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 -
☆ 2014년 가해 1월16일 (녹)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수원] 세상을 치유하는 자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사무엘 4, 1ㄴ - 11
† 복음 : 마르 1, 40 - 45
★ 이스라엘인들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계약 궤를
진영으로 모셔서 승전을 꾀하지만, 오히려 사력을 다한 적들에게
섬멸되고 계약 궤마저 빼앗긴다. 이때 합당하지 않은 모습으로
사제직을 수행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한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간절히 청하는 나병 환자를 낫게 하신다.
그는 예수님의 분부를 어긴 가운데 자신의 치유 이야기를 널리
퍼뜨린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군은 계약 궤의
힘으로 적에게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궤를 진영으로 옮겨
옵니다. 언뜻 보기에 이는 주님에 대한 신뢰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결정은 기대와 달리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군은 섬멸당하고 계약 궤는 적들에게 빼앗깁니다.
또한 엘리의 두 아들도 죽고 그 집안은 몰락합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이보다 앞서 서술되는 ‘엘리의 집안은
망한다.’는 내용의 주님의 말씀(2,27-36)과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
(2,22-26)에 관한 내용과 연관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엘리의 아들들과 이스라엘인들이 계약 궤에 대해 보인
태도는 참된 신앙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것을 ‘수단’으로 여긴
사실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그들 삶의 방식을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따라 변화시키려는 노력 없이, 그리고 하느님의 현존을
그 자체로 경외하는 가운데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참된
경건함도 없이, 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는 영험한 도구로 여기는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어쩌면 주님을 모르고 있는 ‘이방인’보다도
신앙의 참모습과 더욱 동떨어진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많은 경우에 이러한 교묘한 불신앙의 유혹과
직면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언제나 전체의 삶을 요구한다는
사실입니다.
절반의 삶만을 내어놓으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자족할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의 진짜 관심이 머무는 나머지 절반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하느님의 존재를 격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절반의 인생이 아니라 온전한 삶을 바란다면, 삶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던지는 신앙생활의 용기와 진실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무릎을 꿇어라 : 반신부의 복음 묵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마르1,40-45)
무릎을 꿇어라.
저는 한때 허리가 많이 아팠습니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낫지
않았습니다. 한의사에게 침을 맞기도 했고 통증을 완화시켜 주는
약을 먹기도 했습니다. 고통이 너무 심해서 매일 같이 ‘주님, 제발
살려 주십시오. 살려주세요.’ 하고 매달린 적이 있습니다. 아프고
나서야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더 알게 되었습니다.
편찮으신 분이 많습니다. 질병으로 다가온 고통을 이긴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께 믿음을 고백해도 아픔은 여전하기 때문에
진정 그분이 함께하시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기도합니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이루실수 있으시니
고통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이 몸소 함께 하고 계심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고통이 계속된다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지켜주시고,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당신의 수난 고통을 체험하는 시간으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시간이 단련의 시간으로 성화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유다인들에게 나병은 하늘에서 내린 형벌로 저주 받은 모습이요
(레위13,34) 죽음으로 향하는 상태(욥기18,13)였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공공장소나 사람들의 모임에 나타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다가오면 자신이 ‘불결한 사람’ 이라고 외치면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법으로 규정하였습니다(레위13,45-46). 법은 접근을
막을 뿐 나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고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1,40). 하며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용기 있게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를 인식했으면 해결 방법을
찾아야지요. 그리고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더 이상 다른 길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지푸라기라도 잡고 매달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하소연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상의 것이라도 할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사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항복의 자세입니다. ‘저의
목숨은 당신께 달렸으니 저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그저 저는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립니다. 저로써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애원하는 자세요, ‘한 말씀만 하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이고 저를 고쳐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고 저의
희망이십니다.’ 하는 순종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결국 무릎을 꿇은
것은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이고 불결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더욱 다가와야
하고 또 그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사랑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분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우리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정신적, 영적인 나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애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우리가 주님께 나올 때 취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되려면 먼저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배워야 하겠습니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은 무릎 꿇지 못하는 원인을 다섯 가지로
말씀하셨습니다.
