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성계는 1335년 고려 충숙왕때 화령부에서 이자춘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뛰어난 무장이었고 용맹하였다는 데는 이견이 없으나, 태조실록에 나와 있는대로 날 때 어떻고 학문이 어쩌고 하는 말들은 개국 후에 조작된 헛소리들이다.
원에서 벼슬하던 이자춘의 뒤를 이어 동북면에서 강력한 병사를 사병으로 기르고 있던 이성계는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부하자 장래가 촉망되는 고려의 무장으로 자리매김을 시작했다.
고려 말에 왜구의 침공이 극성을 부릴 때 이성계는 이름만 들어도 고려의 군사들이 벌벌 떨던 아지발도라는 어린 왜장의 투구 끈을 화살 한 방으로 끊어내 명성을 쌓았다. 아무튼 30여년 간 전쟁터를 누비면서 단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장수로서는 대단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친원파의 거두였던 간신 이인임의 횡포가 극에 달하게 되자 최영과 이성계가 정변을 일으켜 이인임을 숙청하고 군권을 양분하였는데, 최영은 당시 이성계보다 나이가 스무살 쯤 많았다.
1387년에는 원의 군벌인 나하추의 항복을 받은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이 원래 원나라의 땅이었으니 이를 요동에 귀속시킨다"라는 조치를 알려왔다.
그런데, 다른 것은 몰라도 국토를 떼어 달라는 요구는 어불성설이었다. 고려는 수 차례 사신을 보내고 별 짓을 다했으나 명은 요지부동이었고, 1388년에 드디어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시켜 5만의 병력으로 요동을 정벌케 하였다. 그러나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이성계가 4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최영은 정벌을 강력하게 주장하여 요동정벌은 그대로 시행되게 되었다.
이성계가 반대하면서 내세운 네 가지 조건은 첫째, 소로써 대를 거역함이요, 둘째, 여름철에 출군함이요, 셋째, 모든 병력이 요동 정벌에 나서면 왜구가 침입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요, 넷째는 더운 장마철이라 궁노가 풀리고 군대에 병이 돌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네 가지 불가론을 살펴 보면 첫째, 명나라가 우리 국토의 약 4분의 1을 그냥 먹겠다는데 무슨 빌어먹을 아래위가 있고, 둘째, 당시는 음력 4월로 군의 여름철 원정이 불리하기는 하지만, 당시 사정이 군을 움직이기 좋은 계절을 기다릴 수 없는 형편이었고, 셋째, 왜구들의 큰 침입은 이미 지나간 때였고, 넷째는 병력을 징발하는데 싸움도 안 해보고 물러나자는 것이었으니 지나친 걱정이었다.
즉, 이성계는 명을 상대로 애초부터 싸울 생각이 전혀 없어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 그러면 요동 정벌에서 애당초 이성계를 빼 버렸어야 하는데 당시 고려에는 이성계만한 무장이 최영 빼고는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당시 명은 북원을 상대로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서 고려군이 요동을 친다 해도 전 국력을 동원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최영의 이 계획은 우리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고, 해볼 만한 도박이었다.
요동 정벌군의 배치는 최영이 총사령관으로 팔도도통사로 중군을 이끌었고, 이성계가 우군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를 맡았다. 최영은 정벌군과 동행해야 했으나, 당시 24세로 우둔했던 우왕이 자기 곁을 못 떠나게 최영을 만류함으로써 정벌군에 사령관이 부재하게 되었고, 그것이 위화도 회군을 가능하게 했다.
4월 20일에 의주에 도착한 정벌군은 4월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았고 최영은 진군을 독촉했으나, 이성계는 사령관 최영이 오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군을 움직이지 않았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여름에 들어서면서 비가 오기 시작했다. 압록강 물이 불어나고 사망자가 생기자 이성계는 회군을 요청했으나 조정에서는 계속해서 진군을 독촉했다. 비가 멎자 고려군은 압록강을 부교로 건너 강속에 있는 위화도에 상륙했다. 이곳에서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이성계의 설득에 넘어갔고, 드디어 이성계의 반란은 시작되었다.
1388년 5월 22일에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개경으로 회군하여 4천에 불과한 최영의 수비군을 격파하고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의 주인공 최영을 체포했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이자 군의 원로로서 청렴한 인물이자 고려의 충신이었으며, 이성계에게는 뒤를 돌보아 준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었다. 최영은 충주로 귀양 갔다가 곧 참살되었으니 이성계는 배은망덕의 전형이었던 것이다.
골수 친원파였다가 친명파로 돌아선 이성계는 명의 연호를 사용하고 명의 격식과 의관을 따르게 했다. 전권을 쥔 이성계는 우왕을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 우왕의 아들인 9살 난 창을 옹립하니 그가 고려의 33대 창왕이다.
코너에 몰린 우왕은 최영의 측근들과 이성계 제거를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다시 강릉으로 유배되었고, 이성계는 다시 대대적인 숙청에 나서서 이색과 조민수를 폐하고 사람을 보내 우왕과 창왕을 죽였다. 이때 우왕의 나이 25세, 창왕은 겨우 10세였다
이렇게 이성계가 전 왕들을 모두 참살하고 전권을 쥐자 이에 반발한 사람이 그 유명한 단심가의 주인공인 정몽주였다.
이성계는 문병 온 정몽주를 아들 이방원을 시켜 회유하려 했으나 정몽주가 이를 거절하자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때려 죽였다. 이성계 일파로부터 역적의 누명을 쓴 정몽주는 거리에 수급이 효수되었으며 그의 집은 적몰되고 말았다.
