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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청의 모순적인 승리: 열강과의 전쟁 그리고 군벌들의 태동
청은 기존의 외교적인 정책으로 열강들과 내부 세력들의 균형을 통해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였습니다. 여기에 군사적인 정책과 산업 정책을 통해 이 모두를 아우르는 전략을 구성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는데, 겉보기에는 이들의 행위가 마치 무의미하고 자살적인 전략이라 여기질 것인데 그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청불 전쟁과 청일 전쟁, 의화단 전쟁의 청의 참전 이유
자강파의 지속적인 노력은 이후 청의 군대를 유지할 세력으로 바꾸어 신군 즉 북양군대, 남양군대등 현대식 군대들로 탈바꿈해 주변국들에게 긴장을 주었으며, 내부로는 산업화에 초첨을 맞춰 무기의 대량 생산과 기술 증강, 철도와 학교 등 인프라와 제도의 개혁등에 집중하여 부분적으로 실적을 거두었지만, 이런 개혁에도 문제가 존재하였는데, 이는 외부의 개혁이 중국에 들어와 변화를 주게 될시 기존의 만주 지배층들과 한족 신사들의 자리가 흔들이고, 내부적으로는 서로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하여 산업과 군대의 개혁의 중심 축이 쉽게 잡히지 못해 산업의 이익과 효율을 극대화 하지 못했습니다. 더욱이 군대 또한 과거의 구조에 매달려서 규율과 사기, 전술도 제자리 걸음 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 열강들의 침공이 시작되었을 때 청나라는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시작하여 대규모 배상금과 영토 할양등으로 피해를 보았고, 의화단의 단에서도 서구 연합군에게 크게 당해 조약으로 중국을 반식민지 당하게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이에 서구와 국민들의 눈에는 청조는 무능력한 식물인간 취급을 당했고, 이런 형태로 신해 혁명이 발생하여 청조는 결국 300년의 왕조가 종말을 하게됩니다.

(조선이란 물고기가 청에게 오지 않더라도 자신의 참여로 상황을 혼란하게 만들어 러시아와 일본의 충돌을 유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청조의 이런 행위는 결과적으로 승리로 이어졌는데,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중국의 기본 전략은 바둑처럼 비교우의를 통해 승리를 얻는 것입니다.(외교의 목적으로 전쟁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원리인 것입니다.) 일단 청불 전쟁의 시작 원인에는 베트남의 합병이 있었고, 청일 전쟁에서는 조선에 대한 일본에 야욕이 있었습니다. 일반적이라면 자신들이 군사적으로 무능하고, 적들과의 싸움에서 진다는 것이 맞는다면, 전쟁을 피하고 세력을 유지하려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전략의 시선으로 볼 시 청조가 전쟁을 피한다면, 결과적으로 전쟁을 한 것과 비교할 시
오히려 전쟁을 통해 외부 세력과 충돌하여 적들의 시간을 줄이게 만든다면, 역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청조 인 것입니다. 이유는 청과 전쟁을 하게 되면서, 열강들은 청조와의 싸움에 힘과 시간을 낭비하게 되고, 결국엔 열강이 승리하여 원하는 것을 얻겠지만, 청조는 이 때 시간을 벌고, 다른 열강들을 참여시키어 적들의 추가적인 확장과 청에 대한 공세를 줄이는 데 효과를 얻게 됩니다. 프랑스는 청에게 우위를 가져 베트남을 먹었지만, 이를 보고 영국은 동남아로 진출하고 둘은 중국 남부를 갖고 서로 경쟁하게 되었고, 일본은 조선을 먹어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지만, 이때 러시아는 청조의 허약성을 보고 남하하여 일본과 경쟁해서 종국에는 불리했던 청이 자신의 세력을 최소한으로 손실되는 것으로 방지하였고, 의화단의 난에서도 개혁에 반대되는 의화단 세력을 정리하면서, 외부 세력에게 청조가 그저 당하는 것이 아닌 극단적인 저항을 보여줘 외부의 침공을 예방하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 일으키었습니다. 살을 주고 뼈를 치는 것이 청조의 기본 전략이었지만, 조선은 일본의 전략과 청의 전략을 서로 사용했다가, 일본이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없애면서 식민지로 떨어지지만요.