1). 자신이 믿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2). 지금 자신이 어떤 병이 들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주고자 하는 선물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4). 교만함 때문이다. 교만한 자세란 목덜미가 뻣뻣한 자세이다. 몸이
굳어 있는 사람이고, 마음이 완고한 사람이다. 5).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이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 무릎 꿇는 기쁨의 날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사실 저는 지금 혼자서 부산에 왔습니다. 서품식 이후 1박 2일로
어디를 훌쩍 다녀올 생각을 했었거든요. 마침 딱 이틀 동안 아무
일도 없는 시간이 있어서 휴가를 내고 이렇게 부산에 혼자
왔습니다. 부산에 와서 특별히 한 것은 없습니다. 그냥 하루 종일
‘갈맷길’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부산의 대표 걷기 길을 걸었습니다.
어제 하루에 걸은 거리가 거의 20Km 정도 되었으니 꽤 많이
걸었지요? 더군다나 길을 잘못 들어서 뜻하지 않은 산행과 암벽을
타야 하는 고생까지 했습니다. 오늘도 15Km 정도 걸을 예정인데
무릎도 아프고, 발바닥도 아파서 조금 걱정은 됩니다. 그래도
혼자만의 여행의 묘미를 만끽 느끼면서 바쁘고 복잡한 생각들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 있었던 저를
당황하게 만들었던 일 하나가 생각나네요.
어제 부산 ‘태종대’까지의 걷기 일정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광안리로 이동하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저는 교통카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버스에 올라타면서 교통카드를 인식하는 장치에
카드를 터치했습니다. 그리고 빈 의자가 보여서 얼른 앉으려고
그쪽으로 가는 순간, 기사님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습니다.
“뒤로 가는 아저씨! 돈 안 내고 타나?”
주위를 둘러보니 뒤로 가는 아저씨는 저 혼자입니다. 저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지요. 저는 다시 기사님이 계신 자리로 가서 다시
교통카드를 인식기에 댔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더군요.
저는 당연히 되는 줄 알고 자리로 들어가려 했던 것인데, 반응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저로 인해 버스가 늦게 출발했으니) 현금으로 교통비를
지불했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수도권에서 사용되는 교통카드는 부산에서
사용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제 겨우 부산 교통카드가 전국에
공용으로 사용될 뿐, 다른 지역의 교통카드는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교통카드는 무조건 전국공용으로만 알고 있었던 저의
무지가 어제와 같은 실수를 만든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반드시 진리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가지고 있는 이상 항상 진리의 길을 걸을 수는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모르면서도 아는 채 하는 것, 자신의
뜻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이기심과 잘못된 판단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 모습이 하나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한
나병환자를 고쳐주시면서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과연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선교사의 모습을 한 것일까요? 어쩌면 그는 자신의
깨끗해짐을 세상에 알리고자 그렇게 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이들의 치유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알렸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행동한 것이지요.
예수님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말씀을 따르지 못한 것이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 곳에 머무실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반드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걸림돌을 치유된 나병환자가
제공한 것이지요.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는 주님을 드러내는 우리,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펼치는 우리. 이를 위해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는데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은 언제나 열린 눈과 일하는 손을 통해 온다(제레미 테일러).
어제 걸었던 코스가 모두 보이는 곳입니다. 암남공원에서
출발 ~ 태종대까지...
무거운 짐
어제 새벽 부랴부랴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읽고 있는 책 2권,
새벽을 열며 묵상 글 작업을 위한 노트북, 그리고 속옷과 세면도구.
이렇게 짐을 싼 가방을 드는 순간, 너무 가벼웠습니다.
‘이 정도면 걷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겠다.’
