찹싸알떡~ 메미일 묵~
소리는 길게 끌면서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고 있었다.
문득 생각났다. 저 길, 전봇대 앞 저 길은 얼음이 얼었을 텐데. 잘 올라가려나 몰라. 모퉁이를 도느라 소리는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왔다.
찹싸알떡~ 메미일 묵~.
결혼하기 전 휘경동 친정에서 듣던 소리였다. 자박자박 바람을 끌고 왔다 가는 소리였다. 미닫이문을 열고
내다보면 마당에는 달빛이 휘어져 내렸다. 언제 왔는지 모르게 마당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지붕골을 타고
바람이 흘러내릴 때마다 눈도 따라 날렸다. 날아 내린 눈은 조그맣게 회오리치면서 마당 가운데를 휘돌았다.
그런 때 양철 홈통은 쟁강쟁강 노래했고 기왓골을 타고 고드름이 피었다.
바람이 지붕위에서 둥그렁거렸다. 내비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은 금호빌라 모퉁이를 냉큼 돌아 모퉁이집에서
한참 머물렀다. 한달음에 내려가지 못하고 모퉁이 집에서 걸린 바람은 이층 베란다에서 댕글댕글 구르다가
창문 틈을 파고들어와 이윽고 마루까지 들어왔고 긴 마룻골을 밟으면서 산속에서 듣고 온 이야기를
속살거리다가 네모진 천장으로 타고 올랐다가 다시 빠져나가 비탈길을 거침없이 훑어 내리면서 비산동
종합운동장까지 단숨에 내려갔다. 그런 날에는 베란다 난간에 올려놓은 식혜가 수정과가 꽁꽁 얼어붙었고
아이들은 좋아라 웃어대면서 베란다에 놓아둔 식혜를 퍼 날랐다.
“물 받으시네요.”
그 목소리는 느릿했다. 고개를 들었다. 한 아이를 업고 또 다른 아이 손을 잡은 여자가 웃고 있었다.
업힌 아이는 잠이 들었는지 고개가 옆으로 떨어져 있었고 네 다섯 살이나 되었을 법한 키 작은 남자아이는
툴툴대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젊디젊은 그녀는 나보다 컸고 몸집도 컸다.
“저 모퉁이 집에 사시죠. 언제 차 한 잔 주세요.”
침착한 말투였다.
“언제든 놀러 오세요. 차 줄게요.”
그녀가 상익이 엄마였다.
차 한 잔 마시자는 제안, 차 한 잔 달라는 것은 친밀감의 표시이며 알고 지내자는 의사 표시이다. 흔하고
쉬운 말이기도 했다. 누군가 알고 싶을 때 혹은 누군가에게 신세를 졌을 때 우리는 흔히 그런 말을 한다.
차 한 잔 하자고. 달리 공통 화두가 없는 주부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은 “차 한 잔 하게 놀러와" 또는
"차 한 잔 주세요.” 였다. 그 차는 커피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커피는 준비가 쉽다. 그저 물만 끓여내면 된다. 찻잔, 그도 아니면 머그잔으로 마셨고 간단히 씻어내리면
그만이었다.
그녀가 온 것이 아니라 내가 갔다. 길이 꽁꽁 얼어붙은 날이었다. 싸목싸목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는 동안 들고 있는 냄비 꼭지에 눈이 내려앉더니 금세 물이 되었다. 스텐 전골냄비 속에는 흰죽이
들어있었다. 상익이 동생 먹일 것이었다. 상익이네 아이들은 둘 다 몸이 약했다. 툭하면 배탈이 난다고 했다.
겨울이라 배탈이 날 계제가 아니었는데도 다시 또 배탈 났다고 해서 흰 죽을 먹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흰죽을 쑬 줄 모른다고 해서 쑤어가지고 간 것이었다.
“어서 오세요.”
