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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崔致遠)의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 碑銘)
최치원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8년 12세 때 당나라 장안 체류 7년 만에 18세 나이로 빈공과(賓貢科)에 장원급제 하여, 표수현위(漂水縣尉)로 임명되었다. 879년 고병(高騈)이 황소(黃巢) 토벌에 나설 때 그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있으면서 만든 시문들이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 이다. 당시 고변의 지시로 쓴 글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이다. 글 중에 '천하 사람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 속의 귀신까지도 너를 베려고 의결하였다' 라는 구절을 읽고 황소가 모골이 송연하고 심혼이 놀라서 저도 모르게 상(床)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최치원은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이 되었으며,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또 882년에 자금어대(紫金魚袋)도 하사받았다.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
광명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도통검교태위(諸道都統檢校太尉) 아모(我某)는 황소(黃巢)에게 고한다.
*여기서 아모(我某)는 고병(高騈)이다.
*황소(黃巢)는 당(唐) 나라 말기에 반란을 일으켜서 도성(都城)을 점령한 도적이다. 최치원이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격문(檄文)을 지어 황소에게 보냈다.
대개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여 변통할 줄을 아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 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리는 데서 패한다. 비록 백년(百年)의 생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이나, 만사(萬事)는 마음이 주장된 것이매, 옳고 그른 것은 가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내가 임금의 군사를 거느려 정벌(征伐)에 나섯으나, 군정(軍政)은 은덕을 앞세우고 베어죽이는 것을 뒤로 한다. 앞으로 상경(上京)을 회복하고 큰 신의(信義)를 펴려 하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간사한 꾀를 부수려 한다.
너는 본시 먼 시골의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시세를 타고 감히 강상(綱常)을 어지럽게 하였다. 불칙한 마음을 가지고 높은 자리를 노려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다. 죄가 하늘에 닿을 만큼 되었으니, 반드시 패하여 망할 것이다.
아, 요순(堯舜) 때로부터 내려오면서 묘(苗)나 호(扈)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양심 없는 무리와 불의불충(不義不忠)한 무리들이 너희 하는 짓처럼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나. 먼 옛적에 유요(劉曜)와 왕돈(王敦)이 진(晉) 나라를 엿보았고, 가까운 시대에는 녹산(祿山)과 주자(朱泚)가 황가(皇家, 당 나라)를 향하여 개짖듯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강성한 병권도 잡았고, 또는 몸이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그러나 잠깐 동안 못된 짓을 하다가 필경에 더러운 무리들은 섬멸되었다.
너는 평민의 천한 것으로 태어났고, 농민으로 일어나서 불지르고 겁탈하고 살상(殺傷)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고, 속죄될 조그마한 착함은 없었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不唯天下之人 皆思顯戮) 아마도 땅 가운데 귀신까지 너를 베어 죽이려고 의론하리라.(兼恐地中之鬼 已議陰誅).
*황소가 격문을 보다가 이 귀절에 이르러 놀래서 앉았던 상에서 떨어졌다 한다.
우리 나라는 덕이 깊어, 더러운 것도 참아주고 은혜가 중하여 결점을 따지지 아니하여, 너를 장령(將領)으로 임명하고 너에게 지방 병권(兵權)을 주었거늘, 너는 오히려 짐새[鴆]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의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뜯고 하는 짓은 개가 주인 보고 짖듯하여, 필경에는 몸이 임금의 덕화를 등지고, 군사가 궁궐에까지 몰려들어 임금의 행차는 먼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께서 너의 죄를 용서하는 은혜가 있는데,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리니, 반드시 얼마 아니면 죽고 망하게 될 것이니, 어찌 하늘을 무서워하지 아니하는가.
주(周) 나라 솥(鼎)은 물어볼 것이 아니요. 한(漢) 나라 궁궐이 어찌 너 같은 자가 머물 곳이랴. (넘보지 말라)
*우(禹) 임금이 구정(九鼎)을 만들어 후세에 전하여 제왕(帝王)들이 그것을 수도(首都)에 두어 왔다. 주(周) 나라 말기에 강성한 제후(諸侯) 초왕(楚王)이 사람을 보내어 구정이 가벼운가를 물었다. 그것을 곧 제가 천자(天子)가 되어 구정을 옮겨가겠다는 뜻이다.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道德經)에 이르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소낙비는 하루 동안을 채우지 못한다. 천지도 오히려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이랴.' 하였다.
또 듣지 못하였느냐. 춘추전(春秋傳)에 이르기를,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쌓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 하였다.
이제 너는 악이 쌓이고 화(禍)가 가득한데도 스스로 미혹하여 뉘우칠 줄 모르니, 옛말에 제비가 막(幕) 위에다 집을 지어 놓고 불이 막을 태우는데도 방자히 날아드는 거나, 물고기가 솥(鼎) 속에서 너울거리다 바로 삶아 데인 꼴을 보는 격이다.
