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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金佐鎭 (1889 ~ 1930)】 "북로군정서사령관으로 청산리 독립대첩"
(음)1889년 11월 24일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기에는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4년 뜻한 바 있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에 남아 있는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그 직후 일제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자행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구국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한성연회(漢城聯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 양위 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하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설립하고 각 지방 학회를 설립하여 대응하였다. 이때 대한협회 지부를 홍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성지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지방의 구국교육운동을 선도하였다. 1908년 자택을 교사로 제공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 운영 경비로 충당하게 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군 무장 항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부터 안승구(安承龜)·민병옥(閔丙玉)·조형원(趙亨元)·남정면(南廷冕)·이영렬·박종원(朴鍾元) 등과 직접 자금모집에 나섰다.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서울에서 붙잡혀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 생활 중 백범 김구(金九)와의 만남은 항일 투쟁을 위한 새로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13년 출감 후 고향에서 정양을 취하던 중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창설하자 이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광복회 일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7년 3월 이기필(李起弼)·감익룡(甘翼龍)·신효범(申孝範) 등 7명과 함께 붙잡혔다. 이기필·감익룡·신효범은 기소되었고, 최익환(崔益煥) 등 4명과 함께 면소 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곧바로 위조화폐를 발행하여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일본 경찰이 단서를 잡고 추적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서(大韓獨立書)」를 발표할 때, 서일(徐一)·여준(呂準) 등 38명과 함께 서명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한독립서」는 국내 독립선언서보다 몇 주 앞서 공표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 직후 대종교측에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창설하자 총재 서일의 요청을 받고 대한정의단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서일 등 대종교 신도들은 만주에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가 만세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강화를 위해 유교 신도단체 공교회(孔敎會)와 합작하여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북간도 각지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 개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순한글 신문인 『민보(民報)』 와 『신국보(新國報)』 를 발행하였다.
또한 독립군 편성 준비로 극비리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1,037명의 청년자원자를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 장정과 군자금 준비가 갖추어지자 1919년 8월 독립군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실제로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가 절박하게 대두되자, 대한정의단은 이 과제를 신민회 계통 무관을 초빙하여 해결하였다. 이때 조성환(曺成煥)·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초빙되어 1919년 8월부터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장정들의 군사 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들이었던 반면에 공교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군주제(君主制)를 지지하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이었기 때문에 공교회 계통의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탈하였다. 김성극(金星極) 등은 복벽파의 독립군 단체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새로 조직하고, 이규(李珪)·강수희(姜受禧) 등은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를 조직하였다.
1919년 10월 서일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玄天黙)이었고,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즉 대한군정부의 독립군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창설 지휘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성립과 동시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성립을 보고하고, 산하 군사기관으로서의 공인을 신청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로서,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명칭 변경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대한군정부도 ‘정부’(政府)의 이름을 갖게 되면 임시정부의 ‘정부’와 혼동되어 마치 동격의 2개 정부가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무렵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중심이 되어 편성한 독립군 단체에게 이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는 명칭을 보내었으므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는 이와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지어 애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는 ‘대한군정서’라는 공식명칭보다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 사령관을 맡자 곧바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 편성작업 시작과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김훈(金勳) 등 다수 훈련 장교들 및 각종 교재를 공급받았다.
1920년 3월 초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 떨어진 삼림지대 안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겸임하였다. 약 500명의 장정을 뽑아 독립군을 창설하고, 뒤이어 다시 6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병력을 보충했으며, 나머지 장정들은 대기하면서 경호 병력이 되게 하였다. 입대한 병사들에게 사격술과 총검술을 비롯한 총기사용 훈련과 학과훈련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현재 사관연성소에서 훈련을 끝낸 독립군 사병이 약 600명이었고, 장래 독립군 사관이 되기 위하여 상등병의 견장을 붙이고 철저한 군사 훈련과 전략전술을 교육받고 있는 사관생도가 약 300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사관연성소에서 철저한 군사 훈련교육을 받은 연성대(硏成隊)를 가졌으며, 대종교의 군자금 조달로 무기를 잘 공급하여 독립군 부대들 중에서 무장이 가장 잘 갖추어진 부대였다. 대체로 독립군 부대들의 무기는 소총이었으며, 기관총을 1정이라도 갖춘 부대는 드물었다. 이에 비하여 북로군정서는 중무기에도 큰 비중을 두어 기관총과 함께 야포도 구입하였다.
