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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 속에서 오시는 하나님
현재는 어지러운 시국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상황입니다. 탄핵은 통과되었고 이제 헌법 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헌정을 어지럽힌 이는 이 모든 절차를 지연시키려 하며 당파적 관심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은 자신의 당리 당략만을 고려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이 모든 것이 사필귀정, 즉 옳은 방향으로 결국 일이 되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은 비단 정치적 영역 뿐 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들 속에서 모든 일들에 언제나 선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은 극도의 혼돈과 불합리, 그리고 불투명 속에서도 그에 적절하게 응답하는 우리의 삶을 세워가십니다. 대림절 우리가 말씀 앞에서 기다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물론 세상의 여러 소란과 격변들을 뛰어넘고 잠재우시면서 동시에 우리 각자에게 근본적인 평화와 안식 그리고 사랑을 불어넣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어쩌면 무언가 뚜렷하고 선명한 해결보다는, 문제 앞에서 선 우리의 태도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주서는 것일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두 본문에 마주 섭니다. 하나는 앗시리아의 침공 앞에서 유대의 편에서 구원을 가져오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오심에 대한 머나먼 약속에 관한 것 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비천함 속에서 고난을 받기 위해 오신 메시야를 따르는 제자도에 관한 것 입니다. 두 본문은 대림절이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추구할 그 구원의 길의 모습을 드러내어 줍니다. 어떤 면에서 두 서로 다른, 그러나 서로 보완되는 오심에 대한 이야기, 즉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오심과 또한 제자도의 부름을 요구하는 메시야의 오심은, 사실 우리 편에서의 나아감, 즉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꿈과 비전을 갖고 나아가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섬김으로 나아가는 것 두가지를 같이 포함합니다. 우리가 고대하고 기대하는 그 놀랄만한 구원을 주는 그러한 사건은, 그것이 무엇이던 간에,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그 자신을 부인하며 섬김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한 진리를 오늘 두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본문은 제 1 이사야라고 불리는 예언자에 의해서, 약 기원전 8세기 경, 아시리아의 침략 앞에서 희망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시리아는 강한 기병과 전차력을 바탕으로 주변 민족들을 가혹하게 정복한 근동의 패자였습니다. 주변 민족들을 열등하다 여기면서 적들의 사상자들의 해골을 쌓고 포로들의 코애 사슬을 꿰어 데리고 가는 폭압적인 통치 방식을 택했습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두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이집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다가 멸망되는 것을 보고, 또한 그 역시 조국 유다가 곧 정복당할 위기에 처해있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사야 35장은 상당히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약속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아시리아의 패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유다 군대의 승리를 전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약한 자를 돌보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러 오셔서 사막에 꽃이 피고 연못이 되고 광야가 물로 덮이고 맹인과 지체 부자유자들이 건강해지고, 예루살렘은 세계의 중심이 되어서 모든 나라를 하나로 묶는 대로를 닦아내고, 진정한 의인들이 그 길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매우 구체적이고 또한 현실적인 공포 앞에서, 즉 아시리아가 자신과 자기 민족을 포로로 사로잡아 죽일 수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너무나 추상적이고 또한 비현실적인 희망을 노래 합니다. 그 비현실적인 희망은 바로 그가 볼 주님의 영광, 혹은 하나님의 영화, 혹은 원어적으로는 하나님의 높음이 드러나서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일거에 해소하고 동시에 긍정적인 가치, 즉 거룩의 가치가 예루살렘에서부터 뻗어나가서 전세계를 감화한다는 예언입니다. 주님의 영광은 곧 그의 백성을 돌보는 힘과 권능으로서 그것은 만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드러난 힘은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자연 사물들, 즉 사막의 황페함과 광야의 척박함, 그리고 신체적 질병과 고통들 마저 모두 변화시킬 것 입니다. 이러한 자연 환경과 인간 생명에서 겪는 부정적인 것들을 급진적으로 변화시키는 자연의 변혁은 물론, 더 나아가서 제국의 폭력들이 야웨의 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가치에 의해서 통합되는, 정치-종교적 변혁 역시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능력은 아시리아와 이집트 같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분열과 분쟁을 종식시키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거룩한 길을 통해서 세계를 하나로 통일할 것 입니다. 