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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국과 일본의 불편한 사정
(1) 중국의 상황
이전에 말씀 드렸다시피, 중국은 장제스의 통일로 일단은 중국은 통일을 완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통일 이전과 통일 과정, 이후의 상황이 장제스를 절망에 빠트리고 일본과의 전쟁을 멈추게 하였는데,
통일 이전- 국민당은 3개의 집단: 중국 공산당, 우파, 좌파로 갈라저 연합 정권의 성질을 띄고 있었으며, 지도자들로는 공산당은 보르긴과 소련 간부들, 유학파 등을 주축으로 이루었고 우파는 장제스를 주축으로 하였고, 좌파는 왕징웨이로 대표되었습니다. 이때 보르긴은 장제스의 지지를 계속하여 소련에게 계속 국민당을 지지하도록 요구했고, 왕징웨이는 장제스의 견제 등으로 광동성의 패권은 장제스의 손에 집게 되었습니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오랜 동지로 장제스에게 위험한 경쟁자이었습니다.)
통일 과정- 이후 장제스는 연합 정부의 군대를 창설(8개의 군단( 자신의 직속 군단과 충성파 군단, 군벌 이나, 의용군 등 다양한 집단의 군단을 통해 15만의 군대를 가지게 됐습니다.))
로써 북벌을 시작하였고 여기서 국민당의 군대는 민심을 잃은 군벌의 군대(군벌의 수장과 그의 군대는 사실상 토비의 동일어나 마찬가지로 약탈과 학살을 잃삼고 대륙을 오염시키는 루신이 말했던 데로 ‘역병’ 그 자체 였습니다.)에 우위를 가지면서 승리를 하였고 우한을 점령하여 연합 정부의 수도로 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장제스는 난징과 상하이의 진군을 하게 되면서 연합 정부 간의 갈등이 벌어지는데,
공산당은 자신들의 세력 확장을 위해 좌파의 토지권을 장악하거나, 농민과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등 세력이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난징 사건을 통해 공산당에 대한 장제스의 불신을 의심하였고, 그의 반공 성향을 경계해 연합 정부 내에서 3 세력의 충돌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장제스가 상하이 점령 후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자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해 3대 세력의 투쟁이 시작됐습니다.
여기서 2개의 변수가 등장하여 장제스의 승리로 이어지는데 바로 숙적인 군벌들과 상해의 암흑회가 그것이었습니다.
기독교 장군 평위샹: 그는 다른 군벌과 다르게 자신의 근거지인 안후이 성을 장악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지 않고 오히려 도덕적이고 검소한 생활과 군대에 대한 통제를 통해 자신의 신앙과 시민들의 지지를 강화시키었고 오히려 다른 군벌들을 경멸하였는데 평위샹은 원래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하고, 공산당이 자신들의 토지권을 장악하자 좌파들이 자신의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공산 인물의 추방을 요구하여 그들을 돕기로 약속했지만, 그는 장제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어 자신의 두 번째 별명인 배반 장군 이란 것을 보여주었고 이는 좌파의 허점으로 이어저 왕징웨이는 장제스에게 복종하고 좌파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잃게 됩니다. 이후 장제스는 자신에 우호적인 군벌들(엔시상, 장쉐량 등)을 포섭했고 이들을 통해 다른 군벌들을 토벌하거나 지역 관리를 시키게 됩니다.
(다른 군벌과 다르게 평위상은 관리 출신으로 도덕과 예의를 갖춘 검소한 군벌이었다.)
중국의 흑사회들(청방)
중국 근현대사에서 흑사회들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사생아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특히 상하이는 그런 흑사회의 메카로 청방이나 삼합회 같은 주요 범죄조직들의 근거지이었고 그런 지도자들은 정권과 혁명가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 강화시켰습니다.(이유는 상해 같은 조계지는 주요 상업과 학문의 중심지이고, 여러 단체들(공산당도 여기서 시작됬습니다.) 의세력 강화와 아편 밀매등 불법이 난무하는 바벨론에 비견될 만 했습니다.)
이중에 두웨이가 이끄는 청방은 가장 강대한 조직으로, 그는 장제스의 주요인연(젊은 시절 상해의 범죄조직과 연결), 세력 강화가 서로 맡아 상하이를 장악하려는 공산당의 세력을 말소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이후 장제스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지주, 상인 등을 억압하여 장제스의 권력을 강화시키게 만들었습니다.(이런 행위는 장제스가 자본주의자도 기득권의 편도 아닌 유교주의적 독재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후 장제스는 그에게 상하이 감독관의 자리를 주었고 상해는 그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당시 상해는 모든 욕망의 도시로 악명이 높았고, 범죄란 그림자 같은 존재이었다.)
