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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점에 선 사람(딤후 4:6-8)
독실한 기독교인이고, 일제시대 지금의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 시인이 지은 서시(序詩)는 이렇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내용이 아름답지마는 특별히 첫 부분이 참으로 아름다운 시입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윤동주 시인은 아름다운 죽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숨 거두는 순간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는 삶으로 인생을 마치고 싶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똑같은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 사도입니다. 딤후 4:6-7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윤동주 시인이 남은 인생에 대한 자신의 삶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하면, 사도 바울은 이미 다 산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남은 인생을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살다가 마치고 싶다는 윤동주 시인의 소박한 희망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이 됩니다. 그런데 마치 인생의 결승점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고 후회가 없는 인생을 이미 다 살았노라고 고백하는 바울 사도의 삶은 너무나 존경스럽고 경외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여러분, 오늘이 2023년 마지막 날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2023년도 달력을 벽에 건지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달력의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의 삶을 돌아보며 정말 나는 후회함이 없는 삶을 살아왔는가? 하나님 앞에 오늘 내가 서서 내 자신의 2023년을 돌아본다면 어떠한가를 점검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감격과 감사하는 마음도 있지만 별로 해놓은 것도 이루어 놓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세월만 허비했구나 하는 후회함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세월만 후회하고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이 한해를 살았다고 하는 고백이 연말마다 고백되어지는 그런 삶을 한해한해 살아가야 됩니다. 출발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종착점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2023년의 마지막 시간과 2024년도 새해 첫시간을 하나님앞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시작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과거는 묻지 마십시다. 잘못 시작되었다느니, 잘못 살아왔다느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게 남겨진 시간이 더 중요합니다. 시작은 미비하였으나 끝은 똑바로 맺어야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마지막이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첫째, 사람은 죽습니다.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언제 죽을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현실적인 것이 아니니까 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나이가 많건 적건 상관없습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도 없습니다. 언제 죽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셋째, 오늘이 나의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대학의 학장을 지낸 분이 갑자기 중한 병에 걸려서 그만 세상을 떠날 시간이 얼마남지 않게 되었지만 하던 일이 아직 많았는데 아직 정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인되는 여집사님이 얼마나 안타까워하는지 모릅니다. 자기가 죽는다는 것을 본인도 짐작했을 것 같은데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제 유언도 해야 하고, 남은 일도 정리해야 할 때인데도 그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없이 부인이 담임 목사님께 부탁을 했습니다. "목사님, 이제 하던 일을 정리해달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한마디로, 유언을 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환자에게 그 말을 조심스럽게 꺼냈습니다. 그랬더니 "내가 왜 죽어요?"라고 반문합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내가 왜 죽어요?"하다가 갔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정리하지 못하고 그대로 가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분명히 끝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바울은 바로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순교하게 될 것을 그는 미리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세 가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께 바쳐진 하나의 제물로 비유했습니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서 전제라는 말의 원어는 '스펜도'라는 말인데 이 말은 동물의 목을 쳐서 그 선지피가 솟아오를 때, 그 피를 그릇에 받아서 제단에 가져다가 붓는 제사의 마지막 순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전제는 그 제사 인생의 마지막 순서 즉 하나님 앞에 가야 하는 죽음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바울이 지금 말하고 있는 전제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는 바울의 말은 이제 하나님께 드린 자신이 사도로서의 삶이 마지막 시간이 되었고 순교의 시간이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비장한 순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떠날 기약이 가까운 시점에서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인생을 살았구나,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구나,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바울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존경스런 인생입니다. 그렇다면, 한 해의 마지막 순간에 우리는 올해 어떤 삶을 살았습까? 후회는 없습니까? 부끄럼은 없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와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서 바치는 하나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약에서 제물은 몇 가지 엄격한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깨끗해야 합니다. 흠이 있으면 안됩니다.
본인이 생각할 때에는 깨끗하다 하더라도, 제사장이 검사할 때에 조그마한 흠이라도 있으면 제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주 온전하고 깨끗한 제물로 드려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물이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제물은 살아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도 건강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병든 동물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완전하고 건강하게 살아 있는 것이라야 제물이 됩니다.
셋째는 그 살아 있는 것을 제단 앞에 가지고 와서 죽여야 합니다. 거기서 비로소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산 제물을 제단 앞에서 죽이는데, 그 고기를 바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는 것이 진정한 제물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넷째 의미가 있습니다. 제물은 대신 죽는다는 것입니다. 대속제물이 되어 양이 죽습니다. 그러나 자기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죄 때문에 양이 죽는 것입니다. 제물이란, 대신 죽을 때에만 제물입니다. 교회를 위하여, 복음 전파를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죽습니다. 자기는 하나님앞에 전제로 드려졌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관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바쳐진 제물이다 하며 자기 생명을 고스란히 주께 바치고자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제물됨을 특권으로 여기고, 영광으로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을 보세요. (빌 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가 되어 내 피를 쏟아부어도 나는 기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귀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우리의 삶은 하나님앞에 드려진 예배입니다. 하나님앞에 드려진 제사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드려진 제물로서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하나님앞에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온전히 제물을 드리는 것을 기뻐하고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까? 저는 우리 교회안에 참으로 많은 분들이 헌신하고 충성하고 자기를 쏟아붓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참으로 귀하게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을 보십시오. 나는 하나님앞에 드려진 제물로서 흠이 없고 온전한 것이었는가? 나는 2023년도를 그렇게 살아왔는가? 깊이 점검하고 새롭게 새해를 맞이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인슈타인 박사에게는 그를 사랑하는 제자들이 평생동안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그들이 같이 지내면서 보니, 아인슈타인 박사는 너무너무 귀한 분입니다. 그 인격이 고결하고 존경스러운 바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박사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공이란 X, Y, Z다."