일제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독립군에게 대패하자,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토벌’하려 함과 동시에 8월에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워 일본군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중국군이 출동하게 되자, 멍푸더(孟富德)의 중국군측과 한국 독립군측은 일본측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지린성(吉林省)의 옌지현(延吉縣)·훈춘현(琿春縣)·왕칭현(汪淸縣)·허룽현(和龍縣)의 4현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명월구(明月溝)에 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 제일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國民會軍)·의군부(義軍部)·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 등도 이도구로 이동하였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독립군은 북방 이동하여 9월 말경 나자구(羅子溝)에 도착하였다. 왕칭현 서대파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1920년 9월 17일~18일에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여 1920년 10월 12일~13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한국 독립군 ‘토벌’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간도불령선인 초토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출병’해서 독립군 ‘진압’ 작전을 시작하였다. 일제가 간도침입에 동원한 일본군 병력은 나남(羅南)의 제19사단 전부와 용산(龍山)의 제20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 및 기타 보조 병력을 차출 첨가하고, 시베리아 주둔 11사단·13사단·14사단의 일부를 차출하여 모두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측면 지원으로 관동군 일부와 비행기까지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이 거대한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이중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 작전 목표는 제1단계에서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반복 ‘토벌’해서 독립군을 전원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민간인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독립군 무장운동은 물론 비무장 독립운동까지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 목표에 따라 아즈마(東)지대가 10월 15일 용정(龍井)에 도착한 후 10월 18일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와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일본군 아즈마지대는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000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여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일본군 선발대 야마다보병연대(山田步兵聯隊)가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에 진입하자 백운평(白雲坪) 부근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선발부대를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백운평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부터 청산리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 전투에서 대승한 후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여 주둔했을 때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泉水坪)(샘물골) 마을에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작전회의를 열고 천수평의 일본 기병대를 먼저 기습 섬멸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10월 22일 새벽 5시 30분경 이범석 지휘의 연성대가 앞장서서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4명은 탈출하고 나머지 일본군 기병 제27연대 소속 전초기병중대 116명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북로군정서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으로 경미하였다. 이것이 일본군 1개 기병중대를 섬멸한 대승리의 ‘천수평전투’였다.
뒤이어 ‘어랑촌(漁郞村)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 874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에, 10월 22일 오전 9시 일본군도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왔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6배가 넘는 우세한 병력과 화력만 믿고 고지 독립군을 아래에서 포위하여 오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우세한 화력으로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고지 아래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만 낸 채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당황망조(唐慌罔措)하여 결국 패퇴하였다.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기병연대장 가노(加納) 대좌를 비롯해서 30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한편 독립군측도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도 결국 독립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인 10월 23일부터 소부대를 편성해서 서북방으로 이동하면서 일본군 부대들과 조우할 때마다 소규모 전투로서 ‘맹개골(萬麒溝)전투’ ‘쉬구(溝)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9일경에 안투현 황구령촌(黃口嶺村)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들과 합류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북방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의 결과를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가 1,200여 명”이라고 하여,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00여 명으로 계산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임시정부에 제출한 정식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이며, 부상자가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중국의 『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2,000명으로 추정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주력이 되어 승리한 ‘청산리독립전쟁’은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수립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과 작전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일본군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에서 무장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 비무장 독립운동세력까지 뿌리 뽑아 한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었는데, 일제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1단계에서조차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하여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독립군 부대들의 ‘청산리독립전쟁’ 대승리는 만주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까지도 보위했으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투쟁을 한층 더 고양시켜 주었다.