이후 브로긴과 게일런 같은 소련 간부들은 장제스의 기습적인 정권 쿠데타에 기존의 연합이 붕괴되 귀환하였고 이후 숙청을 당하게 되고, 좌파 또한 그런 장제스에 복종하고 우한 연합정부에서 난징 국민정부에 충성하게 되었고, 공산당은 장시성, 대장정 뒤 옌안으로 도피하고 이후 장제스의 군벌 통제에 대한 반장 전쟁(평위상, 엔시상등)에서 우호 군벌(장쉐량, 광둥 파벌 등)과 함께 승리하여 평위상은 산시로 떠나고 다른 군벌들도 장제스에 복종함 으로써
장제스의 일당 독재가 시작됩니다.
통일 이후- 장제스의 국민 정부는 중국의 현대화를 위해 열강(특히 미국과 독일)의 도움 하에 주요 계획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수도 난징은 근대적인 도시로 바뀌고 중국 각지에서 철도, 공장, 학교 등이 세워지고 새로운 교육 방법(무상 교육, 문법이 어려운 문언문에서 간편한 백한문으로 전환 등), 주요 인물(쑨원의 가족, 장제스와 정략 결혼한 쑹씨 집안, 자신의 가문, 천씨 가문) 들에게 역할 배분 및 관리를 담당하며, 자신의 권위와 국가의 세력을 키우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난징 10년에 빛과 그림자는 존재하였는데 주요 인프라등은 공산당과 군벌, 일본과의 견제를 위한 개발에 가까워 경제적으로 중요한 곳에 대한 투자가 없었고 전국으로 퍼지지 못해 여전히 미개발 구역이 많았고, 일본과의 충돌, 출혈적인 국방비 증가로 인해 예산 또한 국방비와 차관 갚기에 집중되 민생, 경제에 투자가 어려워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문맹과 빈곤에 시달렸고 내부적으로는 공무원의 부패, 군벌, 지역 유지들의 개혁의 반대, 군벌 중심의 낡은 군대 여기다 4대 가문의 부정, 부패로 장제스는 아군마저 타락한 모습에 크게 절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장제스는 남의사가 제출한 토지 개혁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권력 유지를 위해 이를 반대하는 등 그도 다른 군벌이랑 다름이 없음을 보여주게 돼 인민의 원성을 사게 됩니다.)
이를 위해 장제스는 내부 유지와 강화를 위해 3개의 조직과 주요 문화 운동을 벌이게 되는데요. 자신의 부하인 황푸 군관 출신 다이리의 군사통계조사국(정보국, 비밀 경찰), 자신의 벗의 조카인 천궈푸, 천지루가 수장인 비공식 집단 CC단, 역행사라는 유교적 교육과 체제를 보장하기 위한 남의사 등 주요 집단을 만들어 자신의 정적들과 내부 공산당, 군벌, 학생, 노동자, 상인, 농민 등 시민들을 감시 통제 하였고, 외부의 첩보와 테러 등을 통해 장제스의 체제를 발전시키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제스는 공산당을 멸망시키려 하게 되지만, 장쉐량은 이에 대해 의문을 같게 됩니다. 이유는 공산당 위주의 토벌과 일본과의 충돌의 기피는 이미 민심의 한계 가까이 가게 되었고, 자신의 세력 또한 위험해지고 있었으며,(일본의 침공이 강해질수록 장쉐량의 세력은 줄어들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공산당이 계속 유혹하였습니다. 여기다 유럽의 파시스트의 성공은 그의 생각을 바꾸게 하는데, 이는 영토의 지속된 손실이 정부의 붕괴라는 경우로 이어질 수 있고 오히려 파시즘처럼 일본과 충돌할 시 국가의 통합을 유발시키어 순기능이 온다고 여기었습니다.(이런 파시즘의 성장은 왕징웨이에게도 영향을 주어서 큰 문제가 발생시켰습니다.)
장제스 또한 일본을 견제해야 할 열강이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아직 준비가 덜 된 장제스의 세력이 일본을 치는 것은 자살 전략이었고 독일 고문들도 이를 알고 있었지만, 이 상태로는 전략의 우위차가 심해질 수 있기에 방향의 전환이 시작됩니다.), 장쉐량 말대로 대일전 준비와 서구와의 연합을 게획했지만, 반공 후 대일전이란 전략이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기에 마침내 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장제스의 최대의 적은 공산당, 일본이 아닌 자신의 동지들 이었습니다.)
