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회] 어용교수의 글 불순광고 게재 거부
장준하 평전/[11장] 반이승만 투쟁과 4월혁명 2008/12/21 08:00 김삼웅 장준하가 독재정권의 탄압을 받으면서 <사상계>를 정론지로 키우고 이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민주언론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주위에 우수한 인력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기서는 어용교수의 원고와 일본산 피아노광고 게재 거부에 대한 사례를 들고자 한다.
이승만독재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이 하루가 멀다 하게 게재되었다. <사상계>에도 어용교수로 알려진 서울대 이 모 교수의 글이 ‘배당’되었다.
'국부 이승만박사의 계시(啓示)한 민주주의의 이념'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고이다.
어용 작가 교수들을 동원하여 정부찬양의 글을 쓰게 해 가지고 전국 각 신문잡지에 강제배당하여 게재시킴으로써 한때 ‘만송족(晩松族)’이란 말이 세상에 유행어가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던 시절이 있다.
한번은 목사요 철학박사인 당시의 공보처장(지금의 문화공보부 장관과 같음)인 모씨로부터 서울대학교의 이O조 조교수의 명의로 집필된 '국부 이승만박사의 계시한 민주주의 이념'이란 제목의 글을 <사상계>에 게재하기를 바란다는 전갈과 함께 50장 가량의 원고를 공보처 출판과장이 들고 온 것이다. 그 무렵 이박사를 ‘국부’라 한 것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 분의 가르침을 갖다가 ‘계시’라고까지 이름 붙여 글에다 쓴 건 나로선 처음 구경한 일이었다.
‘계시’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 가르쳐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닌가?
요샛말로 말해서 참 웃기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고 오늘날 생각할 때 자유당 정권이 넘어진 게 참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국부’라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으니 이제 신격화시키자는 모양인데 못된 정권일수록 이런 간악한 아첨배들의 밑에 붙어서 갖은 교묘한 발상법으로 그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는 법인 것이다.(중략)
우리 <사상계> 관계자들 중에는 후일 보복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제목만을 적당히 고쳐서 실어보자는 측도 있었지만 나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그 원고를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런 걸 실어가며 구차히 목숨을 부지해나가느니 차라리 죽게 되면 죽자는 비장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공보처장은 ‘광무신문지법’까지 원용하여 가며 당시의 유력 일간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관록(?)을 지닌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 무렵 그런 종류의 글을 다른 신문 잡지에서는 거의 매호마다 계속하여 싣지 않고는 못 견디던 때인 데도 우리 <사상계>만은 단 한번도 안 싣고 말았다. (주석 15)
당시 이승만 정부는 가장 격렬한 논조의 야당지 <경향신문>을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하여 폐간시켰다. 표면상의 이유는 ① 59년 1월 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지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사실을 날조, 허위보도했고 ② 2월 4일자 단평 '여적'이 폭력을 선동했으며 ③ 2월 15일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휴발유 부정처분 기사가 허위사실이고 ④ 4월 15일자 이승만대통령 회견기사 '보안법개정도 반대'가 허위보도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적 이유는 <경향신문>의 강력한 정부 비판에 대한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경향신문>은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4월혁명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준하가 정부에서 ‘배당’한 이대통령 찬양 논문을 싣지 않고 돌려보낸 것은 폐간을 각오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자유당 치하의 우리 <사상계>의 역사는 수난사라기 보다는 투쟁사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것도 항상 이기는 투쟁사였다. (주석 16)
다음은 박정희정권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사상계> 광고부장의 증언이다.
나는 어느 날 큰 광고주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야마하 피아노 한국대리점이 개설되어 피아노광고를 1년 계속해서 게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광고신탁서를 받아온 나는 신바람이 나서 <사상계>사에 와서 편집부에 보고했다. 다음날 장준하 사장께서 나를 좀 보자고 하시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광고를 주문받아오느라 수고했지만 그런 광고는 우리 <사상계>에 게재할 수 없으니 되돌려주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광고의 제품이 바로 일제 피아노였기 때문이다.(주석 17)
주석
15) 장준하, 앞의 글, 22~23쪽.
16) 장준하, 앞의 글, 23쪽.
17) 임광수, '그런 광고는 사상계에 안되오', <광복 50년과 장준하> , 221쪽.
이승만독재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신문과 잡지에서는 이대통령을 찬양하는 글이 하루가 멀다 하게 게재되었다. <사상계>에도 어용교수로 알려진 서울대 이 모 교수의 글이 ‘배당’되었다.