길이란 결국 제국의 주권과 그 행정체계를 실현시키는 교통망이라고 한다면, 이사야의 본문은 곧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통일할 것은 곧 거룩의 가치, 즉 하나님의 법에 따른 삶이 될 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왜 당면한 구체적인 위기 앞에서 그렇게 크고 황당한 머나먼,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꿈과 비전이 이야기되는 것일까요. 지금 필요한 예언이란 어쩌면 구체적으로 아시리아의 군사적 원정이 실패할 것이다 혹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아시리아를 견제할 이집트를 활용해라 등등이 아니었을까요? 어쩌면 예언이라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금 당면한 문제들, 좁은 지평 속에서 나의 삶을 흔드는 여러 일들에 대해서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그리고 더 큰 믿음 속에서 보게 하는 관점을 불어넣는 것일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을 지금 나의 좁은 시야에 가두지 않고,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눈으로 나의 좁은 문제와 관심을 넘어가는 비전을 가지는 것이 예언의 본령일 지 모릅니다. 우리는 소위 탄핵 정국 속에서 이땅의 민주주의라는 본질적이고 넓은 가치와 동시에 개인의 권력욕 혹은 자기 당의 권력 유지라는 좁은 가치의 대립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군인이건, 일반 시민이건, 정치인이건, 언론인이건, 그 누구건 간에 그 일반적인 가치에 대한 넓고 긴 호흡과 헌신을 가졌기에, 자신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생각없이 관성에 따르지 않고, 민주 시민의 일반적인 원칙에 따라서 자신의 일을 담당하며 재앙을 멈추었는지를 잘 볼 수 있었습니다. 탄창 지급을 하지 않은 지휘관이건, 태업을 한 장병이건, 단시간에 국회로 모인 시민이건, 도망치지 않고 담을 넘은 정치인이건, 심지어 계엄 해제를 요구한 현집권 여당 의원이건, 그 실망스러운 이후의 처신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름에 파악한 일반적인 원칙을 따라서, 자신을 가두는 관성과 두려움에 걸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답은 결국 언제나 긴 호흡으로 멀리 그리고 깊이 보는 꿈과 비전에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일부분인 정치와 민주주의도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궁극적이고 또한 가장 넓고 포괄적인 가치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 세상 모든 것과 모든 이가 누릴 근본적인 새로움과 변혁을 그려가는 하나님의 꿈과 비전은, 비록 너무나 뻔한 일반적인 원칙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도,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좁은 시선을 넘어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넓게 보고 더 나아가 더 강하게 희망하는 법을 배우기를 요청합니다. 무릇 대림절에 우리가 결국 이사야를 따라서 기다리는 것은 바로 믿음을 가지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넓고 깊고 먼 시선을 다듬어가는 것에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삶의 문제이건 혹은 사회적인 차원의 부정의나 모순적 현실이건 간에, 그 가운데에서 낙담하지 않고, 동시에 나의 유익이나 나의 문제 해결에 하나님의 일을 가두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이 가져오는 근원적이고 또한 그 만큼 이상적인 변화를 긴 호흡으로 그리고 넓은 시야로 꿈꾸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대림절 우리는 그러한 꿈이 우리에게 말을 건내게끔 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는 동시에 그 꿈과 넓은 비전을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발견하며 그것을 살아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 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급진적인 또한 근본적인 꿈과 비전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전혀 다른 꿈과 비전을 가집니다. 대림절에, 즉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은 물론 그의 제자들을 따라서, 그 모든 꿈과 비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가 남긴 영향들 속에서 이미 이루어졌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입니다. 현실을 넘어서는 꿈과 비전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렌즈를 통해서 투과됩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는 마가복음은 다음과 같은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가질 꿈과 비전은, 그것이 급진적이고 또한 그만큼 추상적인 만큼, 동시에 우리 각각이 가지는 가장 일상적이고 또한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낮아짐을 자처하는 섬김 속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보여주는 것 처럼, 하나님이 일하실 저 먼 미래의 급진적이면서 또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그 변혁을 꿈꾸는 것 만 해도 어쩌면 열정이 가득 차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마가 복음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는 관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한 급진적 꿈과 비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각자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다른 이를 위해서 수난을 자처하며, 가장 낮은 자리에서 남을 섬기며, 모든 연약하고 스러지는 이들을 끌어안는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가 복음을 관통하는 주된 메세지는, 세상은 물론 제자들도 알아보지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수난받는 메시야의 비밀스러움이며 그를 따르는 