(2) 일본의 상황
이홍장은 지속적으로 일본이 자신들을 위협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대비책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일본이 서구 열강들과 달리 자신들과 매우 유사한 성질의 국가였기에 이런 자세를 취했는데요. 일본의 구조를 보면 이홍장의 예견은 맞았습니다.
폐쇄적인 성향은 비단 중국 문화 뿐만 아니라 일본 또한 섬나라의 특성처럼 폐쇄적인 구조로 유지해왔으며, 폐쇄성은 중국 보다 더해 문화적 동질을 넘어서 지리적 폐쇄성을 갖기에 외부인들에 대해선 더욱 금지하였습니다.(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일본은 지금도 매우 폐쇄적인 성질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으며, 전국 시대나 해외 탐방을 제외하면, 계속 닫힌 사회를 유지했습니다.) 더욱이 일본은 중국처럼 자신들이 하늘의 선택을 받았고 천황을 통해 그런 체제가 유지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중국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고 이런 두 체제의 충돌은 필연적이었습니다.
( 중국이란 체제를 서구 열강이 간섭을 안했지만, 일본은 그런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최악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일본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가 다르다고 전쟁을 벌였다면, 이는 아마 국화와 칼의 내용처럼 일본의 문화가 미국과 싸웠다는 이치가 안 맞는 내용이 됩니다.
가장 큰 원인은 일본의 새로운 체제의 등장과 체제 간의 충돌이었습니다.
테크노 크라시의 등장
기존의 일본의 체제는 메이지 체제로 이는 자유 무역과 방임주의, 야경 국가를 모토로 삼는 영미식 국가이었습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구조이었구요. 하지만 공산 혁명,1차 세계 대전,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런 벨-엘포크 시대의 현상을 붕괴시키는 새로운 사상의 등장으로 태어난 것이 테크노크라시 혹은 테크노파시즘이었습니다.
테크노크라시 체제는 번햄이 주장한 관리 혁명에서 나온 것으로 이는 기존의 경영,소유의 대한 정의를 붕괴시켰고, 국가의 정의, 유기적 민족공동체의 탄생, 과학기술의 재확립, 생산에 대한 전면적 사상 파괴를 일으키었습니다.
1, 경영 소유의 분리와 테크노크라시 체제의 탄생
기존의 산업 구조는 자유 시장 경제하에 방임된 구조를 갖고 있었기에 독과점 기업의 등장과 경영과 소유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잦았으며, 여러 기업이 다양한 분야를 가지면서(심지어 은행을 소유해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의 투자로 유도했습니다.) 시장의 이익을 자유롭게 얻을 수 있었고, 정관 유착을 통해 이런 독점 자본주의의 모순을 증폭시키고 있었습니다. 또한 관료들도 각자의 업무에 분업화 시키어 관료제의 역할 분담을 세분화 시키었고, 시장에 대해서는 관여를 최소화 시키는 구조이었습니다,
하지만, 테크노크라시 사회에서는 이 모든 행위가 모순된 것이고 사회 전체를 암에 걸리게 하는 실패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회는 경영과 소유의 분리를 통해 부의 세습과 빈부 격차를 줄이면서 전문 경영자를 양산해 경영 능력을 강화시키는데 중점을 두었고, 소유 또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해 경영에 대한 참여를 하도록 만들었으며, 이런 역활을 수행하기 위해 관료 집단 또한 단순히 행정업무를 넘어서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신의 행정능력을 강화시키는 가하면, 계획된 경제를 통해 시장 경제를 안정화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테크노파시즘은 이름대로 정의가 어려움 이념이었습니다.)