1920년 12월 미산에 집합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여기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 등의 요청과 안내를 받아 다른 독립부대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 노령(露領)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무기 공급을 받아 대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1921년 3월 이만에서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국민회군·의군부·군무도독부·혈성단 등 만주에서 건너온 독립군 부대들과 청룡대·사하린부대(박일리아 부대)·이만부대(박그레고리 부대) 등을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 후에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다.
이 통합독립군은 약 3,000명의 병력으로서 총재 서일과 부총재 김좌진·홍범도 등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통합독립군이 대작전을 전개하기 전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1921년 3월 긴급하게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 오하묵(吳夏黙)을 임명한 후 통합독립군을 그 산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이때 소련군의 독립군 지휘를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왔다. 그 직후 1921년 6월 박일리아부대(사하린부대) 등이 고려혁명군정회의에의 편입에 거부 반응을 보이자 갈란다라시윌린 등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부대 등을 공격케 함으로써 독립군은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참혹한 희생을 내었다. 이것이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북만주에 돌아오자 다시 독립군 재건에 진력하였다. 1925년 3월 닝안현(寧安縣)에서 호응하는 이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 김혁(金赫)·조성환·정신(鄭信)·남성극(南星極)·박두희(朴斗熙)·최호(崔灝)·유현(劉賢)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 맡았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아 즉시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장정들을 모집해서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졸업생이 500여 명에 달하자 약 530명의 병력으로 신민부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는 만주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만주에서의 한국인 무장활동을 만주군벌이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1928년 1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서 다수 간부를 체포하였다. 신민부는 타격을 입고, 독립운동은 독립군 군사 활동보다는 교육·민생 활동에 역점을 두자는 최호 등의 ‘민정파’가 대두하였다.
이에 신민부를 재건하여 직접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고 독립군 활동 중심의 신민부(군정파)를 운영하였다.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 군량과 경비조달을 보조하도록 하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국내에 강(姜)모 요원 등을 파견하여 조선총독부 기습작전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신민부 통치하의 북만주 일대 동포들에게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반드시 1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밖에 노동강습소를 설립하여 일반교육과 함께 독립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신민부(군정파)는 1928년 2월 3일 닝안현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그 해 12월에는 남만주의 참의부 간부들과 함께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일시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통 단체들과 공산주의 계통 단체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비밀결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는 한편, 동년 7월에는 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 등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세력도 포섭하여 북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창립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주석으로서 농촌 자치조직을 강조하고, 동포들의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 1929년 10월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 운영하는 등 실업운동을 실행하였다. 또한 북만동포의 중등교육을 위한 북만중학(北滿中學) 설립을 추진하여 토지를 확보하였다. 한족총연합회 사업 활동의 하나인 산시참 정미소 사업격려 도중에 노령 고려공산당 산하 재중공산청년동맹에서 파견한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1930년 1월 24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겠다고 간도에 침입해 들어온 5개 사단 차출 2만 5,000명 병력의 막강한 일본군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의 적은 병력으로도 탁월한 작전과 과감한 기습 선제공격으로 참패시켜 독립군의 대승리를 쟁취해서 한국독립운동을 보위한 무장독립운동의 영원불멸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빈주 사건과 대한독립전쟁사의 영웅 「김좌진장군 암살」
빈주 사건과 김좌진장군암살
마왕 김좌진 장군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폐위되고 순종이 즉위하자 조선 전역에서 수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일본은 의병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그래서 고국에서 일본에 저항할 수 없게 된 의병들이 만주 간도 지방으로 갔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농민들이 19세기 말엽부터 이주해서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의병활동을 하던 무인들이 간도에서 조선인을 모아 군대를 조직할 수 있었고, 식량 등 군수 물자 등을 마련하기가 용이했다.
간도는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독립군이 일단 국경을 넘으면 일본군이 추격할 수 없었다. 추격해서 일본군이 만주에 들어와도 독립군은 지리에 익숙했던 반면에 일본군은 지리에 어두어 독립군에 항상 유리했다.