(8개국 출병 이후 중국 대륙은 반동파의 청소와 열강들의 직접 통치의 행위를 감소,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심해졌고 청은 이를 기회로 보고 산업화를 차근차근 진행합니다.)
(비교 우위의 싸움에서 패하면 청조의 패로 이어졌고, 전쟁이 패배하더라도 결국 청조에게 출혈적 이지만 우위를 갖게 되기에 전쟁은 이런 외교 전략의 하나로써 사용되었고 이후 중국의 이해불가능한 전쟁과 혼란한 외교 전략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내부적으로도 이런 군벌 집단을 만든 것도 위의 목적과 비슷했습니다.
청조의 주력인 팔기의 개혁을 하게 될 시 만주족의 정체성의 소멸과 청조의 체제의 위협이 되었기에, 팔기를 유지하면서 향신과의 협조를 통해 군벌 수준의 군대를 조직하여 국방을 견제하였는데, 이 때 특정 군벌이 세력을 키워 청조에 도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로가 견제하는 자세를 두었고(이것으로 인해 이홍장의 북양 군대가 청일전에서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했고, 남양 군대가 지원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동시에 외부 세력을 막을 군사력으로 성장해 균형을 유지 했지만, 이후 신해혁명의 등장으로 청조의 게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북양군대의 등장은 견제와 균형을 불안하지만 체제를 유지시켰습니다.)
6. 신해 혁명과 쑨원, 장제스
신해 혁명은 앞에서 보았듯 청조의 무능함에 대한 민심과 군대의 불만으로 나왔습니다.
특히 우창 지방에 대한 철도를 국유화라는 정책이 개시 됐을 때, 향신들의 분노가 쏟아졌고, 이후 다른 지방에서 청조가 민생에 대한 가혹한 정책에 반발하여(당시 경제는 민, 관의 협력( 국가자본주의처럼 관리가 산업을 만들면, 민간에게 이를 맡겨 이익을 가지는 것)이었는데, 정관 유착으로 민중들의 불만을 샀고, 여기에 외국 기업들의 투자로 민간 경제가 약화되고, 비효율적인 규제 등으로 인해 상인들의 불만을 사고 있었습니다.)
시민들의 대규모 봉기가 시작되었고, 이후 수비대들도 이런 불만에 참여해 반란이 일어나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어, 중국 각지에서 청조에 대한 분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 쑨원은 미국 중서부에서 반란 자금 모집을 위해 가있었는데, 중국에서 시작된 반란을 보고 자신의 자리를 예상하여(우발적으로 일어났기에, 머리 없는 용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혁명의 수장으로 여기리라 예상하여 급히 귀국길에 이끌었고, 자신의 조언가인 호머 리, 자신의 동지들을 데리고 신해혁명을 이끌었습니다. 청조는 독일의 교육을 받은 북양군대의 수장인 위안스카이의 권세가 강대해지자(장교들과의 인간 관계열강과의 우호 관계로 자신의 사병집단으로 바꾸게 하였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퇴출시켰지만, 반란 진압을 위해서는 그의 도움이 필요해 불러들었지만, 그는 오히려 반란군과 협상해 청조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동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의 등장은 이상적이지만 동시에 불안정한 어린 아이 같았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혁명이 성공적이라 하겠지만, 이후의 사건은 이를 실패로 만들게 됩니다.
사실 신해혁명의 가장 큰 문제는 내부 군벌들과 열강의 견제를 균형으로 잡던 청조가 공중분해되 통합이 어려워졌기에 최악의 경우 중국의 분열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쑨원과 위안스카이 모두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협상을 하게 되었는데 협상의 결과 중화민국 임시 총통자리를 위안스카이에게 줌으로써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습니다. 이에 호머 리는 쑨원에 실망하여 그와 결별하였고, 이후 중화민국 총통으로 위완 스카이가 최종적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여기서 쑨원의 선택이 문제가 된다고 생가하실 수 있지만, 쑨원의 전략은 의회를 통해 위안과 반동파들을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좋든 싫든 위안스카이의 세력은 청조를 대신한 중요 세력이었으며, 위안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권력을 장하였습니다.)
