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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대혁명에서 파리코뮌까지] 대혁명의 원인과 국민의회(1)
1. 귀족의 반동과 왕의 무능
프랑스 혁명과 같은 세계사적 사건은 결코 한두 가지 원인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 또 어떤 돌발적인 원인에 의해 갑자기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수많은 역사가들이 갖가지 각도에서 여러 차례 연구해 왔다. 우리도 앞장에서 그러한 연구 성과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혁명의 뿌리깊은 원인들이 무엇인가를 이미 살펴본 셈이다. 그러므로 이제 프랑스 혁명을 고찰하려고 할 때 다만 혁명의 직접 도화선이 된 귀족과 부르주아지의 대립 및 이 대립을 조정하지 못한 루이 16세에 관해서만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8세기 프랑스는 제도에 앞서 풍속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제도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잡고 있었으나 풍속은 부르주아의 돈과 재능을 바탕으로 한 성공을 따르고 있었다. 돈과 재능은 본질상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는 불평등했으나 현실의 풍속은 사회적으로 평등하였다. 이 풍속상의 평등에 불만과 불평을 숨기지 않고 대항한 것이 귀족의 반동이었다. 사회적 풍속을 지배한 것은 부르주아의 이념과 실력이었다. 당시 귀족이라면 허영과 사치와 나태를 대표하고, 부르주아라면 근면과 검약과 합리성과 능률과 자유를 의미하였다. 이때의 자유는 추상적,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의 자유와 기업의 자유였다. 또한 상공업을 규제와 금지에서 해방시키고, 이성과 과학을 신학과 도그마에서 해방시키고, 양심을 야만스런 편견에서 해방시키고, 토지를 봉건적 지조(地租)에서 해방시키는 자유였다. 이런 자유를 구가하는 노래는 이제 부르주아의 지휘에 따라 모든 사람이 부르는 대합창으로 변하였다.
대합창 소리를 눌러버릴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풍속상의 평등과 자유에 대한 대합창을 시대착오적인 낡은 제도와 권위로 막으려고 할 때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메티비에(Hubert Methivier)에 의하면 귀족이 지위를 회복하려는 운동은 네 방면에서 일어났다.
첫째는 토지의 수익을 늘리려는 갖가지 반동적인 방법인데, 주로 봉건적 공조의 강화와 회복의 형태로 나타났다.
둘째는 상공업에 대한 동산 획득 방법이다. 귀족이 상공업에 종사하면 귀족 신분을 상실하게 되는 1710년 이래, 몇몇 업종에 관하여서는 귀족의 출자와 경영 참여가 인정되었다. 귀족 기업가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귀족이 상층 부르주아와 결합하여 프랑스 공업을 지배하려고 하였다. 일부 도시에서는 이른바 상업 귀족이 나타났다. 귀족이라는 신분도 돈이라는 현실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귀족 신분을 지키는 길은 토지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새로운 상공업에 의해서 돈을 버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평민인 부르주아지가 만들어낸 주본주의 경제 구조에 적응함으로써만 귀족의 신분도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귀족의 자기모순이었다.
셋째는 귀족이라는 명예의 특권을 고수하는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으로 내려오면서 궁정에 출입할 수 있는 귀족 가문을 900쯤으로 한정한 사실은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들이 부르주아 출신의 햇내기 귀족들을 배격하고 스스로 명예의 특권을 회복하려는 표현이었다. 이것 역시 귀족계급의 자기 모순이었다. 귀족이 누리는 명예의 특권을 귀족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무력화시킨 왕권에 의하여 회복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한편 귀족 신분은 전반적으로 부르주아지의 상승에 대항하여 군대의 귀족화를 꾀하였다. 절대왕권이 신장하는 과정에서 유능한 부르주아가 왕군의 요직을 차지하는 일이 허다했는데, 이제 그 왕권을 지키는 군대의 중추를 귀족이 독차지하려고 부르주아를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781년 칙령은 선조 4대가 귀족임을 증명할 수 있는 자만을 장교에 임명하도록 하였다. 거기서 평민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의 햇내기 귀족도 군대의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넷째는 귀족의 정치적 반동이다. 이는 군대의 귀족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국가의 온갖 중추 기관에서 평민 출신을 몰아내고 귀족이 그 자리를 독점하려고 하였다. 루이 14세 시대에는 능력 본위로 인재를 등용했으므로 자연히 상층 귀족들이 국가의 요직에서 밀려나고 부르주아 출신들이 그 자리를 메우는 경우가 많았다. 교회에서도 이런 추세가 상당히 강하여 1780년경 프랑스의 대주교 중 잘반이 부르주아 출신이었다. 그런데 루이 14세가 죽은 후부터 귀족의 지위 회복 운동을 벌인 결과, 루이 16세 시대에 오면 교회의 고위 성직은 물론이고 국가 통치기관의 요직도 거의 전부 귀족이 다시 차지하게 된다. 이때의 귀족 신분은 명문인가 아닌가와는 상관이 없고, 단지 가톨릭교에 대한 신앙심이 있느냐, 계몽사상을 품고 있느냐가 문제였다.
