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브리튼 화가 제프리스 해밋 오닐(Jefferyes Hamett O'Neale, 171~1797)의 1774년작 세태풍자 동판화 〈화상(畫商)들과 골동품상(骨董品商)들의 품평에 자신의 작품을 맡기는 화가(The Painter submitting his picture to the Examination of Connoisseurs and Antiquarians)〉이다.
이 그림에서 바보모자(얼간이모자; 어릿광대모자; fool's cap)를 쓴 화가는 자신의 화실을 방문한 동물대가리를 가진 고객(顧客)들에게 자신의 작품 〈그리스 항아리 정물화〉를 거꾸로 뒤집어 보여준다.
고객들 중 뒷줄에서 오른손으로 쥔 돋보기를 오른눈에 갖다댄 최단신 고객은 개대가리를, 그의 왼편에 서있는 고객은 원숭이대가리를, 다음 왼편에 서있는 고객은 당나귀대가리를, 그앞에 서있는 고객은 곰대가리를, 그의 오른편에 서있는 망토를 걸친 고객은 멧돼지대가리를 가졌다.
이 그림의 우하단(右下段)에서는 고양이 두 마리가 화가의 작품을 올려보고, 우상단(右上段)의 그림받침대(이젤) 꼭대기에 걸터앉은 올빼미는 화가와 고객들을 내려본다.
화실의 벽면에 걸린 그림 4편에는 각각 고양이대가리를 가진 여자, 요강을 받쳐든 남자, 양(羊), 황새가 묘사되었다.
요컨대, 이 그림에는 개, 원숭이, 당나귀, 곰, 멧돼지, 올빼미, 양, 황새가 각각 한 마리씩, 고양이가 세 마리, 이족보행포유류 두 개체가 묘사되었다고 얼추 품평될 수 있다.
☞ 한국 인간 배려 이기심 이성 합리성 몽객 자아계몽; 자기계몽
☞ 한국인들이나 한국족속의 자기계몽 불가능성
☞ 한국 교육부 민중 개돼지 신분제 통념 실태 역리 쳇바퀴 양면거울 표정관리
☞ 한국 샤머니즘 무속 주술 감정 감각 미신 정치
☞ 한국 매끄럽게 술술 읽히는 쉽게 위로하는 달달한 예쁜 정겨운 권력 관계 맛있는 한국 집단최면 교육 칩 자충인간 통념 망각 티모니즘 손모가지 잔잔한 표절 문학 몽롱한 호모사피엔스
☞ 동물을 인간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의인화; 우의법, 알레고리, 비유법
최근에 한국에서 “개처럼 행동하는 고양이”를 뜻하도록 심심찮게 사용되는 “개냥이”라는 합성속칭(合成俗稱)과 다르게, “개처럼 행동하는 돼지”를 뜻하지는 않을 이른바 “개돼지”라는 낱말은 심지어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어엿하게 등재되어 “개와 돼지를 아우르는” 말(馬)이 아닌 “말(語)”로서 “견돈(犬豚), 구체(狗彘), 돈견(豚犬)”의 동의어이며 “미련하고 못난 사람을 비유하는 말(語)”이라고 풀리는(설명되는) 표준말이다.
그런데, 적어도 한국에서, 최근부터 방송된 애완동물이나 반려동물을 주제로 삼은 몇몇 방송 프로그램은 개나 고양이의 버릇들 중에, 그러니까 반려견이나 반려묘의 버릇들 중에, 주인에게나 보호자에게나 이른바 집사에게 불리하거나 불편한 버릇이 교정되면 유리하거나 유편한 버릇으로 변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그런데 적어도 한국에 거주하는 이보포류개체(☞ 참조)들 중 몇몇의 몇 가지 버릇은 워낙 경직되거나 강직해서, 그런 버릇들에 찌들어버린 개체를 아무리 괴랄하게 배반해도, 적반하장해도, 괴롭혀도, 착취해도, 교정되거나 환멸되기커녕 뉘우쳐지거나 성찰되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자각되거나 상상되지도 않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적어도 한국에서 이른바 “개돼지”라고 “거의” 타칭되거나 “타칭될 만한” 개체들이, 아니면 스스로 개돼지라고 자각하거나 말거나, 하여간, 비록 “모든 타개체”를 싸잡아 개돼지로 비칭(卑稱)하거나 하칭(下稱)하거나 멸칭(蔑稱)하지는 않아도, “특정한 개체나 개체들이나 집단”을 그렇게 비칭·하칭·멸칭하는 개체들이, 켕기면 자기편마저 그렇게 비칭·하칭·멸칭해대는 각자의 졸렬하거나 야비한 몇몇 버릇을, 그러니까, 예컨대, “몸값”이라는 메쓰거운 낱말을 아무렇잖게 듣거나 읽거나 글쓰는 버릇이나 모든 타개체를 “학벌”로나 “집값”으로 환산하여 차별하는 버릇을, 설마, 교정하거나 환멸하거나 뉘우치거나 성찰하지는 못할망정 가까스로 자각하거나 상상할 수 있을 확률은, 그러니까 자신의 그따위 버릇들을 계몽당하거나 계몽하여 이른바 “호모 사피엔스”답게 생각할 수 있거나 언행할 수 있을 확률은, 과연 얼마일까?
대관절, 설마, 그런 확률이 있기는 있을까?
어쩌면 차라리 0으로 수렴할 확률이 오히려, 적어도, 마치 “아무것도 뉘우치지 않으련다”고 다짐해서 그랬는지 기어코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을 성싶은 어느 시인을 “혓바닥을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도록 키웠다는 바람처럼, 팔 할은 되잖을까?
뭐, 그런 개체들의 버릇대로 아니면 말고!
그래도 몸값의 논리는 요따위로 버젓이 횡행하는데.
☞ 계몽확률을 0으로 수렴시키는 사회병리현상의 일례
(2022. 10. 12. 17:49)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니콜라 투생 샤를레(Nicolas Toussaint Charlet, 1792~1845)의 1832년작 〈(돼지우리의 문앞에서 대치한) 돼지와 개(Un cochon et un chie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