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조 시인의 시집 『사진첩』
책소개
시조의 장에서 서석조 시인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2004년에 계간 『시조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서석조 시인은 실존적 고향을 탈회奪回하려는 건강한 내면 의식을 작품 세계에 투사하고, 부조리와 상실에 대항하여 공동체적 연결성을 지향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참 자기를 되찾고자 하는 의지를 끊임없이 소환함으로써 세계와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고, 자아 동일성을 회복하기 위해 여지없이 시조라는 의식적 공간에 의미 있는 존재와 기억을 담는것이다. 그렇기에 서석조의 시조 미학은 그만의 매혹적인 사건이 되고 일종의 '아토포스atopos'가 된다.
서석조 시인
약력: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2004년 계간 《시조세계》
신인상 수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시조집 『매화를 노래함』 『 바람의 기미를 캐다』
『 돈 받을 일 아닙니다』와 기행시조집 「별처럼
멀리 와서』 현대시조100인선 『각연사 오디』 등
을 발간하였고, 경남문학우수상, 한국해양문학상,
시조시학 젊은시인상, 서정주문학상, 경남시조문
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문인권익옹호위원, 국제PEN
한국본부 회원,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 오늘의
시조시인회의 부의장, 경남시조시인협회 이사,
국제PEN한국본부 경남지역위원회 감사, 세계시조
시인포럼, 국제시조협회, 경남문인협회,청도문인협회,
이호우·이영도문학기념회, 산청문인협회, 시조세계
시인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부산상고, 농협대
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
농협중앙회 삼천포지점장(2회) 창원반림지점장,
진해중앙지점장, 창원봉곡지점장, 김해동지점장,
산청군지부장, 진해시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시인의 말
시조에 입문한 지
스무 해에 이르러
자랑이야 할까마는
이력은 이력이라
얼굴이 붉어짐에도
기념 책을 펴냅니다
2024년 봄 서석조
비무장지대
한 발짝 들이밀면 불귀의 땅 애오라지
초병의 날 선 시선 날줄을 퉁기는지
수풀을 난장질하는 선불 맞은 저 멧돼지
폐허에 왕거미줄 인적조차 끊어져도
파리한 실개천이 논자락을 후벼 돌며
사라진 주인 자취를 밝혀 띄우는 윤슬
만방 처연한 노래 피 얼리는 빙하기에
별 받기 신방돌이 바람 쟁여 햇살 받네
아무리 빨라도 늦는, 늦으면 그예 죽는
구세주
남양산 로터리 횡단보도 소나기 속
우산 없이 허둥지둥 헤쳐 뛰던 한 여인
전봇대 부여잡으며 속절없이 젖어 들고
지나던 승용차 한 대 느닷없이 멈춰 서서
차창을 스륵 내려 우산 하나 툭 건네곤
휑하니 가던 길 그냥 미련 없이 가버린다
세상에 참, 구세주가 따로 또 있을까
화들짝 놀라 펼친 우산 위 빗줄기가
축포를 터트리듯이 은빛으로 퍼져난다
사진첩
글자 하나 몰라도 나는 살아 팔순이다
공부깨나 해놓고 절름대기 일쑤라니
등짝을 내리치시며 서슬 퍼랬던 어머니
그날 그 고향 집에 감나무 가로 벋고
댓돌의 높이만큼 농민신문 쟁여져
문명文名을 바랐으랴만 묵향 머금은 주소
괜스레 헛간 뒤져 먼지바람 일으키자
댓잎에 베인 바람이 구석구석 파고든다
아뿔싸, 아닌 곳에 둔 입신양명 사진첩
첫사랑
― 세상에나, 그가 요즘 치매라는데 니 아나?
상고의 처진 학력에 칼금을 그어놓고
저 멀리 휘돌아가던 어느 오월 버스 자취
아등바등 시집살이 고향길은 멀어지고
품계를 가늠하랴 드넓어진 세상에서
이팝꽃 뭉실 필 적엔 소리죽여 울었단다
소식이야 흰 소식 못 들은 척 해봐도
괜스레 달력을 찢어 구기다가 찢다가
내리는 빗줄기 속을 하염없이 헤아린다
달동네 노후
비둘기 날갯짓도 작은 꿈에 감싸이고
발아래 성채城砦들도 외로운 날개 접어
가파른 오름길마다 뒷걸음을 치게 한다
수레의 무게만큼 밀려나는 시름으로
오금에 빗장 질러 들 날숨을 가리랴
천국은 높은 데려니 오르고 또 오른다
몸 누일 한 평 방에 별 주렴 달도 환해
가진 한 벌 넝마에도 라면 한 끼 주식에도
무심결 날개 단 듯이 가벼워지는 나날들
해설
서석조의 '서로시조'라는 아토포스atopos
김태경(시조시인. 문학평론가)
서석조 시인은 이번 신작시집 『사진첩』에서 "저 쫄깃한 광망이 밤을 얽어 무거우면"(「삭발, 그리고 광장」) "잔바람 품어 안고/ 큰바람 휘감고"(「조팝꽃과 벚꽃 사이」) "서역 먼 사막에다 호박씨나 심어" (「발바닥 티눈 하나에, 벽창호」)볼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귀 바짝 세워 열고 천기를 염탐"(「나팔꽃, 천기를 염탐하다」)한다. 타자와 함께곪아 터진 생의 아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봤듯이, 그는 타자와 연결망을 형성하는 글쓰기를 위해, 자신만의 문학적 공간에 '서로시조'라는 아토포스를 건설하였다. 그곳은 열린 공간이고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낭만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시인이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언어로 어둠과 슬픔을 견디며 기름진 들판에 씨앗을 심는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서석조 시인의 시집에서 '홀로시조'를 멈추고 '서로 시조'로 고요히 스며드는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가 아토포스 안에서 빚은 기대가 타자와의 조우를 향한 견고한 이상이었다는 점, 그 사랑과 매혹으로 시조의 장場에서 서석조 시인은 다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