그런데 부르주아의 힘이 이러한 귀족의 봉건적 반동에 밀리기만 하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했다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부르주아는 모든 면에서 상승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귀족과의 불안정한 균형을 깰 수 있을 만큼 지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귀족들이 부르주아가 차지한 고위직을 다시 빼앗을 수 있었다고 하여, 18세기 후반의 귀족이 부르주아의 상승세를 꺾을 힘은 없었다. 더구나 귀족의 반동이 강하면 강할수록 왕권을 약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한결 더 그러하였다. 귀족이 부르주아의 상승을 일시 누를 수 있었던 힘도 귀족 자체의 힘이 아니라 왕권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그 귀족이 왕권을 약화시켜서 먼 옛날 왕권에게 빼앗긴 봉건권을 회복하려고 했으니 그 모순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러한 모순을 안고 있는 귀족의 반동은 어차피 귀족 자체의 몰락을 가져오게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런 몰락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도록 한 사건이 귀족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졌다. 바로 재정 문제에 대해 귀족이 내놓은 해결 방안이었다. 방안의 주요 골자는 귀족이 면세 특권이라는 봉건적 특권을 그대로 누리면서 국가재정의 엄청난 적자를 해결하려는 어이없는 방안이었다. 인구 전체의 2퍼센트에 불과한 50만의 특권 신분이 국가 재산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은 세금을 내지 않고 제3신분에게만 모든 세금을 매겨서 국가의 재정 적자를 해결하겠다고 했을 때, 상승일로에 있는 부르주아지와 특권 신분의 충돌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 두 계급의 충돌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조정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이 공정한 조정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했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또 설혹 일어났더라도 초기에 원만한 해결을 보는 데 성공했을 것이다. 루이 16세는 이렇게 중요한 권력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중요한 역사적 역할을 수행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흔히 역사의 도도한 흐름 앞에서 개인의 존재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나, 상황에 따라서 개인의 힘은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으로서, 개인이 자리한 위치에 따라 역사에 미치는 힘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으나 그 힘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백년전쟁 말기에 프랑스의 패퇴를 역전시킨 무명의 소녀 잔 다르크(Jeanne d'Arc)의 힘은 결코 한낱 전설적인 것으로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는 능히 잔 다르크의 출현이 가능한 것이다. 잔 다르크처럼 무명의 소녀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하물며 막강한 공적 권력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루이 16세의 경우는 잔 다르크와는 반대로, 막강한 공적 권력을 사용하여 프랑스이 파국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본인의 무능으로 실패한 사례로 남았다.