망명 조선사람들은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대한독립단,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북간도에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대한독립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조선 밖에서 군대를 훈련시켜 조선안으로 들어가서 일본군대와 싸워 나라를 되 찾을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3.1운동을 계기로 선포한 상해 임시정부는 외교와 무저항을 원칙으로 하는 독립운동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을 보고 1919년 말부터 무장투쟁으로 선회하기 시작하여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무장투쟁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홍범도도 1919년12월에 군대를 조직했다. 1920년 봄, 상해 임시정부 동로 사령관 이용, 대한군무도독부 최진동, 대한국민회 안무 그리고 홍범도가 모여 상해임정의 요구에 따라 북간도 무장투쟁 단체를 하나로 통합했다. 이를 대한독립군이라고 하고 홍범도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3월1일부터 6월 초까지 무려 34회에 걸쳐서 대한독립군은 국경을 넘어 일본관서와 파출소등을 공격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국경을 넘어 중국영토 안으로 독립군을 추격할 수가 없었다.
대한군무도독부 최진동은 홍범도 보다 조금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 3 형제가 봉오동 골짜기의 방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10 키로에 달하는 골짜기는 물이 흘러서 농토가 많이 있고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가 힘들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모두 조선 사람이었다. 따라서 중국 당국의 간섭이 없었다. 독립군 훈련, 독립운동의 근거지, 한국인이 집결할 수 있는 입지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최 씨 삼형제는 이곳에 생필품 공장도 가지고 있어서, 무기 구입을 위한 막대한 군자금도 어렵지 않게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실상의 군의 지휘는 최진동이 맡았다.
독립군의 무기는 귀국하는 체코군단으로부터 구입했다. 일차대전중 현재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나라가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었다. 독립을 원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징집되어 나라를 빼앗아간 오스트리아 -헝가리 군대에 소속되어 연합군 편이었던 러시아와 싸웠다. 그들은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그리고 러시아군 안에서 자체적인 군단을 만들어서 자기 민족을 억압하던 오스트리아-항거리군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런데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고 볼세비키가 집권 한 후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정전 협정을 맺어 버렸다. 러시아군에 속해 있던 체코군단은 서쪽에 있는 유롭의 연합국으로 가야 했으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을 통과해야 했다. 그들이 고국으로 안전하게 돌아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한없이 가는 수밖에 없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타고 동쪽 끝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당시 러시아는 적군과 백군이 싸우는 내전 중이었다. 그들의 동행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를 점령하고 배편을 마련하여 유럽으로 돌아 갔다. 65000 명이 넘는 병력이었다. 이 때 대한독립군은 이 들로 부터 무기를 구입했다. (참고: 거꾸로 읽는 러시아 혁명사 1, 체코 군단, 피바다 뚫고 시베리아 횡단; 중앙일보 채인택 기자 2017.11.01)
일본조선주둔군 사령관 우수미아 다로는 독립군 안 밖에 수많은 밀정을 심어 놓아 독립군 내의 정보를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1920년 8월 일본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독립군은 체코군단으로 부터 군총(소총) 약900정, 권총 약 200정, 기관총 2문, 폭탄 100개, 망원경 7개, 탄환 1정당 150발을 구입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구입한 무기를 북간도로 운반해야 했다. 무려 200 키로의 험난한 길을 도보로 운반했다. 지리적으로 험악할 뿐만 아니라, 일본군, 경찰, 헌병의 감시를 피해야 했고 중국군과 마적 때의 눈을 피해야 했다. 기차나 자동차로 운반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무기운반에 많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3개의 부대로 나누어 도보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등에 지거나 지게에 무기를 싫고 한달이 넘어서 무사히 북간도로 돌아왔다.
거의 완벽한 무장군대가 된 독립군은 두만강을 건너 국내 일본군 초소등을 거의 매일 공격하고 국경을 넘어 도망 치는 작전을 수행했다.