침착한 어조로 상익이 엄마가 나를 맞았다. 여전히 포대기를 둘러 아이를 업고 있기는 했지만 눈가에 잔주름을
잡으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현대 하이츠 연립이라는 아주 근사한 이름을 가진 그 집은 삼층, 아니 반지하까지
합쳐 사층 건물이었다. 언덕 막다른 곳, 길이 끝나는 곳이었다. 연립 뒤쪽은 급경사진 비탈로 길과 동네는
거기서 끝이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그 삼층 건물은 이미 낡아 여기저기 허술한 구석을 드러내고 있었다.
금세 낡는다는 것은 업자가 서둘러지었고 돈을 들이지 않으려고 했다는 뜻이었다. 변두리 집, 연립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못된 업자들이 벽속에 철근 대신 막대기를 넣어 건물을 짓던 시기였다. 산자락에 산비탈에
집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던 시기이기도 했다. 농지에서 택지로 전용이 이루어지던 시기이기도 했고 혹은
그린 벨트 지역 해제에 운을 걸던 시기이기도 했다. 낡은 도시의 재개발보다는 도시 끝자락 산 끄트머리 파고
드는 것이 더 쉽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거 간을 전혀 안했어요. 소금을 넣던가 새우젓을 넣던가 해서 먹이세요. 아이들 배탈 날 때는 흰죽이 최고예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미진한 듯 했다. 떨떠름한 그녀의 표정이 그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경험이
인식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일에서 무언가 굉장한 것을 기대한다. 감기가 나으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지 않다. 아주 작은 일들에 주의하면 된다. 감기가 낫기 위해서 녹용이나 인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특별한 것은 일상으로 들어오면 언젠가부터 일상이 된다. 흰죽이라 해서 무언가 좋은 것이
아닐까 기대했을 것이다. 그녀의 표정이 내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거실 한 쪽, 빛이 잘 드는 쪽에 놓여 있는 어항이 주의를 끌었다. 주홍빛의 물체들이 오가고 있는 그 어항은
그 집의 장식이요 생기요 표정이었다. 아니 또 하나 있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돈된 그녀의 집 장식장
위에는 큼직한 성경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첫댓글 무조건 반갑습니다. 희야님이 건강하시다는 증거이니.... 고대하는 독자층이 있다는 거, 잊지 마세요. ^^*
고맙습니다. 그동안 좀 나태했더니.
제가 처음으로 얼굴인사 터는거 참 힘들어 하거든요. 분당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갔는데 두달이 지나도록 집에서만 지냈지요.그러던 어느 날 두집 건너에 사는 사람이 아침에 벨을 누르면서 커피 한 잔 하러 오시라고 하대요. 여러집 아짐들이 벌써 모여 있더라구요. ㅎㅎ 그때부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집저집 다니며 맛난 거 해 먹곤 했지요. 15년이 지난 지금, 사는곳은 다르지만 그래도 아주 가깝게 지내는 친구사이가 되었죠. ^^
제가 그렇답니다. 아직도 멀었어요. 이만큼이나 나이 먹었는데도.
쟁강쟁강 울림이 오는 글을 싸목싸목 고갯짓하며 잘 읽었습니다. 제발 역사에 남을 명문장 논문 쓰려 하지 마시고, 그냥 좀 쉽게 쓰시와요. 일단 졸업하시고 난 뒤에 더 좋은 논문으로 학자의 길을 가시면 되잖아요???
ㅠ.ㅠ 고견 감사합니다. 그동안 게을렀어요. 정신 차려야 했는데....
베란다에 내놓은 차가운 식혜 한 잔 하고 싶네요. 희야님, 우리 언제 차 한 잔 같이 해요!
차 한 잔 주세요.. 차 마시러 오세요...전 이 말이 참 어렵습니다. 저를 아는 사람들은 말하지요, 전혀 못 믿겠다고...이미 알게 됐으니 못믿는거지 처음은 진짜 힘들어요. 이 곳 바람재는...글쎄요, 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