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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金剛山)은 산이 아주 높고 빼어난 경치는 창궁(蒼穹)에 까지 높이 솟아 있어서 날이 개어 태양(太陽)이 솟아오르면 온 산이 유독 밝게 반짝 거린다. 또한 산골짝은 깊고 자욱하게 짙으니 흰 구름이 항상 꽉 끼어 있는 지라 흐리기 만 하면 이내 비가 내린다.
층암절벽(層岩絶壁) 곳곳에 매어 달린 듯한 폭포(瀑布)가 물줄기를 내려 쏟으니 흡사 목욕탕(沐浴湯)처럼 움푹 파인 깊은 쏘가 많으며 이리 하여 만약 비가 내려 계곡의 물이 불어나게 된다면 유람(遊覽)하는 사람들의 불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금강산(金剛山)은 일 년 사시(四時) 계절에 따라 경치가 다르다.
봄이면 금강(金剛)이라 하여 해동(解凍)이 늦고 몹시 추운 관계로 산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여름은 봉래(蓬萊)라 하여 흐리고 비가 자주 내리는 까닭에 자칫 옷이 흠뻑 젖는 일이 많으니 이를 무릅쓰면서 까지 산에 들어가기란 역시 어려울 것 같으며 가을이 되면 풍악(楓岳)이라 하여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아니하여 산에 오르기에 가장 알맞을 뿐 아니라 경치도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겨울은 개골(皆骨)이라 하여 항상 눈이 쌓여 있고 얼음이 얼어 있어서 한 걸음도 나아 갈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러므로 금강산(金剛山)을 구경하려면 가을이 가장 좋고 아니면 늦봄 쯤 이라야 하는데 오늘 우리 일행의 금강산 구경 행차는 늦은 봄 첫 여름이니 역시 알맞은 때에 온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에 스님이 가르쳐 주는 길을 따라 구룡연(九龍淵)에 갔는데 이 절은 보광사(普光寺)에서 서남(西南) 쪽으로 십여 리(十餘里) 쯤 되었다.
오선대(五仙臺) 좌정암(坐鼎岩) 삼성암(三聖岩) 흥운담(興雲潭) 백파담(白波潭)을 차례로 지나 앙지대(仰止臺)에서 잠시 쉬었다.
지나는 곳마다 방백(方伯) 수령(守令)과 명인달사(名人達士) 들의 이름이 바위에 소소(昭昭)하게 각자(刻字) 되어 있었다.
백여보(百餘步) 쯤 더 갔더니 금강문(金剛門)이 있는데 두 개의 큰 바위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어서 흡사 지붕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몇 사람이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었다.
이 곳으로 부터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또 감사굴(監司窟)을 거쳐서 천화대(天花坮)에 올랐다.
사방을 바라보니 신기(神奇)한 요술쟁이가 만들어 놓은 듯 수 많은 만봉(巒峰) 들이 기괴(奇怪)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다시 옥류동(玉流洞)으로 들어갔더니 바위 돌에 설마경(雪磨鏡)이 잘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백여 보(百餘步) 남짓 되는 곳에 연주담(聯珠潭) 무봉포(舞鳳暴) 비봉포(飛鳳暴) 등 폭포(瀑布)가 있는데 그 폭포의 원류(源流)는 어디서 시작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마치 절벽(絶壁)에 비단 천을 펼쳐서 걸어 놓은 듯하다. 이 물 줄기가 절벽(絶壁) 바위에 부딪쳐서는 마치 구슬이 튀 듯 흩어지고 바람을 따라 물거품을 이루면서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퍼 붓고 있다.
말이 달리듯이 날쌔게 지나쳐도 소나기를 맞는 듯하였다.
병목처럼 된 장방(長方)의 긴 모서리를 따라 건너서니 구연담(口淵潭)이 있는데 돌다리 위에 [구천은하(九天銀河)]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나아갔더니 마치 기둥처럼 깎아 다듬은듯한 층층(層層) 바위가 절벽(絶壁)을 이루어 병풍(屛風)처럼 둘러쳐 있는데 그 가운데를 외줄기 성난 폭포가 높은 재 꼭대기 산마루에서 날듯이 흘러내리니 이 폭포가 즉 구룡연(九龍淵)이었다.