'국부 이승만박사의 계시(啓示)한 민주주의의 이념'이란 제목의 글이었다. 다음은 장준하의 회고이다.
어용 작가 교수들을 동원하여 정부찬양의 글을 쓰게 해 가지고 전국 각 신문잡지에 강제배당하여 게재시킴으로써 한때 ‘만송족(晩松族)’이란 말이 세상에 유행어가 되어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던 시절이 있다.
한번은 목사요 철학박사인 당시의 공보처장(지금의 문화공보부 장관과 같음)인 모씨로부터 서울대학교의 이O조 조교수의 명의로 집필된 '국부 이승만박사의 계시한 민주주의 이념'이란 제목의 글을 <사상계>에 게재하기를 바란다는 전갈과 함께 50장 가량의 원고를 공보처 출판과장이 들고 온 것이다. 그 무렵 이박사를 ‘국부’라 한 것은 하나도 새로운 것이 없는 것이지만 그 분의 가르침을 갖다가 ‘계시’라고까지 이름 붙여 글에다 쓴 건 나로선 처음 구경한 일이었다.
‘계시’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없는 것을 신이 가르쳐 있게 한다는 뜻이 아닌가?
요샛말로 말해서 참 웃기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고 오늘날 생각할 때 자유당 정권이 넘어진 게 참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국부’라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으니 이제 신격화시키자는 모양인데 못된 정권일수록 이런 간악한 아첨배들의 밑에 붙어서 갖은 교묘한 발상법으로 그 정권의 운명을 재촉하는 법인 것이다.(중략)
우리 <사상계> 관계자들 중에는 후일 보복을 두려워하여 어떻게 제목만을 적당히 고쳐서 실어보자는 측도 있었지만 나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고 그 원고를 되돌려 보내고 말았다. 그런 걸 실어가며 구차히 목숨을 부지해나가느니 차라리 죽게 되면 죽자는 비장한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그 공보처장은 ‘광무신문지법’까지 원용하여 가며 당시의 유력 일간지 <경향신문>을 폐간시키고 관록(?)을 지닌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 무렵 그런 종류의 글을 다른 신문 잡지에서는 거의 매호마다 계속하여 싣지 않고는 못 견디던 때인 데도 우리 <사상계>만은 단 한번도 안 싣고 말았다. (주석 15)
당시 이승만 정부는 가장 격렬한 논조의 야당지 <경향신문>을 미군정법령 88호를 적용하여 폐간시켰다. 표면상의 이유는 ① 59년 1월 11일자 사설 '정부와 여당의 지지멸렬상'에서 스코필드 박사와 이기붕 국회의장 간의 면담사실을 날조, 허위보도했고 ② 2월 4일자 단평 '여적'이 폭력을 선동했으며 ③ 2월 15일자 홍천 모 사단장의 휴발유 부정처분 기사가 허위사실이고 ④ 4월 15일자 이승만대통령 회견기사 '보안법개정도 반대'가 허위보도라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적 이유는 <경향신문>의 강력한 정부 비판에 대한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경향신문>은 폐간된지 361일 만인 1960년 4월 27일 4월혁명과 함께 복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준하가 정부에서 ‘배당’한 이대통령 찬양 논문을 싣지 않고 돌려보낸 것은 폐간을 각오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자유당 치하의 우리 <사상계>의 역사는 수난사라기 보다는 투쟁사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것도 항상 이기는 투쟁사였다. (주석 16)
다음은 박정희정권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사상계> 광고부장의 증언이다.
나는 어느 날 큰 광고주 하나를 만나게 되었다. 다름 아닌 야마하 피아노 한국대리점이 개설되어 피아노광고를 1년 계속해서 게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광고신탁서를 받아온 나는 신바람이 나서 <사상계>사에 와서 편집부에 보고했다. 다음날 장준하 사장께서 나를 좀 보자고 하시더니 근엄한 표정으로 광고를 주문받아오느라 수고했지만 그런 광고는 우리 <사상계>에 게재할 수 없으니 되돌려주라고 말씀하신 그분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광고의 제품이 바로 일제 피아노였기 때문이다.(주석 17)
주석
15) 장준하, 앞의 글, 22~23쪽.
16) 장준하, 앞의 글, 23쪽.
17) 임광수, '그런 광고는 사상계에 안되오', <광복 50년과 장준하> , 2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