실제로 의회의 수에서 국민당이 과반수를 거두고 쑨원의 동지이자 반사회주위자인 쑹자오링이 차기 중화민국 총리가 될 것이라 예상 했지만, 위안스카이의 세력은 이를 암살과 테러로 이를 무마시켰고(당시 위안 스카이와 쑨원과의 싸움에서 상하이는 그런 투쟁의 장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졌고,장제스의 친구인 천지메이도 장제스와도피 중에위안의 암살자에 의해 사망하였습니다.), 계축 전쟁 등 쑨원을 압박하자, 그는 결국 일본으로 망명을 가야 했습니다. 이후 위안스카이는 주요 권력을 장악하면서 자신의 체제와 중국을 효과적으로 지배해야 할려면 군주제가 효율적으로 여기었고 이는 결국 위안스카이의 호헌칭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1)호국 전쟁과 쑨원의 한계
여기서 그는 일본에게로 부터 21개조라는 요구까지 받아들이면서 황제 칭제를 강조했지만, 이로 인해
국민들의 반발과 반대 세력과의 충돌로 호국전쟁이 발생하였고 여기서 위안스카이가 죽고 그의 지지기반인 북양 군대도 된치루이, 장쮜린 등 주요 군벌로 쪼개지면서 군벌 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쑨원은 이에 다시 중국에 돌아와 호국 전쟁을 이끌게 되지만 사람들은 그의 실력을 의심하게 됩니다. 이유는 이전부터 보여준 쑨원의 행동이었는데요. 쑨원은 주로 외국에서 활동해왔으며 자주 봉기가 실패하면서 주변 인들을 이끌지 못하였고, 국내 세력과 잘 맞지 못하였고 그의 퇴폐적인 행동(첩실, 불륜, 이혼)으로 도덕적인 불신과 지도자의 자질을 의심받아 세력의 붕괴, 광동성에서 재시작해 중국 군벌들을 통일해야 한다는 큰 벽에 부딧치게 됩니다. 그러한 순간에 손을 흔든 것이 소련으로 쑨원의 삼민주의가 사회주의와 비슷하다고 여기어 쑨원에 접근하여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하고, 고문관인 브로긴을 보내고 그러면서 중국 공산당을 국민당에 통합시키게 합니다(공산당 내부에선 불만이 팽배했지만 세력 확장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이해 쑨원은 황푸 군관학교를 세우고 초대 교장으로 자신의 보호관인 장제스를 임명하고, 소련의 지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쑨원은 어디까지나 소련의 지원만 필요했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부정하였기에 상인들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아 주변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장제스는 또한 소련의 보좌관인 게필린(가명으로 아내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을 섞음)의 조언(대규모 군벌의 군대를 이기려면 다수의 부대가 아닌 몇몇의 정예부대로 유지)에 따라 황푸군관학교의 정예군대를 키우게 됩니다.(장제스의 일생은 이후 편에서 연결되기에 다룹니다.)
이후 쑨원이 간암으로 사망한 이후 수많은 군벌들이 득실거리는 중국에서 이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국부이지만, 그의 능력은 의심을 받아 여러모로 불안정했습니다.)
