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조선> 편집을 맡아 고군분투하던 김교신에게 최태용 목사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성서조선> 폐간을 충고했다. 1931년 봄의 일이다. <성서조선> 28호 ‘성서통신’은 이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경외할 만한 선배’는 최태용이었다. 비판이 제기되었던 시점으로 보아, 최태용의 비판은 직접적으로는 김교신의 글 <성서조선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 대한 비판이었을 수 있다. 1931년 2월에 발표된 이 글에서 김교신은 자신이 전도자가 아니며 일개 평신도일 뿐이라는 것, 전문적인 신학적 지식을 가지지도 않았으며 보통 사람 이상의 영적 체험을 가지지도 않았다는 것을 거듭 말하고 있다. 김교신은 그의 공생애 내내 자신이 소인素人, 즉 아마추어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1932년 3월 <영과 진리> 38호에는 ‘<성서조선>의 김교신에게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공개장이 실렸는데,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1년 전인 1931년 이른 봄에 최태용이 김교신에게 ‘확신과 사명’이 없다면 ‘학생 시대의 유희’일 뿐이니 그만두라는 충고를 한 적이 있었다는 것, (2) 그 후 <성서조선> 37호에 실린 <성서조선의 금후>라는 글을 읽어보니 ‘확신과 사명’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고 <성서조선>이 가치 있는 잡지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3) 따라서 일 년 전 <성서조선>에 대한 비판을 취소하고 사과한다는 것 등.
처음 <성서조선> 폐간을 충고한 지 일 년이 지나 다시 이 일을 거론하게 된 데는 장도원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어느 신학교에서 늦깎이 신학생으로 있던 최태용은 졸업을 앞두고 조선으로 들어와 양산, 금마 등에서 전도 집회를 열었고, 고향인 영흥과 함흥을 방문한 후 다시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이 무렵의 사정은 <영과 진리> 37호에 수록된 ‘여행기’에 자세히 드러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일본으로 돌아간 최태용이 당시 오가키에 있던 장도원 목사의 집에 하루를 머물면서 <성서조선>의 가치를 두고 논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 무렵 장도원 목사는 오가키에서 목회를 하면서 <성서조선>에 많은 글을 발표하고 있었으니, 최태용의 <성서조선> 비판에 반론을 제기했을 것이다. ‘여행기’가 전하는 최태용의 <성서조선> 비판을 옮겨 보자.
최태용의 <성서조선>을 비판하면서 우치무라 간조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최태용이 <성서조선>을 비판하면서 우치무라를 거명하고 나선 데는 그럴만한 내력이 있었다.
최태용은 누구였던가? 함경남도 영흥 출신으로 김교신보다 네 살이 많았던 그는 수원농림학교를 다니던 십대 후반에 수원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으며 20세에 극적인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자신의 죄에 대해 고민하던 중 홀연히 광명한 빛이 비치는 가운데 ‘복음을 위하여 네 몸을 바쳐라’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된 것. 이를 계기로 그는 전도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최태용은 이 무렵 책을 통해 우치무라 간조를 알게 되어 그를 사숙私淑했고, 이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출입하였다.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 1921년이었으니 이 무렵부터 최태용과 김교신은 서로 알고 지냈을 것이다. 먼저 조선에 들어온 최태용은 1925년 <천래지성天來之聲>이라는 신앙잡지를 내고 성서 모임을 열었는데, 1926년 여름 방학을 맞아 조선에 들어온 김교신이 최태용을 찾아 일을 돕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에서 배우기는 했으나 신앙 체험이 달랐고, 특히 1929년 이후 최태용이 신학을 공부하게 되면서 무교회주의에 대한 입장도 달라져, 1931-32년 무렵 이 차이가 겉으로 드러나게 된다. (김교신과 최태용의 관계에 대해서는 류대영, <최태용과 무교회주의 : 김교신․우치무라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와 역사 55호, 2021 참고)