나는 웅장한 군략(軍略)을 가지고 여러 군대를 모았으니, 날랜 장수는 구름 같이 날아들고, 용맹스런 군사들은 비 쏟아지듯 모여 들어, 높고 큰 깃발은 초새(楚塞)의 바람을 에워싸고, 군함은 오강(吳江)의 물결을 막았다.
맹렬한 불이 기러기 털을 태우는 것과 같고, 태산(泰山)을 높이 들어 참새알을 눌러 깨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서늘한 가을 강의 신이 우리 군사를 맞이한다. 서풍이 불어 숙살(肅殺)의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이슬은 답답한 기운을 상쾌하게 하여 준다.
경도(京都)를 수복하는 것이 열흘이나 한 달 동안이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살리기 좋아하고 죽임을 싫어하는 것이 상제(上帝)의 깊으신 인자(仁慈)함이요, 법을 굴하여 은혜를 펴려는 것은 조정의 어진 제도이다.
나라의 도적을 정복하는 이는 사사로운 분(忿)을 생각지 않는 것이요, 어둔 길에 헤매는 자를 일깨우는 데는
진실로 바른 말을 하여 주어야 한다. 그래 나의 한 장 편지로써 너의 거꾸로 매달린 듯한 다급한 것을 풀어주려는 것이니, 고집 하지 말고 일의 기회를 잘 알아서 스스로 허물을 짓다가도 고치라.
만일 땅을 떼어 봉해 줌을 원한다면, 몸과 머리가 두 동강으로 되는 것을 면하며, 공명(功名)의 높음을 얻을 것이다.
일찍이 회보(回報)하니 의심둘 것 없나니라. 나의 명령은 천자를 머리에 이고 있고, 믿음은 강물에 맹세하여 반드시 말이 떨어지면 그대로 하는 것이요, 원망만 깊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 덤비는 도당에 견제(牽制)되어 취한 잠이 깨지 못하고, 여전히 당랑(螳螂)처럼 수레바퀴에 항거하기를 고집한다면, 그때는 곰을 잡고 표범을 잡는 군사로 한 번 휘둘러 없애버릴 것이니, 까마귀처럼 모여 소리개 같이 덤비던 군중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갈 것이다.
그때 너희들 몸은 도끼에 피를 바르게 될 것이요, 뼈는 융거(戎車, 군용차) 밑에 가루가 되며, 처자도 잡혀 죽으려니와 종족들도 베임을 당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동탁(董卓)같은 너를 잡아 불에 태울 때 후회하여도 때는 늦으리라. 너는 진퇴(進退)를 참작하고 잘된 일인가 못된 일인가 분별하라. 배반하여 멸망되는 것이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됨과 같으랴.
장사(壯士)답게 모범을 택하여 결정할 것이요, 어리석은 생각으로 여우처럼 의심만 하지 말라.
내가 고하노라.
*이 격문은 계원필경집에 '격황소서(檄黃巢書)'란 이름으로 실려있다.
최치원은 885년 신라로 돌아와 헌강왕에 의해 한림학사에 임명되어 외교문서 작성을 담당했다.
이듬해 저술을 정리하여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을 왕에게 헌상했으며, 31세 때 왕명으로 대숭복사비명(大崇福寺碑銘)과 진감국사비명(眞鑑國師碑銘)을 지었다.
최치원은 재주가 많아 질시도 많이 받았다. 그를 끌어 주던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죽은 뒤, 국왕의 총애를 받던 미장부(美丈夫)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천권(擅權)하자, 외직(外職)으로 나갔다. 890년(진성여왕 4년) 이후에 태인(泰人)과 천령군(天嶺郡, 함양)과 서산(瑞山)) 등지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891년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동해안 군현을 공략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다음해는 견훤(甄萱)이 자립하여 후백제를 세웠다.
난세를 만나 산림이나 강과 바닷가에 누각과 정자를 짓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놓고 책을 베개 삼아 읽고 풍월을 읊조렸다. 경주 남산(南山), 강주(剛州, 의성) 빙산(氷山), 합주(陜州) 청량사(淸凉寺), 지리산(智異山) 쌍계사(雙溪寺), 합포현(合浦縣, 경남 창원), 부산 해운대가 그가 노닐던 곳이다.
마지막에 가야산(伽耶山)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면서, 형인 승려 현준(賢俊)과 정현(定玄)대사와 도우(道友)를 맺고 지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고 공자묘(孔子廟)에 종사(從祀)되었으며, 1023년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 때 태인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 고운영당(孤雲影堂)에 제향되었다.
계원필경집 서(桂苑筆耕集 序)
회남(淮南)에서 본국에 들어오면서 조서(詔書) 등을 보내는 사신을 겸한,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臣) 최치원은 저술한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립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5수(首) 1권
오언칠언 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部) 5권
계원필경집 1부 20권
*'계원필경집'은 시문집(詩文集)으로 20권으로 구성되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문집이다.
