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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은 박정희 대통령 탄신일이었지.
1917년생이니 한일합방 7년 후에 태어났어.
40이 넘어 딸과 같이 임신 한 어머니는 낙태를 위해 간장을 한 사발 마시기도 하고 디딜 방아 밑에 드러눕기도 하는 등 태아를 떼기 위한 모든 일을 다 했다지.
뱃속에서 그 모진 민간요법들을 모두 견뎌냈으니 태아였을망정 남달랐다고 할까.
그 덕분에 얼굴이 까매졌다고도 하고.
아버지는 동학의 접주였는데 동학이 실패로 끝나자 상모동으로 돌아와 1600평 되는 남의 땅을 부쳤어.
너무나 가난해서 박정희가 진학 시험을 보러 가자 제발 떨어지길 빌었다지.
박정희는 지금도 역대 대통령 중, 아니 단군 이래의 위대한 지도자 중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지.
친일파다 OOO다 독재자다 등등 그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박정희는 우리 가슴 속에 영원한 대통령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그것은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을 설계하고 재단해서 오늘날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거야.
물론 하면 된다는 정신을 불어 넣었다는 큰 업적이 있지만 역시 정신만으로는 배고픔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그 무엇을 가장 많이 만들어 내고 창조해 냈다는 사실이 국민들 가슴에 깊이 각인된 거겠지.
박정희는 대한민국의 패러다임을 만들고 백년대계를 세웠어.
아직까지 아무도 박정희의 패러다임을 뛰어넘지도 부수지도 못했지.
뛰어넘기는커녕 이해조차 제대로 못했고 승계도 못했어.
박정희의 패러다임을 제대로 이해하고 계승했더라면 지금쯤 통일 과업을 완수하고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겠지.
박정희가 고속도로를 만들던 당시 양김을 비롯 김문수도 극빈국 대한민국에 왜 고속도로가 필요한 지 이해하지 못했지.
그때 벌써 박정희는 마이카 시대를 꿈꾸며 곧 고속도로 가득 자동차가 넘치게 된다는 걸 알았고 그 준비를 했던 거야.
정주영에게 조선소를 만들라고 하자 정주영은 현대 망한다면서 거부했지.
그러자 박정희는 현대가 정회장 꺼냐고 물었어.
할 말 없던 정주영은 조선소를 만들 수밖에 없었지.
포철 또한 당시로는 불가능한 역사였지.
군인 출신이었던 박태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어.
박태준 뒤에는 박정희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무엇보다 서울의 비대화를 내대보고 그린벨트를 만든 그 혜안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하지.
2차 대전 후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는 말은 박정희의 의지가 어떠했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거야.
박정희가 지나가는 길에 녹화가 안 된 맨땅이 보이면 안됐었어.
박정희가 지나간다는 소식만 들리면 군수들은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맨땅에 꽂았지.
그 후에 다시 나무를 심더라도 모가지 안 달아나려면 어쩔 수 없었어.
그런 노력과 의지 덕분에 대한민국은 유례없는 산림녹화 성공국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지.
조선 자동차 전자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등등 오늘날 우리가 영위하는 거의 모든 일류 제품의 설계와 추진이 박정희의 작품이었고 중화학 공업 거의 모든 업종에서 예외 없는 성공을 거뒀어.
세계는 그것을 한강의 기적이라 불렀지.
그도 그럴 것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일본의 산업구조를 따라간 나라가 한국이니까.
오늘날 조선이 일본을 추월하고 삼성전자의 순익이 일본의 상위 7개 전자업체의 이익을 모두 합한 것보다 두 배가 넘는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볼거야.
과연 박정희가 없었어도 이런 성과를 이룰 수 있었을까?
이룰 수 있었을거라고?
그럼 박정희가 어떤 준비를 했었고 그 과정이 어땠는지 단적인 예를 들어 주지.
우리에게 박정희 대신 마르코스가 있었더라도 과연 박정희가 꿈꾸던 이런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김문수가 이제야 박정희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데 김문수의 경우는 그래도 괜찮은 거야.
일부에서 아직도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김문수 같이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 데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려야 할까?
그걸 깨닫는 게 그들의 백년대계야.