제자도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주제, 즉 가장 크고자 하는 이는 남을 섬기며 가장 작아져야 하며 또한 아이와 같이 여린 생명들을 품어내는 일을 해야한다는 주제는 기실 그러한 수난받는 메시야의 길과 제자도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9장은 마가복음 안에서 수난받는 메시야의 정체의 드러남과 그의 제자들의 어리석음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결국 클라이맥스인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에 길을 여는 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장 후반 부터 지속적으로 이야기되는 바인 그리스도는 죽임을 당하는 존재이고 제자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그를 따르라는 권고는 지속적으로 세상적인 권력과 영광을 지향하며 제자도 자체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우둔함과 계속 대조됩니다. 제자들이 예수 안에서 가진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꿈과 비전 그리고 귀신 축사와 치유 같은 사역들은 분명히 꿈을 꾸고 이루는 내 편에 서 있는 하나님이라는 아집을 불어넣습니다. 그 꿈과 비전 그리고 사역은 비록 어느 정도 피치 못할 자기 야망에 결부되어 있더라도, 하나님의 일하심과 영광이 드러나는 일이라고 제자들은 의심치 않았을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에게 예수와 함께 으쓱거리며 다니기를 넘어서 예수와 함께 따르며 죽음이 그들이 꾸는 꿈과 비전, 그리고 사역에 핵심적인 것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작정이라도 한 듯이 8장 부터 계속 예수는 운을 띄웁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사실 알아듣지만, 이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혹은 모르는 척 하며 이를 회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꾸는 꿈과 비전, 그리고 그 사역은 필수적으로 가장 구체적인 자리에서 고통을 겪고 견디며 끌려가는 삶을 포함한다는 것을 예수는 계속 제자들에게 가르치려 합니다. 우리는 마가 복음을 읽으며 때때로 제자들을 우습게 생각합니다. 제자들이나 되가지고, 우둔하긴, 당연히 예수를 따르는 삶은 십자가지 라고 쉽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값싼 복음을 쉽게 비판하면서 또 그만큼 더욱 제자도 역시 쉽게 생각합니다. 많은 경우, 신앙의 문제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삶을 조금 풍요롭게 하는 정신적 경험 정도로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 십자가와 제자도는 결국 밋밋한 일상에 다소간에 톡 쏘는 얄팍한 비장한 가치만을 더하는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렇게 안 살거 알면서 잠깐 반성의 시늉이나 하고 또 그것을 표현하면서 성찰하는 나의 도덕적 우월성을 만지는 그런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제자도는 근본적으로 예수를 따르면서, 침묵 속에서 십자가를 견딘 예수처럼, 아무 응답도 없고 불투명한 어리석게 보이는 믿음 속에서 암담하고 어두운 삶을 그 자체로 짊어지고 걸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십자가는 억지로 영웅처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러 계기들과 이웃과의 함께 삶 속에서 어느 덧 덮쳐오게 됩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마다 각자 다른 삶의 지평에서, 언제 어느 때, 그리스도가 나의 궁극적인 기쁨의 소식을 가져왔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전혀 다른 선택과 처신, 그리고 관점을 가지면서 견뎌야 할 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곧 기쁜 소식이지만, 그 기쁜 소식을 맡고 전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그것은 고통스러운 따름의 부름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점을 직면하기를 회피합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큰 꿈과 비전과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자아를 키우고 그 힘을 자기 스스로 누리려는 생각만 할 뿐,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무력함 속에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하기에 누가 제일 큰가 혹은 누가 가장 먼저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여전히 자기를 중심에 두는 습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꿈과 비전을 왜곡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9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수의 새로운 율법의 가르침과 또한 권능의 사역을 행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꿈과 비전을 가지면서도, 그 비전은 결국 내가 가장 크다 혹은 내가 가장 첫 번째 서열이다라는 틀을 통해서 굴절되어 버립니다. 결국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꿈과 비전은 제자들이 꼭 악의적이어서가 아니라 결국 자신의 자기 실현 욕구와 구분이 흐려질 정도가 됩니다. 흔히, 사람의 큼 혹은 사람의 작음의 문제는 결국 서로가 공동으로 씨름하는 목표에 얼마나 기여하며 또한 그 과정에서 리더쉽을 발휘하며 또한 인정과 보상을 독점하는가의 문제로 생각됩니다. 하기에 제자들 역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의 문제를 공동체 안에서 나의 영향력과 기여도의 문제로 바꾸어 버립니다. 예수는 그 과정에서 그 꿈과 비전의 허황됨에 도취되기 이전에, 그리고 그 허황된 꿈과 비전이 자신의 욕망과 아집을 부풀리게 하기 이전에, 언제나 자기 스스로 물어보아야 할 것은 남을 위해서 기꺼이 말석에서 그리고 가장 볼품없이 섬길 준비가 되어있는가 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 물음은 곧 어떻게 이전의 자아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덧입는 과정이 이루어지는가의 문제입니다. 