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농구 NBA에는 D-리그라는 좋은 하부리그가 존재한다.
NBA에 진출하지 못한 선수들에게 농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섬머리그초청등 다양한 방법으로 선수들의 도전을 받아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 KBL에서는 그런 방안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때 KBL지원을 받으며 2군도 활성화 되었지만 지원이 없으니 당시 모든 10개팀이 운영하던2군팀도
대다수가 운영을 포기하며 2군리그도 사실상 해체하였다.
매년 대학 졸업생들은 배출되고 많지만 10개구단에 선택받을수 있는 선수는 1라+2라운드 합쳐서 20명이다.
(올해 신인드래프트는 39명이 지원하였다 신인드래프트 신청자 http://kbl.or.kr/history/2013_kbl_draft_02.asp
1군+2군 합쳐 총32명이 입단하였다.)
이런 선택받지 못한 선수들을 위해 KBL에서 유일하게 마련해놓은 제도가 수련선수다.
수련선수라는 말이 많은 농구 팬들에겐 익숙치 않아 소개할까한다
(사실 대부분의 내용이 점프볼 발췌.점프볼 다이스키!!)
수.련.선.수
제도의 시작
현재SK소속의 "주키드" 주희정이 연습생 신화의 첫 주인공으로 기억을 많이 하시나
수련선수 제도가 생기기 이전인 1997년의 일이다.
1999년때 수련선수 제도가 마련된 이후 2000년 10월에 열렸던 2001 신인 드래프트에서 처음 시행된 수련선수 제도는
선수들에게 한줄기 희망이자 2군 제도가 없던 초창기KBL의 마지막 보루의 역할을 해왔다.
다만, KBL 정규등록선수가 정규리그 기간 중 부상, 징계 등 기타사유로 출전선수가
12명에 미달하는 경우에 한하여 KBL의 승인을 얻어야만 수련선수를 1군 공식경기에 등록,출전 시킬수 있었다.수련선수 1호였던 김수환(신세기)을 시작으로 처음 시행된 수련선수 드랩에서는 10개 구단이 반 강제적으로 1명씩 지명해 모두 10명을 수련선수로 두었다.
현재시점에서는 각 구단의 재량에 따라 수련선수를 보유하고 지명할 수 있다.
수련선수가 되는 경우는 KBL 국내 신인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자, 선수 계약이 만료되고 소속구단에서 재계약을 포기하여
KBL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된 자,은퇴선수 중 은퇴 당시 소속 구단의 동의가 있는 자 등 3가지가 있다.
수련선수의 수에 대해서는 구단 자율에 맡긴다. 구단은 신인드래프트에서 탈락한 선수 또는 선수계약 만료 전에
보류선수로 공시되어자유계약선수가 된 경우에는 선수를 자율적으로 선발할 수 있으며, 한 선수에 두 구단
이상의 경합이 있을 시에는 선수가 결정하게 되어있다.
수련선수의 계약은 KBL이 제정한 표준계약서에 의하여 체결하며 계약기간은 1년 이내로 한다. 구단은 계약 만료
2개월 전부터 계약 만료일까지 선수와 재계약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할 수 있으며
이 기간 내에 구단이 재계약 의사를 선수에게 통보하지 않을 경우 계약연장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되며,
계약 만료 익일에 수련선수는 자유계약 수련선수가 된다. 그리고 선수는 소속 구단과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경우 계약 만료 1개월 전까지 구단에 서면으로 통보해야 한다.
그동안 수련선수 출신으로 1군경기를 한 선수도 있었지만,대부분이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은퇴의 길을 택해
사라지곤 했다.
수련선수의 계약은 보통 1년, 연봉은 1,500만-2000만원. 1군 선수가 받는 최저연봉인 3,500만원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다.
하지만 이 금액은 구단의 샐러리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만약, 구단은 수련선수가 KBL공식경기에 참가할 경우 출전경기당 출전수당으로 지급하여야 하며,
이금액 또한 샐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렇듯 수련선수는 제대로 된 연봉도, 경기출전도 보장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것은 단지 농구공을 잡을 수 있다는 꿈 하나뿐이다.
