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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랑 구기순의 서예 작품론
고향, 서천을 말하다
신웅순 시조시인, 서예가 ,평론가, 중부대 명예교수
1. 들어가며
2010년 삼랑의 서예 작품론에서 필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삼랑 구기순은 차라리 시인이다. 글제를 고르는 안목이나 글제에 대한 감상이 예사롭 지 않다. 글씨는 그 사람이며 그 사람의 모든 것이다. 자신을 숨겨본들 자신의 마음가 짐, 영혼까지 숨길 수 있겠는가. 천박하면 천박한 대로 고상하면 고상한대로 숨김없이 드러나는 것이 글씨이다. 그래서 서예를 法이라 했고 禮라했고 道라했다.
삼랑은 글씨도 글씨이려니와 문학에도 많은 재능을 보였다. 대학에 편입하여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기도 했다. 서예학도이면서 국문학도가 되었다. 이제는 글과 글씨가 일체가 되어 시·서에서 세계를 보는 눈이 한층 넓어졌다.
이번 작품들은 고향 서천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다. 고려 말 가정 이곡에서부터 조선 초 목은 이색, 조선 후기 석북 신광수를 거쳐 현대 시인에 이르기까지 서천의 역사가 총망라되었다. 인물, 설화, 전설, 속담, 유적 등 명실상부한 서천을 말하고 있다. 삼랑의 이번 전시는 바로 ‘서천’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2. 여말 가정(稼亭)에서 조선 후기 석북(石北)까지
가정 이곡은 고려후기「죽부인전」,『가정집』 등을 저술한 학자로 본관은 한산, 이색의 아버지이다.
「차마설(借馬設)」은 ‘말을 빌려 탄’ 개인의 체험을 고전 수필인 ‘설(說)’의 형식으로 쓴 작품이다. 설은 사물이나 사건에 관한 생각을 서술한 글로 지은이의 개인적 체험이나 가치관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또한 이를 알리고자 하는 수필 형식의 글이다.
글쓴이는 세상의 부귀와 권세도 본래부터 소유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빌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소유인 양 생각하고 반성할 줄 모른다고 맹자의 말을 인용해 지적하고 있다. 이곡은 올바른 삶이 무엇인가를‘차마설’에서 제시하고 있다.
삼랑은 ‘차마설’을 읽고 현 세태를 다음과 같은 표제어로 읽어내고 있다. 사람들에게 경계를 삼으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아, 사람의 마음이 옮겨지고 바뀌는 것이 이와 같을까
삼랑체로 썼다. 구기순의 삼랑체는 스승 석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조금은 각지 었어도 딱딱하지 않고 궁체와 결합된 삼랑만의 부드럽고 우아한 개성 있는 글씨체이다.
목은 이색은 고려 말 대학자로 고려 삼은의 한 사람이다. 이색의 한산팔경은『신증동국여지승람』제17권 한산편에 소개되어 있다. 한산읍성을 중심으로 금강하류와 한산벌을 둘러싼 경관을 노래하고 있다.
‘숭정암송, 일광석벽, 고석심동, 회사고봉, 원산수고, 진포귀범, 압야권농, 웅진관조’가 그것이다.
한산팔경의 위치, 박미옥·구본학의 논문 ‘생활권 마을 습지 정원문화연구’에서
한산팔경의 노래를 삼랑은 훈민정음체로 썼다. 고향과 한글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태채는 숙종 때의 인물로 1660 현종 1년에 태어나 1722 경종 2년에 졸했다. 그의 부인도 같은 해에 태어나 40세 1699년에 졸했다. 그는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으로서 우의정까지 올랐으나 소론에 의해 진도로 유배, 사사되었다.
일찍 죽은 아내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고백한 글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체를 혼용하여 쓰고 있다. 표제어는 캘리 형식의 나름체로 전면은 흘림체로 중간 중간 크게 쓴 붉은 글씨는 단아한 정자체로 썼다. 붉은 글씨는 메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썼고 협서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의 마음에서 썼다. 붉은 글씨와 협서 일부이다.
