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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은 혼이다! 외곬인생 요리사 김원일
날아라 마린보이 : 야생마~린 생생 리포트!/홍보마린의 스토킹
2011/01/21
“음식은 혼이다!”
외곬인생 요리사 김원일
그의 요리는 맛있다..
그의 인생을 알고 먹는 그의 요리는 더 맛있다.
“사람들이 선생님의 요리를 어떻게 평가하던가요?” 라고 묻자 자신의 요리를 누가 평가하겠느냐고 되묻는다.
“내 요리를 평가할 사람은 국내에는 없어. 내 책도 마찬가지고. 그 누가 감히 김원일을 평가하겠나.”
요리사 김원일(54)은 너무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다. 짐작은 하고 찾아간 인터뷰이었지만,
그 자신만만함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젊었을 때 한가락 하다 그는 딱 ‘부산 사나이’ 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전역하는 날 찍었다는 사진의 호리호리한 모습은 간데없지만 자신만만하고 호탕한 그 눈빛만은 여전히 느낄 수 있었다.
<전역할 당시의 호리호리했던 부산 사나이 김원일>
하지만 그 자신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계3대 요리학교이자 일본 최고의 요리학교인 아베노쯔지 조리사전문학교, 대학원을 3년이나 다니고
프랑스에서 프렌치 요리까지 배운 그이다.
장사꾼에게 상도가 있다면 손님에겐 객도가 있다며 싫으면 먹지 말라고 소리치는 그이지만,
테이블 세 개로 시작한 식당을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일식집으로 키워낸 것도 그이다.
휴가 나온 해병들이 너무 멋있어 보여서 친구와 해병대에 지원했다는 그는 요리라는 한 길에 인생을 다 바친 부산 사나이였다.
297기로 지원을 했지만 한 번 떨어지고 해병대가 좋아 재도전해 356기로 입대한 요리사 김원일.
독하게 인생을 달려온 그이지만 해병대의 혹독한 훈련은 그에게도 가혹했나보다.
“진해에서 훈련을 받는데…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어휴. 그 때 훈련 생각을 하면 아직도 아찔해.
요즘 애들 훈련은 훈련도 아니지. 그래도 빨간명찰 달 때의 희열은 안 해본 사람은 말도 못하지.”
얼핏 봐도 다혈질일 것 같은 그는 아니나 다를까 육군포병학교의 위탁교육에서도 사고를 치고 퇴교를 당한다.
포항에서 건물을 짓는 일에 투입됐던 그가 일병진급 후 맡은 일은 영농반의 오리농장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어릴 때 집이 목장을 해서 오리도 수천마리 키워보고 개, 돼지, 소도 키워봤는데
해병대에 와서까지 오리 키우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 상병 달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데 도저히 그 생활을 못하겠더라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라는 '의용'>
그는 결국 군에 오기 전 호텔에서 잠시 일을 했던 것이 연이 되어 전역할 때까지 연대 본부에서 조리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그리고 전역 후, 부산 코모도 호텔에 취직하면서 요리는 점점 그의 인생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어느 날, 고참 주방장들이 자리를 비운 시간에 식당에 온 일본인 손님에게
김원일 요리사는 어깨 너머로 배운 실력을 발휘하여 요리를 내놓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알아듣지 못할 일본어로 쏟아지는 욕 한바가지.
김원일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부산에는 원양공단이 있어 일본인 손님들이 굉장히 많았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알아야 한다. 그래서 독학으로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쉬는 날이면 일본 손님들의 관광 가이드가 되어주며 일본어 공부를 한지 9개월.
원어민 수준으로 일본어를 구사할 만큼 실력이 늘었을 때 그 손님이 다시 호텔을 찾았다.
9개월 만에 일본어를 능숙히 구사하는 김원일을 보고 놀란 일본인 손님. 김원일은 그의 관광 가이드를 자청하여 친분을 쌓았고,
일본으로 돌아간 그 손님에게서 김원일의 인생을 바꿔놓을 책 몇 권이 날아온다.
“그 요리책을 보는 순간, 그 동안 요리랍시고 했던 것은 요리가 아니었던 거야. 돼지죽이었던 거야.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 정도가 최고급 요리였던 우리나라였는데 그 책은 정말 환상적이었어.
‘아! 요리도 공부를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지.”
<도미회>
유학을 가기 위해 사우디아라비아와 일본을 왕복하는 LPG 선을 2년간 탔다.
배가 일본에 정박할 때면 세계적인 요리학교 아베노쯔지를 찾아가서 입학 절차를 밟았다.
유학 자격을 얻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영산대 일어과에 진학한다. 평생의 동반자가 된 부인도 이 때 만났다.
월등한 일본어 실력으로 A+ 로 성적표를 도배했지만,
1학년을 마치고 유학 자격이 생기자 자퇴서를 낸 후 드디어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지금 생각하면 배짱도 참… 해병대를 나왔기에 가능했던 것 같아.