뻗친 물줄기의 길이가 삼백 칠십 척(三百七十尺)이나 되고 가마솥(釜)과 떡시루(甑)처럼 깊이 파인 돌덩이는 그 깊이가 사십 척(四十尺)이나 된다고 하니 실로 굉장한 장관(壯觀)이 아닐 수 없으며 못 가까이는 접근할 수가 없다.
만폭동 제하에 시 한수를 읊었다
<만폭동>
금강문 속에 수많은 시내 흘러
인간 세상 하염없는 시름을 끊어 놓았네.
층 벽에 나는 모습 명주를 펼친 듯
화살을 뿜어내듯 바위도 감돌아 벽옥이 흩어지듯 하네.
가가(假家)에서 먹을 것을 먹으면서 아픈 다리를 조금 쉰 다음 구룡연(九龍淵)을 돌아 쇠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데 철근(鐵筋)을 바위에 꽂아 석축(石築)을 하고 탐승자(探勝者)가 이를 따라 다닐 수 있도록 하였으나 너무 힘겹고 아찔하여 나이가 많은 노약자나 어린 아이들은 못 갈 것 같고 혈기(血氣)가 강장한 젊은 사람일 지라도 눈이 어지러워 자칫하면 실족(失足)할 것 만 같은데 정신이 든든치 못한 사람은 마음도 흔들릴 뿐 아니라 눈에 현기(眩氣)가 나서 만일 잘못 실족(失足)이라도 한다면 돌은 매끄러워서 잡을 수도 없을 것이니 저 깊은 웅덩이에서 기어 나올 방도란 없을 터 인 즉 어찌 조심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이 명산을 못 보고 늙는다면 한스러운 유회(遺悔)가 아닐 수 없을 것이나 나는 집에 귀가(歸家)해서도 남에게 이 곳 구경을 권하고 싶지 않을 뿐더러 나의 자녀 질(子女侄)에게는 유계(遺戒)로서 일러두어야 할 것만 같다.
점심은 삼가(三街)의 주인집에서 하고 곧 길을 떠나서 삼십 리 쯤 걸어갔더니 고성군 서면 보현리(高城郡 西面 普玄里)였는데 김동근(金東根)씨의 점에서 유숙하였다.
이 날의 행보이수(行步里數)는 팔십오 리(八十五里)였다.
4月 26日 무신(戊申) 맑고 더움.
십여 리를 걸어갔더니 구숙령(狗宿嶺) 재였다.
구숙령(狗宿嶺) 재의 높이는 마치 하늘에 닿을 듯 하고 재를 오르는 데는 아흔 아홉 구비를 올라야 만 되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개걸음(狗步)처럼 뛰어서 하루 종일을 가도 다 못 가고 자고 갔다 하여 이 고개 이름을 구숙령(狗宿嶺)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날 걸은 이수(里數)는 사십 리(四十里)인데 수목(樹木)은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져 있고 인가(人家)는 영성(零星)하였으며 다만 물 흐르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명월교(明月橋)를 건넜더니 곧 유점사(楡岾寺)앞 개울이었다.
산영루(山暎樓)에 올라 잠시 동안 누각(樓閣)의 이곳 저곳을 둘러 본 후에 점심을 요당(寮堂)에서 한 후 사무실에 들어갔더니 주지(主持)는 김일운(金一雲)씨였다.
인사를 나누고 나니 그 주지(主持)가 멀리서 온 우리들의 어렵고 힘겨운 행차를 위로해 주면서 서기 유재식(劉載植)으로 하여금 능인보전(能仁寶殿)에 이르러 보전문을 열쇠로 열어 구경시켜 주었다.
