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원 지음: 동학농민혁명 시기 공주전투 연구(모시는사람들, 2024년 11월 15일 발간)를 읽고
틈틈이 동학 공부를 해 오던 중, 동학과 관련하여 의미가 심중한 신간 한 권을 만났다. 정선원 선생의 『공주전투 연구』가 그것인데, 비단 우금티 전투에 관한 사실 연구일 뿐만 아니라, 내 생각으로는 동학에 관한 여러 새로운 연구 결과를 접할 수 있는 귀중한 책으로 보였다.
동학 연구의 공로자이신 박맹수 교수도 “이 책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전체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며, 정 박사의 저서를 읽지 않고서는 앞으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제대로 논할 수 없을 것”이며, 이 저서가 “앞으로 동학농민혁명 연구의 전범, 즉 교과서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래서, 마음과 자세를 다잡고 이 책을 읽던 나는, 누선도 이미 말라버린 80이 넘은 노인으로서도, 여러 번 눈물을 흘렸다.
우선, 우금티에서 짚신 감발을 하고 흰옷을 입은 130년 전의 이 땅의 백성들이 일본군의 스나이더 소총의 탄환에 쓰러져 간 그 엄청난 제노사이드에 분해서 울었고, 전주화약 이후에는 동학사상을 체화한 일반 민중들이 “사회 운영의 주체”로 거듭났다는 데에 감동해서 울었으며, 속수무책으로 경복궁에 갇혀 일본군의 포로 상태였던 왕과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이 시키는 대로, 자기 백성들을 향해 스나이더 총을 쏘는 일본군을 안내하고, 자기 백성들과 싸우는 일본군의 지휘에 따르던 조선 관료와 군인들의 처지와 행태가 더럽고 가증스러워서 울어야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최근에 드러난 ‘우리 국사의 진실’과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밑바탕으로 해서, 공주 일원의 전투를 새로이, 철저히 연구한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 국사의 진실’이라 하면, 그것은 나카츠카 아키라(中塚 明) 교수에 의해 발굴된 진실, 즉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불법 점거하고 고종을 사실상 감금하여 일본군의 포로로 만들었고, 갑오경장을 단행했다는 김홍집 내각이 실은 일본의 괴뢰정권이었으며, 그 괴뢰정권으로부터 ‘청군 축출 요청’을 받았다며, 이틀 후인 7월 25일에 청일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즉, 경복궁 점령, 갑오경장의 조선 정부, 청일전쟁, 그리고 동학농민혁명군의 2차 봉기가 각각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큰 사건, 즉 갑오년의 왜란이란 사실이다.
또한, ‘일본의 역사 왜곡’이란, 이 모든 사실을 1894년 당시의 일본 외무성과 일본 군부는 ‘조선 보호’라는 미명하에 불리한 증거를 모두 없애고 철저히 속였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당시 일본 당국은 조선인만 속인 게 아니라 자국민과 조선 주재 외국 공관 전체를 모두 속이고, 사건들을 모두 왜곡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들이 전제되지 않은 동학농민혁명과 그 전투에 대한 연구는 이제부터는 거의 모두 시의(時宜)를 상실하며, 재검토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전봉준 등의 2차 봉기가 1차 봉기 때처럼 더는 지방관의 탐학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복궁에 포로로 갇힌 국왕을 해방시키고 일본의 괴뢰정권인 김홍집 내각을 무너뜨리기 위한 봉기였다는 사실이다.
나카츠카 아키라의 ‘경복궁 침입’ 규명 이외에도, 혹카이도대학 이노우에 카츠오(井上勝生) 명예교수가 발굴한 어느 일본병사의 「종군일지」를 참고한 것도 이 책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즉, 이 「종군일지」가 발굴됨에 따라 동학농민혁명군을 진압하기 위해 특별 파견된 부대인 후비(後備) 제19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南 小四郞) 소좌의 행적과 그 왜곡 이전의 죄상이 밝혀짐으로써, 공주전투가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되는 것이다.
아, 이 책을 읽으면, 종국에는, 무엇보다도 우리가 잘못 배워온 우리 역사를 재발견하게 되고, 도대체 우리 사학자들은 그동안 무엇을 연구해 왔는지 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슬픔이 생긴다.
일본인들이 증거를 인멸해 놓고 왜곡해 놓은 그 역사를 그대로 베껴서 그것을 우리 국사로 가르쳐 온 것이다.
경복궁 침입 사건을 알지 못했던 까닭에, 청일전쟁과 갑오경장의 상관관계를 몰랐고,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최대의 적이 동학농민혁명군이었으며, 전봉준 등은 실제로 고립무원으로 일본군과 싸운 것이었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최근에 박맹수 교수를 통한 나카츠카 교수와 이노우에 교수 등 소위 일본의 '자학사관(自虐史觀) 역사학자'들의 1차 자료 발굴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라 치더라도, 우리의 국사학자들은 왜 이것을 뒤늦게나마 알고서도, 진실에 새삼 놀라며 진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면서 국사 교육을 개선할 노력을 하지 않고 있는지 정말 심각하게 따져 묻고 싶다.
다시 공주전투로 돌아가자면, “공주전투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야만성을 여실히 폭로하는 사건이었고, 일본군의 조선 민중에 대한 ‘제노사이드(특정 집단의 멸종을 목적으로 한 대량 살륙 행위) 군사 작전’을 실행했던 현장이었다.”(391쪽).
이것은 을사늑약 11년 전의 일이었으며, 일본인들이 ‘영광의 시대’, ‘무오류의 시대’라고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메이지시대(1968-1912) 안에 일어난 일이다.
