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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마태는 마태복음을 쓴 사람입니다. 막2장과 눅5장에서는 레위라는 이름으로 나옵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기록합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진정한 선물인 예수님을 만난 자요, 그가 예수님을 만나 일어난 변화, 또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세관에 앉았던 세리에서 사도로 바뀌었으니 하나님의 선물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부르신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은 마태를 찾아오셔서 부르셨듯이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요15:16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것도, 구원하신 은혜도 분명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레위가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세리들을 불러 함께 먹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눅5:27~29입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세리 친구들은 주로 세리입니다. (박세리 친구들은 골프선수들?) 그들이 모여서 예수님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이것을 비판하고 트집을 잡습니다. 어떻게 죄인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먹을 수 있느냐고. 이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세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1.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딱 한 부류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안 아파 본 사람! 그들 외에는 다 이해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이국종 교수가 죽어가는 중증환자를 치료했습니다. 판문점으로 월남하다 총상으로 내장만 일곱 곳이 파열된 오청성 병사를 살렸고 아덴만 작전에서 여섯 발의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을 살렸습니다. 의사가 얼마나 중요한지, 유능한 의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한 자는 의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얼마나 필요한 존재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치료하는 의사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치료자입니다. 단지 육신의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치료하여 자유케 하는 것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아픔, 근심과 염려까지도 치료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에 있는 염려와 근심만 아니라 분노와 증오, 두려움과 무서움도 치유하는 분이십니다. 손에 든 돌을 내려놓게 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 맡기면 치유받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채찍에 맞으심은 우리의 질병과 연약함도 담당하신 것입니다. 벧전2:24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예수님이 담당하지 못한 죄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신 지지 못할 짐은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온전히 믿음으로 맡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병든 자가 아니라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였습니다. 죽을뻔한 자가 아니라 죽었던 너희라고 했습니다(엡2:1).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어 인공호흡하고 심폐소생해서 살렸다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죽을뻔한 자를 살린 것입니다. 사람이 치료하는 것은 죽어가는 자를 살린 것이고 기절한 자를 깨어나게 한 것입니다. 수혈로 살리기도 하지만 살아있는 자에게 살 수 있도록 수혈한 것이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죽은 자라면 아무리 수혈을 한들 살아나지 않습니다. 의사가 치료하는 것은 붙어있는 생명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꺼질 뻔한 불씨를 다시 살린 것입니다. 넘어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살렸다는 것은 죽어가는 자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어떻게 살렸습니까? 죽은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어 살리신 것입니다. 단순히 회복, 소생시킨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 없이 주님이 일방적으로 그렇게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 은혜입니다. 은혜중의 은혜! 선물 중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를 살리는 의원으로 오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있으나 마나 하는 의원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유능한 의원이십니다. 우릴 위해 당신의 생명까지도 내어주시어 우리를 치료하는 의원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병든 자요, 죄인임을 고백하고 치료자이신 주님을 모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2. 내가 긍휼을 구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은 긍휼을 가르칠 때 이런 예화를 듭니다. 아버지가 옆집에 가서 삽을 빌려오라고 아이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안 빌려주었습니다. 얼마 뒤에 그 집에서 삽을 빌리러 왔습니다. 이때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빌려주라고 합니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따집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가 안 빌려줬다고 나도 안 빌려주면 그것은 그에게 복수하는 것일 뿐이고 빌려주면서 원망하고 투덜대면 아직도 그에게 지난 일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는 것이고 그가 필요해서 빌리러 왔으니 그냥 빌려주면 그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이것이 긍휼인데 우리 중에 이렇게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까? 긍휼이 무엇인지 알아도, 이해했어도 실천은 잘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배우라고. 배우라는 것은 처음부터 네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니 너희도 내게 배우라, 훈련하라, 배워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영어의 learn과 study는 다른 의미입니다. 둘 다 배우다, 공부하다, 이지만 study는 공부하다, 모르는 것을 알다, 연구하다는 의미가 있지만 learn은 아는 것을 몸에 배게 하다, 익히다는 뜻입니다. 새로운 지식과 방법, 기술을 몸에 배게 익혀서 적용하듯이 긍휼도 배워서 그렇게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study만 하지 말고 learn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은 자녀에게 이렇게 정의를 내립니다. ‘긍휼은 상대의 허물, 약점을 덮어주는 것, 참고 기다리는 것, 그 사람과 같아지는 것이다.’라고. 그 사람과 눈높이를 맞춰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먼저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죄인의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가 아니지만 세리의 친구가 되어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고 함께 앉아 잡수셨습니다. 죄인이 아니지만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의 죽음도 당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하늘 보좌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죄인의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죄인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지 않았다면, 이러한 긍휼을 베풀어주지 않았다면 우리 같은 죄인이 감히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의 이 긍휼을 배워야 합니다. 배워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닮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 익혀야 합니다.
긍휼은 조건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죄인 취급 받는 세리를 긍휼히 여기심은 어떤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긍휼은 이유가 없습니다. 과거의 어떠한 일도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에게 과거를 묻지 않고 맞아들였습니다. 과거에 어떠한 것도 이유가 될 수 없고, 이유가 되지 않는 사랑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세리 마태만을 긍휼히 여기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매달아 자신을 죽이는 자들과 십자가 아래 자신을 조롱하고 저주하는 사람들까지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또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사울까지도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할렐루야!
문제는 주님께 긍휼을 받고도 남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해져서 전해도 듣지 않는다고도 하고, 세상이 너무 흉흉해서, 라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나에게 있습니다. 멸망 길로 가는 영혼을 바라보고도 아무 슬픔도,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우리 마음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세상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할 자요, 또한 주님의 마음으로 긍휼을 베풀어야 할 자입니다. 긍휼을 베풀지도 않을뿐더러 구하지도 않는 내가 문제입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케 하러 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앞에 의인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롬3:10~12입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예수님은 이런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의인을 찾아오셨다면 그 앞에 설 자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을 찾아오셨기에 우리도 예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자신들이 의인이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의 율법적 열심이 자기들을 의롭게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교만하였습니다. 정작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고 용서 받아야 할 대상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정해놓은 사람들과 벽을 쌓은 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도 중에도 세리와 비교하면서 우리를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내 안에도 이런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이 다인줄 알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한다면 바리새인적인 요소가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이들이야말로 진실로 병든 자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그들의 의가 잘못된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고 고백하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고 나오는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용서해주십니다. 예수님께 나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이미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용서해 놓았습니다. 다만 이 사실을 몰라 용서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고 긍휼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죄인을 부르러 온 것처럼 우리도 죄인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저 사람은 안 돼’라고 선을 그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전도는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멸망으로 가는 영혼을 긍휼히 여겨 다가가는 전도야말로 긍휼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준 것처럼 우리도 그들을 긍휼히 여기며 주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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