아 부인은 단정하고 정숙하였으며 마음을 쓰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같이 올곧았고
…… 나를 대할 때는 매우 공경하였지만 성품이 약간 강해 나의 잘못이 있으면 직접 옳게 간해 용서치 않았다. ……아 부인은 나에게 시집온 후로 모든 괴로움을 겪었으며 항상 아침 저녁으로 나에게 극진히 공양을 했지만 당신은 싸라기 죽을 먹었다. ……아 부인의 현숙한 덕과 아름다운 범절은 장수를 누리지 못했으니 슬픈 일이고
……만남과 헤어짐을 다소 가볍게 여기는 요즈음의 사람들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이 글을 옮겨 쓰다.
작금에 와 긴 글을 자신만의 한글체로 자연스럽게 써내려간다는 것은 자판에 익숙해진 현대에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한글 서예인들이 이를 어떻게 예술과 함께 정립해 나가야할 것인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붓글씨는 예술이요, 수양이요, 전달이기 때문이다.
붉은 글씨만 읽어도 글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게 배려한 점과 협서로 쓴 현대인들에게 일침을 가한 짤막한 감상도 이채롭다. 특히 예술적인 표제의 캘리 형식도 잘 구성되어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끌 수 있도록 했다.
임벽당은 유여주의 계실로 중종 조의 시인이다. 유여주는 중종 때 현량과에 선발되었으나 기묘사화 후 향리인 비인으로 낙향하여 임벽당을 짓고 은거, 독서와 서예로 일생을 마쳤다.
임벽당은 서천의 여류시인이다. 임벽당의 시 ‘가난한 여인의 노래’는 정음체로, ‘작은 마을 그윽이’는 한글 궁체 흘림으로 썼다. ‘가난한 여인의 노래’는 흘림체 협서로 ‘깊이가 있고 인생과 우주를 관통하는 질서가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단평을 덧붙였다.
석북 신광수는 동방의 백낙천이라 불리우는, 관산융마로 유명한 서천의 조선 후기 시인이다. 그의 많은 시들은 당시 사회의 피폐한 실상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나무하는 소녀」는 하층민의 고난을 노래한 많은 시들 중의 백미이다.
궁체 흘림체로 썼다.
가난한 집의 계집종 맨발의 두 다리로 산에 가서 나무를 하려니 뾰족뾰족 차돌에 부딪쳐 다리 에 피가 흐르는데 나무뿌리 땅에 박혀 낫이 뎅겅 부러졌다네. 다리 다쳐 흐르는 피 괴로워야할 겨를이나 있나요 오직 두려운 건 부러진 낫 주인에게 야단맞을 일이로다. 나무 한단 머리에 이고 해 저물어 돌아오니 한 덩이 조밥이야 허기진 배 기별도 안 가는데 주인의 야단 잔뜩 맞고 문 밖에 나와 남몰래 훌쩍인다. 남자의 성냄은 한 때지만 여자의 성냄은 열두 때라네. 샌님의 꾸중 은 들을만해도 마님의 노여움 견디기 어려워라.
부용당은 당대 명문장가였던 석북 신광수, 기록 신광연, 진택 신광하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형제들 밑에서 시를 익혔다. 부용당은 임벽당과 함께 서천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부용당의 ‘매미소리’는 훈민정음체로 썼다.
3. 구한말·일제시대
구한말 유기남 군수의 ‘청안당서’에 나오는 말
또 다른 캘리 형식의 글씨체이다. 삼랑은 한글에 대한 글씨체를 끊임없이 실험하고 있다. 삼랑의 글체가 격조가 있는 것은 오랫동안 써온 궁체가 밑받침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글체를 창작한다는 것은 기저에 우리 고유의 한글 궁체라는 글씨가 바탕이 되어있어야 한다. 그래야 격조가 있다. 뭉뚝하게 쓴 글체가 마치 ‘신안구가’, ‘도덕신선’ 등의 추사의 글씨체를 보는 듯하다.
청안당서는 서천 군수로 부임을 받은 유기남 군수가 동학 혁명으로 불타버린 읍성과 주변을 돌아보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실토한 글이라고 한다. 유기남의 군수의 이 경구는 구한말 동학혁명의 아픈 상처, 서천의 현장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여기에 삼랑의 뭉뚝하고 묵직한 글씨는 당시의 비감을 현장감있게 전해주고 있어 가슴이 뭉클하다.