일본 육사를 나왔음에도 일본을 추월할 수 있는 저력을 만들었고 한때 좌익활동을 했음에도 오늘날 북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국력을 만들 수 있는 기초를 다졌지.
6.25때 북한의 탱크에 맞서 수류탄을 던졌던 한국이 이제는 최고의 탱크를 수출하고 이지스 전함을 만드는 나라가 됐어.
박정희가 추구하던 자주국방의 결실이지.
박정희가 보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이렇듯 부국강병의 근저에 박정희가 있기 때문이지.
부국강병이야말로 보수가 추구하는 영원한 가치일 수밖에 없으니까.
박정희가 겪었던 그 무수한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누구보다 일본을 잘 알게 됐고 누구보다 공산주의의 맹점을 꿰뚫게 됐지.
국시를 반공으로 할 만큼 박정희는 반공의 최선봉에 섰고 극일의 핵심이 됐어.
그걸로 족한거야.
박정희는 자신의 꿈이 이루어 질 수만 있다면 사후 내 무덤에 침을 뱉으면 어떠냐하는 위대한 민족중흥의 꿈을 가졌었어.
과연 오늘 우리는 박정희의 그 위대한 꿈을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박정희는 그 당시에 벌써 KAIST를 만들고 ADD를 만들었어.
과학입국에 대한 그의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는데 과연 그런 기관들이 오늘날 우리의 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하루는 오원철이 밤늦게 ADD에 들렀어.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방이 있어 뭘 만드나 궁금해서 가봤지.
그 방에서는 어떤 연구원이 진공관을 가지고 씨름을 하고 있었어.
“뭘 만드십니까?”
“무전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총이나 박격포나 대포는 어떻게 만들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무전기 개발 은 워낙 어렵기 때문에 미국에서 가져다 쓰는 거다, 하고 모두 체념을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한 연구소에서 우리보다 앞서서 2년 동안인가 연구개발을 했는데 실패를 한 상태였던 거예요.
그러니 지레 무전기는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되는 거다, 하고 포기하고 있었지요.”
당시에는 소총을 만들 기술이 없었어.
그래서 총을 분해해서 치수를 쟀지.
그렇게 만든 설계도로 총을 만들었고.
그 소총으로 시범 사격을 해야 했는데 아무도 사격을 하려고 하지 않았어.
총열이 터지면 위험하니까.
그런 과정을 거쳐 박격포도 만들고 철모도 만들었어.
그럼에도 무전기만은 미군 무전기를 빌려다 썼지.
통신이란 개념이 전무했던 거야.
청계천에서 진공관을 구해서 조립해 보고 미군부대에서 IC를 구해 조립도 해 보다가 나중에는 반도체를 구해서 무전기를 만들었지.
시제품을 4대 만들었어.
이 연구원이 바로 ADD 창립멤버인 서정욱이야.
해병대가 포항에서 한미합동 훈련을 매년 했는데 서정욱은 포항까지 내려가 평소 알고 지내던 통신 장교인 이재규 중령을 만났어.
남몰래 무전기를 개발했는데 작동이 되는 지 야전에서 시험해줄 것을 요청했지.
이 중령은 2주 훈련을 마치고 싱글벙글거리며 서정욱을 찾아왔어.
다른 부대의 무전기가 몽땅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미군과 교신을 못했는데 그 무전기 덕분에 미군과 불편 없이 교신을 했다는 거야.
그 얘기가 정보계통을 통해 청와대까지 들어갔고 어느 날 대학 선배인 오원철 수석으로부터 전화가 왔어.
1972년 7월 2일이었지.
박 대통령이 그 무전기를 찾는다는 거야.
오원철의 지시대로 서정욱은 무전기 한 대를 청와대로 보내고 한 대는 사무실 책상 위에 켜놓은 채로 있었어.
무전기를 켜놓고 앉아 있는데 쏴아 하는 잡음이 없어지면서 경상도사람 목소리가 들렸지.
박대통령이었어.
박대통령은 격려를 하며 애로사항을 얘기하라고 했지.
서정욱은 기다렸다는 듯 그동안 쌓인 불만을 다 얘기했고.
그 이후로 통신·전자 분야에 대한 개발 지시가 떨어지고 연구개발비가 나오고 적극적인 지원이 시작됐어.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이 IT대국으로 우뚝 설수 있었던 출발점이었던 셈이야.