이러한 생각으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간 뒤, 곧바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1~2시간은 정말로 신나게 걸었습니다. 그런데
2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짐이 무겁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가벼웠던
가방이었는데 왜 이렇게 무거워질까 싶더군요. 그러면서 ‘왜 책을
2권이나 넣었을까? 책만 없었어도 더 가벼워졌을 텐데....’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시 뒤에 노트북 때문에 무겁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는 ‘그냥 여행 중이라서 묵상 글 없다고 공지할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분명히 가벼운 짐이었는데, 계속해서 짊어지고 걷다보니 점점
무거워집니다. 어쩌면 아무런 짐이 없어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짐이 있던 없던, 또 무겁든 가볍든, 시간이 지나면서는 점점
무거워지고 힘들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우리의 세상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남의 짐이 가볍다고
부러움을 표시하기 보다는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할 때,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어렵고 힘듭니다. 그러나 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사랑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사랑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복음묵상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 .”(마르코1,41)
---
예수님을 움직이게 한 힘은 연민이었습니다. 그분의 연민은
불쌍해서 혀를 차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싸구려 동정심이나,
어쩌지도 못하는 마음에 발만 동동거리는 그런 느낌이 아닙니다.
그분의 연민은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손을 아무리 뻗어도 닿지 않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런 안타까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듯한 아픔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분의 연민은 열정이었고 행동이었습니다. 머뭇거림 없이,
철저하게 상대와 하나가 되어 그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가난하기에, 병이 들었기에,
세상에서 밀려났기에, 죄인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았던 이들,
그들과 함께 조건 없이 아파하고, 먹을 것을 나누며
희망을 열어준 열정이었고 행동이었습니다.
결국 그분의 연민은 죽음을 마다 않는 그런 사랑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십자가를 믿고 그 사랑을
믿습니다.
(2013.01.17)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눈길을 걷다가...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마르코 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눈길을 걷다가...>
피정 중에 눈 덮인 바닷가를 홀로 걸었습니다. 어젯밤부터 눈이
내렸는데, 그 동안 단 한 사람도 지나가지 않은 순백의 대지를
밟고 지나가려니 조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은 길도 미끄러워지고 행동도 부자연스러워지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쓸어야 되고...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세상의 모든 추함과 더러움을
모두 덮어버리는 그 모습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을 엿보기도 합니다.
깨끗하고 하얗다못해 눈마저 부신 해안가 눈길을 걷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도 저 눈처럼 다시 한 번 깨끗해지고
싶다. 나도 다시 한 번 순수해지고 싶다.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해보고 싶다.’
예수님께 다가온 나병환자 역시 저와 비슷한 마음, 아니 더 간절한
마음이었겠지요.
얼마 전 원인 모를 간지럼증세로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너무 자주
샤워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음식을 잘못 먹어서 그런지 온 몸이
간지러웠습니다. 밤낮으로 긁어댔습니다. 틈만 나면 긁어대니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참다 참다 안 되겠어서 결국 병원신세를
졌더니 즉시 완화가 되더군요.
특효약도 없던 예수님 시대 중증 나병에 걸린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조금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매일 곪아터지고 깊어져
가는 환부의 상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던
나병환자였습니다. 매일 자신의 살점이 조금씩 떨어져나가는
상실감에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열악한 의료
여건상 나병환자는 치유를 향한 일말의 희망도 없이 조금씩 죽음을
향해 한발자국씩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병에 걸린 것만 해도 서러워죽겠는데, 세상 사람들은 뭔가
큰 잘못을 해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고 여기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어쩌다보니 나병에 전염되어 오늘에 이르렀는데, 우연히 재수 옴
붙어 죽을 고생하고 있는데, 멀쩡한 사람 중죄인, 아니 죽은 사람
취급하니, 병도다도 더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나병환자가 보여준 적극적인 태도를 보아 그는 이미 예수님과
관련된 소문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미
결심했겠지요. 이분만이 살길이다.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상관없다.