이 증언 하나만으로도 구한말 서천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랑의 향토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에 찬사를 보낸다.
청년이 나라의 보배요 천하의 보배이다.
월남 이상재는 서천 출신으로 한말의 정치가·사회운동가·독립운동가이다. 서재필과 독립협회를 조직, 부회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개혁당 사건으로 복역했으며 조선일보사 사장 등을 지냈다.
이 표제어를 가운데에 알기 쉽게 정자체로 크게 쓰고 양쪽엔 한 줄씩 협서를 섰다. 당신의 절박한 심정을 대변한 메시지이자 외침이다. 대련 형식을 취해 금방 알 아볼 수 있도록 굵은 정자, 삼랑체로 또박 또박 썼다.
4. 현대 시인·소설가
삼랑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신석초의 ‘바라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한국서예여류 정예작가전에 출품했던 작품이다.
이번 바라춤 전시는 의미 있는 특별 전시이다.
서천의 시인 신석초의 대표작 「바라춤」은 여성 화자가 저녁에 청산에 올라 산사에 머 물면서 자기 각성을 하고 새벽에 하산한다는 내용으로 무려 45연 427행에 달하는 장시이다. 향토시인 신 석초의 대표작을 향토 서예가 삼랑의 글씨체로 표현해 냈다. 세로 50센티에 가로가 무려 15미터에 달한다. 서천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기적 같은 대작이다.(2010 한국서예 여류정예작가전에서)
필자의 말이다. 이 대작을 서천 군민에게 첫선을 보인다. 단아한 한글 궁체 흘림으로 썼다.
그의 ‘심추’는 궁체 정자체로 썼으며 협서는 반흘림으로 썼다. 삼랑은 지루하지 않도록 내용과 형식에 따라 글씨의 크기라든가 다른 글씨체라든가 등등 상황에 따라 변화를 주어 쉽고 편안하게 읽도록 꾸몄다.
비록 가난한 고향이요 그들 부부에게는 더할 수 없는 아픈 상처를 준 고향이긴 하지만 매를 준 어머니가 훗날에는 더욱 그립듯이 고향에 끌리는 정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박경수의 소설 1974년 작품「황토기」일부이다. 가난한 농촌과 빈곤한 사람들의 정감어린 삶을 그렸다. 박경수가 하고 싶은 말을 이 한 구절로 대변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원작자를 작곡하여 노래로 선보이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예술성을 갖추면서 내용도 전달하게 할 수 있을까는 이제는 서예 작가들의 몫이 되었다.
황토기 글씨는 맨 위에 묵직하게 얹어놓고 아래에는 작은 삼랑체로 안정감있게 받쳐주고 있다. 손모아 기도하는 모습, 기원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이 글씨체는 필자가 보지 못한 또 다른 새로운 캘리 형식의 글체이다.
나태주의 「안부」
나태주는 서천 출생으로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대숲 아래서」로 등단한 시인이면서 교육자이다. 풀꽃 시인으로 유명하다. 공주 문화원장을 거쳐 현 풀꽃 문학 관장으로 있다.
외에 「안부」. 「풀꽃 3」,「바람에게 묻는다」 등이 있다. 나태주 시 3편은 전부가 삼랑의 개성있는 캘리 글씨로 되어 있고 하나는 정음체로 되어있다. 여기에는 그림도 있고 여백도 있어 시와 글씨,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구재기 시인은 1978년 현대시학 추천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그는 서천군 시초면 고향집에 시비가 있는 ‘산애재’에서 야생화를 가꾸며 살고 있다.
구재기 시 16편은 서천의 역사, 설화, 전설 등 서천의 유적지를 노래하고 있어 현대판 또 다른 귀거래사라하면 어떨까 싶다.