프로팀들의 2군리그가 다시 활성화 되야 양질의 리그로 발전할수가 있다.
수련선수 1호선수
김수환
수련선수 제도는 1999년에 마련되어 2000년도에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처음 시행될 당시에는 98시즌 원년부터 드래프트에 탈락된 49명의 인원들에 대해 드래프트를 하여 10개 구단에서 각 1명씩 수련선수를 뽑았다. 김수환
첫 수련선수 드래프트 1픽는 김수환(신세기,현 전자랜드)의 몫이었다. 김수환은 중아고 당시 현주엽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각광받는 유망주 였지만
연세대 진학 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실업팀 현대에 입단한 뒤 군입대를 했고 다시 연세대에 복귀한 98년 4월 MBC배 대학연맹전에 출전하였다가 무자격선수
출전에 걸려 선수자격을 박탈당했던 불운의 스타였다.
(최희암감독까지 징계)그후 학교장추천으로 신인드랩에 나갔지만...과거의 사건때문에 실력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다.
그렇지만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신세기에 1800만원을 받고 수련선수로 입단되었지만 그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다시 농구공을 놓고 말았다.
당시 10개 구단에서 뽑은 수련선수들은
연세대 유한길 추성하 이종호 전계원
건국대 김성은
동국대 김정재
단국대 이두훈,김지윤 등등 이였고
그후에도 수련선수는 각구단에 뽑혔다.
2003년 드랩에는 코리아텐더(현kt)와 오리온(현오리온스)가 각각 명지대출신의 가드 서병원,이우정을
모비스의 최희감감독은 조선대출신 포워드 김영춘 선발하였다.
하지만 대학시절부터 스타급 조명을 받은 황금기연고대 선수들과 기존 농대의 실업팀출신의 선수들이 자리잡고 있는 상황에
수련선수가 1군 엔트리에 들어가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다
수련선수 네임벨류 甲
정인교
기아차(후 모비스)의 허재의이적의 반대 급부이자 KBL초기 '사랑의 3점슈터'로 이름을 날리던
그가 신고선수???
그는 현역 시절중 일명'FA 미아'가 된 01-02시즌 수련선수 생활을 1년간 하게된다.
하루아침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다.
여수 골드뱅크와 무난히 재계약을 맺을 것으로 전망됐지만,
이들의 협상은 끝내 결렬.FA협상이 모두 마감된 2001년 7월 5일 정인교는 은퇴 위기에 몰린 선수가 되어버린다
원소속 구단과의 1차 협상기간이 지금과 달리, 당시 FA와 원소속 구단에게는 한 달(5월 1일~31일)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여기서 합의점을 찾지 못한 선수는 6월 한 달 동안 다른 구단으로부터 영입의향서를 제출받아야 이적이 가능했다.
협상기간이 불필요하게 길었던 것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로 대두된 건 원소속 구단과의 2차 협상기간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까다로운 보상 규정도 선수들의 이적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연봉 순위 30위 내의 FA를 영입한 구단은 전소속 구단에 당해 연봉에
계약기간을 곱한 선수의 연봉 30%와 보상선수(보호선수 4명 제외)를 넘겨줘야 했다.
당시 1억 1,000만원으로 연봉 19위였던 정인교는 영입시 보상선수를 넘겨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2000-2001시즌 여수 골드뱅크로 이적한 정인교의 활약상은 기대에 못 미쳤다.
박성배, 정락영 등 젊은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했고 KBL데뷔후
최저기록인 33경기 평균 21분 20초 출전 7.2점에 그쳤다.
장기인 3점슛도 1.2개를 성공시키는데 머물렀다.(전시즌까지 정인교 선수의 평균스탯 약15점 3점슛 2.95개)
가치가 하락한 상태에서 FA를 맞이하게 된 것. 본인 역시 어느 정도의 삭감은 예상하고 골드뱅크와의 협상에 임했다.
그런데 구단으로부터 생각지 못한 연봉을 제시받았다.
“5,000만원을 제안했다. 물론 성적이 안 좋았던 건 인정하지만,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제시였다.” 정인교의 말이다.