이 무렵 김교신이 최태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김교신의 <내촌감삼론에 답하야>(성서조선 18호, 1930. 8)에 잘 드러나 있다. 이 글은 김인서의 우치무라 비판에 답한 글로, 김인서가 자신을 우치무라 간조의 조선인 제자로 적시한 데 대해 김교신은 자신 말고도 우치무라의 제자라고 할 만한 이가 많이 있다고 말하면서 가장 먼저 최태용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 무렵 <영과 진리>에 수록한 한 글에서 최태용은 자신에게 우치무라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최태용의 이 글은 또 다른 조선인 문하생을 통해 우치무라에게까지 전해졌고, 이를 들은 우치무라는 조선인이 자신에게 많은 감화를 받았다는 데에 대해 감사하면서 기독교가 ‘일본 내지에서보다 대륙 방면에서 보다 더 선한 열매를 맺으리라’는 덕담을 했다고 한다. 김교신은 이 일을 들어 최태용이 우치무라의 제자라고 한다면 아무도 시비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로 그의 존재를 인정하였다. 김교신이 우치무라의 신임을 받는 조선인 문하생이었던 데 비해 최태용은 우치무라와 개인적인 교류가 많지 않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김교신이 자신보다 최태용을 앞세운 것은 겸양의 표현이었다고 보아야겠다. 이처럼 최태용을 겸양의 예를 다해 ‘경외할 만한 선배’로 여겨오던 김교신으로서는 선배의 <성서조선> 비판이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최태용이 김교신과 <성서조선>을 비판하고 나선 속사정을 장도원 목사와의 만남을 전하는 '여행기'에서 짐작해 볼 수 있다. 최태용의 비판이 우치무라 선생의 제자인 입장에서 우치무라적으로 판단할 때 <성서조선>은 무가치한 잡지라고 한 것을 보면 <성서조선>이 우치무라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한다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것 같지만, 이 시기 이미 그가 우치무라식 무교회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성서조선> 비판을 위해 우치무라를 끌어들인 것은 다소 어색하다. 그가 말한 ‘우치무라적’이라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잡지가 ‘우치무라적’이기 위해 지녀야 할 ‘개인적 확신이나 사명’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전도여행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간 최태용은 장도원 목사의 집에 묵으면서 밤늦도록 대화를 이어갔는데, 이 무렵 최태용은 ‘새 복음’을 전할 사명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장도원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포부를 말하고 있다.
35살 늦깎이 신학도 최태용의 포부가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 가늠할 길은 없으나 이러한 사명관이 <성서조선이란 무엇인가?>에서 드러나는 김교신의 태도와 거리가 먼 것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러한 최태용의 비판에 대해 김교신이 공개적으로 답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개인적으로라도 답을 했는지 분명하지 않다. 최태용이 <성서조선의 김교신께 드립니다>(영과 진리, 1932. 3)라는 사과문을 발표한 것은 <성서조선> 37호에 수록된 <성서조선의 금후>라는 글을 자신의 비판에 대한 답으로 간주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성서조선이란 무엇인가?>와 <성서조선의 금후> 사이에 그만한 차이가 있었을까? 사명과 확신이 없던 잡지가 1년 사이에 그것을 가지게 된 것일까? 이 물음을 가지고 <성서조선의 금후>를 보면 최태용의 사과문에서 <성서조선>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바꾸게 된 근거가 무엇인지 의아해진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금후>에서도 거의 같은 목소리로, 도리어 더 담백하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공부한 만큼 성서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실어 보내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짐작건대 우치무라 간조 서거 이후 최태용의 내면에 조선인으로서 자신이 우치무라의 뒤를 이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인정 욕구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성서조선>이 우치무라의 정신을 계승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아마도 이런 인정 욕구를 드러낸 것이리라. 그런데 이 비판에 대한 김교신의 대답은 지극히 소박한 것이었고, 따라서 최태용은 자신의 활동과 <성서조선>이 서로 겹치지 않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성서조선>에 대한 비판을 거두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성서조선의 김교신께 드립니다>라는 글에서 최태용이 사족처럼 덧붙인 문장은 다음과 같다.
이후 최태용은 독자적으로 복음교회를 창설하는 등 전도자로서 활동을 이어갔으나 김교신과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