보전(寶殿) 안으로 들어가 불상(佛像) 앞에서 재배(再拜)한 다음 느름나무 뿌리(楡根)에 나란히 열좌(列座)한 오십삼불(五十三佛)을 구경하였다. 이 오십삼불(五十三佛)은 서역(西域)으로 부터 처음 건너 와서 이 산 느름나무 뿌리(楡根)에 열좌(列座)하였으므로 절(寺)이름을 유점사(楡岾寺)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조선(朝鮮)의 불교(佛敎)는 유점사(楡岾寺)가 제일 먼저 세워졌으므로 절 가운데서도 제일 선종(第一禪宗)이 된다 하며 절을 지은 지가 지금으로 부터 이천 구백 년(二千九百年)이나 되는데 그 사이에 다섯 번이나 실화(失火)로 태운 일이 있다 하니 금강산(金剛山)은 가히 천하의 명산이며 유점사(楡岾寺)도 또한 조선의 여러 사찰(寺刹) 가운데 종사(宗寺)가 된다고 한다. 어찌 아름답고 웅장(雄壯)치 않으랴.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오탁천(烏啄泉)이란 샘물이 있다. 아주 까마득한 옛날 한 때 물이 말라서 창황(蒼皇)한 때가 있었는데 이때 마침 까마귀(烏鳥)가 날아 와서 이곳을 주둥이로 쪼아서 뚫으니 마침내 물이 솟아 샘이 되었으므로 샘 이름을 오탁천(烏啄泉)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표주박(瓢)으로 물을 떠서 마셨더니 심신(心神)이 무척 상쾌(爽快)하였다.
이어 사명당모기(四溟堂毛旗)를 구경하였다. 이 모기(毛旗)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일본(日本)을 쳐서 정토(征討)하였을 때에 짚던 지팡이(杖)라고 한다. 어찌 그같이 오랜 세월(歲月)동안 잘 보수(保守)를 하였는지 참으로 진중(珍重)한 보물이 아닐 수 없다.
사관(舍館)에 들려서 식대와 하룻밤 유숙하는 사관비를 물어 보았더니 제일 낮은 대접(待接)이 육십 전(六十錢)이라 한다.
유숙(留宿)하고 싶지가 않아서 마사연암(摩詞衍菴)을 향하여 가는데 서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여러 언덕(阜頭)이 나란히 열좌(列座)하고 있었다. 이 부두(阜頭, 두술머리)는 도통(道通)한 스님께서 선화(仙化)하게 되면 이 스님을 기념(紀念)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두둘(阜)이라 한다.
영선교(迎仙橋)를 건너 효운동(曉雲洞)을 구경한 다음 십여 리를 걸어갔더니 은선대(隱仙坮)에 이르렀다. 은선대(隱仙坮)에서 내려다 본 경치는 그야말로 개장(槪壯) 그것 이었다. 원근(遠近) 눈이 미치는 곳마다 유람객(遊覽客) 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각자(刻字)가 무수하다.
은선대(隱仙坮)를 내려오는데 갑자기 앞길이 막히듯이 끊어지더니 해도 서천(西天)으로 기울고 있었다. 오늘 점심을 엿(飴)으로 하였는데 목여(穆汝)형이 말하기를 숲이 깊고 산길이 이렇 듯 캄캄한지라 처음 온 낯선 산 중에서 모험을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 되므로 다시 되돌아 유점사(楡岾寺) 반약암(般若菴)으로 내려와 이름을 신법해(申法海)라 하는 스님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였는데 역시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낸 것처럼 반기며 맞이해 주는 지라 퍽 감사하였다.
너무 피곤하여 이내 잠자리에 들었다.
이 날 행보이수(行步里數)는 모두 오십오 리(五十五里)였다.
4月 27日 기유(己酉) 날씨는 맑으나 오히려 쌀쌀함.
이는 산이 높고 계곡이 깊기 때문인 듯하다.
스님이 말하기를 어제 아침에는 서리가 내렸다 한다. 나뭇잎은 아직 쑥(쑥)처럼 무성(茂盛)하지 않다
조반(朝飯)을 마친 다음 다시 작일(昨日)에 갔던 길을 따라 십 리(十里) 쯤을 갔더니 칠보대(七寶臺)가 바라보인다. 조금 쉰 다음 고개를 세 번을 넘었더니 곧 내무령(內霧嶺)이었다. 늙은 잣나무 숲이 끝도 없이 우거져 있는데 자연으로 나서 자연으로 무성(茂盛)타가 자연히 잎 지고 자연히 썩으면서 몇 천 년 동안을 지내온 자연(自然)이다.
도끼(斧)를 가지고 이 깊은 산 속 까지 올 리(理)가 없으니 모두가 자연 그대로이다. 실오리 같은 오솔길과 간간히 만들어 놓은 사다리 복도를 타고 오르며 반나절을 지나 왔는데 하늘도 없고 땅도 없는 것 같이 어렵기만 한 길을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옛날 촉도(蜀道)로 가는 길이 어렵다 하였는데 이와 같은 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재(嶺)로서 동(東)과 서(西)로 구분을 한 다음 서쪽은 내금강산(內金剛山) 동쪽을 외금강산(外金剛山)이라 부른다.