루이는 흔히 말하는 ‘사람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에는 유능하다든가 흑백이 분명하다든가 의지가 꿋꿋하다든가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혹은 믿음직하다든가 하는 따위의 뜻은 들어 있지 않았다. 루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뚱뚱한 몸집에 어디로 보나 호인형의 남자였다. 미식가이고 무도회와 사냥을 즐기고 특히 열쇠를 만드는 취미가 있었다. 취미를 취미 삼아 즐기는 정도라면 골치 아픈 정무에 휴식을 제공하는 오락거리쯤으로 생각하겠지만, 루이는 골치 아픈 정치는 아예 질색이고 사냥과 열쇠 만들기에만 전념하는 편이었다. 그는 국왕 참의회에서 골치 아픈 일이 논의되면 곧 피곤해져서 회의석상에서도 졸곤 했다고 한다. 그런 인물이었으니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다 한들 무슨 유익한 일을 과단성 있게 해낼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에 직면하여 어찌 일을 제대로 판단하여 책임성 있게 처리할 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최고 권력자를 두었던 프랑스는 분명히 불행한 나라였다. 그러나 그러한 국왕일지라도 국왕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똑ㄸ고하면 국가의 불행을 피할 수도 있고 또 불행을 더 ㄹ수도 있는데, 루이의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마저 없었다. 루이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쳤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허영심이 강하고 경박하고 수다스럽고, 나쁜 의미로 정열적이고 춤을 즐기고 별별 추문을 다 만들어내는 여자였다. 루이와 프랑스의 불행을 한층 더 악화시킨 것이 이 여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프랑스 혁명을 반대하는 국제적 음모에 앞장선 오스트리아 황제의 왕녀였다. 만일 루이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라 현명하고 정숙한 프랑스 여인을 왕비로 두었더라면 루이와 프랑스이 불행은 정도가 덜했을지도 모른다.
한때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저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간단히 살펴보면 루이와 왕비, 그리고 그들 주변의 궁중 꼴이 어떠하였던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라 모트(Jeanne Balois de la Motte) 백작부인은 여자 사기꾼이고 로앙 추기경(Cardinal de Rohan)은 바람둥이 오입쟁이었다. 이 둘은 불륜의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백작 부인은 앙투아네트와 아주 친한 사이인 것처럼 행세하였다. 그런데 값비싼 다이아몬드 목걸이 하나가 파리의 보석상에 있었다.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를 사고 싶었으나 루이가 사주지 않았다. 이것을 알았던 백작 부인이 로앙에게,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왕비에게 사드리는 데 중간 역할을 해준다면 왕비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넌지시 암시하였다. 백작 부인은 왕비에게 팔아주겠다고 보석상에서 목걸이를 건네받은 후, 로앙에게는 거저 줄 터이니 그것을 왕비에게 선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상을 풍겼다.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바람둥이 로앙은 이게 웬 떡이냐고 좋아하여, 어느 날 저녁 왕비라고 확신한 어떤 부인과 베르사유 궁전의 나무 그늘에서 달빛을 받아가며 밀회를 즐겼다.
얼마 후 보석상이 목걸이 외상값을 궁정에 청구해 옴으로써 이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루이는 이 수치스런 일을 은밀히 처리하려고 하지 않고 고등법원의 손을 빌려서 자기의 명예가 침해당한 데 대해 보복하려고 하였다. 백작 부인은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을 살다가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망가서 <라 모트 백작 부인의 변명서>라는 책을 써서 사건의 전모를 폭로하였다. 게다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남편 라 모트 백작이 벌써 영국으로 갖고 도망치고 없었다. 한편 로앙 추기경은 고등법원으로부터 무죄로 석방되어 세간의 갈채를 받았는데, 이 판결은 프랑스 왕비를 유혹하는 것쯤은 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범죄가 아님을 증명한 셈이었다. 이때부터 파리 경찰국의 진언에 따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시민의 시위를 두려워하여 파리에 가지 못하였다. 같은 해 1786년에 스트라스부르 조폐국에서는 루이 금화를 주조하였는데 그 금화에 새긴 왕의 초상에는 뿔이 달려 있었다. 초상의 뿔은 간통한 아내를 둔 남편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왕궁의 추태와 악평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왕의 측근들이 있었다면 아마 사태는 그다지 심각하게 악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루이를 가장 걱정해 주어야 할 왕의 아우들인 아르투아 백작과 프로방스 백작 및 왕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 등은 걱정은커녕 오히려 루이를 퇴위시키고 자기들이 왕위에 오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등법원이 루이 16세의 무능력자 선언을 하도록 획책하고 있었다. 혁명 전야의 왕실 꼴이 이 모양인데도 루이 16세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고 그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기 마음속의 권력자로 자리 잡은 왕비와 무책임한 측근들의 예상과 계획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끌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