목숨 걸고 매달려보자. 율법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그는 더 이상 앞뒤 재지 않고, 그냥 저돌적으로 예수님께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무조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렇게 외칩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간절함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절박함은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절절한 슬픔, 부르짖는
외침이 자비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권능의 손을 펴시어 나병환자의 환부에 손을 갖다 대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죽음을 향해 부패되어 가고 있는 인성이 눈처럼 깨끗하신 하느님의
신성과 만납니다. 비참한 인간 현실과 대자대비하신 하느님이
마주칩니다. 결핍 투성이인 인간이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자비로 마침내 나병환자는 새 삶을 부여받습니다.
은혜로운 예수님과의 마주침으로 인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끔찍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의 환부를
지닌 나병환자였는데 이제 깨끗하고 깔끔한 꽃미남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우리도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을 통해 깨끗한 영혼의
소유자로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1주간 목요일
2014년 가해 1월16일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 1,40-45
제가 참 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작년 8월에 교구청으로
들어왔습니다. 12월 30일에는 새로이 보좌 주교님이 두 분
나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는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이신
염 수정 대주교님이 새로이 추기경이 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는 일 마다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을 믿으면 돈이 없어도 마실 수 있고
먹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지치고 힘들 때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을 합니다. 먼저 주님을 찾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에는 다섯 가지의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는 거절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거절합니다.
이제 모세의 앞에는 험난하고 힘든 여정이 시작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현실의 삶에서는 얻을 수 없는 영광을 주십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의 뜻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지, 바라지
않는 것을 얻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면 건강한 삶을
바라보면 되고, 행복하기를 원하면 행복한 삶을 바라보면 됩니다.
셋째는 참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는 것입니다. 이 참는 것은 어느
정도가 아니라, 죽기까지 참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참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합니다. 신앙의 선조들도 처음에는 잘 참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참지 못하고 사람을 죽였고, 바오로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협조했으며, 베드로도 예수님을
잡으러 왔던 대사제의 종 말코스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선조들도 처음에는 자신들의 화를 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느님을 알면서 참기 시작합니다. 가장 잘 참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넷째는 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제 하느님께서 원하는 것을
하기로 정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으며,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따라 살 것을 정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종처럼 살지 않고, 하느님께서 가르쳐주신 계명을 따르기로
정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남을 도와주기로 정하는
것, 새벽미사에 가기로 정하는 것, 감사헌금을 하기로 정하는 것,
부부싸움을 하지 않기로 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개와 함께
뛰어가니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개와 뛰어가지 마라. 개보다
빨리 뛰면 개보다 더한 놈, 개보다 늦게 뛰면 개만도 못한 놈, 개랑
똑같이 뛰면 개 같은 놈이 된다.’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따라가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세상 사람보다 못하면
세상 사람만도 못하다는 소릴 듣게 됩니다. 세상 사람처럼 살면
신앙생활을 하는 의미를 모른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삶을 따르기도 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섯째는 건너기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홍해바다를
건넜습니다. 믿음은 이제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과 희망, 사랑이 있는 주님의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입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그래서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나의 잘못된 습관과 허영, 욕심과 탐욕의 바다를 건너야 합니다.
그래서 자비와 친절, 온유와 겸손의 세상으로 나가야 하며,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치유를 받게 됩니다. ‘빵의 기적’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사랑입니다. ‘믿으면 보게 되고, 사랑하면 알게 된다.’
고 합니다. 믿으면 이제까지 보았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면 이제 까지 알았던 것과 다른 세상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기 시작한 형제님께서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많이 변했어!’ 그 형제님은 이제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거절했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예전처럼 작은 일에 화를 내기보다는 참았고, 주일에는
무엇보다 미사에 참례하기로 정했고,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재물과 명예, 욕심과 이기심의 바다를 건너
나눔과 봉사와 사랑과 평화의 세상으로 건너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실 때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때도, 나병환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2014년 새해에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세상을 치유하는 자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복음 : 마르코 1,40-45
< 세상을 치유하는 자 >
‘연탄길 3권’에 ‘이름 없는 편지’란 제목으로 소개된 사연입니다.
상우 아빠는 야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사고 직후 뺑소니를 쳤습니다. 의식을 잃은
상우 아빠는 병원으로 옮겨져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상우네 집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고 병원비로 빚까지 져야 했습니다.