1920년6월4일독립군 30여명이 중국 쪽에 위치한 길림성 삼둔자 마을에서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 강양동에 있는 일본 헌병초소를 습격했다. 일본군이 그냥 참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본군 남양 수비대가 국경을 넘어 독립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지리에 어두운 일본군은 이미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게 괴멸되었다. 독립군의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판단한 일본군은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계획했다. 나남 19사단은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1920년6월7일 봉오동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대회전이 벌어졌다.
지형에 밝은 독립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매복해 있다가 골짜기를 따라 들어오는 일본군을 공격했다. 독립군의 완승이었다. 1920년 6월 27일자 상해 신보는 일본군 전사자는 150명이었고, 소총 160정, 기관총 3문, 수류탄을 노획했다고 보도했다.
조선사람들에게는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지만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오합지졸이 아니고 상당한 전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경각심을 일으켜 주었다. 간도 조선사람들의 독립에 대 한 희망이 고양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당국을 긴장하게 했다.
자주 일어나는 진공작전으로 일본군의 피해가 심각해지자, 조선주둔 일본군은 만주의 중국군벌에게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하라고 요구했다. 중국군 지휘관 맹부덕이 김좌진을 방문했다.
그는 독립군을 무장해제 시키지 않고 조용히 부대를 이동시켜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이동 하라고 충고했다. 김좌진은 일단 시간을 달라고 하여 그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김좌진은 더욱 산속 깊숙한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중국군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일본외교 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1920년6월15일자로 된 기록에는” 일본군은 간도파견 정보원으로부터 독립군 각 단체가 활발한 전투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같은 문서 1920년7월21일 기록은 “간도 *불령선인단의 위력은 더욱 강대 해져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군련 군자와 무력충실에 노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 국경의 습격 등을 기회를 타서 감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고 적고 있다. (*일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조선 단체 즉 독립군을 의미)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부는 독립군뿐만 아니라 독립군에 전적으로 협조하는 간도 조선인 주민들까지 토벌 대상으로 삼았다. 독립군은 병력, 노동, 식량 기타 군수 물자를 사실상 주민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1920년8월 조선주둔 일본군은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했다. 1920년 10월부터 1921년 초까지 계속된 토벌 작전이었다. 조선주둔 일본군, 시베리아 주둔 일본군, 일본관동군 도합2,3만의 병력이 연변지역을 포위했다. 이중 북간도 독립군을 직접 공격한 병력은 5,000에 달했다. 일본군의 공격 대상은 독립군뿐만 아니라 양민 학살도 서슴지 않았다. 독립군을 돕고 있던 조선인 사회를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일본 외교 사료관문서는 그때의 일본군 조선부락 공격의 상황을 “우리 부대는 이 부락을 습격하여 가옥 40여호를 소각하고 광복단 교관 및 제2대장 외교부장 및 동부원 3명 아울러 구장, 부구장, 광복단, 병졸 등 10여명을 독가스를 사용하여 살육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시기에 수천명의 간도지역 한인이 학살되었다.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사실은 치를 떨게 한다.
1920년10월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이 습격 당했다. 영사관은 불타고 일본인 거류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일본 당국은 마적단 속에 불령선인과 러시아 과격파가 포함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강을 넘어 중국영토에 군대가 들어가 조선인들을 토벌할 구실을 찾기 위한 일본이 꾸민 사건이었다. 일본군은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왔다.
독립군은 2만여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피해서 백두산 동남쪽에 있는 청산리 골짜기로 이동했다. 2000여멍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청산리는 통상적인 작은 마을이 아니었다. 좌우 몇 십 키로 가 넘는 넓은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과 병력 등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독립군은 이곳의 지형에 밝았다.
