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호]
번함(Buruham)공원에서 점을 보다 외 1편
정선호
휴일 번함공원의 호수에선 사람들 배를 타고
호수 주위엔 늙은 여자 몇이 점을 치고 있네요
그들은 한국 여느 점쟁이같이 출생일과 손금으로
점괘를 진지하게 알려주고 사람들은 듣고 있네요
지천명을 바라보며 미래나 운명이라는 낱말과
한참 멀어진 나도 장난삼아 점을 봤지요
한국과 떠 있는 해와 달, 별의 위치가 다르고
점쟁이와 내가 가진 정서와 문화가 다른데
점쟁이가 어떤 점괘를 말해줄지 궁금해지는 시간,
우주가 생성되고 지구에 땅이 만들어진 후
점쟁이와 나는 다른 문화와 자연에서 살며
산과 들판, 바다와 관계 맺으며 살아 왔지요
다만 그녀가 전생에 한번쯤 한국인으로 살았거나
내가 전생에 필리핀인으로 살았던 적 있다면
점괘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요
그날 내가 해발 천오백미터에 있는 바기오시에 갔고
번함공원에서 점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내 운명은
죽을 때까지 공원 호수에서 머무는 것인가
이국의 산속 도시에서 펼쳐진 내 운명,
수많은 내가 살아 온 수천년의 세월이 스쳐갔네
* 번함(Buruham)공원 : 필리핀 루손섬 북부 바기오시 도심에 있는 공원
얼굴을 만지다
1
안면 맛사지 가게에서 순서를 기다렸다
얼굴은 살아 있는 사람의 너무나 큰 상징이어서
한 사람의 일생이 오롯하게 담겼다
너무 커다란 상징의 풍요 위해 필리핀에서
난 고국에서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누렸다
누구나 젊고 활기찬 얼굴 유지하기 위해
화장하거나 나 같이 맛사지를 하지만
죽은 사람에겐 더 이상 얼굴은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흉측한 공포의 상징일 뿐이다
살점이 없는 해골은 해적선이나 독극물의 표시,
심지어 전투 부대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결국 얼굴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다
안면 맛사지를 받는다는 것은
죽음을 맞이하는 거룩한 의식이기도 하다
2
세상에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없다
지역과 인종에 따라 달라 얼굴 생김새에 따라
민족을 구분하기도 하고 국가를 세우기도 했다
고국의 모든 사람들 얼굴 생김새가 거의 같아
단일 민족이라 하고 남북통일 위해 애쓰는 것도
남북의 사람들이 생김새가 같아서이기도 하다
내가 살고 있는 필리핀인들 얼굴은 각양각색이다
원주민부터 말레이족, 그들과 스페인과 미국인,
인도인, 중국인, 일본인의 혼혈인이 살고 있다
형제간에도 피부색과 얼굴이 다른 경우도 많지만
필리핀인은 그걸 따지거나 화젯거리로 만들지 않았다
얼굴이란 사람이 살아 있다는 표식일 뿐이다
정선호 | 2001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 몸속의 지구』,『세온도를 그리다』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