그 몫을 바로 우리 개포동 성당에 넘겨주신 게 아닐까? 팔을 들어 하느님께 탄원하는 모세 같은 주임 신부님도 계신다. 오른 팔을 받치는 아론처럼 개인의 기도도 필요하며 후르처럼 우리 개포성당 공동체의 기도는 더욱 절실하다. 여호수아처럼 앞장서 나가는 현양분과장도 있어야 하고 그 뒤를 따르는 군사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하느님이 축복하고 또 진정으로 주관하시지 않겠는가?
게일 수녀님은 이 글의 말미에 이런 기도를 하셨다.
“주 하느님!
저희가 당신 일을 하려고 애쓸 때
당신께서 저희를 위해 계획하신
모든 것을 완성시켜 주소서!”
여기에 난 한 마디만 척 붙였다. 아주 간단하게.
“아멘!”
4월 6일 밤 9시 30분. 버스가 마침내 열린 포구, 열린 성당 앞에 도착했다. 이성진 미카엘 보좌신부님, 김 히아신타 원장수녀님, 정 글라라 · 손 테레사 수녀님을 비롯해 많은 교우 분들이 환영하러 나오셨다. 버스가 서자 밖에 있던 모든 분들이 박수를 쳐주신다. 나도 여행을 꽤나 많이 한 것 같은데 여행 끝나고 박수를 받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매우 피곤했지만 박수 소리에 “야, 이 순례 잘 갔다 왔네!”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참으로 복된 4박 5일간의 시간이었다.
원장 수녀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조금 전에 아들이 왔다 갔다 하던데...” 하신다. 가방을 내리면서 정 글라라 수녀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아들 못 봤어?”하신다. 아들 프란치스코와 내가 붕어빵은 붕어빵인가 보다. 닮은 사람끼린 도대체 닮아 보이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기계에서 뚝딱 뽑아낸 듯 똑 같은 가 보다.
사실 이런 비밀이 있긴 하다. 몇 년 전 우리 부자가 잘 삐진다고 해서 처형(한경진 마리안나)이 별명을 지어준 적이 있었다. 아빠 아우구스티노는 <삐돌이 원(One)>, 아들 프란치스코는 <삐돌이 (Two)>였다. 지금이야 말할 수 있지만 당시엔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이 사고 쳐도 “삐돌이가 삐돌이를 닮아서 그렇지!”하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삐돌이 하나만 문제가 생기면 다른 삐돌이까지 연쇄 불안이 이어진 시절이다. 이 별명을 극복하는 데 족히 몇 년은 걸린 것 같다.
그런데 요즘 부쩍 난 삐돌이 인 것 같은 느낌이다. 하느님 앞에만 서면 그렇다. 그저 보따리를 풀어놓고 이것도 해주십사, 저것도 해주십사... 그러다 안 해주시면 또 삐짐이다. 그래도 이번 순례를 통해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던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성덕과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주교님을 통해 뒤늦게나마 철들게 해주시니 주님의 은총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나의 스승님이며 또 나의 수호성인이신 성 아우구스티노의 ‘진정한 고백’ 한 토막으로 긴긴 순례기를 마친다.
늦게야 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내안에 님이 계시거늘
나는 밖에서, 내 밖에서 님을 찾아
당신의 아리따운 피조물 속으로
더러운 몸을 쑤셔 넣었사오니,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당신 안에 있잖으면 존재조차 없을 것들이
이 몸을 붙들고 님에게서 멀리했나이다.
부르시고 지르시는 소리로
절벽이던 내 귀를 트이시고
비추시고 밝히시사 눈멀음을 쫓으시니
향내음 풍기실 제, 나는 맡고 님 그리며
님 한 번 맛본 뒤로 기갈 더욱 느끼옵고
님이 한번 만지시매,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
♡ ♡ ♡ ♡ ♡ ♡ ♡ ♡ ♡ ♡ ♡ ♡
그동안 부족한 순례기를 읽어주신 모든 교우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
첫댓글 순례기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너무 재미있게, 생동감있게 잘 읽었습니다. '같이 갔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보려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순례기라기 보다는 신앙고백서을 읽은 느낌입니다.. 그저 사진으로만 보아온 서만자, 마가자, 단동, 변문이 눈에 그려지듯 생생한 느낌으로 전해옵니다. 순례단곁에서 그길 내내 브뤼기에르 주교님 함께 하셨읍니다~~ 건강하게 돌아오셔서 감사합니다..
순례기를 읽고 모든분들이 브뤼기에르 주교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고싶은 생각이 들겄같아요 머리숙여 감사드립니다
성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마지말 말 " 위 없는 기쁨에 마음이 살라지나이다."라는 말은 옛 번역으로 바오로 수도회에서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위 없는 기쁨"은 최상의 행복이란 뜻이며 "살라지나이다"는 불 사르다의 '사르다'에서 나온 말로 2000년 현대지성사 출간 번역본에서는 이 말을 "활활 타올랐나이다."로 쓰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를 ...
아우구스티노님께서 순례기 생경하게 전해주시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성아우구스티노의 고백록으로 저도 순례의 여정에 점을 찍을까 합니다. 순례기 말로는다 표현못하지만 제가슴에 담겠습니다. 함께했던 시간들이 행복했었습니다. 모두모두에게 감사의 인사드립니다. 이제 브뤼기에르주교님의 시복시성을 위해 앞으로 전진해야할일만 남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