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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회의
그림설명- 왼쪽은 니케아로 향하는 로마의 문이다. 니케아는 큰 교회 회의가 열리던 곳이고, 오른쪽은 니케아 회의의 벽화이다.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에 대해서 본블로그는 지난 성경상식 란에서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 이라는 주제로 살펴본 바 있다. 그 때 ttp://blog.daum.net/hyodoza/14880579 는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당시,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추방하는 문제,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내용 등을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하고 폐회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잠시 언급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니케아 회의에 있었던 아리우스 논쟁과 그 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아리우스의 주장
AD.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유월절 논쟁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졌던 내용이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그후 많은 피를 흘리기도 하는 등 역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장식되기까지 하였다.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고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ογος - 말씀,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아리우스의 생각은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려졌고 어부들까지 따라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 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동방 각지로 여행하던 아리우는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몇 명의 교직자들로 인해 문제는 더욱 확산되었다. 사도시대 이후로 여태까지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에대한 부분이 아리우스에 의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 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지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일체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296-373)이다. 그 역시 알렉사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그는 20대에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논쟁이 끝날때 까지 수십년간 관여하였으니 가히 아리우스 논쟁에 대한 산 증인이라고 할 수있는 사람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20대였을때 아리우스는 이미 60대였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들 중에는 20여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감독들에게 여기서 작성한 신조(니케아 신조: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 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두명의 감독(리비아의 데오나스와 세쿤더스)과 함께 일루리아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 파의 반격
2년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의 교리를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아리우스를 앞장서서 공격했던 감독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거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알렉사드리아의 감독이 되어있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집요하게 덤벼드는 적들에 의해 336년에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반대파를 제거한 아리우스 파들의 다음 단계는 니케아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인 주후 336년에 아리우스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으므로 형세가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공론화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제 드러내놓고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우스 주의를 지지한 황제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의해 통치 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유배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 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배 영역 안에 들어온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서방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얼마후 콘스탄틴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것 처럼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니케아 교리를 반대한 사람이었으니 아리우스 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리가 작성되었다. 당시 감독들은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황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적에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세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교를 신봉한 쥴리안 황제
그런데 얼마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키며 그들의 지도자 쥴리안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양 진영의 군대가 집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었으므로 쥴리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쥴리안황제는 콘스탄틴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엘류시니아인의 신비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아직까지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직(Pongifax-Maximus: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상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틴과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의거하여 교회에 간섭 하였다.)을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쥴리안은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그 동안의 소외 되었던 이교가 활성화 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자기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입히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가독들이 새로운 적(쥴리안과 이교)을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분열과 아라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쥴리안이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안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민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반달.동코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아리우스주의의 국가들
이 세 민족-헤루라이,반달,동고트-의 공동점은 아리우스주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카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종교암흑세기를 주도한 카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회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단,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화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를 수있을 만큼 아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니케아신조의 한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이미 성삼위일체를 공부한 성도들이라면 쉽게 그 허구성을 알 수 있으리라 믿으므로 논의를 생략하고, 니케아 신조에 대해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AD.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 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이시요, '성부와 동등한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애매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로 인해 오늘날 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일이 같기 때문에 일체라 하는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경 지식의 부재로 인해,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 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회는 '성부=성령', '성자=성령' 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교리로 서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글을 마치며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닌, 초대하나님의 교회에서부터 강조되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나온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미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미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아는 고로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호 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호 4: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호 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놓았고,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 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나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 까? 그가 오셔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닌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요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슴을 깨닫게된 우리들은 성부로서,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겠다.
본인 孝親짱은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일명 안증회 성도로서 성령시대 육신으로 임하신 구원자 아버지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고 전한다.
사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성경은 초림때 육신으로 임하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증거하였다.