구재기의 「기벌포에서」일부
「진포대첩」「문헌서원에서」「쌍도를 바라보며」 등 16수가 소개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삼랑체를 비롯, 훈민정음체, 궁체 정자, 흘림, 변형된 삼랑체, 나름체,캘리 등 많은 글씨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림, 색깔, 여러 체의 글씨 그리고 구성, 배치, 여백 등에도 많은 고심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또 다른 삼랑의 넓어진 시야를 감상할 수 있다.
석야 신웅순은 석북 석초가의 후예로 1985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했으며 대학교수를 정년하고 현 명예교수로 있다.
「한산모시」는 1980년에 쓴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시의 직조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총 15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1, 2, 3, 5, 6, 9, 10, 11, 13 등 9수를 뽑아 더욱 세련된 삼랑체로 썼다. 정태준이 작곡한 이 한산모시 노래는 2018년에 군에 헌정한 바 있다.
신웅순의 「어머니 31」
한산모시 외에 「아내 25」는 한글 궁체 흘림과 흘림 삼랑체가 섞여져 있는 글체이다.「어머니 31」은 역시 삼랑체로 배경과 장의 구성이 여백과 함께 어우러져 있다. 가독성과 함께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신성리 갈대밭은 한산 모시, 한산 소곡주와 함께 서천을 대표할 수 있는 브랜드이다. 시인 김진설은「겨울 신성리에서」를 노래했다. 백제 적 남정네를 잃고 헤매어 소복을 입고 흐느적거리는 여인네의 몸짓을 본다고 했다. 겨울 갈대밭에 초혼가로 휘모리로 백제의 한을 풀어냈다. 삼랑도 그런 심정으로 이 시를 썼으리라 생각된다. 또 다른 세련된 흘림 삼랑체이다.
조순희는 전 서천 문화 원장을 지냈고 최근에 등단한 시인이다.「장항선 단선의 길 」과「기다림」을 삼랑의 또 다른 특유한 서체로 썼다.
네가 오기로 한
시간에
네가 오지 않으면
나는 그 곳에 서서
하염없이 너를 기다려야한다.
비껴가는 길이 없으므로
- 조순희의 「장항선 단선의 길」
협서에 조건 없는 사랑을 생각하게 한다고 느낌을 덧붙였다.
5. 삼랑의 시·서
삼랑은 이 전시에 4편의 시를 선보였다. 전에도 간간히 시를 써오긴 했으나 이 4편의 시들은 여타 시인 못지않다. 「이골나다」와 「판교 우시장 가는 길」은 절창이다. 체험이 육화되어 나타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고백서이다. 시와 서가 예술로 결합된 명품이다. 본인도 자신의 시를 자신의 글씨로 쓰는 이런 예술을 꿈꾸어 왔으리라.
시와 서는 둘이 아닌 하나이다. 옛날엔 이런 것들이 일상이었으나 지금은 함께 하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시 따로 글씨 따로가 되었다. 붓은 여유요, 풍류요, 노래요, 수양이요, 메시지이다. 시요, 그림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에 와서도 시서가 함께 할 때, 이것이 자연스러워질 때 한글 서예의 고품격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골나다」는 모싯일을 해서 육남매를 키우신 엄마 김화중 여사의 일생을 그린 딸 삼랑의 시이다. ‘꾸묵’은 모시를 째고 남은 짜투리이다. 꾸묵 뭉치는 고래심줄보다 더 강하다. 가슴에 뭉쳐진 이것이 어머니의 가슴이다. 꾸묵! 이 단어 하나면 모든 일생을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말 하나가 가슴을 울린다. 동자체 같은, 어린 아이 손글씨 같은 글씨를 돌에 새기듯 꾸욱 꾸욱 눌러썼다.
삼랑에게「우시장 가는 길」은 그 옛날 농촌 풍경의 가난과 슬픔의 절창이다.
그날 아버지는 유독 정성스레 쇠죽을 푹 끓이셨다.
버겁떼기처럼 엉겨붙은 쇠똥을 긁어내어 말끔해진 엉덩이도 오래도록 쓸어내리셨다.
몇 번의 송아지를 내어 빠듯한 살림에 목돈을 마련해준 누렁이를 우시장에 데려가는 날이다.