(2) 장제스의 성장
쑨원 사망 이후 광동성은 크게 3개의 세력으로 분리 되었는데 쑨원의 세력들로 구성된 정통파와 실력을 바탕으로 정치기반을 쌓은 혁신파, 전통적으로 관둥성의 세력가였던 태자파로 분리되었고 특히 왕징웨이가 있었던 혁신파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장제스, 왕징웨이, 보르긴 이 3명은 광둥성 의 통치로써 경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기반인 황푸군관 장교들과 군사적 능력으로 광둥성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장제스는 기존의 전략인 소수 정예에서 대규모 군사력으로 갖추는 방향으로 전환하였고 소련의 영향을 줄이면서 북벌을 시작하게 됩니다. (보르긴의 귀환)

(장제스의 지지 기반이자 인생의 변화는 황푸 군관학교에서 시작됐고, 저우언라이도 이곳 출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장제스는 군사 교리에 대해 소수 정예의 부대가 아닌 대규모 인력을 통한 전략을 가기위해 여러 잡군들(군벌 패잔병, 용병 등)을 고용하고, 북벌에서도 다른 군벌들을 포섭해서 불완전한 통일 하여 이후 심각한 문제를 갖게 되는데 그 원인에는 군벌과 속해있는 열강들, 소련의 압박이 주 원인 이었습니다. 군벌들은 열강들과 포섭하여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였고 열강들도 분열된 중국을 이용해 이익을 얻고 있었는데 만일 반외세적인 세력이 통일된다면 이는 이권의 침해로 이어져서 국민당을 방해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소련의 도움은 절실했습니다.
하지만 소련은 서서히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는데 소련은 북방 영토의 확장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괴뢰화를 시작했고 이는 국민당에게 배신으로 이어졌으며, 장제스는 여기서 선택의 순간을 갇게 됩니다. 이 때 장제스는 열강들의 포위에서 소련의 역할에 대한 문제와 내부의 지지를 생각할 시 소련이나 다른 열강은 믿지 못할 적들이었지만, 다른 열강에게 예전처럼 이권을 줄 시 소련처럼 세력 확장을 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군벌을 지지하지 않고 오히려 국민당을 도와 중국 통일과 소련의 견제를 해주는가 동시에 중국을 보호한다는 결론을 갖게 되었고, 내부적으로도 상인들과 중산층 등 반사회주의자들도 국민당을 지지하게 되기에 소련에 우호적이던 장제스의 시각은 완전히 바꿔 공산당을 숙청하고 연합정권을 붕괴시키고 난징국민정부를 강화하게 됩니다.(북벌 성공),(상하이 쿠데타, 이 상하이 쿠데타에서 많은 범죄 조직들이 장제스를 지지하고 공산당에 대한 테러와 암살, 공격이 가해졌는데, 이는 장제스의 젊은 시절 천씨 가문가의 인연에서 시작됬습니다.)

(거대한 중국 대륙에 각각의 군벌과 지지하는 열강 그리고 소련의 확장은 장제스에게 이홍장의 선례처럼 선택아닌 선택 을 해야했습니다.)
이 시기에 장제스는 통치방식을 쑨원과 다르게 봤는데 쑨원은 최종적으로 민주주의를 실현하여 삼민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주 목표였다면, 장제스는 국가의 구조가 스승지도자(훈정에 의한 통치)에 의해 관리되는 사회를 이상 국가라 여기어 사민주의적 민주사회가 아닌 민족주의적 권위 사회를 중점으로 움직였으며, 중국의 주적도 공산주의 세력을 최우선으로 이후를 군벌과 일본, 러시아 마지막으로 서구 열강으로 여기었는데 이는 이홍장과 같은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공격은 주변국들에게 많은 지지와 도움을 받았고, 소련의 견제를 위해 일본과 다른 열강에게 많은 이권을 주었지만 청조처럼 견제를 중점으로 하여 경제 개발과 체제 안정을 오류가 존재했지만, 안정적으로 성공하였습니다.(난징 10년)

(겉보기에는 서로가 이질적이라 여기어 지지만, 열강과 공산주의 위협에 빠진 중국과 독일은 어찌보면 가장 비슷한 성향의 국가이기에 협력 관계가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었습니다.)
