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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윤리교육과를사랑하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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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역사] 발표자료 [민족국가의 태동과 제국주의의 침략] 왜 갑신정변은 3일천하로 끝나버렸을까? -팔색조 모둠
10 안윤석 추천 0 조회 188 10.11.08 05:16 댓글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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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11.08 21:53

    첫댓글 * 팔색조 : 다음 발표 제목, 다시 생각하세요.

  • 작성자 10.11.14 22:46

    수정하였습니다.

  • 10.11.08 18:04

    그들이 삼일천하에 머물렀던 것은 급진성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급격하게 계획을 추진했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허점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겠죠. 그러나 정작 그들이 실패한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민중의 지지가 부족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습니다. 과도기적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민중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간과한 것이 가장 큰 실패 요인입니다.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았습니다. 김옥균은 일본의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메이지유신 과정에는 외세에 대한 의존이 없었습니다.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 10.11.08 13:10

    그러나 우리나라의 급진적인 개화파들은 정치적 기반이 부족했습니다. 군사를 일으킬 만한 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에 의존한 것은 잘못입니다. 외세에 의존하는 것은 또 다른 외세를 불러들입니다. 지지기반을 민중에서 찾지 않고 외세에서 찾았다는 것이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갑신정변의 실패 요인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새 시대의 흐름은 민중과 기존 지배층과의 결합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다고 볼 수 있는 그들에게서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 10.11.08 13:56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병옥 학우의 말처럼 그들은 급격하게 계획을 추진하다 도리어 일을 그르쳤습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역행했다고 생각한 병옥 학우의 말에 동의합니다.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흐름이 아니라면 그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16:31

    * 천병옥 : 1) 과도기적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민중의 힘을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었습니다. ->> 2)

  • 10.11.08 18:03

    수정하였습니다.

  • 10.11.08 15:10

    사막을 횡단할 때 가장 힘든 점은 목마름과 배고픔도 아닌 작은 모래알갱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세세한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세력은 청나라군대를 별로 중요(重要)하게 생각하지 않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것이 큰 화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또한, 그들은 개혁(改革)에 성공할 생각만 하고 있었고 후의 일이나 실패하였을 때의 일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준비부족과 섣부른 계획이 그들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어떤 일을 준비할 때는 세세(細細)한 것부터 시작해 그 일이 미칠 수 있는 여파(餘波)를 충분히 고려한 다음에 그 일을 추진(推進)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14:29

    저도 갑신정변 주도자들의 치밀함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얕보았던 작은 것 하나가 실패라는 결과에 한몫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는 서두르는 것보다 꼼꼼하고 세심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초가 튼튼해야 무엇을 하든 나중에 무너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 10.11.08 18:34

    갑신정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습니다. 점점 커가면서 스스로 기준을 정해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나누어서 공부하는 습관이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학문을 바라보지 않고 세세한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점을 반성해봅니다. 사소한 것이 더욱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갑신정변의 실패를 통해 다시 한번 배웁니다.

  • 10.11.08 14:27

    갑신정변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났지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失敗)를 계기로 우리가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갑신정변은 백성들의 공감(共感)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딛고 민중의 의식을 깨우치기 위해 독립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실패를 통해 나아가야 할 방향(方向)을 잡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실패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서 교훈(敎訓)을 얻고 올바른 목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10.11.08 14:46

    저도 심설 학우와 같은 생각입니다. 갑신정변은 민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소수만이 아닌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10.11.08 14:52

    맞습니다. 어떠한 일의 결과에만 급급해하지 않고 과정에서 교훈을 얻고, 결과에서 많은 것을 느낀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갑신정변도 비록 실패했지만, 그 속에 담긴 많은 교훈으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실패했을 때 좌절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 10.11.08 21:59

    1884년 12월 4일 개화파는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하고자 우정국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축하연에 참여한 수구파의 우두머리를 처단하고 민영익에 부상을 입혔지만 결국 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실패한 원인은 준비가 철저하지 않았고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철저한 준비의 필요성과 사회는 소수의 힘이 아닌 민중의 힘이 중요함을 깨달았습니다.

