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포기한 길 재도전…“못 가 본 길은 더 아름다웠다”
<지난 호에 이어>
“슈우욱~~~.”(타임머신이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소리.)
2년 뒤인 2022년 2월 중순 어느 날, 나는 다시 스튜어트섬으로 들어갔다. 무릎 부상으로 못다 한 라키우라 트랙 마지막 구간을 마치기 위해서였다. 누가 확인할 것도 아닌데 나는 미완의 트랙 길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평생 한 번 가기에도 힘든 스튜어트섬을 두 번이나 찾아가는 행운을 누렸다.
10인승 경비행기 타고 20분 만에 스튜어트섬 도착
인버카길에서 경비행기를 탔다. 기장을 뺀 승객은 모두 아홉 사람. 실내 공간은 네 평도 채 안 되어 보였다. 반백 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중년 비행기였다. 나는 30여 년 전 아프리카 케냐에서 5인승 세스나 비행기에 몸을 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섬 여행을 나 홀로 했다. 순간 위험스럽게 천상에 머문 황홀한 경험이 뇌리에 떠올랐다.
포보 해협(Foveaux Strait)과 스튜어트섬의 만(bay) 서너 곳을 지나 오반에 도착했다. 비행기가 지상을 박찬 지 20분 만이었다. 60km의 하늘길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뉴질랜드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스튜어트섬이 불쑥 내게 다가온 느낌이었다.
오반 시내에는 이미 택시 기사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스튜어트섬에서 5대째 사는 그 남자다. 수상 택시 정박장인 골든 베이(Golden Bay)까지 데려다주었다. 요금은 20달러. 2년 사이에 5달러나 올랐다. 예약한 수상 택시를 타고 노스 암 산장으로 향했다. 젊은 기사는 배를 전세 낸($150나 냈다) 나를 의아한 듯 쳐다봤다. 저간의 과정을 설명하자 얼굴에 웃음을 보였다. 나의 성실한 트레킹 자세에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젊은 기사는 나를 산장에 내려 주고 오반으로 되돌아갔다. 노스 암 산장은 적막했다. 숙소와 주방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간밤을 보낸 등산객들은 이미 산장을 다 떠난 뒤였다. 주방 의자에 앉아 2년 전을 되돌아보며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라키우라 트랙 마지막 날 구간을 끝내기 위해 다시 왔다고. 알지? 내 맘.’
트랙 마지막 날인 사흘째 일정은 노스 암 산장부터 펀 걸리 주차장(Fern Gully Car Park)까지 이어지는 11km, 4시간~4시간 30분 구간이다. 나도 모르게 ‘못 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은근히 기대가 더 커졌다. 내가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여기에 왔는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세상 길이 모두 이 길만 같았다면…
짐은 비옷과 비상식품 등 최소한으로 꾸린 상태. 초등학교 1~2학년용 배낭에 하루치 물품을 다 넣었다. 날아서 가도 될 만큼 몸이 가벼웠다. 2년 전 배낭과 비교하면 5분의 1 무게에 불과했다. 다행히 날씨까지 도와주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등산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모자를 벗어 산장을 향해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다시는 가기 힘든(혹은 싫은) 비릿한 추억의 장소라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 구간은 아름다운 숲과 바닷가를 끼고 걷는 길로 연결되어 있었다. 숲은 고요하고 바닷가는 평화로웠다. 내 앞뒤로 걷는 등산객은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나 홀로, 완벽한 홀몸이었다. 그러다 보니 산행 내내 묵상이 깊어졌다. 갈 길은 (상대적으로) 짧고 등에 진 짐은 (절대적으로) 가벼워 한결 편했다.
숲은 울창한 나무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2년 전 둘째 날 진저리를 치며 걸었던 진흙 길도 볼 수 없었다. 세상 길이 모두 이 길만 같았다면…. 그랬다. 이 세상에서 천천히 걷는 삶만큼 행복한 일도 없을 것이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아닌, 순전한 사람의 걸음 속도로만 산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평화로울 거라고 믿는다.
라키우라 트랙 숲속은 봄과 가을, 그리고 여름과 겨울이 섞여 있다. 잎사귀는 봄이고 낙엽은 가을이다. 나무줄기는 여름이고 그루터기는 겨울이다. 수만 년 아니 수백만 년 그렇게 계절이 쌓여 왔다. 그 계절의 어느 공간에 있든 등산객은 마냥 행복할 수 있다.
라키우라 국립 공원은 투이새 등 ‘새의 천국’
못 가본 길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높은 고갯길도 없었고 험한 돌길도 없었다. 그저 걷기에 완벽하게 딱 좋은 길이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새 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방울새, 투이새, 공작비둘기(팬테일새) 등 온갖 새가 나를 따라오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노랫소리마저 황홀해 그 소리에 취하면 숲속 더 깊은 곳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사실 라키우라 트랙이 포함된 라키우라 국립 공원은 새 공원이라고 할 정도로 새의 천국이다. 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은 꼭 찾아야 할 곳이다. 스튜어트섬 골든만(Golden Bay)에서 배로 15분 거리에 있는 울바섬(Ulva Island)은 뉴질랜드 남.북섬에서는 보기 힘든 각종 희귀 새와 동물이 살고 있다. 섬 전체가 자연보호구역(sanctuary)인데 등산객이 아닌 경우 대부분 이 섬을 찾는다.