여호와란 이름이 있었음에도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자가될 수 없었듯이 이제 성령시대 새 이름 으로 오신 안상홍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이제는 구원을 받을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안증회는 성령시대 구원자로 임하신 새 이름 안상홍님을 구원자로 믿고 땅끝까지 그 이름을 전할것이다.
출처 : | 성령과 신부를 영접한 하나님의교회 | 글쓴이 : 孝親짱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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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왼쪽은 니케아로 향하는 로마의 문이다. 니케아는 큰 교회 회의가 열리던 곳이고, 오른쪽은 니케아 회의의 벽화이다.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에 대해서 본블로그는 지난 성경상식 란에서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 이라는 주제로 살펴본 바 있다. 그 때 ttp://blog.daum.net/hyodoza/14880579 는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당시,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추방하는 문제,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내용 등을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하고 폐회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잠시 언급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니케아 회의에 있었던 아리우스 논쟁과 그 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아리우스의 주장
AD.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유월절 논쟁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졌던 내용이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그후 많은 피를 흘리기도 하는 등 역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장식되기까지 하였다.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고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ογος - 말씀,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아리우스의 생각은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려졌고 어부들까지 따라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 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동방 각지로 여행하던 아리우는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몇 명의 교직자들로 인해 문제는 더욱 확산되었다. 사도시대 이후로 여태까지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에대한 부분이 아리우스에 의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 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지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일체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296-373)이다. 그 역시 알렉사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그는 20대에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논쟁이 끝날때 까지 수십년간 관여하였으니 가히 아리우스 논쟁에 대한 산 증인이라고 할 수있는 사람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20대였을때 아리우스는 이미 60대였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들 중에는 20여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감독들에게 여기서 작성한 신조(니케아 신조: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 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두명의 감독(리비아의 데오나스와 세쿤더스)과 함께 일루리아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 파의 반격
2년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의 교리를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아리우스를 앞장서서 공격했던 감독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거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알렉사드리아의 감독이 되어있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집요하게 덤벼드는 적들에 의해 336년에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반대파를 제거한 아리우스 파들의 다음 단계는 니케아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인 주후 336년에 아리우스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으므로 형세가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공론화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제 드러내놓고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우스 주의를 지지한 황제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의해 통치 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유배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 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배 영역 안에 들어온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서방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얼마후 콘스탄틴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것 처럼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니케아 교리를 반대한 사람이었으니 아리우스 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리가 작성되었다. 당시 감독들은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황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적에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세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교를 신봉한 쥴리안 황제
그런데 얼마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키며 그들의 지도자 쥴리안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양 진영의 군대가 집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었으므로 쥴리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쥴리안황제는 콘스탄틴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엘류시니아인의 신비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아직까지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직(Pongifax-Maximus: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상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틴과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의거하여 교회에 간섭 하였다.)을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쥴리안은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그 동안의 소외 되었던 이교가 활성화 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자기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입히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가독들이 새로운 적(쥴리안과 이교)을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분열과 아라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쥴리안이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안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민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반달.동코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아리우스주의의 국가들
이 세 민족-헤루라이,반달,동고트-의 공동점은 아리우스주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카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종교암흑세기를 주도한 카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회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단,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화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를 수있을 만큼 아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니케아신조의 한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이미 성삼위일체를 공부한 성도들이라면 쉽게 그 허구성을 알 수 있으리라 믿으므로 논의를 생략하고, 니케아 신조에 대해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AD.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 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이시요, '성부와 동등한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애매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로 인해 오늘날 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일이 같기 때문에 일체라 하는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경 지식의 부재로 인해,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 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회는 '성부=성령', '성자=성령' 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교리로 서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글을 마치며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닌, 초대하나님의 교회에서부터 강조되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나온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미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미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아는 고로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호 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호 4: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호 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놓았고,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 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나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 까? 그가 오셔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닌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요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슴을 깨닫게된 우리들은 성부로서,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겠다.
본인 孝親짱은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일명 안증회 성도로서 성령시대 육신으로 임하신 구원자 아버지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고 전한다.