신은 나이 12세에 집을 나와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배를 타고 떠날 즈음에 아버님이 훈계하기를 '앞으로 10년 안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가서 부지런히 공부에 힘을 기울여라.'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엄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 감히 망각하지 않고서 뜻을 길러서 걸맞게 되기를 소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이 백 번 하면 저는 천 번의 노력을 경주한 끝에 중국의 문물(文物)을 구경한 지 6년 만에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의 끝에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당시 노래하여 읊고 사물에 뜻을 부쳐 한 편씩 지으면서 부(賦)라고 하기도 하고 시(詩)라고 하기도 한 것들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어린아이 글 같은 것이라 장부에게는 부끄러운 일이라 오히려 득어(得魚)를 드럽힘 같아 다 버렸습니다. 그러다가 그 뒤 낙양(洛陽)에 유랑하며 붓으로 먹고살게 되어서는, 마침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어 모두 3편(篇)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 뒤 율수 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는데, 봉록은 후하고 관직은 한가하여, 벼슬 하면서 여가가 있으면 학문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촌음(寸陰)도 허비하지 않으면서 공적 사적으로 지은 것들을 모아 문집 5권을 만들었습니다.
급기야 미관(微官)을 그만두고 회남의 군직을 맡으면서부터 고시중(高侍中, 고병)의 필연(筆硯)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군서(軍書)가 폭주하는 속에서 4년 동안 이룬 작품이 1만 수(首)도 넘었습니다만, 이를 정리하고 보니 열에 한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어찌 모래를 파헤치고 보배를 발견하는 것에 비유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기왓장을 깨뜨리고 벽토를 긁어 놓은 것 보다는 나으리라고, 여겨 마침내 <계원필경집> 20권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신은 군막에 기식(寄食)하면서 문득 필경(筆耕)이라는 제목을 달게 되었는데,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정성(情性)의 밭을 파헤친 만큼, 하찮은 수고나마 스스로 아깝게 여겨져서 위에 바쳐 올리고 싶은 마음이 들기에, 시(詩)ㆍ부(賦)ㆍ표(表)ㆍ장(狀) 등 문집 28권을 소장(疏狀)과 함께 받들어 올리게 되었습니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에 전(前)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 사(賜) 자금어대(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소장을 올려 아룁니다.
진감선사 비명(眞鑑禪師 碑銘)
지금 쌍계사에 진감선사 비석이 있다. 사람들은 사진만 찍고 그 뜻을 모르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탑두에 새긴 전서(篆書)는 최치원 친필이요, 새겨진 글은 천하 대문장의 글이다. 비석 내용을 소개한다.
'유당 신라국 고 강주 지리산 쌍계사 교시 진감선사 비명병서(有唐新羅國故康州知異山雙谿寺敎諡眞鑑禪師碑銘幷序)'
*진주 옛 이름이 강주(康州)이다. 가야시대 고령가야의 고도였고, 삼국시대는 백제 거열성, 통일신라시대는 거열주, 청주, 강주로 개칭되었고, 고려 태조 23년에 처음으로 진주로 개칭되었으며, 성종 2년에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었다.
전(前) 서국 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자금어대 하사받은 신 최치원 왕명을 받들어 글을 짓고 아울러 전자(篆字)의 제액(題額, 비석의 머리 글)을 씀.
무릇 도(道)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며 사람에게는 나라의 다름이 없다. 이런 까닭에 우리 동방인들이 불교를 배우고 유교를 배우는 것은 필연이다. 서쪽으로 대양을 건너 통역을 거듭하여 학문을 좇아 목숨은 통나무 배에 의지하고 마음은 보배의 고장으로 향하였다. 비어서 갔다가 올차서 돌아오며 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얻는 것을 뒤로 하였으니, 또한 옥을 캐는 자가 곤륜산의 험준함을 꺼리지 않고 진주를 찾는 자가 검은 용이 사는 못의 깊음을 피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드디어 지혜의 횃불을 얻으니, 빛이 오승(五乘, 진리로
그러나 학자들이 간혹 이르기를 '인도의 석가와 궐리(闕里, 공자 유적이 있는 중국 지명)의 공자가 교를 설함에 있어 흐름과 체제가 달라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를 박는 것과 같아서 서로 모순되어 한 귀퉁이에만 집착한다' 하였다.