  • 10.11.08 16:34

    * 이인선 : 다른 댓글과 차별화되도록 내용을 보완하세요.

  • 10.11.08 21:59

    수정하였습니다.

  • 10.11.09 01:19

    대중의 힘이 밑바탕이 되고 선각자들이 앞에서 국민을 잘 이끌어주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사회는 엘리트와 민중이 조화될 때 발전될 수 있습니다. 엘리트와 민중을 포함한 집단 전체가 정치의 주체이고 국가의 힘입니다.

  • 10.11.08 14:49

    국가의 주체는 민중(民衆)입니다. 그러므로 민중들이 중심(中心)이 되어 이루어진 아래로부터의 개혁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소수(少數)만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위로부터의 개혁(改革)이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또한, 급하게 개혁을 단행하려고 했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準備) 없이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Be prepared'의 자세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의 영향력과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 10.11.08 18:08

    그렇습니다. 갑신정변은 소수만의 개혁이었습니다. 정권 획득을 위한 개혁이었죠. 민중을 생각하지 못한 것은 큰 실수입니다. 물론 그들의 정강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는 있지만, 주체가 기득권층이 되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근대적인 사회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봉건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 10.11.08 23:06

    네, 동의합니다. 민중무시하면 개혁이나 개몽의 대상을 없습니다. 같은 원리, 민중으로 뒤받침을 보이지 않으면 보수세력과의 투쟁에 성공의 기회를 약합니다.

  • 10.11.08 18:25

    갑신일록은 김옥균이 갑신정변 때의 일을 기록한 일기입니다. 윤석 학우께서 발표에서 말씀하셨듯이 이 자료는 강범석 교수에 의해 위작일 수도 있다는 논란을 받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한번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수용하는 정보들이 결코 사실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정보들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아 그 본질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갑신정변 역시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여러 원인을 다각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욱이 정보의 바닷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갑신일록의 위작 논란은 안일한 태도로 정보를 마냥 수용

  • 10.11.08 18:25

    만 하는 우리를 반성하게 해줍니다.

  • 10.11.08 20:23

    자윤 학우의 글을 보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참되고 진실한 것을 찾아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과거의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역사적 사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갑신정변의 갑신일록도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업을 들으며 많은 탐구와 토론을 통해 올바른 것을 볼 줄 아는 눈을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에서 많은 훈련을 통해 우리 모두 진실을 구별해내는 지성인이 됩시다.

  • 10.11.08 20:15

    3일 만에 끝이 난 사건이 역사 속에서 이렇게 오래오래 묻히지 않고 기억된다는 것은 분명히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신정변은 새 시대를 만들고 그 시대의 권력을 쥐려는 세력에 의한 사건이었습니다. 세계 역사의 좋은 점을 본받고 근대 의식을 도입하려는 개화파의 의도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독립협회나 3.1운동의 전개와 달리 가장 중요한 세력인 민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설득도 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간과했던 작은 모순은 결국 3일 만에 모든 것이 끝나는 비극을 맞게 했습니다. 이것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사람을 이끌 때에도 조심하며 민감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또한, 다수와 소통하는 것

  • 10.11.08 20:17

    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도 느끼게 해줍니다. 미래의 많은 학생을 이끌 우리도 이러한 점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 10.11.08 21:08

    역사를 주도하는 것은 다수. 즉 민중입니다.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한 갑신정변은 결국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 10.11.08 21:06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라는 점과 엘리트 계층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하지만 외세에 힘에 의존하려 한 것과, 진정 민중이 원하는 개혁을 하지 않은 것이 한계입니다. 민중은 그들을 외면하였고, 그리하여 그들은 정권은 잡았지만 그것을 유지할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청군에 대한 예측이 부족하여 그에 따른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하였으며, 지나치게 일본만을 신뢰하여 배신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민중과의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해 줍니다. 갑신정변의 한계는 소통의 결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22:02

    저는 지윤 학우처럼 갑신정변의 의의보다는 한계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갑신정변은 스스로 개혁을 이루려는 노력보다는 외세에 의존하고 눈앞의 성공에만 급급했습니다. 또한, 국민들의 상황은 고려하지 않아 국민의 지지가 없었습니다. 다시 한번 국민과의 소통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입니다.

