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젊은 나이에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었는데 요즘 다시 읽으면서 일부 문장들을 블로그에 포스팅하고 있다.
60이 넘어 다시 토지를 대하니 소설 속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시골 한 동네에서 함께 살았던 이웃들의 이야기처럼 생생하게 다가온다.
오늘 10권을 마치고 표시해 둔 문장들을 포스팅하는데 어릴 때 미영이라고 불렀던 목화에 관한 대목이 나왔다.
'복동네는 올해 미영 많이 땄제? 예년하고 같지요 머. 올 게울에도 눈이 짓무르게 베를 짜것구나'
그 시대 한국 모든 어머니들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밤늦게까지 길쌈하고, 또 새벽 일찍 일어나 물 길어다 밥하고, 겨울에는 하루 종일 베틀에 앉아 계셨다.
올해 93세 우리 어머니 그때 그 모습들이 눈앞에 생생하다.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나는 학교 문턱도 못 밟아봤다!"라고 늘상 말씀하셔서 내가 대학원 졸업하면서 석사모를 씌워드렸던 우리 어머니!
어릴 때 모습들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두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목화로 어떻게 무명베를 짜서 옷을 만드는지 물었다.
우리는 진사굴 밭에다 미영을 심었어야.
봄에 미영씨를 심으면 여름에 꽃이 피고 파란 다래가 맺히는데 그 다래를 따 먹으면 물이 많고 달짝지근해야.
가실이 되면 다래가 단단해지면서 꽃이 피듯이 하얗게 목화가 피어.
목화 나무에 연 하얀 목화를 쏙쏙 빼다가 말리는데 마당에 말리면 먼지가 들어가니까 우리는 지붕에다 말렸어야.
목화가 다 마르면 상손떡 물레방앗간에 가서 타는데 목화를 기계에 넣으면 새까만 씨는 다 빠지고 하얀 목화솜만 남아.
물레방앗간에서 타온 목화를 떡국처럼 뭉쳐서 지댄허게 만들어.
떡국처럼 지댄허게 만들어진 목화를 물레로 돌려서 실을 뽑아.
실은 물레의 쇠가락에 감기는데 목화로 실을 뽑을 때는 쇠가락과 실 사이에는 짚을 대어 감고 삼베 실을 뽑을 때는 대나무 잎을 넣어.
실이 한 타래 다 차면 바꾸고 바꾸고 해서 자꾸 실타래를 만들어.
만들어진 실타래 10개를 한꺼번에 걸고 10가닥의 실타래를 만들어.
이렇게 10가닥의 살타래 10개를 만들어.
그 담에는 난다고 하는데 마당에서 길게 늘어놓고 하는데 이것은 혼자서는 못해.
그냥 갖다 거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으로 만들어야 돼.
걸고 갖다 걸고 4가래 할라면 아래 2개 막고 아래 박아서 스무재씩 네가레(이해 불가)
마당에다 도투마리를 걸어놓고 쌀을 갈아 훌렁하게 쓴 풀을 솔로 실에 골고로 발라서 멕여.
풀을 안 멕이면 실이 일어나갔고 안돼.
푹 맥인 실이 서로 붙지 않게 잘 말려야 하는데 불 도수를 잘 맞춰야 돼.
(어릴 때 보면 불꽃이 나지 않는 벼 겨로 불을 피웠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실을 베틀에 걸고 베를 짜.
베는 쳇발로 찔러갔고 북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발을 웅크려 탁 치고 뻗어갔고 탁 치고 해서 베가 어느 정도 짜지면 감고 스무재 정도 되면 끊어.
삼베는 하루에 한 가락 스무재를 짜는 사람도 있는디 명베는 하루에 스무재 한 가락을 못 짜.
나도 큰집에서 시집살이할 때 하루에 스무재 한 가래를 짰어.
시집가기 전에 외할머니가 안 갈쳐갔고 시집가서 배울라니까 땀났어야.
짜진 명베에 검정물을 들여 바지하고 우아기를 만드는데 옷 만드는 모양에 대고 베를 짤라서 미싱으로 박아갔고 손으로 꿰매.
우리 동네서 미싱은 외삼촌 집하고 부천떡 집에만 있었는디 난중에 우리도 쌀 한 가마 주고 대흥서 사 왔어.
그 미싱을 서울로 이사 올 때 가져왔는디 미국 막내가 대학교 때 영어 연극한다고 발틀을 갖고 가서 안 가져왔어야.
숫한 놈이지. 그것이 있어야 연극 헌다고 허니까 갖고 갔것지.
다리 없이 대가리만 남았는디 행당동에서 이사할 때 내불고 왔어야.
막내가 가지고 간 미싱 다리 누가 고물로 잘 팔아묵었것지야.
우리 시골 그 좁은 방에서 명 갈아갔고 외할머니가 나라 주면 내가 매서 느그들 옷 해 입혔지.
그 명으로 느그 아부지 두루마기 만들어줬잖아.
추울 때는 접 것으로 더울 때는 홀 것 두루메기를 만들어 입었어야.
그다음에 나이롱 옷이 나왔어야.
그 목화 심고 콩 심던 진삿굴 밭 서울로 이사 오면서 월웅둥 사람한테 40만 원 받고 팔았어야.
40만 원, 쌀 샀으면 몇 가마나 될랑가 모르겄다(인터넷에 찾아보니 1984년도 쌀 한 가마 가격이 61,428원이다)
진사굴 밭에서 밭 매고 있으면 니가 학교 갔다 오다가 "엄마~ 내가 밥 해 놓을게!"하고 그랬어야.
(아래 오른쪽 노란 부분이 진사굴 밭이고 A B로 표시된 곳. 꼬불꼬불 계단처럼 다락논들이 있는 우리 시골 동네다)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때 자식들도 많고 밤낮으로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어땠어?"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야. 니네들 먹는 거 보고 크는 거 보고"
며칠 전 서울시 동료이자 친구며 퇴직 후 지금은 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친구가 카톡으로 본인 글씨를 보내놨다.
저기 엄마가 걸어오네
마음이 아플 때는 좋은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마음이 아플 때는 행복한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마음이 힘들 때는 신나는 것만 기억하기로 했다.
그랬더니 저만치 엄마가 걸어왔다.
현목 김태수 쓰다.
친구에게 답글을 보냈다.
나는 기억력이 좋지않아 그런지
엣날 아프고 힘들었던 일들은 기억에 없고 아름다운 추억들만 있으니
머리가 나쁜 것도 또한 좋은 점이 있나 보네 친구!
첫댓글 어머니 힘든 삶이 고스란히 들어나는군요. 이제 자식들에게 보답 받으셨음 합니다
귀한 어머님에 대한 기록 감사하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