사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성경은 초림때 육신으로 임하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증거하였다.
여호와란 이름이 있었음에도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자가될 수 없었듯이 이제 성령시대 새 이름 으로 오신 안상홍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이제는 구원을 받을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안증회는 성령시대 구원자로 임하신 새 이름 안상홍님을 구원자로 믿고 땅끝까지 그 이름을 전할것이다.
출처 : | 성령과 신부를 영접한 하나님의교회 | 글쓴이 : 孝親짱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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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설명- 왼쪽은 니케아로 향하는 로마의 문이다. 니케아는 큰 교회 회의가 열리던 곳이고, 오른쪽은 니케아 회의의 벽화이다.
아리우스주의와 니케아 회의
니케아 회의에 대해서 본블로그는 지난 성경상식 란에서 '니케아 회의와 유월절 논쟁' 이라는 주제로 살펴본 바 있다. 그 때 ttp://blog.daum.net/hyodoza/14880579 는 "이 니케아 회의에서는 당시, 예수님은 신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던 아리우스를 추방하는 문제, 그리고 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내용 등을 안건으로 상정하여 처리하고 폐회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아리우스의 주장을 잠시 언급하였다.
이번 시간에는 니케아 회의에 있었던 아리우스 논쟁과 그 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정리해 보도록 하자.
아리우스의 주장
AD.325년의 니케아 회의에서 유월절 논쟁과 함께 중요하게 다뤄졌던 내용이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한 논쟁이었다 이 논쟁은 그후 많은 피를 흘리기도 하는 등 역사의 어두운 부분으로 장식되기까지 하였다.
아리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장로로서 특이한 주장을 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었다. 그의 주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고 같다.
1. 그리스도는 몸을 입은 로고스(헬, λογος - 말씀,진리)다.
2. 그리스도는 변하고 고난을 받을 수 있다.
3. 그러므로 로고스는 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다.
아리우스의 주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므로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에 대한 아리우스의 생각은 성부의 첫 피조물이 성자이듯이 성자의 첫 피조물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아리우스는 대단한 선전가여서 자신의 교리를 위해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을 외우기 쉬운 운시 형식에 넣어 퍼뜨렸는데 이 노래들은 거리에서 불려졌고 어부들까지 따라부르게 되었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감독 알렉산더는 회의를 열어 아리우스를 출교 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추방되어 동방 각지로 여행하던 아리우는 몇 명의 감독들을 설득하고 자신을 지지하게 하였다.
아리우스를 동조하는 몇 명의 교직자들로 인해 문제는 더욱 확산되었다. 사도시대 이후로 여태까지 내려오던 그리스도의 신성에대한 부분이 아리우스에 의해 중대한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문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적인 문제로 번져 나갔다.
니케아 회의
주후 325년,'교회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교회 위에 군림하던 콘스탄틴 황제는 유월절 지키는 문제와 아리우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독들을 니케아로 모이게 하고 회의를 지행하도록 하였다. 체제 기간의 경비는 일체 황실에서 지불하였다.
아리우스의 반대편에 서서 공격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296-373)이다. 그 역시 알렉사드리아 출신으로 그리스인이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등함을 주장하며 아리우스의 주장에 팽팽히 맞섰다. 그는 20대에 이 논쟁에 참여하게 되어 논쟁이 끝날때 까지 수십년간 관여하였으니 가히 아리우스 논쟁에 대한 산 증인이라고 할 수있는 사람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20대였을때 아리우스는 이미 60대였다.
325년의 니케아 회의에 참석한 300여명의 감독들 중에는 20여명의 아리우스 추종자들이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는 모든 감독들에게 여기서 작성한 신조(니케아 신조: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질이라는 내용)에 서명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내용에 동의 하지 않는 무리는 이단으로 정죄하도록 하였다.