시험삼아 논하건대, 시(詩)를 해설하는 사람은 글자로써 말을 해쳐서 안되고 말로써 뜻을 해쳐서도 안된다. 예기(禮記)에 이른바 '말이 어찌 한 갈래뿐이겠는가. 무릇 제각기 타당한 바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논(論)을 지어 이르기를 '여래가 주공, 공자와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극치를 체득함에 아울러 응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함께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심약(沈約)은 말하기를 '공자는 그 실마리를 일으켰고 석가는 그 이치를 밝혔다' 하였으니, 참으로 그 대요를 안다고 이를 만한 사람이라야 더불어 지선(至善)의 도(道)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심법(心法)을 말씀하신 것은 현묘하고 또 현묘하여 이름하려 해도 이름할 수 없고 설명하려 해도 설명할 수 없다. 비록 달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 달을 가리킨 손가락을 잊기란 끝내 바람을 잡아매는 것 같아 붙잡기 어렵다.
공자는 제자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말하지 않으련다.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고 하였다.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문수보살을 대한 것이나, 부처님이 가섭존자에게 은밀히 전한 것은,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능히 마음을 전한 것이다. ‘하늘이 말하지 않음’으로 말하였으니, 이를 버리고 어디 가서 얻을 것인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 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禪師)가 바로 그 사람이다. 선사의 법휘는 혜소(慧昭)이며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한족(漢族)으로 산동(山東)의 고관이었다. 수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정벌하다가 고구려에서 많이 죽자 항복하여 우리나라 백성이 되려는 자가 있었는데, 지금 전주의 금마(현재 익산)사람이 되었다. 그 아버지는 창원(昌原)인데 재가자임에도 출가승의 수행이 있었다. 어머니 고씨(顧氏)가 일찍이 낮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서역 승려가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유리 항아리를 주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선사를 임신하였다.
태어나면서도 울지 아니하여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어 빼어난 인물이 될 싹을 보였다. 이를 갈 나이에 아이들과 놀 때는 반드시 나뭇잎을 사르어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 하였으며, 때로는 서쪽을 향하여 무릎 꿇고 앉아 해가 기울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듯 착한 근본이 진실로 백 천겁 전에 심어진 것임을 알지니 발돋움하여도 따라갈 일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의 은혜를 갚는데 뜻이 간절하여 잠시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한 말의 여유 곡식도 없고 또 한 자의 땅도 없었으니, 음식을 봉양함에 있어 오직 힘 닿는 대로 노력하였다. 이에 소규모의 생선 장사를 벌여 봉양하는 업으로 삼았다. 부모의 상을 당하자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는 '길러주신 은혜는 애오라지 힘으로써 보답하였으나 심오한 도(道)에 둔 뜻은 어찌 마음으로써 구하지 않으랴. 내 어찌 덩굴에 매달린 조롱박처럼 한창 나이에 지나온 자취에만 머무를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정원 20년(804) 세공사(歲貢使)에게 나아가 뱃사공 되기를 청하여 배를 얻어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는데, 험한 풍파를 평지와 같이 여기고는 배를 노저어 바다를 건넜다.
중국에 도달하자 사신에게 고하기를 '사람마다 각기 뜻이 있으니 여기서 작별을 고할까 합니다' 하고, 길을 떠나 창주(滄州)에 이르러 신감대사(神鑑大師)를 뵈었다. 오체투지하여 바야흐로 절을 마치기도 전에 대사가 기꺼워하면서 '슬프게 이별한 지가 오래지 않은데 기쁘게 서로 다시 만나는구나!' 하였다.
급히 머리를 깎고 잿빛 옷을 입도록 하여 갑자기 인계(印契)를 받게 하니, 마치 마른 쑥에 불을 대는 듯 물이 낮은 들판으로 흐르는 듯 하였다. 문도들이 서로 이르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뵙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얼굴 빛이 검어서 모두들 이름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라고 했다. 이는 곧 현묘함을 탐구하는 말 없이 처함이 칠도인(漆道人)의 후신이었으니, 어찌 저 읍중의 얼굴 검은 자한(子罕)이 백성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에 비할 뿐이랴. 붉은 수염의 불타야사(佛陀耶舍) 및 푸른 눈의 달마(達磨)와 함께 색상(色相)으로써 나타내 보인 것이다.
원화 5년(810년) 숭산 소림사의 유리단에서 구족계를 받았으니 어머니가 유리 항아리를 받은 옛 꿈과 완연히 부합하였다. 이미 계율에 밝았으매 다시 학림(學林)으로 돌아왔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니, 홍색이 꼭두서니보다 더 붉고 청색이 남초보다 더 푸른 것과 같았다. 비록 마음은 고요한 물처럼 맑았지만, 자취는 조각 구름같이 매임 없이 떠돌아 다녔다.
그 때 마침 우리나라 스님 도의(道義)가 먼저 중국에 와서 도를 구하였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 바라는 바가 일치하였으니 중국 서남쪽에서 벗을 만난 것이다. 도의가 먼저 고국으로 돌아가자 선사는 곧바로 종남산(終南山)에 들어갔는데, 높은 봉우리에 올라 소나무 열매를 따먹고 지관(止觀)하며 적적하게 지낸 것이 삼년이요, 뒤에 자각(紫閣)에서 나와 사방으로 통하는 큰 길에서 짚신을 삼아가며 널리 보시하며 바쁘게 다닌 것이 또 삼년이었다.