2. 혁신 관료, 군부와 기업들의 등장
이런 테크노크라시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이들은 주로 전문적인 과학기술과 과학업무를 맡았던 하급 관료들(예: 기시 노부스케), 혁신적인 군사 기술을 배운 속칭 통제파(통제파도 여러 해석과 목적이 달라서 기존 체제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라 일컬어지는 중, 하급 군인(도조 히데키, 이시와라간지 등)과 닛산 기업이나 니치쓰 같은 신흥 기업들이 이 사상에 크게 동조하였습니다.(신흥 재벌 들은 기존의 재벌과 다르게 1차 대전과 과학 기술, 공산주의의 생산능력에 크게 동조하여 과학 기술과 계획적인 경영, 정관 유착의 배제와 비효율적인 다방면의 투자보다 중공업, 중화학 등 첨단 기술 위주의 산업을 중점으로 성장했고 기존 재벌처럼 기업과 오너 집안의 이익보단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중점으로 경영하였습니다.) 당연히 이들과 기득권(메이지 관료 집단, 거대 재벌, 황도파와 다른 군부)의 큰 반발을 일으켰으며, 이들에 대한 견제와 좌천, 숙청 등이 있었습니다.
3.유기적 민족 공동체와 생산에 대한 새로운 정의
테크노 파시즘은 기존의 이념을 넘어서 새로운 체제인 관리사회와 기술민족주의를 제창하였는데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관리 효율성, 생산력 증대가 단순히 기업과 국가의 이익을 넘어서
민족 전체의 공동의 이익이자 생존을 지킬 것이라 하였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넘어서 제 3의 길을 주창해 최종적으로 이념의 승리가 테크노 파시즘의 승리로 이어지리라 여기었습니다.
따라서 고효율의 생산과 고임금의 노동을 통해 생산의 효율성을 가지고 인력의 손실을 최소화 하면서 국가와 시민 모두의 이익을 지켜야 했고 과학기술을 중점으로 체제를 발전시키면서, 이를 위해서 민족의 신성한 정신과 국민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야마토 정신은 이렇게 전통을 넘어 현대의 사상과 결합해 민족혼과 과학 기술의 연합이란 결과로 이어진다.)
왜 이렇게 과학 기술과 관리 경제에 대한 요구와 예찬이 존재했는지는 1차 대전과 소련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차 대전은 총력전과 과학 기술, 민족주의 가 합쳐진 유례없는 대 전쟁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놀라운 생산 효율성과 과학기술이 모든 것이 부족한 독일을 4년간의 전쟁을 유지했지만, 러시아는 거대한 인구, 자원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인 생산과 낙후된 학문으로 오히려 패배해 공산 혁명으로 붕괴되는 현상을 본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테크노크라시들은 독일의 놀라운 능력과 그럼에도 자원의 절대량으로 패배한 것을 보면서 영토 확장이 체제의 생존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고 동시에 민족의 생존권을 확장시켜야 우수한 민족성의 증가로 과학기술, 체제의 승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소련의 효율적인 계획 경제의 경제 성장(하지만 스탈린 식의 인간 부품식 경제는 한계가 존재한다고 여기었습니다.)과 미국의 케인즈 파의 뉴딜 정책(미국의 정책도 너무 자유주의가 포함돼 국가의 효율적인 생산에도 방해가 된다고 여기 었구요.)은 방임된 시장 경제가 얼마나 나약하고 무의미한지 깨달았고 민족의 생존을 지키려면 기존의 구체제에 대한 교체가 필요하다 여기어진 것입니다.
(사실 자원의 부족을 정신력과 효율성으로 보완하려 했지만, 이후의 전쟁에서 자원의 절대량은 전쟁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흥 세력들은 자신들의 기획안을 시작할 실험 장소를 얻게 됩니다.
(3) 일본의 만주침공
장제스의 북벌성공과 장쮜림의 패배는 일본에게 만주라는 이권이 뺐길 최악에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보고 일본의 관동군(주임참모 이시와라 간지, 고급 참모 이타가키 세이지로, 사령관 혼조 시게루)의 류타오거우 사건으로 장쮜림을 폭사하고 만주 사변을 일으키어 일본의 만주정복을 성공하게 됩니다.
이후 국제 연맹은 초기에 이를 인정했지만, 일본의 과도한 확장으로 이를 불허했고 이는 일본의 국제 연맹의 탈퇴로 이어집니다. 이후 일본에선 총리 이누카이 츠요시가 이를 반대했지만, 장교들에게 암살됬고, 동시에 황도파 장교들의 쿠데타로 일본 정부는 군부에 대한 통제를 잃어 이후 일본은 군부의 통제를 인정하여 일본의 군국주의화로 이어지게 됩니다.
한편 만주에선 일본 정부의 예상과 다르게 심각한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관동군 중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군인들과 만철주식회사 등이 일본의 괴뢰국과 반대되는 군부의 독자적인 국가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됐습니다.(당시 이런 움직임의 행위자들이 대아시아주의를 신봉하고 오족 협화와 신중국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었는가에 대해 논란은 많지만 아무튼 독자적인 행동으로 정부와 충돌했다는 것은 일치 합니다.)