한편 일본군은 독립군의 이동과 병력의 규모를 첩보대와 밀정을 통해서 실시간 수준으로 보고 받고 있었다. 청산리에 독립군의 80%가 모여 있다는 정보를 안 일본군은 10월21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골짜기 양쪽 끝으로 진입하여 독립군을 포위하려 했다. 독립군은 일본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 위 등의 고지에 잠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렸다. 이것을 모르고 골자기를 따라 들어오는 일본군을 독립군은 가차 없이 사살했다. 전투는 6일동안 계속되었다. 홍범도, 김좌진, 최진동이 독립군의 주력 부대였다.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그러나 이들 승전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참고: 국방 TV; 봉오동, 청산리 전투 100주년 특집]
1920년10월2일 중국 마적단 일본영사관 방화 사건을 빌미로 만주에 들어온 일본군 3개 사단은 청산리 지역의 독립군 토벌 작전을 하는 동안 간도 조선인들을 학살하고 조선인 마을을 불태우고 재산과 식량을 약탈했다. 10월9일에서 11월5일까지 27일 동안 만의 학살된 조선인은 3,469명이라고 한다. 일본당국의 조선간도 불령선인초토계획이 1921년초까지 계속되었고 연해주에서 똑 같은 작전을 했기 때문에 아마 학살된 조선인은 수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인 학살이 일본의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이라고 대부분의 역사 자료에 기술되어 있는 데, 조선인 학살이 전투와 병행된 것으로 보아서 간도 조선인들이 독립군에게 식량, 군수물자, 정보 등을 제공했기 때문에 근거지를 없애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고 생각 한다.
일본은 중국에게 압력을 넣어 조선독립군 토벌을 요구했다. 그동안 만주에서 중국군의 도움으로 비교적 아무런 제한 없이 활동하던 독립군은 만주의 주인 중국당국의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추격 또한 끈질겼다. 조선인과 조선인 마을이라는 근거지가 없어졌다.
만주에서 활동하기 어려워진 독립군은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했다. 볼세비키의 도움을 받아 일본군과 싸우기 위해서 였다. 당시에 레닌은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원조를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 한 바 있다. 자유시는 고유명사 스보보드니(자유로운)의 번역이다. 당시 러시아는 내전 중이었다. 볼세비키 공산당 군대를 적군이라고 하고 보수 우파 군대를 백군이라고 했다. 일본,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은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일본은 적군의 적이었고 독립군 또한 일본이 주적이었다.
자유시에 있는 적군은 독립군을 적군에 포함시켜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하려고 했다. 러시아 안에 조선공산당이 있었고 이들 또한 일본과 무장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파와 상하이 파로 갈라져 있었다.
10여개의 독립군단은 자유시로 들어오자 소련당국은 공산당을 위해서 싸워달라고 요구했다. 이를 거절하자 독립군을 2중 3중으로 포위하고 무장 해제를 시켰다. 이 기미를 미리 알아차린 김좌진은 이만에서 만주로 되돌아 갔다.
이르쿠츠파 고려 공산당과 상하이파 고려 공산당은 독립군의 통수권을 두고 서로 경쟁했다. 독립군은 일단 상하이파에 들어가 있었다. 이때 이르쿠츠파 공산당이 코민테른의 협조를 얻어 상하이파의 무장해제를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적군과 이르쿠츠파 공산당은 무력으로 상하이파 공산당을 공격하여 제압했다. 이 와중에 독립군 36명이 사망했고 970명이 포로가 되어 볼세비키 혁명군에 편입되었다. 홍범도와 지청천도 적군에 소속되었다.
만주로 돌아간 김좌진은 어떻게 되었을 까? 1925년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이범윤등과 함께 신민부를 창설하고 무장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본의 탄압으로 간도조선인들의 협조가 청산리전투 이전 같지 않았다. 자금, 식량, 군수, 병력 등을 그들에게 의존해왔던 그로서는 난처한 입장이었다.
김좌진은 대한독립군총사령관으로서 발표한 부령 제11호 5조와 6조는 조선주민에 대한 병역의무와 세금납세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제5조 본군단에 있어서 징모 한 병사로서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제6조 군에서 청한 자금납부를 거절하는 자는 중벌에 처한다.