X는 말을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생각도 복잡해집니다. 그러므로 말을 적게 하라는 것입니다. Y는 생활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서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하든지 그 과정을 즐길 수 있는 자가 행복한 자입니다. 목적을 다 이루면 행복할 것이다. 아닙니다. 과정을 즐기는 자가 멋있는 성도입니다. 교회 일을 하든지 집안일을 하든지 직장에서 일을 하든지 그 일을 기쁨으로 즐기면서 하십시오,
억지로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하면서도 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하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가든지 오든지, 내가 하는 모든 일과 생활을 즐기는 것, 이것이 성공입니다. Z는 여유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 너무 미친 듯이 거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여유, 이러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말하면 먼저 기도하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벌써 부어지고(6절)"라고 말씀합니다. 눈물과 땀과 피와 생명을 벌써 다 쏟아부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부음이 되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 싸우는 군인으로 비유했습니다.
7절,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이라는 선으로 악과 싸우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세상과 싸우는 것입니다. 영적전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또 사도바울은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신앙생활은 하나의 씨름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나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적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믿지않는 타락한 세상입니다. 또하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우리 안에 있는 옛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적 전쟁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영적인 싸움을 인식해야 합니다. 내가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싸움을 싸운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사람이나 환경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마귀와 죄악과 싸운다는 것입니다. 싸우는 사람과 같이 항상 긴장하고 있다는, 깨어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생명을 건 노력을 하고 있다, 온 생명을 다 바쳐 수고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전쟁에서ㅏ 가장 중요한 것은 상관의 명령에 부조건 복종하는 것입니다. 전쟁할 때 내가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상관의 명령을 따라서 순종합니다. 목숨을 건 절대순종입니다. 그것이 군인입니다. 군인은 명령에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상관이 가라고 할 때에 가고, 오라고 할 때에 오고, 죽으라고 할 때에 죽습니다. 그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래야 진짜 군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미 생명을 바쳤습니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다짐합니다. 이처럼 선도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가진 자로서 어디를 가나 무엇을 하든지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면서, 그리스도께 절대 순종, 절대 복종하는 군인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영화롭게 하고자 합니다.
또한 선한 싸움을 싸워서 선으로 악을 이깁니다. 선은 빛과 같습니다. 악은 어두움입니다. 어둠이 당장에는 대단한 것같지만 빛이 밝아오며 어둠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드러내고 자랑하면 어둠은 한 길로 왔닥 일곱길로 도망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을 보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렇게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장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잘 듣고 순종하면 반드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것입니다.
3. 경기하는 경기자로 비유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했습니다. 운동장에서 달리기 하는 선수와 같습니다. 히 12:1,2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세상적 목표는 어쩌면 세상사람처럼 돈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격이 성령의 열매를 맺고 우리의 심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질 때 거기에 필요한 모든 것도 함께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엡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목표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2023년 한해 동안 얼마만큼이나 영적으로 성장했습니까?
여러분의 인격속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얼마나 자랐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목표는 무엇입니까?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5절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법대로 경기를 했습니다. 파울을 범하지 않았고, 반칙하지 않았고, 규칙대로 경기에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 경기를 위하여 절제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25절)" 온전히 절제하라고 말씀합니다.
상을 얻기 위해서는 self control, 자기절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모든 것이 죄라고 외치는 사도 바울입니다. 믿음, 고귀한 믿음, 순수한 믿음, 복음적 신앙을 내가 굳게 지켰노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싸우고, 지켰고, 승리했고, 마치고, 이제 스스로 훌륭하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결승점이 왔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결승점을 넘어 저 앞에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자기를 위하여 준비해놓은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승점에서 면류관을 바라보고 있는 것, 사도 바울이 임종 직전에 가진 자기의식이었습니다. 굉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성자가 예수님의 영접을 받아서 하늘나라에 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직전, 문간에서 그는 지나온 생을 돌아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험준하게 살아왔던 그 일생이 한눈에 보입니다. 그 발자취가 보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발자취가 두 사람의 것입니다. 성자는 예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는데 어째서 발자취가 두 줄로 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동행하였기 때문이니라." 그런데 골짜기를 지나거나 아주 어려운 곳을 지나는 길에는 발자취가 한 사람의 것 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왜 저기는 발자취가 한 줄입니까? 왜 저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아니다. 네가 너무 힘들어 해서 내가 업고 갔기 때문이니라.“
성자는 여태껏 자기 혼자 살아온 생애인 줄 알았는데 이제 회고해보니 주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고, 업어주시고, 보호하셔서 오늘날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승점에 서 있습니다. 이 결승점을 넘어서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제물이라면 어떤 제물로 드려졌습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제물입니까? 군인이라면 얼마나 충성을 다했습니까? 경기자라면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까? 끝나기 전, 아직 끝이 아닌 끝에, 이 종말론적 기회에 서서 스스로 평가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이 기다릴는지 생각해보세요. 심판입니까? 징계입니까? 아니면 상급입니까, 면류관입니까? 이 결승점에 서서 저 앞에 있는 소망의 세계를 밝게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