상우 엄마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상우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화가가 되겠다는 꿈도 접어야 했습니다. 상우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상우까지 잃게 돼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정신을
차리기로 했습니다. 집을 줄여 그 돈으로 엄마 친구와 조그마한
옷 가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옷 가게를 시작도
해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엄마 친구가 돈을 가지고 도망쳐 버린
것입니다. 엄마는 우울증이 심해져 이상행동을 보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상우는 온 세상을 증오하게 되었고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공장에 다니며 간신히 집안 살림을 돕고 있던 누나가
상우에게 아버지 앞으로 온 편지 한 통을 가져왔습니다. 그
봉투 안에는 10만 원짜리 수표와 함께 이런 편지가 있었습니다.
“이 적은 돈에 제 마음을 담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따듯한 마음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무쪼록 이름도 밝히지
않은 저의 무례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빕니다.”
둘은 서로 그 편지를 누가 보냈는지 추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끊긴 아버지의 친구 분들 중 하나? 혹은 누나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 혹은 엄마 돈을 가지고 도망친 엄마
친구? 그러나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매 달 똑 같은 날에 똑 같은 액수와 함께 집으로 배달되었습니다.
상우는 엄마를 찾아 병원에 갔습니다. 상우는 엄마의 모습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따라 내려와 넣어준 체리
맛 사탕. 상우는 엄마가 자신이 좋아하는 사탕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몰래 엿본 엄마 병실에서
엄마는 가족사진을 보며 울고 계셨습니다. 상우는 이런 엄마를
더 이상 아프게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줄 사진을 찾다가 장롱 깊숙이 감춰진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발견했습니다. 매 달 집으로 날아오는 편지, 그것은
누나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상우는 그제야 사람을 믿지 못하고
어긋난 길을 가려 했던 자신의 마음을 누나가 그렇게라도 위로해
주려고 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상우야, 사람들을 미워하지 마. 고마운 분들도 있잖아. 다른
사람이 나쁘다고 불평하지 말고,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면
되잖아.”
상우의 얼굴 위로 따스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나병환자는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상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누구도 다가
오려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다가가고 싶지 않은 사람, 그렇게 증오
속에 외톨이가 되어가는 사람, 그 사람이 현대의 나병환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습니다. 그 사람을 찾으면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이해해주고 자신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는 바로 그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내가 원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자신이 낫기를 원하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나병환자는 온 세상
사람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구원자,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움을 받는 사람까지도
행복해 지기를 원하는 그 사람입니다. 자신의 가족을 다 잃었던
고정원씨도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버리지 않고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고는 결국 자신의 가족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양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방송작가 송정림씨의 언니는 새벽 3시에 일어나 원고를 쓰고 아침
6시에 방송국에 출근하는 전쟁 같은 삶을 15년이나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언니가 사는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라
엘리베이터 속도가 매우 늦다고 합니다. 아침에 항상 뛰어 다녀야
하는 언니는 최근 10년 동안 거의 매일 행운을 안고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바쁜 때에 자신이 출근하는 시간에
거의 항상 엘리베이터가 9층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그 행운이 저절로 온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바로
옆집이지만 인사만 건네며 살아왔던 약사 부부가 언니가 바쁜
것을 알고는 출근하면서 자신들 뒤에 출근하는 언니를 위해
9층을 찍어놓고 내렸다는 것입니다. 작지만 큰 이 사랑이
송정림씨의 언니에게 10년간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송정림, 참 좋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십 년 동안의 행운)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입으면 세상 모든 사람이 싫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누군가 한 사람의 사랑으로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병을 주는 사람도
있고 치유해 주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치유는 바로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우리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하느님께 감사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 1,40-45
하느님께 감사
좋은 일이 생겼으면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딥니다.
태어나 결혼할 때까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하느님은 멀리 하다가,
큰 변을 당하면 사람들을 외면하고 하느님께 원망하기 일쑤입니다.