상백운대(上白雲臺) 제하의 시 한수를 읊었다.
<백운대 위에서>
흰구름 깊은 곳에 백운대 있어
신선이 이 곳에서 노님을 쉽게 알겠네
조화옹은 애타는 마음을 가엾게 여길지라도
참 인연 빌려 한가닥 길이 열렸으니 다행일세.
여기서 회양(淮陽)을 향하여 내려오는데 길가에 감로수(甘露水)가 있었다.
다시 조금 걸어 사선교(四仙橋)를 지나 묘길상(妙吉祥)에 이르니 돌을 쌓아 단(壇)을 만든 다음 그 단(壇) 위에 탑(塔)이 세워져 있는데 그 탑(塔)에 새겨져 있는 미륵불상(彌勒佛像)은 그 높이가 열 길(十丈)이나 되고 넓이도 가히 너 다섯 아름이나 될 듯하였다. 어느 연대(年代)에 이 처럼 웅장한 탑불(塔佛)을 세웠는지 알 수 없으나 불상(佛像) 옆으로 묘길상(妙吉祥)이란 삼 대(三大) 글자가 새겨져 불지암(佛地菴)을 바라보도록 하였으니 참으로 장관(壯觀)이었다.
마사연암(摩詞衍菴)에 이르러 점심을 먹던 중 마침 전라도(全羅道)에서 금강산 탐승(探勝)을 위하여 왔다는 김(金)씨 성의 노인 한 분을 만났다. 조금 후 이 노인과 함께 마사연암(摩詞衍菴) 뒤 계곡으로 들어가 만회암(萬灰菴)을 구경한 다음 또 다시 한 언덕을 오르게 되었는데 두 객(客)은 그만 뒤 따라 오지를 못한다.
목여(穆汝)형과 둘이서 서로 붙잡으면서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데 절벽 아래에서 부터 의관(衣冠)과 신발도 벗고 쇠줄(鐵鉤)을 잡으며 높이가 십여 길(丈)이 넘는 절벽을 간신히 기어올랐다.
바위와 바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던 중 길 아래에 있는 금강수(金剛水) 샘에서 샘물 한 잔을 마신 다음 다시 돌아 백운대(白雲臺) 정상(頂上)에 올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백운대(白雲臺)를 둘러 감으며 힘차게 뻗은 산줄기(脈) 따라 혹은 높고 혹은 낮은 수많은 봉우리가 한 눈 속으로 들어온다. 그 중 높은 봉(峯)은 그 꼭대기가 하늘 위 까지 솟아 있어도 그 봉우리 꼭대기는 겨우 몇 사람만이 용납(容納)될 넓이일 뿐이다.
바위에 기댄 채 먼 곳 가까운 곳 눈이 미치는 데 까지 내려다\보았으나 왠지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 잠시 정신을 진정(鎭靜)시킨 다음 드디어 백운대(白雲臺)를 내려오는데 위태롭기가 오를 때 보다 휠씬 더하다.
간신히 대(臺)를 내려와 신라(新羅) 때의 명승(名僧) 의상대사(義相大師)께서 처음 창건(創建)하였다는 마사연암(摩詞衍菴)에 이르러 쉬었다. 해는 이미 서양(西陽)으로 기울고 있는데 여기서 우점사(楡岾寺)까지의 거리는 삼십 리(三十里)나 된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사오십 리(四五十里)라 해도 오히려 부족할 것만 같다.
금강산의 산길 삼십 리는 가히 평지(平地) 백 리(百里)에 버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류(下流)를 따라 내려가니 사자암(獅子岩)이 있고 사자암(獅子岩)을 지나서 백여 보(百餘步) 쯤 되는 곳에 이르니 얼음판(氷板)처럼 미끈한 층벽(層壁)의 평평한 큰 절벽에 석가모니 불상(釋迦牟尼佛像)이 새겨져 있는데 그 불상(佛像) 옆에는 천하기절급법기보살(天下奇絶及法起普薩) 열세 자(十三字)가 새겨져 있었다.