이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위의 「종군일지」 1895년 2월 4일 자 기재사항에는 장흥 등지에서 패퇴하다가 조선 민보군과 일본군에 체포되어 학살당한 동학농민군의 ‘시체 680구’가 나주 남문밖 400미터 지점인 초토영(招討營) 앞의 야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주변에 악취가 진동하고 사람의 기름이 흐르다가 백은(白銀)과 같이 얼어붙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국제법 상으로도 명백한 ‘제노사이드’다.
박맹수 교수는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산화하신 수십만 동학농민군의 영령을 추모하는 ‘통곡의 벽’이 우금티 고갯마루에 세워지기를”(이 책의 뒷표짓글에서) 간원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나 역시 이 소원에 완전 동감이다.
현재 세워져 있는 우금티 위령비는, 내가 보기에는, 일본인과 이 땅의 신친일파에게 경종을 울리기엔 너무 초라하고 빈약하다.
처절하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우면서도 귀기가 서린 기념비, 일본인도 신친일파도 그 앞에서는 통곡하고 싶은 그런 기념비가 필요하다!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는 것은 일본인 자신을 위해서도 결국엔 좋지 않을 것이다. 나카츠카, 이노우에 교수 같은 일본 사학자들이 이 사실을 더 잘 알고 있고, 오늘의 일본인들도 그들의 미래를 위해 이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이 책을 내신 정선원 선생의 오랜 발품과 불굴의 집념에 경의를 표하고, 이 기회에, 나카츠카, 이노우에 선생같은 양심적 일본인 사학자들과 교분을 맺어서 그들로 하여금 조선과 일본의 역사 왜곡의 진상을 드러내게끔 협조해 오신 박맹수 교수께도 삼가 감사드린다.
-안삼환 교수 페북 포스팅
2024년 5월 28일 포항시청 대잠홀
화전을 일군 골이었기에 시커먼 재로 뒤덮힌 산골이라서
주민들이 예로부터 검등골, 금등골이라 했다.
검등골을 한자의 뜻이 아니라 소리를 빌려 표기하여
검악곡(劍岳谷), 낙동정맥 괘령 아래의 험준한 산 봉우리를 검악(劍岳)이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운 선생이 해월 선생에게 도통을 전하며 준 시,
龍潭水流四海源(용담수류사해원)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의 근원이 되고,
劍岳人在一片心(검악인재일편심)
검악에 사람 있어 일편단심일러라.
1989년 7월 28일, 표영삼 선생 등 천도교인들과 함께 검등골을 다녀가며 지은
도올 선생의 시 제목이 '도올검결'이다.
여기서 검결(劍訣)은 '검등골(검악)의 비밀스러운 노래'라는 뜻이다.
"내 어찌 입을 열랴/ 되돌아가자 마개 막아두고/ 천년후 말하리라/ 개벽의 이 만남을"
꼭 30년 전, 1994년 6월 6일 현충일에
김용옥 교수의 영화 시나리오, <<천명, 개벽>>를 사서 읽던 중
이 책의 머리말에 실린 이 시를 읽었다.
해월 선생이 포항 사람이고,
수도하던 곳이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해월 선생의 고향 마을 기일(터일), 수운 선생을 모신 곳이 흥해 매산리(매곡리) 손봉조의 집이라는 것 등
표영삼 선생의 <<동학>>(1, 2)를 읽고 수운, 해월 두 선생의 자세한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그 뒤에 포항문학 회원들과 함께 신광면 사람의 안내를 받아
신광면 마북리 검등골 해월 선생 사시던 집터를 찾았고, 뒤에 혼자서 찾아가기도 하였다.
답사한 뒤에
아동문학가, 색동회 회원인 고 조무근(포항제철초등학교 근무) 선생이
시청에 항의 전화하여 해월 선생 검등골 집터로 가는 안내 팻말을 세우게 하였다.
나는 지역 신문에 해월 선생 검등골 집터 탐방 칼럼을 2회 실었고,
<<포항문학>>에 '동학'을 특집으로 실었다.
또, 노거수회 기관지 <노거수>에도 포항지역 해월 선생 행적을
표영삼 선생의 <<동학>>(1, 2)에서 간추려 싣기도 했다.
하지만, 시민단체나 포항시 차원에서 '해월'에 대한 아무런 반응이 없고 사업도 없었다.
심지어, 포항시사 편찬위에서도 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몇 년 전부터 동대해문화연구소 이석태 이사장님을 비롯한 지역 시민단체가
포항시와 포항시의회를 움직이고, 도올 선생이 35년 만에 다시 검등골을 찾고,
포항시청 대잠홀에서 도올 선생의 강연이 있었다.
그리고, 해월선생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곧 해월선생 현창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인제군 갑둔리 동경대전 및 용담유사 초판본 간행지
2024년 11월 23일
동경대전과 용담유사의 서지학적 문헌 비평은
김용옥 교수의 <<동경대전1>>에 자세하다.
각판(목판을 새김)이 아니고 목활자로 조판하고 인쇄 제책한 곳이다.
원주 호저면 송골 1898년 해월 선생이 관병에게 체포되신 곳. 집은 복원.
동대해문화연구소 이석태 이사장님의 설명
단양 남천동(샘골) 용담유사(龍潭諭詞) 재간한 여규덕(몽양 여운형 선생의 백부?) 집이 있던 마을 입구에
해월선생 순도 100주년인 1998년에 세운 비석.
비문에서 용담유사의 한자 표기에서 '遺'자를 쓴 것은 오자.
명태조의 '6유(諭)'처럼 용담유사의 '유'는 동경대전과 함께 수운 선생이 지은 '가르침'의 가사이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노계 박인로 선생의 문집을 재간행할 때 발문을 수운 선생의 부친 근암 최옥 선생이 썼다.
수운은 노계의 가사를 잘 알고 있었다. 용담유사도 노계의 가사 문학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