  • 10.11.08 22:55

    오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지금 보니, 비록 김옥균(金玉均)등 개화파는 虽然带有“亲日”的性质,但是对于韩国的正面影响也是不能抹杀的。 무슨 일이든 시작은 쉽지 않습니다. 갑신정변은 조선왕조 최초의 자본주의적 개혁운동입니다. 또한 한국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고자 한 첫 번째 시도입니다. 因为这个也使国家得到了开化思想. 사실 만약에 그 당시에 개화파가 정권을 잡았다면 근대적 개혁을 단행할 수는 있었겠지만 일본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을 것입니다.

  • 10.11.08 21:41

    * 장효과 : 1) 좀 친일적(亲日) 성질이 있어지만 갑시정변은 한국에게 정면적 영향을 멸살할 수 없습니다. ->> * 내용을 좀 더 다듬고 중국어로도 표기하세요. 2) 무슨 일도 시작할 때 재일 어렵습니다. ->> 무슨 일이든 시작은 쉽지 않습니다. 3) 갑신정변은 조선왕조의 첫번쩨 자분주의개혁운동입니다. ->> 갑신정변은 조선왕조 최초의 자본주의적 개혁운동입니다. 4) 또한 한국이 첫번쩨 봉건사회에서 자분주의국가로 이행한 시도입니다. ->> 또한 한국이 봉건사회에서 자본주의사회로 이행하고자 한 첫 번째 시도입니다. 5) 국가에게 개화사상을 받았습니다. ->> * 말하고자 하는 바를 중국어로 표기하세요. 6) 개화파이 ->> 개화파가

  • 10.11.08 21:52

    7) 정권을 잡으면 혹시 신진적발전을 시행할 수 있지만 그 다음에 일본과 더 큰 투쟁을 발생할 거 같습니다. ->> 정권을 잡았다면 근대적 개혁을 단행할 수는 있었겠지만 일본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을 것입니다. 8) 이것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고 뒤에 닥칠 재난은 돌아보지 못 합니다.(螳螂捕蝉黄雀在后) ->> 이는 마치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더라(螳螂捕蝉黄雀在后)'는 말처럼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고 뒤에 닥칠 재난은 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 10.11.08 22:55

    이는 마치 '사마귀가 매미를 잡았으나 참새가 뒤에서 노리고 있더라(螳螂捕蝉黄雀在后)'는 말처럼 바로 눈앞의 이익만 보고 뒤에 닥칠 재난은 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 10.11.08 22:56

    수정하였습니다.

  • 10.11.08 21:57

    발표를 듣고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갑신정변이 실패(失敗)한 원인과 결과에 초점을 두었는데 과연 갑신정변이 성공했다면 우리나라에 과연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갑신정변은 최초의 위로부터의 근대적(近代的) 개혁이라는 점에서 높이 살 만하나 그들은 청군을 진압하기 위해 고종에게 거짓을 고하여 일본군의 호위를 요청하였습니다. 이로 이해 갑신정변은 자주적(自主的) 개혁이 아닌 외세, 일본에 의지하여 성공하려는데에만 급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갑신정변이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청나라 대신에 일본의 지배하에 놓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후에 일제 식민지 지배를 더 앞당기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21:58

    새로운 시도, 변화(變化)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체적(主體的)인 태도로 이루어졌을 때에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변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주체성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 10.11.09 00:28