간도주민들은 신민부에 의무금을 납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작인이어서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주고 나머지에서 중국정부에 세금을 납부하고 신민부에 또 의무금을 낼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김좌진은 강제로 군자금을 징수해 갔다. 이에 대해서 조선동포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얼빈 근처에 빈주현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1928년 10월20일, 이곳 조선사람들이 신민부에게 의무금 납부를 거부하고 신민부 보안대가 와서 강요할 경우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포착한 신민주 보안대원들이 회의장을 습격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회의 개최자 황혁 등 사상자 4-50명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주민들은 11월 하순 영안현에서 최경환 등의 주도로 북만주 주민대회를 개최했다. 6개현 16지역에서 한인들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김좌진의 죄악을 열거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본국에 보낸 1930년 2월27일자 보고서에는 빈주사건피해자 유족들이 재중청년동맹과 함께 김좌진살해를 계속 계획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키피디아; 빈주사건)
2007년10월 월간조선은 “김좌진장군은 하얼빈 산시창에 있는 한족총연합회가 운영하는 정미소에서 1930년1월24일, 고려공산청년회일원이며 재중한인청년동맹원인 김신준에게 총격 피살됐다”는 하얼빈총영사관 경찰서장의 보고서를 보도했다. 빈주사건 유족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 신민부와 대립하고 있던 고려공산당을 끌어들여 김좌진을 살해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본다. 한족총연합회는 1928년 12월에 해체된 신민부를 김좌진이 무정부주의자들을 끌어들여 만든 단체이기 때문에 그 정미소는 김좌진이 운영했다고 할 수 있다.
김신준은 사건발생 1년전부터 이 정미소에서 일했다. 일요일이었던 그날 김좌진장군을 경호하던 청년들이 고강산 경호대장과 함께 철둑 넘어 술집으로 가고 없었다. 이때 마침 김좌진이 정미소를 둘러보러 왔다. 김신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정미소를 둘러보는 김좌진에게 권총 두발을 발사했다. 중국군경과 청년대원들이 그를 추적했으나 놓치고 말았다. 배후 지시자 김봉환은 곧 체포되어 독립운동 단체에 의해서 총살되었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은 김좌진의 암살범을 박상실이라고 하고 박상실과 김신준이 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나 그 증거는 아직 없다. (월간조선 2007년10월호)
김좌진 장군은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김좌진의 신민부는 간도조선인주민들에게 일종의 군사정부 노릇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의 군벌과 흡사한 방법으로 주민들로 부터 독립자금이라는 명목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무장 항일에 참여하게 했다. 더 나아가서 나라를 위해서 싸운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자신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식의 요구를 주민들에게 했다. 주민들 중에는 독립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먹고 살기에 바쁜 마당에 나라의 독립이나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는 의도가 없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신민부의 보안대는 세금을 내지 않거나 협조를 거절하면 집에 나타나서 협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포악한 행패는 김좌진장군에게 마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했다.
김좌진장군은 간도조선주민들의 원성을 샀고 고려공산당의 적이었다. 빈주사건으로 살해된 조선인들의 유족이 고려공산청년회와 협의하여 김좌진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과 공산주의자들을 혐오하는 한국사람들은 일본이 공산주의자들을 사주하여 김좌진을 암살했다고 이 사건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앞뒤를 잘 살펴보면 일본당국이 구태여 고려공산청년회를 꼬드길 필요가 없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조선인들끼리 골치거리를 해결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 다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첫댓글 김좌진 장군은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가 강제로 해산된 이후,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에게 가문의 땅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소련영토인 ‘자유시’에서 독립군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학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반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게 된 이 후 반공산주의적 성향의 독립운동을 하였지만, 이에 불만을 품은 공산주의자 박상실 에 의해 만주 해림에서 1930년 암살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산리 대첩 이후 장군은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다행히 소련령 '자유시' 에는 가지 않았기에,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자유시 참변'으로 억울하게 죽은 옛 전우(봉오동 전투)들을 보며 ‘반 공산주의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김좌진 장군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하면서, 1925년 신민부 와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반일 독립운동을 했는데 무장 독립운동을 위해ㆍ자금을 모집하는 길은 험난했다
그의 마흔 살 죽음은 공산주의자들을 배제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의 미움을 받았고, 이에 ‘박상실’에 의해 만주 해림 에서 1930년 41살의 나이로 암살을 당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대한민국 내 통설이다.