가방 하나에 옷 넣고 일한사전, 한일사전 딱 두 개 놓고 2만원 들고 간 거야.
집이고 지인이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해병대 정신으로 간 거지.”
세계3대 요리 학교인 아베노쯔지는 학비가 상당히 비쌌다.
그런 학교를 다니기 위해 그는 학교가 끝나면 일을 하며 돈을 벌어야 했다.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긴 한 재일동포 사업가의 도움으로 나라 지방에 일할 곳과 숙소를 제공받았다.
하지만 학교까지 통학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다.
부산에서 대구 정도 되는 통학거리. 매일 꼭두새벽부터 자전거로 30분 거리의 역까지 달린 뒤 기차를 타고 오사카로 갔다.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까 기차 안에서도 공부를 했지. 요리용 벤치를 갖고 다니면서 내 허벅지를 꼬집어가면서 공부를 했어.
너 여기 뭐 하러 왔느냐 공부하러 왔지 잘 틈이 있냐고 스스로 욕을 해가면서. 허벅지가 성할 날이 없었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학업과 일을 병행해야 하는 그에게 대학생활의 낭만 같은 건 있을 수 없었다.
특히 일본 표준어를 배운 그를 힘들게 한 것은 교수들이 쓰는 사투리였다.
쉬는 시간에 옆자리 학생의 노트를 베끼느라 화장실 갈 틈도 없이 공부를 했다.
이처럼 힘들게 마친 유학생활. 일본 최고의 조리전문학원에서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자신만만해 있었다.
프랑스 요리와 일본 요리를 모두 최고의 요리학교에서 수학했고, 일본어와 프랑스어도 능통한 그의 이력서,
하지만 서울 유수의 호텔에서 그는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그렇게 날려버린 이력서만 50통. 그는 너무나 비참했다.
“그 때까지 한국의 요리사들은 춥고 배고픈 시절 못 배워가면서 요리를 하던 사람들이야.
근데 내 이력서는 너무 화려하니까 오히려 안 받아주는거야.
마지막에 힐튼호텔에서 퇴짜를 맞았는데 비가 엄청 쏟아지는 날이었어.
부산 가는 버스에 사홉들이 소주를 하나 들고 타서는 한 모금씩 마시면서 가는데 눈물이 그렇게 쏟아지는 거야.”
<험난한 삶을 살아온 그를 있게 해준 건 언제나 묵묵히 뒷바라지해준 아내 덕분일지 모른다..>
그는 이틀 만에 다시 일본 땅으로 돌아갔다.
아베노쯔지의 이시나베 교수가 운영하는 식당에 취직한 그는 아무도 하지 않으려하는 궂은일을 도맡아 하며
교수와 직원들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런 그의 인생을 바꿔준 사건이 바로 모 일간지에도 소개된 쥐 사건이다.
그 날도 이시나베 교수가 새로운 요리를 가르쳐주는 자리에 신참인 그는 끼지 못한 채 전복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 때 식당의 생선을 훔쳐 먹던 고양이만한 쥐가 그의 밑을 쏜살같이 지나가 냉장고 밑으로 숨는다.
“밀대로 냉장고 밑을 쑤셔서 쑥 나오더라고. 밀대로 치는데 안 죽길래 주먹으로 쥐 머리를 박살을 내버렸지.
세 마리를 그렇게 잡아서 깨끗이 마무리 하니까 그 때부터 나를 보는 눈빛이 틀려지는 거야.”
그 일이 있은 후 이시나베 교수는 김원일에게 귀화를 권유했다. 매사에 열심히 하는 그의 자세를 보고 그를 키워보기로 결심한 것.
하지만 이를 뿌리친 그에게 이시나베 교수는 프랑스 유학을 권유했다. 추천서와 비행기 표, 학비와 용돈 20만 엔도 함께였다.
그도 그럴것이 그는 일본요리도 공부했지만 원래 주전공은 프랑스 요리였다.
그런 그가 일본요리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얘기한다.
“프랑스 요리를 만들면 1인당 백만 원이 넘게 내야 되는데 한국에서 그 돈을 내고 먹을 사람이 없어.
지금 여기 요리도 십만 원에서 이십여 만원으로 비싼 편이야.
그런데 이것도 비싸다고 안 오는데, 나도 장사를 해야 하니까 일본 요리를 하는 거예요.”
<쑥갓육회비빔밥>
프랑스 유학 이후 그는 힐튼호텔에 취직하게 된다. 하지만 그 생활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재벌가 큰 손님과의 다툼이 문제가 되어 2년 만에 힐튼호텔의 부요리장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다. 사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인연이 닿은 한 기업에서 그를 스카웃 한 것.
대치동의 아파트와 자동차가 주어질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지만,
그가 맡기로 한 600석 규모의 식당이 완공되기 직전 그 회사는 부도가 난다.
그 때 피난 오듯 떠나와서 지금까지 자리를 잡은 곳이 경기도 분당이다.
“조그만 아파트에서 사는데 1년 동안 집밖으로 나간 게 딱 2번이었어. 내내 책만 썼지.
