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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들은 우리나라가 지금 남과 북으로 나눠져서 서로 대립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군사적인 대립사건이 생길 때 한국 또한 세계의 화약고중 하나로 인식되어져서 한국에 와있는 여러 외국인의 가족들은 걱정하며 전화를 걸곤 합니다. 한반도가 속히 어떤 군사적인 위협이 사라지고 평화의 땅이 되어지기 위해서는 속히 통일이 되는 수 밖에 없습니다. 남과 북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위협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서는 통일밖에 없다고 남과 북의 집권자들은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김일성 3대세습체제의 주체사상을 유지하며 통일이 되어도 김일성가족의 세습으로 권력이 이어져야한다고 생각하며 사회주의 공산체제로 통일을 원하는 지향하는 북한과 자유민주주의를 원칙으로 자본주의 경제체제이 통일의 기본체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한민국, 이렇게 서로 다른 원칙으로 통일을 기대하니 절대 이 상태에서는 통일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런 견해의 차이, 생각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로 만나 대화하며 이견을 좁혀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한국전쟁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남과 북의 사람들은 해외 어디에서 만나도 안되고 우연히라고 만나는 일이 생기면 입국한 이후에 간첩이라는 죄를 받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남쪽이나 북쪽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엄중했던 분위기속에서 1972년 5월 지금의 국가정보원격인 당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이라는 사람이 대북특사로 임명받아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해서 김일성을 만나고 7.4 남북공동성명이라는 것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은 이산가족상봉, 스포츠교류, 문화사절단 교류등으로 진짜 통일이 다가온 것 같은 분위기를 보여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도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때에 대북 특사가 북한을 방문해서 대화의 문을 열어보기 위한 노력을 했던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뭔가 일이 시작되기 전 그 일을 준비하며 미리 작업을 진행시키는 책임을 맡아 수고했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국가적으로 큰 행사를 준비할 때, 국가가 엄청난 큰 반향을 일으킬 큰 사건을 일으키려고 할 때 미리 준비해놓는 역할을 하는 인물들이 꼭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이 그런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 이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실 구원 사역의 의미를 가르쳐주고 진정한 하나님택하신 사람들의 회복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복음서의 기록자인 마태는 세례요한이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사람으로서 메시아가 오시는 길을 곧게 만드는 역할이라고 설명합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왕이 어떤 지방을 방문할 계획이 세워지면 신하들이 먼저 가서 왕의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우고 왕이 지나갈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세례요한을 통해 우리 또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려 할 때 어떤 준비를 해야하는 지 살펴보고 참 준비된 사람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합당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첫째로 회개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3장 2절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3장으로부터 이제 예수님 공생애의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에 예수님이 아닌 세례요한의 등장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바로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밝혀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드라마나 영화를 시작하기 전 미리 예고편을 보여주며 본편에 대한 기대를 가져다주는 것처럼 세례요한은 예수님 사역의 준비과정을 맡은 모습을 오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백성이 참 구원이 의미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미리 준비된 인물 세례 요한을 참 구원자 예수님의 앞에 보내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 기록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는 말씀은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광야’는 여리고 언덕 위쪽의 요단강가에 있는 골짜기 부근인 듯합니다. 지금도 그 곳에 가면 세례요한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이라고 알려진 곳에 “예수님 수세터”라는 기념 장소가 있고 그 곳은 방문한 수 많은 성지순례객들이 그 곳에 들어가 세례 체험을 하면서 사진을 찍는 모습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됩니다. 저도 그 곳을 방문해보았는데요. 그 곳은 특별나 보이게 만들어놓은 곳은 아니고 그렇게 고급진 구조물이 세워져 있지도 않습니다. 특히 그 곳은 요단강가이기는 하지만 그 곳부터 유대광야가 시작되기에 예수님 수세터에서 조금만 걸어나오면 황량한 사막의 분위기를 느끼게 만듭니다. 세례요한이 활동했던 주 무대, 이 요단강에 있는 골짜기 지역 광야는 마치 이스라엘의 출애굽사건과 여호수아의 요단강 도강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 곳을 지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에 이 강을 건너면 영원한 행복이 있고 이 강을 건너면 영원한 삶이 허락되는 여호수아 당시 구원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 이 강을 건너면 하나님의 완전한 백성이 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단강은 참 구원을 얻는 것이 어떤 것인지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지를 가르쳐주는 너무나 적합한 장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장소에서 세례요한은 아무런 욕심없이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묵묵히 맡겨진 사역을 하였던 것을 오늘 본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3장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여러분, 성경을 보면서 세례요한은 원래 가난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본문으로 이 본문을 가져올 것입니다. 우리는 세례요한이 원래 기득권이라는 것이 없었던 사람, 재산도 없어 가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세례요한은 정통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많은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처럼 그가 가진 종교적 기득권으로 재산이나 권력을 추구했다면 큰 재산과 큰 권력으로 사람들위에 군림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을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어쩌면 세례요한이 그렇게 기득권을 내려놓고 그 당시의 종교지도자, 종교장사꾼과 다른 삶을 살며 본연의 종교적 사역을 감당했기에 더 세례요한에게 열광하며 환호하며 따랐는 지 모르겠습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낙타털 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사역하는 세례요한의 모습속에서 그간 잊혀왔던 본래의 선지자 모습을 세례요한에게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진실된 선지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세례요한을 사람들이 보면서 그 곳의 많은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메시아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세례요한을 신으로 따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때 세례요한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분명히 선포합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신은 오실 메시야의 사역을 대비하며 회개를 선포하며 회개에 합당한 세례를 베푸는 사람일 뿐 오실 메시아의 신을 들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위치와 사역에 대해 분명히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주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삶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신 메시아가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분명히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오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우리가 준비해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라는 사실을 외쳤습니다.