ADD가 없었고 박정희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핸드폰도 없었어.
본격적인 무전기개발이 시작되었고 미군이 쓰는 무전기보다 훌륭한 무전기가 완성되었지.
완성된 무전기를 가져 오자 서정욱은 무전기를 물속에 던져버렸어.
물이 줄줄 흐르는 무전기를 켜고 작동을 시키니 당연히 무전기는 먹통이지.
다시 만들어! 해서 다시 돌아온 무전기를 이번에는 내동댕이쳤어.
냉동실에도 넣고 깊은 물속에도 넣었지.
이렇게 해서 무전기 제조상의 기준이 정해졌는데 이게 오늘날 핸드폰의 FM이 된거야.
프랑스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삼성핸드폰으로 구조를 요청했었어.
물에 젖었는데도 통화가 되더라며 놀라워 했다지.
브라질의 한 장관이 삼성핸드폰을 떨어뜨렸는데 트럭이 뭉개고 지나갔어.
그런데도 액정만 금이 가고 통화가 되더라는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게 다 그때의 FM을 적용한 덕분이지.
무전기를 만든 서정욱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탱크나 차량의 무전기와 항공기의 무전기까지 개발했어.
이렇게 축적된 기술로 서정욱은 86년에 TDX(전자교환기)를 개발하지.
당시 인도와 브라질은 TDX개발에 실패했고 시장은 미국과 일본등 선진국이 독차지하고 있었어.
당시 한국으로서는 대단한 성과였지.
5공 최대의 업적으로 꼽히는 CDMA는 서정욱을 팀장으로 하는 12명 연구원들의 성과야.
그 중심에 서정욱이 있었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나라가 IT 강국이 된 게 아니야.
박정희 시절부터 꾸준한 연구와 투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지.
서정욱은 이렇게 말했어.
"거스 히딩크감독의 성공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대표팀의 역대 감독들이 한 역할이 히딩크 성공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겁니다.
동시에 우리 팀이 보여준 놀라운 체력도 국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강한 국력을 만들어 낸 기성세대의 피와 눈물과 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체력과 선전이 가능했습니다."
IT의 성공 뒤에는 박정희 시대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던 셈인데 세상은 그게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지.
세계 최초로 CDMA가 상용화되고 서정욱은 SKT의 초대 사장에 취임했어.
왜 사장이 됐는지 알만한 일이지.
그 후 한국의 핸드폰은 세계를 휩쓸게 되지.
과연 박정희가 없었어도 그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중화학공업의 성공으로만 알려져 있던 박정희 시대의 숨은 노력들이 오늘날 대한민국 최고의 대박상품이 된 셈이지.
박정희시대의 국방과학기술의 개가야.
인재를 키우고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인 국방과학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 한 일이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지배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오롯이 박정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어.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자동차를 페기하라고 하면 펄쩍 뛰겠지.
박정희 덕을 보면서 박정희를 비난하는 이율배반에 빠진거야.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 박정희는 후손들이 먹고 살 것을 마련해 줬지.
다음 세대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을까?
박정희는 단군 이래의 가난을 몰아내고 처음으로 우리 국민도 할 수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심어줬어.
대한민국 부국강병의 기틀을 세웠지.
그거 하나만으로도 박정희는 우리에게 영원한 대통령이야.
박정희를 비난하려거든 박정희를 뛰어넘어.
박정희 패러다임을 부수고 새로운 백년대계를 세운 후 그것을 실행해서 반드시 성공해야 해.
성공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왜냐고?
박정희는 성공했으니까.
박정희의 성공이 오늘을 있게 했으니까.
더구나 내일은 선진국이 될거라는 자신감을 갖게 했어.
이게 바로 박근혜가 말하는 아버지의 꿈의 의미야.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 질거야.
우리가 박정희를 기억하는 한.
첫댓글 좌익선동대가 아무리 박정희대통령을 폄훼한다해도 국민가슴속에 핀 영웅박정희의 업적은 무너뜨릴수 없을것입니다.
세계최고 빈곤국가에서 경제 12대국으로 이룩한 박정희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의 영웅입니다.
누가 영웅 박정희를 폄훼 하는가...그죄를 어찌하려고..
대한민국 역사에 불사신 박정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의 애국정신이 대한민국을 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