검단재를 넘어서가는 십여리길 곧 팔려갈 운명을 알기라도 한 듯
가쁜 숨을 몰아쉬는 입에서는 허연 침이 흘러내리고
발걸음은 쟁기 달고 논을 갈던 때보다 무거워 보였다.
빨간 페인트로 서툴게 쓴 국밥이라는 글씨가 도드라져 보이던 우시장 앞 국밥집
그 유리문 너머로 누렁이의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마주한 순간
시큼한 막걸리 냄새도 왁자지껄하던 아저씨들의 술취한 푸념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좋아라 따라나선 장구경, 돌아오는 길에는 누렁이의 눈물 자국이 자꾸 따라와
내가 멍에를 진 듯 무거웠다.
유년의 기억이란 으레 그 감정이 배가 되는 법 그날의 국밥 맛이 어땠는지 다시 사온 송아지가 에미 찾아 울었는지는 기억에 없고 누렁이의 눈에 고인 눈물만 선명한 걸 보니 슬프긴 했던가 보다.
「우시장 가는 길」의 시와 협서이다. 협서엔 그때의 상황을 얘기해주고 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에 갔다 팔려가는 소와 새로 데리고 온 송아지를 보며 그때의 그 기억을 시로 썼다. 지금도 촉촉한 소의 눈망울이 삼랑의 가슴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것이다. 이를 천생 시인이라고 한다.
시란 사람의 가슴을 울려야한다. 어느 시인의 시가 어디 이만한 것이 있으랴. 세상에 시인이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며 시가 아닌 곳이 또 어디에 있는가.
절절이 토해 놓으면 그것이 삶이요 그것이 시이다. 어찌 이 시를 또박 또박 쓸 수 있겠는가. 삼랑은 이를 흘림체로 썼다. 글씨체도 내용과 어울려야 좋은 인연이 되는 것이다.
전어 굽는 냄새에 집나간 며느리 돌아온다.
한산처녀 모싯잎 훑듯한다
다른 지방에 없는 서천 지역의 속담이다.
전어 굽는 고소한 냄새에 그 매서운 시집살이 고통도 잊은 채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예기이다. 전어를 연상해서 쓴 것일까. 구불구불한 글씨가 마치 헤엄치는 전어를 연상케 한다. 글씨란 이렇게도 저렇게도 흉내를 낼 수 있으니 참으로 오묘하다.
‘한산 처녀 모싯잎 훑듯 한다.’ 이 글씨는 시원시원하다. 어떤 일을 시원하게 해내는 모습의 글씨체이다. 글씨 자체가 자기 키보다 더 긴 모싯대를 들고 거침없이 잎을 쭉쭉 훑어내는, 억척스럽게 일하는 처녀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내용과 글씨가 어울릴 때 하나의 완성품이 되고 명품이 되고 명시가 되는 것이다.
6. 나오며
꽃 중의 꽃 김화중 여사의 시 한편으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삼랑의 어머니는 문자를 해득하신지 얼마 되지 않는다. 여사의 살아온 삶을 이제야 풀어놓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값비싼 보석이 어디 있을까, 결단코 없으리라.
김화중의 시 「다시 사는 내 인생」
김화중 여사의 시「다시 사는 내 인생」이다.
문산 도서관 한켠에 걸려있는 친정 엄마의 글이란다. 팔순을 바라보는 엄마의 만학을 존경하며 가슴으로 읽고 눈물로 썼다고 한다.
더는 말해야 무엇 하겠는가. 무릇 우리 어머니들은 이렇게 살았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삶은 분명코 세상에는 없으리라. 쌓여왔던 한을 이렇게라도 풀어내야 했다. 그 외의 작품은 다음으로 미룬다.
이번 전시는 시와 서가 함께 한 자리이다. 시와 서가 삼랑에게 따로였다면 아마도 쓸쓸했을 것이다. 서예학도답게 국문학도답게 시서를 일치시켰다. 내용에 따라 글씨체도 변화를 주어 우리 한글 서예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다. 또 멋지게 변신할 다음 전시를 기대해본다.
2019 .9. 2.
석야 신웅순, 매월헌 서재
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기 조심 하세요
고맙습니다.내내 건강하소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훌륭하십니다.
잘 읽고갑니다.
와주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