이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는 정죄되어 신조에 서명하지 않은 두명의 감독(리비아의 데오나스와 세쿤더스)과 함께 일루리아지방으로 추방당하였다.
아리우스 파의 반격
2년후, 아리우스는 회개하였다고 선언되고 그와 함께 출교되었던 감독들은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 돌아와 은밀히 세력을 넓히며 교리를 가르치던 이들은 상대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아리우스의 교리를 내세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단 아리우스를 앞장서서 공격했던 감독들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반대파에 대해 부도덕한 사람이라거나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의 명예를 훼손한 일이 있다고 고발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알렉사드리아의 감독이 되어있던 아타나시우스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여러 차례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으나 집요하게 덤벼드는 적들에 의해 336년에 유형을 떠나게 되었다.
반대파를 제거한 아리우스 파들의 다음 단계는 니케아 교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같은 해인 주후 336년에 아리우스가 죽었고 다음 해에는 콘스탄틴 황제가 죽었으므로 형세가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아리우스가 살아있을 때에는 공론화하지 못했던 내용을 이제 드러내놓고 공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우스 주의를 지지한 황제
이때 로마 제국은 콘스탄틴의 세 아들에의해 통치 되었다. 콘스탄틴 2세는 서방을 다스렸고, 콘스탄스는 중부 지방을,콘스탄티우스는 동방을 다스렸다.
콘스탄틴 2세는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 유배되어 있던 아타나시우스를 유배지에서 불러왔다. 콘스탄스도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달랐다. 그의 통치 지역은 아리우스 파의 영향을 받는 곳이었기때문에 아리우스 파들을 지지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지배 영역 안에 들어온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서방 지역으로 유배시켰다.
얼마후 콘스탄틴2세가 죽자 서부 지방은 콘스탄스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0년후 콘스탄스도 암살되고 로마 제국은 전쟁에 휘말려 결국 동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티우스에 의해 통일 되었다. 앞에서 언급했던것 처럼 콘스탄티우스는 아리우스주의의 지지자로 니케아 교리를 반대한 사람이었으니 아리우스 파 황제가 로마 전역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교리가 작성되었다. 당시 감독들은 성자는 성부를 닮지 않았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황제로부터 강요당하였다. 로마 감독 리베리우스도 유배당하기 직적에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는 세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교를 신봉한 쥴리안 황제
그런데 얼마후 파리에 주둔했던 로마군대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폭동을 일으키며 그들의 지도자 쥴리안을 황제로 선포하였다. 양 진영의 군대가 집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죽었으므로 쥴리안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쥴리안황제는 콘스탄틴의 조카였으나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그는 엘류시니아인의 신비종교에 심취하여 옛 이교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 힘썼고, 아직까지 로마 황제가 가지고 있는 대제사장직(Pongifax-Maximus:로마 종교계의 최고위직. 대제상장 직분을 행하고 있었고 콘스탄틴과 그 아들들도 이 권세에 의거하여 교회에 간섭 하였다.)을이용해 이방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쥴리안은 우선 모든 종교를 동등히 여기는 정책을 펴 나갔다. 그러자 그 동안의 소외 되었던 이교가 활성화 되었고 이교의 신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독교를 분열시키기 위해 유배지에 가 있는 감독들을 다 불러들였다. 자기들끼리 싸워 큰 피해를 입히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 지역을 제외하고는 여태껏 싸우던 가독들이 새로운 적(쥴리안과 이교)을 의식하고 오히려 규합되기 시작하였다.
로마제국의 분열과 아라우스주의 국가의 멸망
쥴리안이 죽은 후에 보위에 오른 요비안 황제는 기독교인이었다. 이후 계속하여 기독교인 황제가 이어지고 이들은 니케아 신조나 아리우스주의에 모두 관대한 편이었다.
5세기 중반부터 로마 제국은 급격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북쪽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민족들이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분할,점령한 것이다. 이때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포로가 되어 그들 중에서 선교 활동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전도하기 위해 자원하여 그들에게로 들어갔다. 이때, 아리우스주의자들은 헤루라이,반달.동코트 등의 민족들에게 아리우스주의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였다.