이성계는 공양왕도 재위 4년 만에 폐위시키고 원주로 내쫓았다가 후에 살해했다. 공양왕은 원래 왕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중신들이 추천한 왕족들 중에서 후보로 들게 되었다.
후보들이 시원치 않아서 그 중에서 누구를 왕을 시킬지 설왕설래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보낼 것이 아니라 화끈하게 제비를 뽑아 결정합시다." 그래서 당첨되어 왕위에 오른 사람이 공양왕이었다.
그렇게 제비로 왕에 뽑히는 바람에 제 명에 못 살고 겨우 4년 동안 왕 노릇을 하다가 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재수가 참 없는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4년으로 수명을 다하고 만다.
고려가 망하자 개경의 인심이 이성계에게 좋을 리가 없었다. 그들이 존경하던 정몽주, 최영 같은 충신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면서 힘없는 백성들도 속으로는 이성계를 엄청 씹었다. 개경의 백성들은 만두 속에 들어가는 돼지고기를 '성계육' 이라고 부르면서 다부지게 칼질을 하였고, 뒷간을 '서각' 이라 불렀다. 서각은 이성계의 집무실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러니 이성계가 개경에 정을 붙이고 살 수가 없었다.
이성계는 개국한 지 2년 만인 1394년에 정도전을 시켜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도록 했다. 정도전은 도시를 용도에 따라 구획하고 17km 에 달하는 성벽을 쌓았다. 개경에 정이 떨어져 천도를 서두르던 이성계는 궁궐의 초석이 채 놓이기도 전에 한양으로 천도했고, 조선 조정에서는 개성 출신을 중앙에 등용하지 않았으니 개성의 선비들은 장사꾼이 될 노릇 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우자마자 약 3만에 달하는 전국의 왕씨들을 모조리 검거하여 재산을 압수한 다음에 강화도와 거제도로 옮기게 하면서 배에 구멍을 뚫어 바다 속에 수장시켰다. 일부 살아남은 왕씨들은 성을 '전' 씨나 '옥'씨, '신'씨 등으로 바꾸고 숨어 살아야 했다.
이성계의 집안을 미화시킨 대표적인 소설이 '용비어천가'이다. 이 노래에는 초장에 이성계의 6대조를 '해동의 여섯 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은 원나라에 빌붙어 벼슬을 해 먹으면서 잘 먹고 잘 산 위인들이었다.
더구나 반란을 일으켜 고려의 북쪽 땅을 들어 원에 바친 역적 조○의 집안과 대대로 사돈을 맺어 함경도 동북면에서는 빵빵하게 잘 나가는 집안이었다. 함경도의 군벌이었던 이성계의 집안이 당시에 얼마나 잘 나갔는고 하니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 집안의 땅이었다고 한다.
이성계에게는 비가 둘이 있었는데 한씨(신의왕후)와 강씨(신덕왕후)였다.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의 6남과 경신, 경선공주 등 두 딸이 있었고, 강씨 소생으로는 경순공주와 방번, 그리고 방석(의안대군)이 있었다.
한씨는 건국 직전에 죽었으며, 장남 방우는 제 아버지의 역성혁명을 찬성하지 않았으며, 아마 그 이유로 술을 폭음하다 요절했다고 한다. 2남 방과는 1차 왕자의 난으로 2대 왕으로 등극한 이방원의 허수아비, 정종이다. 3남인 방의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4남 방간은 1차 왕자의 난때 방원과 함께 난을 주도하여 1등공신이 되었으나, 좀 무식하고 사리에 어두운데다 욕심이 많아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가 이방원에게 유배되었다. 5남 방원은 이성계의 여섯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하는 등 가장 똑똑했으나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결국 방원은 1차 왕자의 난에서 숙적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번, 방석을 죽이고, 2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끌어 아버지 이성계를 찬밥으로 만들었다. 강씨 소생인 방번은 개국당시 12살, 방석은 11살의 어린 아이였다.
이성계는 왕위에 오른지 한 달 만에 귀여워하던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사랑하는 강비가 매일 울며 짜며 졸랐고 정도전이 강력히 민 결과였지만, 개국에 가장 공이 컸던 방원은 이때부터 모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성계의 팔자는 기구했다. 이성계는 두명의 비와 8명의 아들, 그리고 3명의 딸을 두었으나 두 아내와는 생전에 사별했고 8명의 아들 중 6명이 제 명을 못살고 죽었다. 자신도 개국 후 6년여 동안 왕노릇을 하다가 왕자의 난 이후 쫒겨나 함흥차사의 유래를 만들었다.
이성계는 귀여워하던 두 어린 자식과 사위가 아들에게 죽는 험한 꼴을 보면서 태종 8년에 풍병으로 73세에 죽었다. 이성계가 그때 죽었기에 망정이지 좀 더 살았더라면 더 더러운 꼴을 볼 뻔했다.
태종 이방원은 이성계가 그처럼 사랑했던 계모 신덕왕후 강씨의 능을 파헤쳐 한양성 밖으로 보내 버리고 그 묘석을 파내어 광교를 만들도록 하여 뭇사람들이 밟고 지나다니게 했다. 이장된 신덕왕후의 능은 묘로 격하되었으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정릉이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의 봉분에는 지금도 잔디 대신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했던 아버지의 바램을 무시한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에서 억새풀을 가져와 심었기 때문이다.
출처: 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