한 글자의 크기가 몇 아름이 되는 듯할 뿐 아니라 한 획(劃)의 길이도 거의 한자(一尺)가 넘을 듯하니 그 글자의 굉대(宏大) 장호(壯豪)함은 석가모니 불상(釋迦牟尼佛像)과 더불어 천하(天下)에서 보기 드문 기절(奇絶)을 이루고 있었다.
그 글씨는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씨의 휘호(揮毫)였다.
이곳에는 여덟 개의 못 즉 팔담(八潭)이 있는데 화룡담(火龍潭) 구담(龜潭) 선담(船潭) 비파담(琵琶潭) 진주담(眞珠潭) 분설담(噴雪潭) 위로 마치 칼로 자른 듯이 깎아지른 백 척(百尺) 암벽의 벽면(壁面)에 한 개의 굴(窟)이 뚫어져 있다.
이 굴을 보덕굴(普德窟)이라 부르는데 이 보덕굴(普德窟)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고구려(高句麗)의 안왕(安王) 때의 스님 보덕화상(普德和尙)께서 창건(創建)하였다는 부처를 모신 법당(法堂)이 있었다.
이 법당(法堂)은 삼면이 바위에 기대어 있고 한 쪽은 뿔처럼 뾰족하게 허공(虛空)으로 솟아 있는데 십여 길(十餘 丈)이 넘는 높이에 열아홉 마디로 이루어진 구리(銅)기둥이 이 굴과 높이를 같이 하여 버티고 있었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불법(佛法)을 일으킨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는 이 보덕굴(普德窟)에서 처음 나와 세상으로 나갔다고 한다.
조금 더 걸어가 보았더니 흑룡담(黑龍潭)과 영화담(暎花潭)이 있는데 이 두 개의 못(潭)이 팔담(八潭) 안에 들어가므로 팔담(八潭)은 모두 여덟 개의 못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담(八潭)을 지나는 길은 반석(盤石)으로 되어 평평하고 넓으며 수도 없이 많은 내(百川)가 계곡(溪谷)을 타고 흘러 와 이 곳에서 합하였으므로 곧 만폭동(萬瀑洞)이 되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평평한 돌과 바위에는 입추(立錐)의 틈새도 없이 모두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그 중에는 바둑판도 새겨져 그 줄 쳐진 흔적(痕跡)이 너무나 뚜렷하다.
다시 더 걸어 금강문(金剛門)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 금강문(金剛門)은 인마(人馬)가 넉넉히 드나들 만 한 크기의 문이었다.
표훈사(表訓寺)에 이르러 법당(法堂)을 둘러보던 중 놋쇠로 만든 솥(釜)을 구경하였다. 그 솥은 얼마나 큰 지 무게만도 오백 근이나 된다고 한다. 사찰(寺刹) 경내에는 구경하러 온 남녀 들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어 북적대고 있었는데 마침 경성에서 민영휘(閔泳徽)가 이 곳에 와서 치성(致誠)을 드리고 있는 중이라 한다.
이 사람은 상당한 권력(權力)이 있는 분이므로 사내(寺內)가 물 끓 듯 경외(敬畏)를 하고 있어 더욱 기관(奇觀)스러웠다. 들으니 구황제(舊皇帝)와 황비(皇妃)께서도 함께 금강산 구경을 왔다가 이 표훈사(表訓寺)에서 수십 일(數十日)을 머물며 반선(盤禪)을 한 다음 바로 어제(昨日) 환어(還御) 하였다 한다. 한 나라의 국왕(國王)으로 그 대위(大位)의 위의(威儀)를 갖추지 않고 어찌 이 같이 초솔(草率)할 수 있었단 말인가 싶은 생각이 드니 가히 놀라울 뿐만 아니라 기이(奇異)하여 오늘날 국권(國權)이 국축(鞠縮)을 하여 이 지경이 되었으니 이렇 듯 오무라든 국권(國權)을 언제 회복할 수 있을런지 기약(期約)할 수 없으니 통분(痛憤)하기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참으로 무애(無涯)한 심정(心情)을 억누를 길 없다.
윤(尹)씨 성의 여관에 투숙하였다.
오늘 걸은 이수(里數)는 모두 육십 리(六十里)였다.