이에 고행도 이미 닦았고 타국도 다 유람하였으나, 비록 공(空)을 관(觀)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근본을 잊을 수 있겠는가. 태화 4년(830년) 귀국하여 대각(大覺)의 상승(上乘) 도리로 우리 나라 어진 강토를 비추었다.
흥덕대왕이 칙서를 급히 보내고 맞아 위로하기를, '도의(道義) 선사가 지난 번에 돌아오더니 상인(上人)이 잇달아 이르러 두 보살이 되었도다. 옛날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누더기를 걸친 영웅을 보겠도다. 하늘까지 가득한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리니, 과인은 장차 동방 계림의 땅을 길상(吉祥)의 집으로 만들리라' 하였다.
처음에 상주(尙州) 노악산(露岳山) 장백사(長栢寺)에 석장을 멈추었다. 의원 문전에 병자가 많듯이 찾아오는 이가 구름같아 방장(方丈)은 비록 넓으나 물정이 자연 군색하였다.
드디어 걸어서 강주의 지리산에 이르니 몇 마리의 호랑이가 포효하며 앞에서 인도하여 위험한 곳을 피해 평탄한 길로 가게 하니 산을 오르는 신과 다르지 않았고, 따라가는 사람도 두려워하는 바가 없이 마치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여겼다. *선무외(善無畏) 삼장이 영산에서 여름 결제를 할 때 맹수가 길을 인도하여 깊은 산속의 굴에 들어가 모니(牟尼)의 입상을 본 것과 완연히 같은 사적이며, 저 *축담유(竺曇猷)가 조는 범의 머리를 두드려 경(經)을 듣게 한 그것 만이 승사(僧史)에 미담이 될 수 없다. 이리하여 화개곡의 고(故) 삼법화상(三法和尙)이 세운 절터에 당우(堂宇)를 꾸려내니 엄연히 절의 모습을 갖추었다.
*쌍계사는 신라 진성왕 21년(722) 대비(大悲), 삼법(三法) 두 화상이 선종(禪宗)의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정상을 모시고 귀국,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 눈 쌓인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에 절을 지었다.
삼법화상이 처음 혜능의 정상을 가지러 간 이유와 상황은 이렇다. ‘육조의 정상(頂相)을 흰눈이 덮힌 계곡, 칡꽃이 피어 있는 곳을 찾아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은 것이다. 중국 홍주 개원사(開元寺)에 머물면서, 돈 2만냥을 주고 장 정만(張淨滿)으로 하여금 탑묘에 모셔있는 육조 혜능의 정상을 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그 고을의 현령 양간(楊侃)과 자사 유무첨(柳無忝)의 수색으로 곧 잡혀서 육조의 제자인 영도스님에게 처분을 물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해동에 육조 정상을 모시고 공양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용서를 받아 육조 정상을 모시고 귀국했다.
처음에는 옥천사라 불렀는데, 뒤에 정강왕(定康王)이 절 주변의 지형을 보고 2개의 계곡이 만난다 하여 쌍계사로 고쳐 불렀다.
*선무외(善無畏) 삼장; 중국의 밀교인 진언종에 선무외(善無畏), 금강지(金剛智), 불공(不空)이라는 삼장(三藏, 고승)이 있다.
*축담유 스님은 법유(法猷)라고도 부르는데, 원래는 천축 사람으로 진(晉)나라 때 돈황(燉煌)에 상인으로 왔다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좌선을 하였다. 전하는 말은 이렇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왜 너는 경을 듣지 않느냐?'고 야단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성 3년(838)에 이르러 민애대왕이 갑자기 보위에 올라 불교에 깊이 의탁하고자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 특별히 친견하기를 청하였는데, 선사가 말하기를 '부지런히 선정(善政)을 닦는 데 있을 뿐, 어찌 만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사자(使者)가 왕에게 복명하니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 하면서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색과 공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함께 원만히 갖추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호를 내려 혜소(慧昭)라 하였는데, 소(昭)자는 성조(聖祖)의 묘휘(廟諱)를 피하여 바꾼 것이다.
그리고 대황룡사에 적을 올리고 서울로 나오도록 부르시어, 사자가 왕래하는 것이 말고삐가 길에서 엉길 정도였으나, 큰 산처럼 꿋꿋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옛날 승조(僧稠)가 후위(後魏)의 세 번 부름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산에 있으면서 도를 행하여 크게 통하는데 어긋나지 않으려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깊은 곳에 살면서 고매함을 기르는 것이 시대는 다르나 뜻은 같다고 하겠다. 몇 해를 머물자 법익(法益)을 청하는 사람이 벼와 삼대처럼 줄지어 송곳을 꽂을 데도 없었다.