이에 민중과 후대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를 잡기만 하고 일본과 열강에게 이권을 준다고 비판받았지만, 실제론 소련과 일본의 세력 확장을 제외하곤 열강의 지지를 받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고, 공산주의와 열강을 견제하기 위해 나치스 독일과 동맹을 맺어 군사, 경제, 기술에서 지원과 고문관들의 파견으로 중국을 발전시켰습니다.(반 공산주의로 지원을 받았지만, 국민당의 목적은 국가의 발전이었지, 공산당의 멸망은 오직 그런 목적에 따른 행동이었습니다.)
이후에 나오지만 중국에게 이념이란 그저 한 개의 파편으로 주요한 목적은 중국의 생존과 발전이었고 이를 위해 서로 적대 관계라 할 수 있는 자들(소련, 일본, 독일)과 협력하거나, 적대 관계로 돌변하여서 주요 목적을 달성하거나, 변화를 통해 생존을 유지하였던 것입니다.
(3) 장제스의 방향 전환과 전란의 시작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차근차근 공산당을 멸망시키고 있었고 이제 시안에서 최후 5분이란 명령아래 공산당은 이제 최후의 순간을 당하게 됐지만 시안의 군인들을 지지하러 온 장제스는 장쉐량(장쮜림의 아들로 일본에게 자신의 영토인 만주와 아버지를 잃은 이후 장제스에게 투항하여 시안에서 공산당 토벌을 맡게 됐습니다.)에게 감금당해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을 무찌르자고 하였습니다. 겉보기에 이는 일본을 막을려는 애국청년의 행동으로 보이지만 실제론 자신의 세력이 몰락한 가운데, 장제스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기반을 붕괴되는 것을 방임하였고(장제스는 지속적으로 군벌들의 세력을 악화시키려하였고 이 때문에 반장 전쟁도 발생하였으며 장쉐량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이 베이징 근역을 장악할 시 자신의 모든 것이 사라지기에 일본을 공격하여 세력 복구에 대한 반역행위에 가깝습니다.

(같은 세력인 국민당이자 형제 관계이어도 군벌 간의 투쟁 앞에선 무의미 했습니다.)
이 사건이후 소련과 일본은 서로의 음모로 비판했고 주변국들 또한 이 사건에 대해 크게 관여하였고 공산당에게는 최후의 항전을 대비하는 중 최고의 기회로 작용하였으며, 공산당은 이를 이용해 장제스와의 2차 합작으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세력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공산당에게 장제스와의 합작이란 승리라는 것이었고 이는 공산당의 세력 확장의 시작이 됬습니다.)
어쨌든 공산당의 중재아래 장제스는 풀려난 뒤 공산당과 협력을 하였고, 이후 일본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이 국공내전에서 숱한 전투를 통해 장제스가 이기었지만, 결국 승리는 공산당의 외교술과 기만 정책으로 장제스의 세력을 쫒아냈기에 진정한 승자는 공산당이었습니다.)
다음 편은 중일 전쟁과 국공내전을 다룹니다.
이번 편과 이전 편이 뭔가 짧고 세세히 안나오는 것은 주 목표가 중국 공산당의 연대기가 주목표이고 서로가 연결되기에 장제스의 개인사와 일본의 정보는 중일전쟁에서 다루기로 했습니다.(동시에 난징 10년과 4대 가문도 포함되고요.)
ps. 다음앱의 빌어먹을 계시글 제한 때문에 핸드폰과 노트북을 빙빙돌려서 올리고 지우는 짓을 해서 양해를 드립니다.
(아니 계시글 제한을 1mb 면 계시글을 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돈만 먹고 일은 더럽게 안하네 다음넘들....
주요 사진과 내용글 짤리고, 이게 뭐하는 짓거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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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푸터와 전화기로 했는데 이렇게 왔다갔다 하니 몇부분에서 오차가 나오네요. 오전에 컴퓨터로 수정하겠습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자꾸 오타가 나서 문제가 생기는데 지적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새로운 시각을 배우는군요. 지는줄 아는 전쟁이지만 그래도 하는쪽이 결과적으로 좋다라..
바둑돌 같습니다. 돌 몇개는 잃을 지 몰라도 범위의 확장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이는 장제스,마오도 같은 전략을 쓰게 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