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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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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예찬 풍유 시 스크랩 1월 16일 / 소설가 '정찬주'가 바라본 화순적벽
은하수 추천 0 조회 39 22.09.29 11:22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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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2.09.29 11:35

    첫댓글 무명의 바위 절벽을 적벽이라 이름 짓고 세상에 알린 사람은조선 중종 때 기묘사화에 연루돼 동복으로 유배 온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1483~1536)였다. 최산두는 유배 생활의 고단함을 적벽 강변을 산책하며 달랬다. 그는 적벽이 중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다고 했다.

    중국에는 적벽이 두 군데 있다.
    모두 양자강이 흐르는 호북성에 있는데 하나는 삼국지 중에서 적벽대전을 치렀던 적벽시에, 또 하나는 소동파(蘇東坡)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조렸던 황주시에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삼국지의 적벽을 '무(武)적벽', 황주의 적벽을 '문(文)적벽'이라고 부른다.

    최산두는 조광조의 개혁에 동참했다가 좌절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화순적벽을 최산두의 한이 서린 '한(恨)적벽'이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최산두는 해배(解配)되고도 고향인 광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동복에서 생을 마쳤다. 방랑객 김삿갓 역시 적벽 부근으로 내려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최산두와 김삿갓의 삶과 달리 젊은 날에 창랑적벽이 마주 보이는 물염정(勿染亭)에서 호연지기를 길렀다. '물염정기(記)' 한 구절은 이렇다. '물염정은 동복현에 있다.~

  • 작성자 22.09.29 11:34

    '물염정은 동복현에 있다.
    정유년 가을에 아버지가 화순 현감으로 계셨는데 적벽은 40리 떨어져 있었다. 이듬해 나는 그곳에 가서 노닐었다. …
    적벽은 울퉁불퉁 모양이 기묘하고 빼어났다. 바위 높이는 수십 길이고 너비는 수백 보나 되었으며 빛깔은 담홍색이고 도끼로 깎아 세운 듯 우뚝하였다.'

  • 작성자 22.09.29 11:41

    소설가 정찬주 부인 아내 와이프 박명숙 나이 고향 결혼_- 2020. 11. 17. 23:57

    오늘 2020년 11월 17일 화요일 저녁 22시 45분 EBS1 <건축탐구-집>에서는 “산중가옥, 자연에 물들다”가 방송된답니다. EBS 건축탐구-집 <산중가옥, 자연에 물들다> 편에서는 오랜만에 만난 건축가 문훈과 텐들러 소장이 단풍으로 물든 산중가옥을 찾아간답니다. 서울에 살던 부부가 깊은 산골에 내려와 살게 된 사연은 무엇일지 궁금하답니다. 다음으로 보는 쌍봉사에서는 국내 유일의 3층 목탑부터 독특한 구조의 호성전까지, 다채로운 목조 건축물의 향연이 이어진답니다. -
    전라남도 화순군에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한옥, ‘이불재’가 있답니다. 소설가 정찬주, 도예가 박명숙 부부가 사는 집이랍니다. 소설가 정찬주 씨는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오랜 도시 생활을 접고 화순으로 내려왔답니다. 법정 스님과의 인연으로 불자의 길을 걷게 된 그는 집의 이름도 ‘솔바람에 귀를 씻어 불교의 진리를 이루리라’는 뜻을 가진 ‘이불

  • 작성자 22.09.29 11:49

    (耳佛齋)라고
    그렇지만 이따금 찾아오는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보니 어느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집’으로 그 의미가 변했다고 한답니다. 그곳에서 그는 무위자연을 실천하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답니다. 먼저 내려온 남편을 따라 이불재에 정착하게 된 도예가 박명숙 씨랍니다. 군고구마 대신 피자를, 군밤 대신 치킨을 먹고 싶은 서울 토박이 아내의 웃지 못할 산중생활 적응기가 있답니다. 그런 그녀가 서울에 대한 그리움을 뒤로하고 이불재에 머무는 이유는 바로 사랑하는 도자기 때문이랍니다. / 출처: https://ppeniel.tistory.com/1186 [더원케이:티스토리]