드디어 빼어난 경계를 두루 가리어 남령의 기슭을 얻으니 앞이 탁 트여 시원하고 거처하기에 으뜸이었다. 이에 선려(禪廬, 절)를 지으니 뒤로는 안개 낀 봉우리에 의지하고 앞으로는 구름이 비치는 골짜기 물을 내려다 보았다. 시야를 맑게 하는 것은 강 건너 먼 산이요, 귓부리를 시원하게 하는 것은 돌에서 솟구쳐 흐르는 여울물 소리였다. 더욱이 봄 시냇가의 꽃, 여름 길가의 소나무, 가을 골짜기의 달, 겨울 산마루의 흰 눈이 철마다 모습을 달리하고, 만상이 빛을 바꾸니 온갖 소리가 어울려 울리고 수많은 바위들이 다투어 빼어났다.
일찍이 중국에 다녀온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물게 되면 모두 깜짝 놀라 살펴보며 이르기를, '혜원공(慧遠公)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도다. 연화장 세계는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지만 항아리 속에 별천지가 있다 한 것은 정말이구나' 하였다.
*진(晉)나라 때 승려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있을 적에 손님을 전송하더라도 호계(虎溪)를 건너는 법이 없었는데, 도연명과 육수정(陸修靜)이 방문했을 적에는 이야기에 팔려 저도 몰래 호계를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크게 웃고 헤어졌다는 ‘호계삼소(虎溪三笑)’의 고사가 있다.
대나무통을 가로질러 시냇물을 끌어다가 축대를 돌아가며 사방으로 물을 대고는 비로소 옥천(玉泉)이라는 이름으로 현판을 하였다. 손꼽아 법통을 헤아려 보니 선사는 곧 조계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었다. 이에 육조영당(六祖靈堂, 육조 혜능의 영당)을 세우고 채색 단청하여 널리 중생을 이끌고 가르치는데 이바지하였으니, 경(經)에 이른바 '중생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화려하게 빛깔을 섞어 여러 상(像)을 그린 것'이었다.
대중 4년(850) 정월 9일 새벽 문인에게 고하기를 '만법이 다 공(空)이니 나도 장차 갈 것이다. 일심(一心)을 근본으로 삼아 너희들은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지 말고 명(銘)으로 자취를 기록하지도 말라' 하였다. 말을 마치고는 앉아서 입적하니 금생의 나이 77세요, 법랍이 41년이었다.
이 때 하늘에는 실구름도 없더니 바람과 우뢰가 홀연히 일어나고, 호랑이와 이리가 울부짖으며 삼나무 향나무가 시들어졌다. 얼마 뒤 자주색 구름이 하늘을 가리우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나서 장례에 모인 사람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양사(梁史)'에 '시중 저상(褚翔)이 일찌기 사문을 청하여 앓고 계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다가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를 들었다'고 실려 있으니 성스러운 감응이 나타난 것이 어찌 꾸밈이겠는가.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은 기별을 듣고 서로 조상하고 정을 잊지 못한 이들은 슬픔을 머금고 우니, 하늘과 사람이 비통하게 애도함을 단연코 알 수 있었다. 널과 무덤길을 미리 갖추어 준비하게 하였으니 제자 법량(法諒) 등이 울부짖으며 시신을 모시고는 날을 넘기지 않고 동쪽 봉우리의 언덕에 장사지내어 유명을 따랐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리지 않았고 말에 꾸밈이 없었으며,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겨나 싸라기도 달게 여겼다. 도토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귀인들이 가끔 찾아와도 일찍이 다른 반찬이 없었다. 문인들이 거친 음식이라 하여 올리기를 어려워하면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밥인들 무엇이 해로우랴' 하였으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그리고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
매양 왕의 사자가 역마를 타고 와서 명을 전하여 멀리서 법력(法力)을 구하면 이르기를,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불일(佛日)을 머리에 인 사람으로서 누구인들 마음 기울이고 생각을 다하여 임금을 위하여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 또한 하필 멀리 마른 나무 썩은 등걸같은 저에게 윤언(綸言)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왕명을 전하러 온 사람과 말이 허기져도 먹지 못하고 목이 말라도 마시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하였다.
어쩌다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알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히 할 뿐이다' 하였고, 한다(漢茶)를 공양하는 사람이 있으면 돌솥에 섶으로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알지 못하겠다.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꺼림이 모두 이러한 것이었다.
평소 범패(梵唄)를 잘하여 그 목소리가 금옥같았다. 구슬픈 곡조에 날리는 소리는 상쾌하면서도 슬프고 우아하여 능히 천상계의 신불(神佛)을 환희케 하였다. 길이 먼 데까지 흘러 전해지니 배우려는 사람이 당(堂)에 가득찼는데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산(魚山)의 묘음을 익히려는 사람들이 다투어 콧소리를 내었던 일처럼 지금 우리나라에서 옥천(玉泉, 쌍계사의 옛이름 옥천사)의 여향(餘響)을 본뜨려 하니 어찌 소리로써 제도하는 교화가 아니겠는가.
