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손 이야기는 다른 사사들 이야기에서 나오는 사이클과 맞지 않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하나님이 심판하고, 이스라엘이 부르짖고, 그리고 사사를 세워서 구원하는 사이클입니다. 사시기 1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단지 이스라엘 자손이 악을 행한 것만 나옵니다.
충격적이고 놀라운 곳은 “부르짖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사 삼손에 이르렀을 때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자의식 자체가 없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삼손 이야기를 보면 집단으로 움직이지 않고 삼손만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움직입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 자손은 블레셋과 같이 사는 것에 불만이 없습니다, 하물며 이스라엘 자손들이 사사 삼손을 잡아서 블레셋 사람에게 넘겨줍니다.
삼손 이야기를 풀어가는 핵심 구절 중의 하나가 사사기 13:7절입니다. 즉, “그가 내려가서 그 여자와 말하니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입니다. “삼손의 눈에 들었더라”라는 말은 원어대로 직역하면 “삼손의 눈에 옳게 여겼다 ”입니다. 이는 사사기 17:6, 21:25절의 “사람이 각각 자기 눈(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와 같은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마음대로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사기 14:4절을 보면 “그때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삼손이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라고 말씀합니다. 원어를 보면 “삼손”이란 말이 없습니다. “그가 틈을 타서”입니다. “그”는 “여호와”입니다. 하나님이 삼손을 통해 블레셋 사람을 치려고 틈을 보신 것입니다.
삼손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길과 삼손의 길이 평행을 이룹니다. 삼손은 원하는 대로, 자신 의지대로 갑니다. 자유로운 영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삼손을 이용해서 그의 일을 행하십니다.
사사기 13:24~25절을 원어로 보면 “여호와의 신이 감동하시니라”입니다. “감동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파암”으로서 “몰아내다, 치다, 재촉하다, 압박하다”의 의미입니다. 성령이 삼손을 압박하여 그의 생애를 이끌어 갑니다.
삼손 이야기를 보면, 삼손이 블레셋을 “치다”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치다”라는 말은 “전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틈을 보시고, 그 틈을 이용하여서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 16:21절을 보면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잡히어 눈이 뽑힙니다. 이는 전투력 상실을 의미합니다. 딤나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때 보았던 것처럼, 삼손은 “눈에 보기에 좋았더라”, 즉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는데, 그 결과로 그 눈이 뽑힙니다. 이것은 삼손에게 내리신 하나님의 첫 번째 심판입니다.
민수기 6장을 보면 포도주나 독주를 금하고,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으며, 그리고 죽은 시체에 가까이하지 않는 나실인 규정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삼손 이야기를 보면 “머리 털”의 중요성이 부각됩니다. 왜 그럴까요? 나실인 맹세가 깨지면 머리털을 밀고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나실인 리셋으로서 머리털이 결정적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봐주는 것입니다. 포도주 마시는 것 하나님이 봐주십니다. 머리털을 밀면 하나님의 힘이 떠납니다. 하지만 머리털이 자라면 하나님이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삼손에게 머리털이 자람을 통해 힘이 생기도록 한 것은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기 위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삼손이 죽습니다. 삼손의 죽음은 자살이 아닙니다.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이 전투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승리하고, 삼손은 죽습니다. 다곤 신이 무너짐으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승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삼손의 죽음을 자살이 아닌 전사로서 장렬한 죽음으로 만드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완전히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구원받지 못합니다. 블레셋으로부터 구원이 완성되지 못합니다. 블레셋은 다윗까지 갔을 때, 거기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삼손은 구원의 완성을 못 이룬 유일한 사사가 됩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같이 가는 것이 중요한데,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는 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다르게 가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태입니다.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하나님이 블레셋을 들어 심판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이스라엘 자손이 부르짖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이 없습니다. 블레셋과 함께 지내는 편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죽은 상태로 방치하지 않습니다. 삼손을 통하여 틈을 보시고, 그 삼손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블레셋을 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싸울 의지도, 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워서 계속 싸워나가게 합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한 사람, 즉 삼손을 사용하여서 살아있을 때 죽인 숫자보다 더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이십니다.
사사기 16:28절을 보면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라고 말씀합니다. 삼손의 기도는 건강한 기도는 아닙니다. 자기 원수를 갚아 달라는 보복의 기도입니다. 이기적인 기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향해 부르짖는 것만으로도 중요하게 생각하여서, 그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었고, 나실인으로 자랐습니다. 삼손이 불임 여성에게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이 아닌 아내에게 천사가 찾아와 수태고지를 합니다. 수태고지를 할 때 민족을 구원해 낼 자라는 말을 받습니다. 삼손은 사자를 쓰러뜨렸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배신당하였는데, 그 삯으로 은돈을 받습니다. 삼손은 죽기 직전 눈이 멀고, 모욕당하고, 노예의 처지가 됩니다. 삼손은 악한들 가운데서 죽습니다. 그리고 자기 죽음을 통하여 다곤 신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삶을 보면, 예수님 역시 나실인이십니다.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납니다. 예수님도 천사를 통하여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내용을 듣습니다. 예수는 사탄을 쓰러뜨렸는데, 베드로전서에서는 사탄을 “울며 돌아다니는 사자”에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게 배신당했는데, 그 삯으로 은돈을 받습니다. 예수는 죽기 직전 마찬가지로 모욕당하고, 노예와 같이 다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했습니다.
삼손은 죽었지만, 이스라엘 자손을 완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데는 실패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음으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단 한 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탄으로부터, 원수로부터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여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에 대한 자의식을 온전히 갖고 부르짖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의 방법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저와 여러분에게 은총으로 허락하여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