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2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부활의 아침에”
요 20:1~5
<설날>
오늘이 설날입니다. 설날 아침에 온고을교회는 부활의 아침으로 맞이합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주일과 겹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오늘 설날과 주일이 겹쳤습니다.
거기에 설교 본문이 요한복음 20장 ‘부활의 아침’입니다.
☞ 우리 한국인이 설날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가족 간의 만남이라고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서울로, 부산으로, 광주로, 대전으로 흩어져 살아가다가 설날, 추석날이면 다 모입니다.
달력은 여기에 맞춰줍니다.
설날과 추석은 앞뒤로 하루씩을 더 쉬도록 3일 연휴를 줍니다.
금년 설날은 주일이기 때문에 화요일 하루를 더 쉬게 해 줍니다. 참 좋습니다. 그렇지요?
☞ 이렇게 가족이 모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지요?
윗 어른께 세배를 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세배돈을 준비합니다.
기왕에 주는 세배돈, 기분좋게 하려고 어떤 사람들은 은행에서 신권으로 바꿉니다.
살아계신 부모님, 조부모님께 세배를 하면서 한국인은 돌아가신 어르신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어르신들께 ‘차례’를 지냅니다.
☞ 한국인이 돌아가신 조상께 차례를 지내는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언젠가는 꼭 만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 태어나고, 한번 죽습니다.
죽으면 육신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하늘나라에 갑니다.
거기서, ‘먼저 가신 조상님을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가신 조상님에 대한 기대는 여기서 하나가 더 있습니다.
아직 이 땅에 살고 있는 후손들을 도와서 복되게 해 주십사하는 기대입니다.
한국의 토속 신앙에 있는 ‘음덕’이라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이 도와서 잘 될 수 있다는 기대, 그것이 ‘음덕’입니다.
☞ 성경은 ‘음덕’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선포합니다. 할렐루야~
<살아계신 하나님>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의 ‘음덕’을 기대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살아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이 세상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세상이라서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세상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살아있어야 합니다.”
오늘부터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는 요한복음 20장입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은 우리가 “부활장”으로 기억하면 좋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둡니다.
거기서 끝이 났다면, 살아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죽은 사람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도 조상에게 올리는 ‘차례’를 지내야 할 뻔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둠으로써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요한복음 20장은 선포합니다.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하셨는지 선포합니다.
장사한지 사흘만에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가봤더니, 비어 있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보통 사람으로서 믿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세상의 학문, 세상의 의술, 세상의 과학으로는 믿을 수 없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믿어지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믿음이 귀하다, 믿음이 귀하다 말씀드립니다.
☞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로서, 창조주이시고 우주만물의 주인이십니다.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것은 능히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믿는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죽은 자가 어떻게 다시 살아나?’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왜 십자가 예수를 다시 살리셔야 했는가?
세상 사람들이 쉽게 안 믿을 것이 뻔한데, 그것을 모를 리 없으신 하나님이신데…
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야 했는가? 그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왜 부활인가?>
21세기 현대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면 안 믿습니다.
한번 죽으면, 완전하게 죽었다면, 그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의학적으로도 그런 사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안 믿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의 부활로 섭리하실까?”
“꼭 그 방법이어야 했을까? 다른 방법도 있었을 터인데…”
“왜 부활의 섭리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전도하기 어렵게 만들어놓으셨지?’”
현대인이 믿기에 어려운, 예수님의 부활!
우리에게 겨자씨보다도 작은 믿음이 있다면, “부활이 가능한가?”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죽은 생명 다시 살리시는 일,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요즘 유채는 2015년 6월 25일 이전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이 때는 내가 없었던 때네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은 당초 이 세상에 없었던 생명을 새롭게 탄생시킵니다.
저도 여러분도, 유채도, 모두 없었던 생명입니다.
그러나 태어나서 이렇게 잘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없었던 생명을 이 땅에 탄생시키는 것이나, 죽은 생명 다시 살리시는 것이나?
뭐가 어렵습니까? 새 생명 탄생이나, 죽은 생명 부활이나 하나님에게 매한가지입니다.
“부활이 가능해?” 이렇게 질문하면서,
똑똑한 체 하려면, “없었던 내가 태어난 것이 가능해?”라고 먼저 물어야 합니다!