  • 작성자 22.09.29 11:57

    *저자 정찬주는? 깊이 있는 글쓰기로 20여 년 동안 선과 암자를 징검다리 삼아 명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 온 작가 정찬주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한국문학'신인상에 소설 '유다학사'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로, 성철 스님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산은 산 물은 물', 만해 한용운의 전기를 다룬 '만행', 등신불 김지장 큰스님의 일생을 다룬 '다불', 성왕과 왕인의 삶을 다룬 '대백제왕' 등을 펴냈고, 산문집으로는 '암자로 가는 길', '암자가 들려준 이야기',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소박한 삶' 등이 있다. 또한 창작동화 '동화로 읽는 산은 산 물은 물', '눈부처', 번역서 '날마다 새겨듣는 붓다의 말씀' 등을 출간했다. 1996년에 행원문학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남도 산중에 '이불재'라는 산방을 짓고 농사일과 집필에 전념하고 있다.

  • 작성자 22.09.29 11:59

    동화책에서 글처럼 중요한 것이 삽화다. 어쩌면 삽화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 책에 실린 삽화는 정윤경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이다. 영국 킹스턴대학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한 정윤경 작가는 <행복한 무소유>,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스님의 뒷모습> 등의 삽화를 그렸고, 그림동화 <마음을 담는 그릇>, <바보동자> 등을 펴낸, 이 분야의 실력자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 어느 덧 일흔 줄에 들어선 작가 정찬주는 말한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해 가는 이 사막 같은 시대에 <스님 바랑 속의 동화>가 따뜻한 가슴을 회복하게 하는 영혼의 백신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이 동화를 함께 읽음으로써 자비와 사랑, 지혜의 싹이 자라나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하다.”라고.

  • 작성자 22.09.29 12:02

    헌식돌 옆에 쥐가 죽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스님은 ‘쥐의 탈을 벗어라’는 자신의 말을 듣고 쥐가 죽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 “아! 말귀를 알아듣는 쥐였구나.” 스님은 쥐를 위해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모았습니다. 다음 생에는 쥐의 탈을 벗고 귀한 모습이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이 책 20~21쪽에서 -
    법정스님이 지리산의 한 암자에서 지낼 때의 이야기다. 헌식은 산짐승들과 음식을 나누어먹기 위해 끼니때마다 한두 숟가락씩 밥과 반찬을 놓는 의식을 말한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스님께서 유발제자인 저자에게 회상하듯 들려주었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바랑에 담겨져 있던 그 이야기가 저자의 마음에서 농익어 ‘작은 산짐승 친구들’이라는 제목의 생명동화로 몸을 바꿔 탄생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윤회는 생명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무수한 이야기에도 해당하는 것 같다. 이 책은 모두 3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스님 바랑에서 꺼낸 자비’, 2장은 ‘스님 바랑에서 꺼낸 사랑’, 3장은 ‘스님 바랑에서 꺼낸 지혜’이다. 자비와 지혜가 불교를 구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는 점에 착안하여 이야기를 풀어간 듯하다.

  • 작성자 22.09.29 12:08

    불일증휘(佛日增輝). 1997년 일타 스님이 입적하기 전 소설가 정찬주 씨에게 건넨 친필 휘호다. ‘부처님 지혜를 더 밝게 퍼뜨리고 빛내라’는 스님의 당부. 성철 스님 일대기를 그린 그의『산은 산 물은 물』을 보기라도 한 것일까. 절절하고 치열했던 고승들의 구도 일상을 글로써 담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휘호는 등골이 서늘해진 그의 가슴에 단박에 성성한 화두로 남았다.
    궁금했다. 오른손이 뭉툭한 스님, 부처님 법대로 옳은 중노릇을 하고자 붕대를 감은 손에 불을 붙인 스님, 칠흑 같은 세상에 불을 밝히는 심정으로 성냥을 그은 일타 스님을 글로 그려내고자 했던 소설가 정찬주 씨. 1년 넘게 일타 스님의 세연을 좇은 그에게 일타 스님과 소설 ‘인연’은 어떤 의미일까. 조바심이 일었다. 소설에서 일타 스님의 행적을 좇는 고명인처럼 그의 생각이 궁금해 마음이 급해졌다. 결국 지난 1월 22일 그가 산방을 짓고 사는 전라남도 화순 쌍봉사 부근 ‘이불재’를 찾아 이양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

