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를 잊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 “권태를 잊기 위해 살인을 한다.”
엉뚱하게 들릴지 몰라도 인간 심리를 꿰뚫는 근거 있는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기초적 요구는 의식주 해결이다. 이것의 결핍으로 인간의 기초생활이 타격받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는 순간엔 권태를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가 해결되어 위장이 넉넉히 채워지고 지방질이 축적되는 동안 소리 없이 다가오는 불청객이 권태다.
이제 그의 마음엔 의식주를 찾아 움직일 때의 절박함이 사라지고 나른한 취기와 포만감이 깃들기 시작한다.
위장에 기름기가 끼고 안일한 환경에 익숙해지면 이제 그는 삶이기보다 권태 해결을 위해 눈을 굴린다.
식도락, 도박, 섹스, 스포츠, 스크린, 관광, 등산, 사냥에 탐닉하다가
그것도 시큰둥하여 급기야 전쟁이라든가 살인에까지 눈을 돌린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권태란 지루함인가? 태만인가? 지겨움인가?
그러면 인간은 왜 지루함이라든지 지겨움을 느끼는 것인가?
개나 고양이 호랑이나 코끼리에게도 권태라는 것이 있을까? 아니다.
그들에게 배가 불러 물림은 있을지언정 권태는 없다. 그러면 왜 유독 인간에게만 권태가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개인적 취향이나 문화적 환경에서 찾으면 안된다.
그러면? 권태는 종교적인 문제다. 왜? 권태는 인간이 하나님 없는 영역에 서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권태란 하나님의 신비 밖에서, 죄의 테두리 안에서 부딪치는 존재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권태란 하나님 없는 공백에 깃드는 무의미감 또는 역겨움이다.
권태란 하나님 바깥에서 찾아올 수밖에 없는 생리적인 바이러스 같은 것이다.
냉장고를 이탈한 얼음덩어리는 녹기 시작하고 진공상태로 포장되지 아니한 물건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향기 가득한 정원이 아니라 오물 가득한 쓰레기 더미 위를 벌과 나비는 날아다닐 수 없다.
사람은 육체 뿐 아니라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라서
영성에 적합한 삶이 아닌 삶, 영성 이하의 영역에서 체험하는 구토증이 권태다.
따라서 권태의 반대말은 경이감 또는 신비감이다.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났을 때 사람은 신성을 잃어버리고 신비를 상실했다.
그래서 날개 잘린 매미가 땅바닥 위에서 꿈틀대듯이
신비를 잃어버린 인간은 어느 누구라도 지겨운 생존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신비가 무엇인가? 하나님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권태를 모르시고 권태롭지 않다.
또 오직 하나님 안에 일치된 존재 방식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권태롭지 않다.
소크라테스도 권태롭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도 권태로운 인물이다.
부처 공자 마호메트에게서 권태로움 이상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볼테르 사르트르 버나드 쇼 니체 프로이트 칼 맑스 리처드 도킨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샘 해리스 같은 불경한 인물들은 권태가 아니라 구토증을 일으킨다.
인간 역사상 권태롭지 않은 오직 한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다.
그분은 권태가 불가능하다. 그분은 무한한 신성이 영원한 향기를 일으킨다.
그분이 바로 육화되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을 담고있는 복음서는 단 한번의 권태를 일으키지 않는다.
누가복음 5장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를 만나시는 주님의 기사에서,
누가복음 7장 나인성 과부 앞에 서신 주님의 기사에서, 또 죄인인 여자가 기름을 붓는 기사에서,
요한복음 1장 시공을 초월하여 무화과나무 아래의 나다나엘을 투시하는 주님의 기사에서,
요한복음 8장 돌에 맞아죽을 뻔한 여자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기사에서,
마가복음 5장 귀신들린 사람 안의 수천의 귀신을 내쫒아주시는 주님의 기사에서,
어린아이를 품에 품으시는 주님의 기사에서...
우리는 권태가 아니라 숨돌릴 틈도 없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주를 목격하는 것이다.
인간세계에서 권태에 포위될 때 성경으로 들어가라. 기도 속으로 들어가라.
예배 속으로 들어가라.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들어가라.
2023. 6. 17
이 호 혁
첫댓글 주님의 무한한 신성이 영원한 향기를 일으키듯 저 또한 그런 향기를 품게 하소서~
아멘! 늘 주님 안에 거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