*진감선사가 한국 불교음악의 시조이다.
선사가 열반에 든 것은 문성대왕 때인데 임금이 마음으로 슬퍼하여 청정한 시호를 내리려다 선사가 남긴 훈계를 듣고서는 부끄러워하여 그만두었다. 3기(紀)를 지난 뒤 문인들이 세상 일의 변천이 심한 것을 염려하여 법을 사모하는 제자에게 영원토록 썪지 않고 전할 방법을 구하였더니, 내공봉 양진방(楊晉方)과 숭문대 정순일(鄭詢一)이 굳게 마음을 합쳐 돌에 새길 것을 청하였다. 헌강대왕께서 지극한 덕화를 넓히고 불교를 흠앙하시어 시호를 진감선사(眞鑑禪師), 탑명을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 추증하고, 이에 전각(篆刻)을 허락하여 길이 영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거룩하도다! 해가 양곡(暘谷, 해가 돋는 골짜기)에서 솟아 어두운 데까지 비추지 않음이 없고, 바닷가에 향나무를 심어 오래될수록 향기가 가득하다. 어떤 사람은 '선사께서 명(銘)도 짓지 말고 탑도 세우지 말라는 훈계를 내리셨거늘 후대로 내려와 문도들에 이르러 확고하게 스승의 뜻을 받들지 못했으니 ‘그대들이 스스로 구했던가, 아니면 임금께서 주셨던가’ 바로 흰 구슬의 티라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 그르다고 하는 사람 또한 그르다. 명예를 가까이 하지 않아도 이름이 드러난 것은 선정을 닦은 법력의 나머지 보응이니, 저 재처럼 사라지고 번개같이 끊어지기 보다는 할만한 일을 할 수 있을 때 해서 명성이 대천세계(大千世界)에 떨치도록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러나 귀부에 비석을 얹기도 전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고 금상이 이어 즉위하시니 질나발(진흙을 구워 만든 나발)과 피리가 서로 화답하듯 뜻이 부촉에 잘 맞아 좋은 것은 그대로 따르시었다. 이웃 산의 절도 옥천이라고 불렀는데 이름이 서로 같아 여러 사람의 혼동을 일으켰다. 장차 같은 이름을 버리고 다르게 하려면 마땅히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지어야 했는데, 절이 자리잡은 곳을 살펴보게 하니, 절 문이 두 줄기 시냇물이 마주하는데 있었으므로 이에 제호를 하사하여 쌍계(雙溪)라고 하였다.
신에게 명을 내려 말씀하시기를 '선사는 수행으로 이름이 드러났고 그대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니, 마땅히 명(銘)을 짓도록 하라'고 하시어 치원(致遠)이 두 손을 마주대고 절하면서 '예! 예!'하고 대답하였다.
물러나와 생각하니 지난번 중국에서 이름을 얻었고 장구(章句) 속에서 살지고 기름진 것을 맛보았으나 아직 성인의 도에 흠뻑 취하지 못하여 번드르르하게 꾸민 것에 사람들이 깊이 감복했던 것이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하물며 법(法)은 문자(文字)를 떠난지라 말을 붙일 데가 없으니, 굳이 그를 말한다면 수레를 북쪽으로 향하면서 남쪽의 영(郢)땅에 가려는 것이 되리라. 다만 임금의 보살핌과 문인(門人)들의 바램으로 문자(文字)가 아니면 많은 사람의 눈에 밝게 보여줄 수 없기에 드디어 감히 몸은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맡고, 힘은 오능(五能, 옛 악보에서
그러나 ‘도(道)란 억지로 이름붙인 것’이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재주가 없다 하여 필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신이 어찌 감히 할 것인가. 거듭 앞의 뜻을 말하고 삼가 명(銘)을 지어 이른다.
입을 다물고 선정(禪定)을 닦아 마음으로 부처에 귀의했네.
근기가 익은 보살이라 그것을 넓힘이 다른 것이 아니었네.
용감하게 범의 굴을 찾고 멀리 험한 파도를 넘어 가서,
비인(秘印)을 전해받고 돌아와 신라를 교화했네.
그윽한 곳을 찾고 좋은 데를 가려 바위 비탈에 절을 지었네.
물에 비친 달이 심회를 맑게 하고 구름과 시냇물에 흥을 기울였네.
산은 성(性)과 더불어 고요하고 골짜기는 범패와 더불어 응하였네.
닿는 대상마다 걸림이 없으니 간교한 마음을 끊음이 이것으로 증명되도다.
도는 다섯 임금의 찬양을 받았고 위엄은 뭇 요사함을 꺾었도다.
말없이 자비의 그늘 드리우고 분명히 아름다운 부름을 거절했네.
바닷물이야 저대로 떠돌더라도 산이야 어찌 흔들리랴.