한때 그가 몸담았던 기아팀은 관계자는 “현행 FA 제도상 연봉 30위 내의 선수가 팀을 옮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정인교의 이적 가능성에 회의적인 반응까지 보였다.
기아 관계자의 말대로 정인교는 어느 팀으로부터도 러브콜을 받지 못했다. 백업 슈터로 충분히 활용할만한 카드였지만, 유망주를 내주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대로 원소속 구단과 재협상을 벌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른 구단과의 협상기간 동안 영입의향서를 제출받지 못한 선수는 이후 어느 팀과도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수 없었다. 이는 곧 은퇴를 의미한다.
3점슛을 성공시킬 때마다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적립, ‘사랑의 3점슈터’라 불리던 정인교가 하루아침에 은퇴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선수 생활을 연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수련선수, 즉 연습생 신분으로 구단과 계약하는 것이었다. 타이틀도, 최대 1,800만원이라는 연봉도 정인교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결국 정인교는 잠정 은퇴를 결정했다.
하지만 정인교는 최종 협상이 결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골드뱅크의 수련선수 제의를 받아들였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결정한 선택이었다. ‘FA는 자칫하면 은퇴할 수 있는 제도’라는 인식이 심어지는 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인교가 한순간 수련선수로 전락하자 KBL은 이사회를 개최, 원소속 구단과의 2차 협상기간을 추가하는 등 FA 제도에 대대적인 손질을 가했다.
힘겹게 선수 생활을 이어간 정인교는 2002-2003시즌 최희암 감독이 새롭게 부임한 울산 모비스와 연봉 6,000만원에 계약을 체결, 극적으로 회생했다.
정인교는 이후 1대1 트레이드로 2003-2004시즌 서울 삼성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큰 틀에서 발전이 이뤄지려면, 작은 희생이 필요한 법이다. 정인교는 개인적으로 FA라는 타이틀이 무색한 결과를 안았지만,
이로 인해 후배들은 개선된 FA 여건(물론 아직도 보완해야 할 점은 많다) 속에 구단과 협상을 벌일 수 있게 됐다.
후배들을 위해 수련선수를 받아들였던 정인교는 야인이 된 지금도 후배들이 보다 나아진 환경에서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다.
“FA 규정은 구단에 유리한 측면이 너무 많다. 프로는 몸값을 못하면 구단과 협상이 안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FA 시장에 나갔을 때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여건이라도 만들어져 있어야 하는데 현행 FA 제도는 그런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다.
현재 제도 속에서 선수가 원하는 팀으로 마음껏 이적할 수 있는가? 누구를 위한 FA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의 3점슈터’라는 현역시절 별명에 너무나 어울리는 견해다.
얼짱수련선수
신제록
군입대후 큰부상으로 2011-2012시즌은 BJ-리그에진출하며 KBL 컴백을 노리던 신제록이 극적으로 기회를 잡았다.바로 창원세이커스다.
자유계약(FA)에이어 2군 드래프트에서도 10개 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한 신제록은 LG와 수련선수 계약을 체결, 2010-2011시즌 이후 두 시즌 만에 KBL에 복귀하게 된다
당시기사들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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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군에서 열리는 LG의 산악훈련에 합류한 신제록은 "훈련이 너무 힘들지만 기분 좋게 임하고 있다. KBL로 복귀하게 돼 기쁠 따름"이라며 소감을 전했다.
고대했던 FA가 불발돼 씁쓸한 마음을 못 감췄던 신제록은 어렵사리 기회를 제공한 LG에 대한 고마운 마음도 잊지 않았다. "선수단에 대한 지원이 굉장히 좋다.
안양 KGC인삼공사와 재계약에 실패할 당시 안 좋았던 허리도 많이 좋아졌다." 신제록의 말이다.
신제록의 영입을 고려하던 김진 감독은 고려대 동기 김영환을 통해 신제록의 영입을 타진했고, 결국 선수단에 합류시켰다. 김진 감독은 "코트에 대한 절박함이 느껴진다.
하고자 하는 의욕이 코트에서도 발휘되길 바란다"며 신제록에 대한 기대감을 전했다.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한 LG는 '리빌딩'을 선언했다. 젊은 선수 위주로 전력을 개편, 선수단을 자극시켰다.