4月 28日 경술(庚戌) 구름이 끼었다가 잠시 후 청명(淸明)하였다.
표훈사(表訓寺) 뒤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산정(山頂)에 이르니 조금 편편한 산 중턱에 정양사(正陽寺) 절이 있었다.
헐성루(歇惺樓)에 올라 헌함(軒檻) 앞에 서서 산세(山勢)를 구경하던 중 스님께서 가르키는 지휘표(指揮表)의 지선(持線)을 따라 바라보았더니 혹은 멀리 혹은 가까이 혹은 높이 혹은 낮게 금강산 일만이천봉(一萬二千峰)이 한 눈 속으로 소상하게 가득 차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비로봉(毘盧峰)은 울연(蔚然)히 깊고 빽빽한 모습으로 우거져 있었다.
김상국(金相國) 병기(炳冀)의 시에 차운하여 시 한 수를 읊었다.
<정양사 헐성루 병기씨 시에 차운하여>
누각이 있어 인간세상에서 멀리 벗어났어도
만이천봉이 돌아 눈 안에 있거니
루에 오른 이날에야 참 풍경 찾았으니
헐성의 높은 이름 태산북두처럼 우러르네.
만이천봉(萬二千峰) 금강산 경치를 이 곳 헐성루(歇惺樓)에서 한 눈으로 완상(玩賞)한 다음 다시 되돌아 내려 와 능파루(凌波樓)에 와서 다리를 조금 쉰 다음 약 일 마장(一里) 쯤 걸어가니 백화암(白華菴)이 있는데 암자 앞 큰 바위에 표훈동천(表訓洞天)이라 새겨져 있고 오십삼불상(五十三佛像)이 같이 새겨져 있었다.
보현암(普賢菴)으로 해서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상선루(祥仙樓)에 올라 조금 쉰 다음 개울물을 따라 얼마 아니(數無) 걸어가니 비석(碑石)이 서 있었다. 비석 내용을 살펴 보았더니 영국(英國)사람 부인(夫人)의 기념비(記念碑)였다. 말휘시(末輝市)에 이르러 여기서 오요(午饒)를 하였는데 마침 이 날은 학교 운동회(學校 運動會) 날이었다.
목여형(穆汝兄)과 금강교(金剛橋)에서 지팡이를 놓고 집으로 돌아갈 귀로(歸路) 결정을 서로 의논하였는데 목여형(穆汝兄)이 말하기를
“만약 영동(嶺東)으로 가서 배를 탄다면 배 삯도 적지 않을 뿐 더러 또 배멀미라도 난다면 매우 감당키 어려울 것이며 또 영서(嶺西)로 길을 정한다면 천 리(千里)나 되는 먼 길을 도보(徒步)로는 실로 어려울 터이니 곧 바로 평강역(平康驛)에 가서 경원선(京元線)을 타고 기차(汽車)로 동대문(東大門) 밖으로 가서 잠시 경성(京城 : 서울) 구경을 하고 가는게 내 생각 같아서는 좋을 듯 하고 비록 행자(行資)는 더 들겠지마는 오늘의 우리 걸음이 두 번 하기 어려운 기회가 아닌가”
하고 누누(累累)히 간청(懇請)을 하는 지라 나도 또한 생각해 보니 경성(京城)은 지난 날 한 번 본 일이 있고 비용(費用)이 더 드는 일은 친정(親庭)에서 바라는 의려지망(依閭之望)에 벗어나므로 미안한 일 일 뿐 아니라 또 여러 방인(傍人) 들이 보기에 불고가산(不顧家産) 하면서 먼 길을 덤벙 덤벙 구경이나 다닌다는 비방(誹謗)을 들을 우려도 없지 않을 것이나 한편 스스로 깊이 요량(要量)해 보니 설사 여러 가지가 다소 지나친다 하더라도 불과 삼사일(三四日)이며 비용도 이삼원(二三圓)의 돈이 더 소비 될 뿐이니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서쪽 길을 택하기로 걸정을 하여 사동면 신읍리(四東面新邑里)의 점(店)에 이르러 유숙(留宿)하였다.
이 날은 산길 유람 걸음이 십 리 가량이고 나머지 행로(行路)가 오십 리 가량되어 종일 걸은 이수가 육십 오리(六十五里)였다.
4月 29日 신해(辛亥) 맑다.