생각도 없고 걱정도 없으며 깎음도 없고 새김도 없었네.
음식은 맛을 겸하지 아니하였고 옷은 갖추어 입지 않으셨네.
바람과 비가 그믐밤 같아도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네.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뻗어나는데 법의 기둥이 갑자기 무너지니,
깊은 골짜기가 처량하고 뻗어나는 등라가 초췌하구나!
사람은 갔어도 도(道)는 남았으니 끝내 잊지 못하리라.
상사(上士)가 소원을 말하니 임금이 은혜를 베푸셨네.
법등이 바다 건너로 전하여 탑이 산 속에 우뚝하도다.
천의(天衣)가 스쳐 반석이 다 닳도록 길이 송문(松門)에 빛나리라.
광계(光啓) 3년 7월 어느 날 세우고 중 환영(奐榮)이 글자를 새김.
최치원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동쪽 나라 화개동(東國花開洞)
*이 시는 지리산 석굴에서 어느 노승이 여러 권의 책을 발견했는데 그중 한 권이 최치원 것이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구례군수 민대륜이 그 시첩을 확인해보니 정말 치원의 글씨였고 시 또한 기이하고 옛스러워, 치원의 시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였다.
東國花開洞 (동쪽 나라 화개동은)
壺中別有天 (속세 떠난 병 속의 별천지라네)
仙人推玉枕 (선인이 옥 베개를 권하니)
身世欻千年 (몸과 세상이 어느새 천년일세)
萬壑雷聲起 (일만 골짜기 우뇌소리 일어나고)
千峯雨色新 (일천 봉우리에 비 맞은 초목 새로워라)
山僧忘歲月 (산속의 중은 세월을 잊고)
唯記葉間春 (오직 나뭇잎으로 봄을 기억하네)
雨餘多竹色 (비온 뒤라 대나무 빛이 고아)
移坐白雲開 (옮겨 앉으니 흰 구름이 열리네)
寂寂因忘我 (고요한 가운데 나를 잊노니)
松風枕上來 (솔바람 침상 위를 스치네)
春來花滿地 (봄이 오자 꽃이 땅에 가득하고)
秋去葉飛天 (가을 가자 잎이 하늘에 휘날리네)
至道離文字 (지극한 도는 문자를 떠나)
元來在目前 (원래 눈 앞에 있네)
潤月初生處 (시냇가 달이 처음 뜨는 곳)
松風不動時 (솔바람도 움직이지 않을 때)
子規聲入耳 (자규 소리 귀에 들어오니)
擬說林泉興 (숲과 샘물 흥취 말하려 해도)
何人識此機 (어떤 사람이 이 기미를 알랴)
無心見月色 (무심히 달빛 보며)
黙黙坐忘歸 (넋 놓고 돌아갈 길 잊어 버렸다네)
密旨何勞舌 (밀지를 어찌 노고롭게 말할 거 있나)
江澄月影通 (강은 맑고 달그림자 통하네)
長風生萬壑 (긴 바람 온 골짜기에서 나고)
赤葉秋山空 (붉은 잎 가을 산은 비었어라)
松上靑羅結 (소나무 위엔 송라넝굴 얽히고)
澗中有白月 (시냇물에 흰 달이 있네)
石泉吼一聲 (바위샘 물소리 한번 울리자)
萬壑多飛雪 (온 골짜기 눈발 가득하네)
바위 봉우리(石峯) 운봉사(題雲峯寺) 捫葛上雲峯 (칡덩굴 부여잡고 운봉에 올라) 平看世界空 (굽어보니 세상은 텅 비었네) 千山分掌上 (천 산은 손바닥 안에 있고) 萬事(豁胸中 (만사는 흉중 속에 탁 트이네) 塔影日邊雪 (탑 그림자 하늘 변 눈이요) 松聲天半風 (솔 바람 하늘가 바람이네) 烟霞應笑我 (안개와 노을이 나를 비웃겠네) 回步入塵籠 (발길 돌려 다시 티끌 세상으로 들어가니)
바다에 배를 띄우고(泛海) 돛달아 창해에 배 띄우니, 긴 바람 만리에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뗏목 탔던 한의 사신 장건(張騫) 생각나고, 불사약 찾던 진나라 동남동녀 생각나네(乘槎思漢使 採藥憶秦童) 해와 달은 허공 밖에 있고, 하늘과 땅은 태극 중에 있네(日月無何外 乾坤太極中)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 또한 신선을 찾겠네(蓬萊看咫尺 吾且訪仙翁) * 이 '바다에 배를 띄우고'는 박근혜 대통령 방중시 중국 시진핑 주석이 인용한 시다. 시진평이 '한국과 중국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당나라 시대 최치원 선생이 중국에서 공부하시고 한국에 돌아가셨을 때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하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란 시를 쓰셨지요.' 하고 인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