    급진개화파들이 주체성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세 의존적인 태도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경아 학우의 의견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주체성은 변화에 꼭 필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외세에 의지하여 성공에만 급급하였던 갑신정변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주체적인 태도가 뒷받침되는 변혁이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23:30

    급진개화파는 그 당시 절대적 지배세력이었던 민씨 정권을 타도(打倒)하고 권력의 중심세력이 되려 하였습니다. 굉장히 획기적인 개화의 내용을 담은 14개조 정강을 발표하고, 세상을 바꾸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삼일천하, 실제로는 2일 만에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급진개화파는 변혁(變革)의 주체(主體)가 되지 못하고 주저앉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시대가 본질적(本質的)으로 요구하는 바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이앙법의 발달로 부를 축적한 소수의 부농(富農)들만이 많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배층의 땅을 제외하면 일반 백성이 가질 수 있는 토지는 별로 없었습니다.

  • 10.11.08 23:32

    따라서 민중들은 땅을 분배받기 바라면서 토지개혁을 절실히 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양반지주 출신이었던 급진개화파는 이런 민중의 설움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민중들이 간절하게 원했던 것은 재정의 일원화나 조세제도의 개혁이 아닌 토지제도의 개혁이었습니다.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일어난 갑신정변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듯 허울 좋은 명분으로는 변혁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기를 원한다면 근본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 10.11.09 00:05

    예진 학우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무작정 일을 해내려고 하면 오히려 그르칠 수 있습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바꿔나갈지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10.11.08 23:56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이끈 개화파(開化派)의 목적은 근대적(近代的) 국가를 만드는 것으로 정권(政權)을 획득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이미 정권의 필요성, 중요성을 알았던 것이지요. 정권 획득은 중요한 것이고 현대사로 갈수록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누가 정권을 획득하여 어떻게 정치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만약 당시 개화파가 갑신정변에 성공하여 정권을 획득했다면 우리나라는 현재 어떻게 변해있을까요? 다시 한번 정치(政治)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 10.11.09 00:46

    인경학우의 말씀처럼 정치는 한 나라의 운명을 정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정권획득에 중요성을 알았던 선각자들이 외세의 힘을 빌려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개혁에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본이나 청의 개입을 어느 쪽이든 허락했을 겁니다. 좀 더 나은 선각자들이었다면 민중의 힘으로 개혁을 이루어 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 10.11.09 01:10

    갑신정변은 국민을 고려하지 않은 엘리트들만의 개혁 시도였습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維新]을 롤모델로 삼고 갑신정변을 일으켰지만, 정변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이들은 대중[大衆]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지 못했습니다.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치[政治]적인 개혁이 대중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엘리트들은 대중이 호응할 수 있는 체계, 사상[思想]을 만들어야 합니다. 근대사회[近代社會]로 나아가는 데 있어 대중과 엘리트들의 조화[調和]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정치가와 대중이 조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발전하려면 정치의 주체가 엘리트와 대중 모두가 되어야

  • 10.11.09 01:10

    합니다.

  • 10.11.09 01:33

    갑신정변을 일으키기 전 어떤 인물이 지구본을 보고 모든 나라가 세계에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중화사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발표를 듣고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이 떠오른 것입니다. 갑신정변 당시 일본보다 청이 더 간섭(干涉)이 심할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킬 당시 주도자들은 청군의 도움이 아닌 일본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이점에 앞서 무작정 중국만을 따라 하던 조선이 롤모델을 바꿨다는 것은 조선이 원하는 나라의 모습이, 정치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이고 24개조 정강(政綱)을 통해서 또 롤모델인 일본과는 다른 모습을 구현(具現)해보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10.11.09 01:35

    비록 민중과 결합(結合)해 스스로 힘으로 개혁을 시도했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중화사상을 버리고 24개조 정강이라는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했다는 점은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났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는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연시라는 생각이 어쩌면 새로운 길을 여는데 큰 방해(妨害)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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