아리우스주의의 국가들
이 세 민족-헤루라이,반달,동고트-의 공동점은 아리우스주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카톨릭교를 믿는 세력들에 의해 차례로 멸망을 당했다.
니케아 신조와 아리우스주의의 영향
이후 니케아 신조는 기독교회의 정통교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종교암흑세기를 주도한 카톨릭에 의해서도, 종교개혁 이후에 등장한 수많은 개신교회에 의해서도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라 하여 기본 교리로 채택되었다. 단, 아직도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성부와 성자는 본질상 차이가 있음을 주장하는 여화와의 증인과 같은 일부교파가 있는데, 이는 현대판 아리우스주의라고 부를 수있을 만큼 아리우스의 주장과 같은 성질의 것이다.
니케아신조의 한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동질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이미 성삼위일체를 공부한 성도들이라면 쉽게 그 허구성을 알 수 있으리라 믿으므로 논의를 생략하고, 니케아 신조에 대해 몇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AD.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비록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하고 성부와 성자의 동등이 라는 신조를 채택하였으나. 이 니케아 신조 또한 '성삼위일체' 진리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였다.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의 외아들'이시요, '성부와 동등한본질'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성부=성자'라는 개념을 제시하였으나 그 개념이 애매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로 인해 오늘날 까지 삼위일체를 믿노라는 기독교인들은 물론 신학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쉽게 시인하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버렸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부와 성자는 하는일이 같기 때문에 일체라 하는것이다.'라는 등의 이상한 삼위일체 교리를 전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경 지식의 부재로 인해, 교회 역사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유사 아리우스 주의가 연이어 나타나 성경의 억지 해석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을 매도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니케아 신조에서는 성령에 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니케아 회의 이후의 기독교회는 '성부=성령', '성자=성령' 이라는 성경적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성령의 본질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로, 유명무실한 '삼위일체'라는 용어만 신학교리로 서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다.
글을 마치며
성삼위일체는 신학 교리로서긍정되거나 부정될 만한 내용이 아닌, 초대하나님의 교회에서부터 강조되 온 성경의 진리이다. 진리는 종교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나온 신학자들의 논박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미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미 4:2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사단은 우리가 '하나님 아는 지식'을 가지기를 절대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할 것을 아는 고로
호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호 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호 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호 4:4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같이 되었음이니라
호 4:5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한기 위해 적그리스도의 영을 세상에 퍼뜨려놓았고, 이에 미혹된 사람들은 성삼위 일체를 부인하거나. 혹은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시인하나 마음으로는 부인하는 이중적인 신앙을 갖기에 이르렀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기까지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수 있을 까? 그가 오셔서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닌 지식에 이르게 되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된 것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
요 6:45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약속의 말씀을 따라 진리 말슴을 깨닫게된 우리들은 성부로서,성자로서, 성령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세상 만민에게 하나님을 아는 올바른 지식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데 최선을 다 해야겠다.
본인 孝親짱은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일명 안증회 성도로서 성령시대 육신으로 임하신 구원자 아버지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고 전한다.
사 43:11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성경은 초림때 육신으로 임하신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름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증거하였다.
여호와란 이름이 있었음에도 더 이상 여호와의 이름은 우리에게 구원자가될 수 없었듯이 이제 성령시대 새 이름 으로 오신 안상홍님의 이름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도 예수라는 이름으로도 이제는 구원을 받을수 없음을 증거하고 있다.
계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나님의교회(안상홍증인회) 안증회는 성령시대 구원자로 임하신 새 이름 안상홍님을 구원자로 믿고 땅끝까지 그 이름을 전할것이다.
출처 : | 성령과 신부를 영접한 하나님의교회 | 글쓴이 : 孝親짱 원글보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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