사실 한국에서의 호평에 비해, 연변의 조선족들은 ‘김좌진 장군’에 대한 평이 그다지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일본 측 문서에는 ‘빈주 사건에 대한 보복’이 김좌진 장군 암살의 원인이라고 분석했다.(이는 공산당 측의 의견도 동일하다) ‘빈주사건’이란 만주의 빈주현에 거주한 우리 동포들을, 일본군도 아닌 김좌진 장군계 군인들이 학살한 사건 이다.
당시 만주 한국인 동포들은 대부분 ‘중국인의 소작인’ 신세 인지라 지독하게 빈곤 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좌진 장군의 부대 는 동포들의 '궁핍한 사정'을 고려 하지 않고 '독립 운동 자금 모금을 강제 했었다고 한다. 결국 만주의 빈주현 에 거주하던 동포들은 김좌진 부대의 독립자금 강제징수’에 분노하여 신민부 를 탈퇴을 선언하는 지경에 까지 이른다. 이후 김좌진 장군은 사람들에게 마왕(魔王)ㆍ폭군 같은 별명까지 얻었고, 결국 신민부는 해체되게 된다. 그렇게 김좌진 장군은 일본과의 ‘무력투쟁’을 위해 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부작용도 일으켜서 많은 사람들의 앙심을 품게 만들었던 듯 보인다. 일반동포들은 표면적으로는 독립운동 단체라고 존경하는 척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김좌진 장군은 심지어 이 일로 사형을 구형 받는 지경에 처한다. 독립운동자금을 모집에 협조를 하지 않으면 ‘협박과 테러’를 하며 위협을 했고 끝내 거부하면 죽여버린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한인들은 비록 만주에 거주했지만 처음에는 '해마다 독립운동 기관'인 정의부나 신민부에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독립성금을 냈었다. 하지만 점차 그 정도와 부담이 커졌던 듯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순박한 동포들도 우리 무장대오의 지나친 위력과 침탈을 당하게 되자 점차 반발심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이 자기 집이나 동네에 도착하면 비밀리에 왜놈에게 고발하는 악풍까지 생겼다.(백범 김구의 증언) 일본군의 자료에 의하면 ‘김좌진의 키는 약 185cm, 얼굴은 타원형이고 눈빛이 형형하고 사람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의 인상이며 총명함이 출중하고 좌담에 능하며 특히 해학과 유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라는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일본군이 가지고 있던 김좌진 장군에 대한 정보는, 사실 김좌진의 최측근 이라 여겼졌던 ‘이정’ 이라는 일본 측 밀정의 밀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정’은 북로군정서 당시 ‘김좌진의 중요한 군대 참모’로서 ‘진중일지;라는 자신의 일기에 당시 '독립군들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일들을 자세히 서술했다. 이는 당시의 ‘만주 독립군들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고, 이 자료를 제공한 인물이 ‘이정’ 인데 그가 밀정 이라니.... 김좌진의 측근 ‘이정’이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사실이 황당하고, 이 것만 봐도 김좌진 장군은 어떠한 형태로든 결국 암살 될 수 밖에는 없었던 운명이 아닌가 싶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김좌진 장군이 비록 흠이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처절한 궁지에 그가 몰려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상황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ㆍ김좌진 장군을 일부에서 '마적단 두목'으로 매도하는건 진짜 가슴 아픈 일이다. 독립투쟁사의 위대한 영웅 김좌진 장군은 '매일매일 죽음의 문턱' 에서 삶과 죽음을 벗 삼아 살았던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