참, 스튜어트섬은 살아 있는 키위(brown kiwi-tokoeka)를 직접 볼 수 있는 뉴질랜드에서 몇 안 되는 곳 중 한 곳이다. 첫째 날 숙소인 윌리엄 항구 산장과 둘째 날 숙소인 노스 암 산장 주위에서 만날 수 있다. 야행성 동물인 키위는 날지 못하는 새로 뉴질랜드의 국조(國鳥)이다. 먹는 과일 키위가 있고 또 뉴질랜드 사람들을 가리켜 키위라고 하기도 한다.
키위 새를 관찰할 때 주의할 것 몇 가지를 말해준다.
하나, 5m 정도 떨어져 지켜봐라.
둘, 키위를 좇아가지 마라.
셋, 키위 몸에 손전등 빛을 직접 쐬지 마라.
넷, 시끄러운 소리를 내지 마라.
구간 중간중간 목재 사업의 흔적 볼 수 있어
마지막 날 구간인 펀 걸리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는 만(bay)이 종종 보인다. 나도 두 군데서 쉬었다. 아주 아름다운 바닷가라고까지 할 수는 없지만 잠시 쉬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운 곳이다.
이 구간 역시 19세기 초반, 유럽계 이주민들이 시작한 목재 사업의 흔적을 자주 볼 수 있다. 처음에는 톱으로 나무를 잘라 집을 짓고 보트를 만들어 고기를 잡았다. 그 뒤 최신식 기계를 활용해 나무를 바다 밑으로 끌어냈다. 리무 등 양질의 목재는 고래와 바다표범과 함께 스튜어트섬을 일군 효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라키우라 국립 공원을 만들 때 뉴질랜드 정부는 조금 애를 먹었다. 공원의 일부가 마오리 땅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라키우라 트랙도 마오리 부족의 땅을 거쳐야 하는 구간이 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가는 무례를 범해서는 안 된다.
좀 더 분명히 말하면 라키우라 트랙은 새로 만들어진 길이 아니다. 초창기부터 이곳에서 살던 마오리들이 걷던 길을 뉴질랜드 정부(D.O.C)가 숟가락 하나 올리듯 그냥 그 길을 ‘라키우라 트랙’이라고 붙인 것이다.
스튜어트섬의 공식적인 이름은 ‘스튜어트 아일랜드-라키우라’이다. 영어와 마오리어를 같이 쓰게 되어 있다. 1998년 와이탕이 조약 (재)합의의 일환으로 그렇게 쓰기로 했다.(나는 편의상 스튜어트섬이라고 썼다. 마오리들의 양해를 바란다.)
4시간 30분 걸리는 하루 산행을 30분 앞당겨 끝냈다.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일찍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서 몇 번 쉬고, 또 숲속에서 서너 번 새들과 노래자랑 대회를 했지만 내 등의 짐이 가벼워서 그랬는지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마지막 발걸음을 찍었다.
바닷가재와 포도주로 대장정의 마침표 자축
물론 중간중간 ‘부록 길’(Off the Track)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더 걸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웬만하면 정해진 길을 안 벗어난다는 철칙을 가진 나로서는 괜히 무리해 걷기가 싫었다. 최종 종착지인 주차장에서 페루에서 온 젊은 여행자 커플을 만났다. 전기 자전거를 타고 오반 주위를 도는 사이클 애호가들이었다. 유독 한국 음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들과 이런저런 이바구를 나누고 2km 거리인 오반 시내로 걸어갔다. 이렇게 해서 2년에 걸친 2박 3일간의 라키우라 트랙의 대장정이 끝났다.
같은 날 저녁, 오반에 있는 아주아주 유명한 호텔 겸 대중 술집(South Sea Hotel & Pub)에 들렀다. 100년은 훌쩍 넘어 보이는, 스튜어트섬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는 곳이다. 그곳에서 나만의 라키우라 트랙 완주 기념 축하 잔치를 했다. 스튜어트섬의 상징인 바닷가재(crayfish) 한 마리를 시켰다. 나를 잠시 황홀케 할 붉은 포도주도 한 잔 주문했다. 나도 모르게 입안에 웃음이 돌았다. 그 무엇을 이룬, 아주 소박한 보통 사람의 소소한 행복이었다.
글과 사진_박성기
<라키우라 트랙 편 끝.
다음 글에는 와이카레모아나호수(Lake Waikaremoana) 편이 실립니다.>
첫댓글 스피드와 평화
순전한 사람의 걸음속도로만 산다면 세상은 훨씬 평화로울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기쁠 때가 나와의 약속을 지켰을 때입니다. 나도 세상 뜨기전에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