자연의 순리는 서로 도와주며 평화롭게 살고 하늘에 감사하는 거겠지요.
안 좋은 일의 처리는 서로 돕고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드려야 합니다.
인간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후 완쾌를 하느님께 감사드리라
하셨잖아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마르코 1,44)”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 [수도회] 진정성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6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사무 상4,1ㄴ-11 마르1,40-45
<그는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 마르 1,40-45
진정성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단어는 ‘진정성’입니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요즘 널리 회자되는 말이 ‘진정성’입니다.
말과 행동, 글을 통해 단박 들어나는 그 사람의 진정성입니다.
진정성이 있는 말이나 행동, 글이 감동을 주고 오래 남습니다.
진정성 가득 담긴 편지들은 오래 보관하지만 진정성이 결여된
카드들은 곧 휴지통에 던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진정성입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
이라, 우리 믿음에 하느님이 감동하시는 것도 진정성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드러나는 진정성입니다.
어제 저녁 휴게 중 바오로 수사님과 대화도 생각납니다. 저녁 미사
때 소수의 형제들로 인해 좀 불안했지만 바오로 수사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힘껏 화답송 시편을 낭송하는 모습에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아, 수사님 아주 화답송 시편 잘 하셨습니다.”
“기도 안하면 큰일 나지. 기도는 생명인데….”
엉겁결에 하신 말씀이 진정성 가득담긴 진리였습니다.
사실 기도는 생명이니 하느님의 일인 기도보다 큰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도 진정성이요, 하느님이 감동하시는 것도 우리
믿음의 진정성입니다. 항구한 믿음의 진정성 있는 삶이 자녀들은
물론 자손들에게 미치는 심대한 영향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진정성을 보고 배우는 것이지요.
특히 어머니들의 진정성 가득한 믿음의 삶은 절대적입니다.
‘타고 난다.’ 요즘 절감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께는 돌연변이도 어쩌다 있지 요행이나 우연은 없습니다.
장자의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灰灰 疎而不失)’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뜻인즉 ‘하늘의 그물은 넓어 성긴 것처럼 보여도 빠뜨림이 없다’
하느님의 그물에서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저는 이 번 서울 대교구 주교님과 추기경님의 탄생을 통해서도 이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아, 주교도, 추기경도, 믿음도 타고 나는구나.
부모와 윗대 조상들이 쌓아온 진정성 가득한 믿음의 삶의 결과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주교가, 추기경이
아니었습니다.
두 분 주교님과 추기경님에 대해 소개된 믿음의 가정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모두 두텁고 기름진 믿음의 토양과도 같은 믿음의
집안들이었습니다.
하느님께 요행이나 우연은 통하지 않습니다.
오늘 1독서의 마지막 부분도 의미심장합니다. ‘이리하여 대 살육이
벌어졌는데, 이스라엘군은 보병이 삼만이나 쓰러졌으며, 하느님의
궤도 빼앗기고 엘리의 두 아들 호프니와 피느하스도 죽었다.’
‘엘리의 집은 망한다.’라는 하느님의 사람의 예언대로 악행을 일삼던
엘리의 두 아들은 죽었고 이스라엘도 대패했습니다.
그대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그물을, 심판을
피해 갈 수 없음을 봅니다. 삼만이나 죽었다니 이건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임시처방으로 하느님의 계약 궤를 모심으로 승리를 꾀했지만
하느님이 여기에 넘어갈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믿음의 진정성이
결여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냥 방치했음이 분명합니다.
이런 큰 희생의 시행착오를 통해 배워가는 참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하라’는 말이 진정성 있는 삶의 비결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나병환자의 치유과정에서 깨닫는 진리입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나병환자의 진정성 가득 담긴 겸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진정성은 겸손한 삶에서 환히 드러납니다.
나병의 진정성에 감동하신 예수님도 진정성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깨끗하게 되었다 합니다. 새삼 우리의
진정성 가득한 믿음에 응답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진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내려주시어 영육의 아픔을 깨끗이 치유해 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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