2004-2005시즌 데뷔한 백인선이 최고참. 신제록은 학번으로 따지면 김영환과 더불어 'NO.2'다.
하지만 신제록에게서 권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는 "말로만 선배는 되고 싶지 않다. 먼저 악착같이
수비하며 모범이 되고 싶다.
내가 열심히 하면 후배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 싶다"라고 말했다.
LG가 전력상 약세로 평가되는 현실도 뒤엎겠다는 각오다. 신제록은 "지난 시즌 KGC인삼공사가 젊음을 앞세워 사고치지 않았나. 당장은 어렵겠지만,
LG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세간의 평을 뒤엎을 것이다. LG 전력에 대한 평가는 그때해도 늦지 않다"며 자신감을 표했다.
허리 부상으로 인한 의병 제대 이후 신제록은 각 구단의 보이지 않는 편견에 맞서야 했다. "의병 제대한 선수가 해봐야 얼마나 하겠어"라는 선입견 말이다.
하지만 신제록은 지난해부터 허리 재활에 의욕적으로 나서 부상을 떨쳐냈다.
신제록의 재활을 담당한 의사는 "의지가 대단했다. 이렇게 빨리 허리 디스크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고 견해를 전했다.
KGC인삼공사 시절 쏠쏠한 식스맨으로 활약한 신제록이 LG에서 성공적인 컴백 무대를 가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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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시즌의 수련선수기간을 마친 그는 지금은 은퇴..현역선수로써 더이상 볼수가 없다.
KBO의 장종훈 KBL은?? 수련선수의 좋은예
이중원
이중원은 수련선수 출신으로서는 KBL 최초로 KCC와 4년 장기계약에 성공
자유계약(FA)신분을 획득 계약기간 4년에 연봉 100% 인상을 기록 07-08시즌 연봉 3천5백만원에서 3천5백만원 오른 연봉 7천만원(기본연봉 5천만원, 인센티브 2천만원)에 KCC 구단과 합의했다.
그동안 수련선수 출신으로 1~2년 정도 정규등록을 한 선수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대성한 선수는 이중원이 유일했다.
삼일상고와 중앙대를 졸업한 이중원은 전정규(오리온스)가 1순위로 지명 받았던 2006 신인 드래프트에서 10개 구단에 외면을
당한 채 KCC에서 쓸쓸히 수련선수로 프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는 06-07시즌 수련선수로 경기당 20만원씩 받으며 7경기에 나서 평균 8.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KCC에서 자신의 프로농구인생을 시작한다
계약기간 1년에 최저연봉인 3천5백만원에 정규선수로 등록을 한 이중원은 1년간의 수련선수 생활 끝에 07-08시즌 KCC에서 화려한 프로 시즌을 보냈다.
KCC 허재 감독의 신임을 얻은 그는 정규시즌 1경기를 제외한 53경기에 출전해 평균 4.6득점 1.4리바운드 0.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정규시즌 2위에 올려놓는데 일조했다.
이중원은 '소리 없이 강한 남자' 팀 선배 추승균에 비해 슈팅이나 노련미에 있어서 아직 모자라는 부분이 많지만,
성실하고 적극적인 플레이와 자유투 성공률도 81%(34/42)를 기록해 제2의추승균으로 한때 평가받았다.
상무입대후에도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부상과 재활속에 작년 시즌을 앞두고 은퇴하여
수련선수의 신화의 대단원을 마무리했다.
첫댓글 잘 봤습니다 미래도 보장 안되는 상황에서 연봉 1500만원 받는 것을 선택하는 건 엄청난 모험인데 그 중에서도 살아 남은 이중원선수 굉장하네요
9월에 동호회대회에서 맞붙었던 이중원선수....
헉! ㅠ.ㅠ
상무에 입단했으나 외국인 선수에 밀려 사라진 수련선수 박상현도 있죠
이중원선수 너무 안타깝씁니다. 쏠쏠한 활약을 보여줬는데 부상으로 너무 아쉽네요. 이중원 강은식 이 둘이 없으니 선수층이 확 얇아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