(만주는 산업,농업,인구,자원등 모든면에서 뛰어나 일본과 중국, 러시아가 노리는 옥토 그자체이면서 전략적인 면에서도 최고의 명당이었다.)
당시 만주를 장악한 군부는 왕도 사상과 오족 협화를 중점으로 만든 협화회, 만철 주식회사를 발전시켰고 전시 상황을 위한 계획 경제를 만들기 위해 닛산 같은 신흥 재벌을 정착하여 최종적으로 고도 국방 국가라는 구상을 시작했지만, 이는 일본의 기득권에게는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되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반체제 인사들을 본국으로 송환해 일본의 관료들을 보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만주국이 일본에 종속된 괴뢰국으로 탈바꾸게 합니다.
(이시와라 간지의 사상은 일본 내부에서 매우 이질적이었으며, 그의 거대한 구상은 중일전쟁으로 물거품이 된다.)
이러한 가운데 만주에 파견된 혁신 관료들과 재벌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신체제에 대한 실험을 하였고 이는 향후 일본의 역사를 바꾸게 됩니다.
그 뒤 일본 내부에선 이런 테크노체제에 대한 기득권 간에 다툼이 있었고 이들은 이전의 사건들을 통해 신체제를 변형하여 이용 시 체제의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었고 기존 재벌 또한 전쟁으로 인해 불황이던 경제가 활성화되고 군부와 관료 집단 또한 이런 효과를 보았기에 서서히 중국으로 대규모 도발이 시작하게 됩니다.(이로 인해 전후 미국은 혁신 관료와 재벌이 아닌 구 관료와 재벌 같은 기득권 위주로의 청소를 해서 일본의 핵심 기반이 붕괴되지 않고 오히려 혁신파들의 성장을 유발시켰습니다.)
8. 중일 전쟁의 서막, 장제스의 오판
이러한 두 나라간의 의견 차는 곧 류거우치교 사건으로 시작해 마침내 중일 전쟁이 시작됩니다.
일본은 빠른 속도로 분쟁 지역인 베이징과 텐징을 장악하였고 북방에선 일본군과 중국군 간의 지속적인 분쟁이 일어났고 남부 지역에선 일본의 해상 침투가 발생하였습니다.
여기서 장제스는 거대한 오판을 유발시키는데, 그것은 상하이에 전선을 형성하여, 2개의 전선으로 일본을 교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장제스의 행동에는 주요 이유가 있었는데, 지속적인 소모전이 발생하게 될 시, 산업과 기반이 부족한 중국에게는 일본에게 서서히 밀리게 될 것이 뻔하고 이는 화북의 상실로 이어지기에 전쟁의 악화로 나타나게 되고 공산당의 성장도 하게 되니 2개의 문제가 발생을 막을려는가 동시에 구제 도시인 상해에서 전투가 벌어질 시 열강들도 일본에 대해 간섭을 하게 되 일본을 견제할 것이라는 분석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장제스에게는 독일의 지원을 받은 자신의 정예 군대의 능력을 신뢰하여 2개의 전선을 통해 일본군과 우위를 갖는 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론적으로 따지면 범위와 외교의 승리라는 것을 얻겠지만, 장제스는 이로 인해 치명적인 패배를 갖게 됩니다.
일단 상해로 공세를 하게 되면서 북방의 군대를 철수하게 되어 일본의 화북 점령과 공산군과의 전투에서 불리해저 화북을 손실하였고(중국 공업 지역의 중심지는 만주와 화북이다.)
상해의 주요항구를 일본이 장악하여 병력의 이동이 편리하였고, 오히려 이 공세에서 자신의 최전력과 군대의 소모로 이어지게 되어 상해 점령과 이후 난징 대학살이라는 대참사로 이지게 됩니다.
다음 편은 중일 전쟁 중반에서 국공 내전을 다룹니다.
첫댓글 사진에 욱일기나 참혹한 사진이
있는데 제목을 보여줄 다른 사진이 없어서 이로 했습니다.
이번엔 글의 내용이 알차고 양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펑위상 세력은 안후이가 아닌 산시이고, 군벌들 간의 연결성은 생략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아닙니다. 다들 책읽고 쓰시면 다들 연대기 하실 수 있습니다.(그런데 3시간 걸려서 겜글 쓰는 것 보다 어렵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