여느 사람처럼 자신의 힘의 확장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살아가다가 그것을 내려놓는 것을 배워가는 동시에,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이웃 섬김의 가치를 위해서 삶을 새워가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운 만큼 동시에 그만큼 유익한 과정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가치의 변환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저마다 존재하는 것은 다른 누구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에 따라서 자기 삶의 확장이라는 가치를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다른 관점에서 바꾸어볼 수 있는 창조적 시점을 가지기를 강조하였습니다. 자기 힘을 늘리기 위해서 삶의 경험을 남의 시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시각으로 보라는 권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확장해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간에 자기 스스로 가치를 매기는 방식을 자기 나름대로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 역시 동일하게 가치의 변환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변환은 나의 자아의 확장이라는 꿈과 비전에 따라서 가치의 기준을 세우는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가 이야기하는 가치의 변환은 바로 멀리 떨어진 저 깊고 넓은 하나님의 나라의 꿈과 비전이라는 매우 큰 궁극의 가치 속에서 나의 자아의 확장이라는 어리석고 사소하고 좁은 가치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관점을 기르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제자로서 따르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무한히 크고 무한히 깊으면서 그 이상 만으로 우리의 삶에 열정과 영감 그리고 때로는 설레임과 도취감을 주고는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 확장의 뿌리는 너무나 깊어서 그러한 꿈을 왜곡시키며 나의 꿈의 실현에 소용되는 하나의 수단으로 바꿔버리고는 합니다. 저 크고 넓은 구원의 비전이 있고, 또한 동시에 그것을 더럽히는 자아 확장의 욕망이 있다고 할 때, 예수의 해답은 바로 남을 섬김 속에서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를 짐으로써 그 넓은 구원의 비전을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섬김의 삶은 언제나 어렵습니다. 저희 본문에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어서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적 표현에서는 이는 단순히 모두를 위한 종 혹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입니다. 노예란 자신의 의지가 없어 닥친 상황에서 언제나 자신의 주인의 명령에 굴복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꼴찌가 된다는 것,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넘기며 마지막이 된다는 것은 결국 나라는 삶 자체 혹은 나의 존재의 이유가 나를 필요로 하는 다른 이들에게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억지로,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온전히 비어지고 오로지 그 의지를 그리스도에게 내어 맡길 때, 하기에 자신을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의 도구로 여길 때, 그때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대림절에 기억할 또 다른 가치로 돌아가 봅니다. 이사야에서 즉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무한히 큰 꿈과 비전이라는 가치를 대림절 기간 동안 기다리며 또한 되살리는 것 만큼이나, 마가복음에서 우리는 그 구원의 꿈과 비전의 도구로서 자신을 내려놓고 남의 필요에 응답하며 종이 되라는 부름을 역시 되살리고 다시 기다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생명 사랑 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릇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어느 누구도 뺏지 못하고 부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대한 비전과 꿈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비전과 꿈은 언제나 가장 구체적인 삶의 자리 속에서, 나의 자아를 죽이고 십자가를 짊어지며 섬김 속에서 사는 삶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음 역시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사소하고 가장 작은 자리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구속하심의 큰 꿈과 비전을 가지며, 동시에 그것을 위해서 나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이웃을 위한 섬김이 바로 그 꿈과 비전을 살아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같이 기도하십시다
사랑의 주님
당신은 절망과 슬픔 그리고 어둠의 한 복판에서도
당신의 궁극적 구원의 빛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더 깊이 그리고 넓게 보고 꿈꾸게 하시는 분 이십니다.
그리고 그 만큼 당신은 우리를 꿈꾸게 부르시며
다른 이를 위해 우리를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도록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희로 하여금, 무수히 다양한 삶의 과정과 만남의 계기 속에서,
깊은 시선과 강한 희망, 그리고 섬김을 위한 민감함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도구로서 그리고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나게 해주시옵소서
감사드리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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