어리석은 질문하지 말고,
“하나님은 왜 예수님의 부활로 섭리하실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궁금증을 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부활로 섭리하심에는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생명도 죽음도 하나님의 소관이다.
둘째, 태어남이 시작이듯 죽음도 시작이다.
셋째, 사망 권세의 실체를 직시하라.
<1. 생명도 죽음도 하나님의 소관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나중에 소천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사람이 태어나는 것은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태어나기 이전에는 정말, 세상 그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태어나서 생명이 되었습니다.
누가 섭리했습니까?
하나님이 섭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셨다면, 죽음 역시 당연히 하나님이 주재하십니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왜 진리냐면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없는 이 세상은 상상할 수 없어!”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태어나기 이전에 수천년 동안 자신이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걸 생각한다면 자신이 한 평생 살다가 죽은 이후의 세상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하나님이 주셨으니, 죽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줄 믿습니다.”
<2. 태어남이 시작이듯 죽음도 시작이다.>
첫째, 생명도 죽음도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둘째는 태어남이 시작이듯 죽음도 시작입니다. 할렐루야~
안 믿는 사람들은 말합니다. 죽으면 끝이야, 죽은 다음을 누가 알아?
그렇게 말하면서 설날이 돌아오면 아내를 닦달하면서 차례상을 차리라 합니다.
죽음이 끝이고, 죽은 다음을 아무도 모른다면 조상에게 차례는 왜 지냅니까?
사람이 이렇게 똑똑하고 잘난 척하지만, 어리석기가 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이 시작이듯, 죽음도 시작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이후가 어떻게 전개 되는지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로 섭리하십니다. 할렐루야~
“태어남도 시작이고, 죽음도 시작입니다!” 할렐루야~
<3. 사망 권세의 실체를 직시하라>
첫째, 생명도 죽음도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둘째, 태어남이 시작이듯 죽음도 시작입니다.
셋째는 “사망 권세의 실체를 직시하라”입니다.
‘사망 권세’는 다른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도 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세상에 있는 권세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권세입니다.
이 권세는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권세입니다.
원래 권세라는 것은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힘입니다.
오늘이 설날입니다. 설날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설날은 한국 사람들, ‘민족의 대 이동’을 하게 합니다. 대단한 권세입니다.
또 권세라는 것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입니다.
요즘 저는 트롯트의 권세에 빠져 있습니다.
노래를 듣고 기뻐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눈물짓기도 합니다.
좋은 노래 한 곡을 들으면 마음의 응어리가 풀어집니다.
좋은 영화 한 편을 잘 감상하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좋은 책 한 권을 읽으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권세 중에서 사람들이 최고로 치는 권세는 ‘사망 권세’입니다.
타인의 목숨을 박탈할 수 있는 권세입니다.
흔히 말합니다.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세”를 가졌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권세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이것이 죽음의 권세입니다.
2천 년 전,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 제국이 바로 이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권세 이름이 뭐라고요? ~ “사망 권세”
그들이 이 권세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권세 앞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가장 두렵게 하는 권세이며,
세상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권세 중에서 가장 큰 권세입니다.
이 권세에 의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권세 아래 무릎을 꿇습니다.
하나님은 사망 권세가 이렇게 무지막지한 권세를 휘두르는 것, 그냥 두지 않습니다.
사망 권세가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하나님의 권세에 비하면 조족지혈입니다.
사망 권세를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사람들이 알아야 합니다.
사망 권세가 모든 사람을 무덤에 가둡니다. 무덤에서는 누구도 나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망 권세아래 하나님의 피조물 사람이 굴복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습니다.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맺음>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죽음은 끝이 아니다!”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사람들도, 어렴풋이나마 이미 세상 떠난 조상들이 하늘나라에 가 있음을 감지합니다.
그래서 설날, 추석날, 조상을 추모하게 했습니다.
성경을 알지 못했던 시기, 차례상을 차리고 추모했지만, 우리는 성경을 알게되었습니다.
생명의 탄생이 시작이듯 하나님의 부르심 ‘소천’도 시작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사망의 주관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망의 법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걸 모르고 맞이했던 설날과, 이 진리를 알고 맞이하는 설날의 차이!
느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요한복음 20장에서 한동안 이어질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설레는 이야깁니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십자가를 높여드립니다. 부활을 기뻐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