다시 오늘 본문 마태복음 3장 2절을 읽으시겠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내어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 준비하게 하신 일을 바로 회개였습니다. 세례요한의 역할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과 삶이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삶 속에 생겨난 골짜기가 메워지고 높이 막고 있는 산이 낮아지고 울퉁불퉁했던 길이 고르게 바뀌어져야 이제 신앙의 대로가 생기고 주님이 들어오실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명은 오실 메시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느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진 나라이지만 아무나 들어가는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갈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나라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기에 회개하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품안에 살아가는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 바로 회개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한 ‘천국’은 메시아의 임재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례요한이 오실 메시아께서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역할이라고 한다면 ‘천국’은 바로 오실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례요한에게 있어 메시아와 천국은 동일한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임재가 천국의 임재입니다. 즉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천국이 우리에게 임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오시는 것으로 천국임재라고 결론지으면 되는데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임재, 예수님의 거룩한 사역이전에 회개를 요구할까요? 바로 이 회개가 예수님의 사역을 바르게 하는 준비가 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세상에 물들어 살아가며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는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우리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셨고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땅의 어느 사람이든 결국 회개해야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겐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가 메시아의 임재를 받아들이기 위해 먼저 회개함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함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5절입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도행전 11장 18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천국, 하나님이 주인이신 그 나라는 회개로 출발한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앞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자복하며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앞에 철저하게 고백하며 용서를 빌 때 우리는 천국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 참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천국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둘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자손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입니다.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세례요한의 말씀선포와 사역에 대해 소문을 듣게 된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대 땅 전역에서 몰려와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중 진실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세계의 많은 교회가 시대가 지나고 형식적인 모습이 강해지면서 세례 의식도 많이 간편화되고 세례를 위한 조건이 많이 단순화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기 위한 과정이 깔끔하고 간편하게, 편리하고 단순하게 진행하는 것도 좋은 것이겠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본질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우리는 철저한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세례를 위해 세례 문답을 진행합니다. 세례를 받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문답을 통과해야 합니다. 세례문답의 구성을 살펴보면 성경의 내용과 교리적인 내용과 교회의 조직적인 설명, 직분에 대한 내용, 예배와 신앙생활을 위한 여러 신앙적 지식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배운 것을 문답을 통해 점검하고 문답을 잘 하면 세례를 베풉니다. 어쩌면 세례문답은 신앙생활에 대한 면접고사같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 그런 교회에 관련된, 신앙에 관련된, 삶에 관련된 여러 지식을 배우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나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나는 죄 때문에 죽어야할 존재이지만 나를 대신해서 죄를 갚아주시기 위해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나의 죄를 갚아주시고 내가 이제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생명,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구원의 은혜를 받으려 할 때 회개를 놓치고 세례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철저한 회개를 한 후에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회개’란 말은 단순히 마음의 뉘우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회개’라고 번역되어져 있는 헬라어 ‘μετανοια(메타노이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헬라어 ‘μετανοια(메타노이아)’는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전에 살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그렇게 철저하게 회개하며 인생 자체를 바꾸기를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새로운 삶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축복으로 회복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면서 하는 말씀이 뭡니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신앙과는 거리가 먼 잘못된 신앙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책망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의 자부심 중 하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이들에게 마음속으로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호통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시기에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천국의 조건이 될 수는 없다’고 호통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돌들로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을 이어받은 유대인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신앙을 계승하며 아브라함의 믿음을 유지하는 자가 참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순종한 것을 말합니다. 오늘날 흔해 빠진 인간적인 희망사항이나 욕망을 채우려고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삶, 참 신앙이 없으면서 자기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며 신앙의 확신이 있는 척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실 줄을 믿습니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세례요한이 유대인들에 대해 회개하지 않았다고 질책할 때 그 마음속에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순종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보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다라는 혈통적 유대인을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보다 외형적 혈통을 강조하는 것이 그들의 오류였습니다. 그러니 껍데기만 있는 가증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뭐가 본질이고 뭐가 우선인지를 제대로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이 고백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해석할 때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는 베드로의 고백보다 베드로라는 인물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고 그 말씀대로 베드로가 교황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회에서 초대교황은 베드로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권위를 허락하고 베드로위에 교회를 세웠으니 베드로가 가장 큰 권위를 가졌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로마카톨릭교회에서는 성경보다, 교회의 모든 규칙보다, 어떤 다른 권위보다 교황의 권위가 더 큽니다. 교황의 권한이 성경내용의 해석을 좌지우지할 수 있고 교황의 권한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가치관을 가질 수 있는 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베드로라는 사람을 강조하다보니 베드로라는 사람이 신과 같은 반열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뭔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아브라함의 혈통만 강조하니 잘못된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천국에 들어갈 사람, 메시아를 맞이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합당한 사람은 바로 혈통이 아니라 바른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갈라디아서 3장 28,29절입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영적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어차피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천국가는 하나님의 백성,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돌같은 우리들, 아니 어쩌면 돌보다 못한 우리들을 불러 아브라함의 후손되게 하시고 천국백성되게 하심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천국에 들어갈 사람, 마지막 셋째로 좋은 열매를 맺고 살아갑니다.