  • 작성자 22.09.29 12:16

    성철 스님은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 문수보살, 일타 스님은 한 없이 자비로웠던 관음보살이죠. 『열반경』에 ‘자비심이 여래’란 말이 있습니다. 진정한 자비란 ‘내’라는 소유격을 버리고 남과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 내 물건, 내 집 등 소유와 집착을 어떻게 떨쳐버리는지 일타 스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스님은 맏상좌 혜인 스님이 상좌들의 행동거지를 전하면 경전을 보며 흥얼흥얼 거리셨다고 합니다. 괜한 소리한다고 타박하면 맏상좌 마음에 상처가 될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참 자애로운 분이셨습니다.”

    이제 일타 스님 일대기를 담은 소설 ‘인연’은 끝났다. 그러나 그는 자비로운 일타 스님을 못다 그린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달은 초승달이거나 그믐달이거나 보름달이거나 천개의 강을 비춘다. 많은 말들을 늘어 놨지만 정작 하늘에 있는 달을 다 못 그린 탓이리라. 겨우 강에 비친 달그림자 하나를 베낀 것 같아 아쉬움은 그의 마음속에 진하게 남았다.“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다시 돌아봅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연은 내가 짓는 업의 결과요, 업의 보이지 않는 그림자이며 들리지 않는 메아리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드러나는 것이

  • 작성자 22.09.29 12:23

    . 훗날 발굴 조사가 끝나면서 모두 세어보니 5㎞ 고갯길 양쪽에 고인돌이 모두 596개나 됐다. 채석장으로 쓰였던 감태바위(감투바위)에서는 조선시대 돈치기 놀이를 했던 상평통보가 나왔고 청자 부스러기도 나왔다. 200t에 이르는 핑매바위에는 1929년 새겨놓은 여흥 민씨 세장산(世葬山) 비석이 보인다. 무덤, 제단으로 쓰인 고인돌은 물론 채석장까지 갖춘 청동기 흔적에 세월을 초월한 각 시대 손길이 남아 있다. 2002년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감투바위 혹은 감태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무리는 청동기 시대 채석장이었다. 이곳에서 캐낸 돌로 그 옛날 화순사람들은 고인돌을 만들었다. 화순 보검재 고개에는 1995년 젊은 학자 이영문이 발견한 고인돌 596개가 서 있다. /박종인 기자

    방랑시인 김삿갓과 화순
    이영문은 고향 화순에서 나고 자라 고향에 정주하는 사내다. 김병연(1807∼1863)은 달랐다. 평생을 떠돈 유목민이었다. 세간에 '김삿갓'으로 알려진 김병연은 고향이 경기도 양주였다. 할아버지가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죄로 집안이 멸족돼 강원도 영월 땅에 숨어 살았다. 살다가 영월 백일장에 '김익순의 죄를 논함'