회양군 장양면(淮陽郡長楊面) 순갑리(順甲里)에 사는 백만기(白萬基)를 만나 같이 동행케 되었다.
그 사람은 인품(人品)이 매우 온자(溫藉)하여 길잡이에 매우 도움이 되는 좋은 벗이었다.
어느 산 고개에 올랐을 때 멀리 금강산(金剛山)을 되돌아보니 울연(㭗然)히 점점 멀어져 만 간다.
금강산 구경을 평생 소원처럼 해 왔었는데 열흘도 못 되는 인연으로 그치는 가 싶으니 마치 꿈 속으로 봄 꽃 산을 지나친 듯하여 마음에 연연(戀戀)하고 눈에 삼삼(森森)할 뿐이다.
지나는 길은 비록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으나 금강태산(金剛泰山) 아래에 있는 산세인데도 심히 험하거나 위태롭지 아니하니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십 리(五十里) 쯤을 걸어 신안점(新安店)에 이르러 이 곳에서 백만기(白萬基)형을 작별하고 서서히 걸어 얼마를 오니 많은 사람 들이 모여 술자리를 벌여 놓고 있었다.
이에 염치불고 하고 서로 이끌면서 그 집으로 들어갔더니 그 집 주인은 임씨(林氏)였는데 그 날이 마침 소상(小祥) 날이라 모인 사람 수도 많을 뿐 더러 매우 성찬(盛饌)으로 손님 대접을 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을 맞아 특별히 마음을 더하여 대접하는 주효상(酒肴床)을 받게 되니 그 성의(誠意)는 가상(可賞)하다 하겠으나 예의범절(禮義凡節)에 있어서는 눈에 서투른 곳이 많은 지라 이로서 북쪽 이 지방(地方)에 대한 풍속을 미루어 상상할 수가 있었다.
상(床)을 물리고 난 다음 곧 길을 떠나 수 십 리를 걸어 한 재(嶺)를 넘으니 금화군 경계(金化郡境界)였다. 다시 이십 리 쯤 더 걸었더니 날은 저물고 발은 마치 누에고치처럼 부르터서 억지로라도 더 걸으려 하여도 걸을 수가 없으므로 그만 투숙을 하게 되었는데 금화군 고금성 기오면 창도리(金化郡 故金城 岐梧面 昌道里) 김형오(金亨五)점이었다.
마침 이 날이 장날이었는데 시골의 촌 장터이기는 하였으나 영서(嶺西)의 무역 도회지(貿易都會地)답게 제법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가로이 객창에 기대어 있는데 목여형(穆汝兄)은 피곤하였던지 이내 잠이 들고 홀로 등불을 밝히고 앉아 생각해 보니 집을 떠난 지도 벌써 한 달이 가까워 오는 지라 생각이 자연 향수(鄕愁)에 젖어 든다. 또 집까지 가려면 갈 길은 아직 천리(千里)나 된다. 뚜렷한 명분도 없이 내친걸음이어서 그런지 집 생각이 간절해진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의 의려(依閭)의 고대(苦待)인 들 얼마나 크겠는 가 싶은 생각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불초한 죄책(罪責)이 겹쳐서 더욱 감내(堪耐)하기가 어렵다.
등불을 켜 놓은 채 잠이 들었는데 어느 새 동방(東方)이 밝은 줄도 몰랐다. 여기서 신읍리(新邑里)가 구십리(九十里)라 한다.
5月 초1日 임자(壬子) 맑음
사십 리 쯤 걸어서 탑구리(塔矩里)의 점(店)에서 오요(午饒)를 한 다음 또 십오리 쯤 걸어서 근북면(近北面) 성암리(城岩里)에서 조금 휴식을 하였다.
오늘은 더욱 몸이 피곤(疲困)할 뿐 아니라 마음조차 게을러져서 더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천 리나 떨어져 있는 객지가 아닌 가 가일층(加一層) 마음을 굳게 먹은 다음 한 개울을 건넜더니 곧 평강군(平康郡)의 경계였다.
주점에 들어가 다시 점심을 먹은 다음 평강읍(平康邑)에 이르러 정류장 옆에 있는 이필원(李弼媛)의 점에서 투숙하였는데 이 날 걸어온 행로(行路)는 구십 리(九十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