마태복음 3장 8절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마태복음 3장 10절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오늘 본문에서 ‘회개’라고 번역되어져 있는 헬라어 ‘μετανοια(메타노이아)’는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살던 삶의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온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에게 세례요한은 정말 신랄한 비판을 합니다. 세례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나오자 이렇게 외칩니다.
마태복음 3장 7,8절 말씀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세례요한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라며 강한 질책을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일명 종교지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눈가리고 아웅하며 거룩한 척, 신실한 척, 참 종교인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혀 천국에 합당한 삶,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언행을 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세례는 받고 싶어서 세례요한을 찾아왔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은 대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세례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으려고 할까요? 그들은 이미 사람들에게 지도자급의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두 가지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요한의 등장과 소문에 당시 종교지도자 계급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세례요한의 존재를 정확히 파악해보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권위와 거룩함을 드러내며 자신들도 종교적 행위에 헌신적으로 가식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세례요한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미 그들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에 마치 미리 들어놓은 보험에서 돈을 찾듯이 세례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는 것으로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라는 인증서를 받아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요한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어떤 마음으로 세례를 받으러 나왔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돌이키지 않는 삶, 진정한 회개가 없는 삶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는 평안과 축복과 존경과 사랑이 있고 말로는 회개하며 살아간다고 하지만 결국 그들의 행위를 보면 절대 회개한 자로서 할 수 없는 행동,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돈과 명예와 권력만 추구하고 섬김과 나눔과 사랑의 모습은 없었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었습니다. 신앙인은 분명한 변화의 열매, 은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7장 17~20절입니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멀어져서 입으로만 하는 회개는 참 회개가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임재 앞에 먼저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진실된 삶의 변화가 동반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회개는 참된 삶의 변화를 동반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 강단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회개의 메시지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듣고 가슴을 찢고 거룩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애통해하며 진정 복음으로 거듭날 때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으로 거듭날 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고 회개를 통해 우리의 삶속에 신앙의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입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임재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예수님께서 맺게 하시는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간다면 우리 속에서 참된 회개가 나올 것이고 참된 회개를 통해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고 거룩한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열매맺지 않는 나무는 잘라버리고 없애버리신 예수님의 말씀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전도의 열매, 숫자적인 결실을 생각하며 가시적인 성과가 없으면 죽는 것이다라고 적용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진정한 신앙의 열매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거룩한 성품의 열매, 거룩한 언행의 열매, 거룩한 은사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당연히 맺혀지게 되는 거룩한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열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참된 회개와 함께 참된 열매를 맺으며 천국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세례요한이 이 땅에 와서 예수님의 사역전에 천국에 대해 미리 가르쳐주면서 회개선포와 세례사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세례요한이 행한 선포와 세례 요한을 통해 베풀어진 세례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속에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며 나가려고 할 때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회개를 해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며 무엇을 걱정하며 무엇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죄 문제와 우리의 구원 문제가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루하루 먹고사는 문제, 본인과 가족들의 건강의 문제, 자신의 명예와 권력, 재산의 문제에 대 민감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새로워진 신앙의 열매를 맺은 사람들은 영적인 절실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존재가 죽음 가운데,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그런 영혼의 상태를 싫어하며 참 생명과 구원을 갈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현세보다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가 어떤 삶의 기준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지 우리를 점검해보며 구원에 합당한 참 회개, 천국에 들어갈 귀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의 세례를 보면서 진실된 회개를 하며 참 구원을 갈망하며 나온 사람도 있지만 반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같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인 회개를 들고 자신의 기득권만 챙기려고 세례요한을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있고 정말 하루하루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거룩한 열매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지를 살펴보며 우리가 이제 세상에서의 삶의 목표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 주님과 함께 하는 영적인 삶,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이 땅에서도 천국백성으로서 참 회개와 거룩한 성령의 열매가 넘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