  • 작성자 22.09.29 12:30

    관광객을 부르는 적벽과 운주사 -화순 사내 이영문은 화순으로 돌아와 고인돌을 찾아냈고 정처없던 김삿갓은 화순에서 죽었다. 말년에 구암마을에서 보낸 6년 세월은 가장 긴 정주 생활이었다. 왜 20세기 학자는 화순에 집착하며, 19세기 시인은 어이하여 아들을 뿌리치고 화순에서 눈을 감았을까. / 운주사다. 경내 곳곳에 석불이 서 있고 바위에 기대어 있고 땅바닥에 뒹군다. 탑마다 있는 기하학적 문양과 원형 탑, 북두칠성 배치를 닮은 산기슭 칠성바위 그리고 민짜 석불…. 최근에는 이 절이 불교가 아니라 도교사원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불상들 손 모양이 부처상이 가진 수인(手印)과 전혀 다르고 탑 배치와 문양이 천문학적이라는 근거를 든다. 김삿갓이 운주사에 들렀을까? 그 천재가 다녀간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려고? 그럴 리가 없다./ 떠나온 주잠과 떠나간 정율성​

    그렇게 화순 땅에 세월이 흐른다. 1224년 송나라가 망하고 원나라가 서던 무렵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 학자 주희의 증손자 주잠(朱潛·1194∼1260)이 망명을 감행했다. 일곱 학자와 경호원과 가족을 데리고 황해 건너 도착한 곳이 능주

  • 작성자 22.09.29 12:31

    지금 화순이었다. 주잠은 신안 주씨 시조다. 주잠은 원나라 첩자들을 피해 이름을 덕적으로 바꾸고 무등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외동딸과 경호 무사 구존유가 결혼을 했다. 지금도 신안 주씨와 능성 구씨는 쉽사리 통혼을 하지 않는다. 만대창성을 기리며 본관도 바꾸고 전국으로 흩어져 살던 신안 주씨는 조선조 고종 때 본관을 통일하고 지금 13만 명이 넘는 대가문이 되었다./ [출처] [45] 고인돌이 있는 화순과 소설가 정찬주|작성자 큰내

  • 작성자 22.09.30 06:22

    법정 스님은 저자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현재 전남 화순 쌍봉사 옆 이불재(耳佛齋)에서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펴낸 책으로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인연 1, 2』,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 『다산의 사랑』, 『소설 무소유』, 『산은 산 물은 물』, 『다불』, 『만행』, 『대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산문집 『부처님 8대 인연 이야기』, 『암자로 가는 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정찬주의 다인기행』, 『뜰 앞의 잣나무』,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 등이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 2011년 화쟁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사진 : 유동영 사진삽도인 유동영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발로 찾아 담았던 계간 「디새집」에서 일했다. 이를 인연으로 『책 한 권으로 모자랄 여자 이야기』라는 책을 아무개와 함께 엮어냈으며, 이후 소설가 정찬주를 만나 그의 책에 사진 작업을 하게 된다. 그의 『선방 가는 길』을 시작으로 『자기를 속이지 말라』, 『정찬주의 다인기행』, 『소설 무소유

  • 작성자 22.09.30 07:07

    1593년 진주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화순의병들의 이야기 <조선의 혼은 죽지 않으리>(도서출판 여백) 1년 동안 화순군청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화순 출신 의병 최경회(崔慶會 532~1593) 장군을 비롯, 구희(具喜1552~1593), 문홍헌(文弘獻1539~1593) 등 전라우의병군.진주 남강 같은 하늘 아래서 똑같이 몸을 던졌다.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전7권)>.”며 “선거이 장군, 김억추 장수, 김천일 의병장 이야기에 이어 이번 화순 의병 지도자들의 이야기가 네 번째다.”나는 이제 여기서 뼈를 묻겠다.”고 선언 13년이 이양면에서 ‘자랑스러운 이양, 청풍인의 상’을 주었으니 이제 작가는 화순 고향에서 인정받는(?). 새벽 네 시 정도 일어나 뒷산을 한두 시간 걷고 오전엔 글 쓰고 오후엔 밭을 일군다.법정은 그의 집 사랑채 편액도 써 주고, 샘터사에 입사해서 법정 스님의 원고를 담당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너만의 꽃을 너만의 꽃을 피워라”며 말씀의 너만의 꽃을 피워라”며 말씀의 죽비치셨다.<샘터> 단골 필진인 최인호 작가와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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