출판사와 계약이 되서 원고를 넘기고 내일부터 요리 사진을 촬영하는 날인데 그 회사가 또 부도가 나버리더라고.
시련이 겹치니까 참 끝도 없는 거야.”
원고를 다 챙겨들고 형설출판사를 찾아갔다. 그의 기구한 삶과 비참한 현실에 출판사 회장이 선뜻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의 책은 그렇게 한 권, 두 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하루는 책에 들어갈 돈가스 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놀러 온 큰 아들 동현이와 그 친구들에게
일본과 프랑스 유학까지 마친 요리사의 돈가스는 너무나 맛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졸라서 맛을 보러 온 동네 아줌마들까지 사로잡아버린 그 맛. 그 아줌마들의 성화에 돈가스 소스를 팔기 시작한다.
“아름아름 학부모들한테 소문이 나서 작은 생수통으로 몇 백개도 넘게 팔았어.
그걸 보고 마누라가 장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봐.
친척들한테 돈을 빌려와서는 나한테 말도 없이 7평짜리 구멍가게를 하나 얻은 거야.”
95년 7월 1일. 그렇게 테이블 세 개짜리 가게에서 일본식 요릿집을 시작했다.
돈가스 뿐만 아니라 별의별 요리들을 준비했지만 한 달 동안 손님이 없었다.
“한 달쯤 되던 날 어떤 사람이 반바지 차림에 껄렁껄렁하게 오더니
“뭐 좀 할 줄 알아요?” 물어보면서 고등어회 1인분하고 술을 한 병 시키더라고, 그래서 맛있게 탁 만들어줬지.
임마가 몇 점 먹더니 자세가 달라져. 나갈 땐 예의를 갖추고 실례했다면서 나가는 거야.
다음 날 양복을 차려입고 오더라고. 백발이 성한 노신사 한분과….”
그 백발의 노신사는 한국영화협회 회장이었고 그 때부터 입소문은 시작됐다.
테이블 3개가 쉬는 날이 없었고 가게 밖은 늘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졌다.
테이블 3개로 하루에 400만원씩 매출을 올렸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4개월 만에 가족들에게 빌린 돈을 다 갚고 24평 가게로 이사를 갔다.
가게가 커지기 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분당 서현의 먹자길의 땅을 사고 지금의 건물을 지은 게 12년 전이다. 그 동안 얼마쯤 벌었을 것 같은지 묻자.
그는 100억 이상을 불렀다. 하지만 그 돈을 다 책을 쓰는데 쏟아 부었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저서는 일본에서도 그 수준을 인정받을 정도이다>
그는 요리사에게 중요한 눈이 망가질까봐 컴퓨터를 배우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쓴 70권 가량의 원고는 모두 대학노트에 손 글씨로 적혀있다.
게다가 원고의 대부분이 한자이고 그림도 하나하나 손으로 그려 놨다. 그런 원고를 책으로 내줄 출판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가뜩이나 팔릴지 미지수인 고급요리책인데다가 방대한 양의 원고를 컴퓨터로 옮기는 것은 만만치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때려치워라 그러면서 출판사를 만들어 버린 거야.
도서출판 원일. 더러워서 내가 만든다 이거야. 서점에서 책 팔자고 해도 됐다고 해버렸어.”
실제로 그의 책은 그의 가게에서만 판매되고 있었다. 그래도 입소문을 타고 그의 책을 사려는 사람들의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책을 주문한 장부를 들춰보니 미국에서까지 그의 책이 주문될 정도였다. 수억을 들여서 펴낸 그의 책은 비싸다.
한권에 12만, 13만 원 정도 하는 그의 요리책은 사실 잘 팔릴 요리책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요리의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 보기에도 확실히 그의 책의 질은 달랐다.
<칼을 쓰는 방법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소개하는 그의 책>
“된장찌개도 비법을 공개 안 하는 세상인데, 일본과 프랑스에서 배우고 34년간 연마한 고급기술을 다 공개하는 거라고.
시계에도 명품이 있고 가방에도 명품이 있는 것처럼 책에도 명품이 있는 거지.
내 책 사려면 우리 가게 와서 제 값을 치루고 사가라. 배짱인거지. 자신이 있으니까.”
하지만 도서출판 원일이 찍힌 요리책을 12만원씩 받고 팔아도
한 권에 5억 원 정도를 들인 것을 생각해본다면 남는 장사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내가 그 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것을 국가와 국민에게 돌려준다는 생각으로 하는 거야. 해병대 출신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지.
밥 하나를 갖고도 500가지의 요리를 만들어서 책을 펴냈어.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고 이왕이면 좀 맛있는 밥을 먹자는 거지.”
올해 2월이면 그의 자서전 ‘김원일의 외곬인생’을 포함한 나머지 6권의 책이 모두 발간될 예정이다.
촬영에 사용된 그릇이 1,100종류, 식재료를 촬영하기 위해 민통선부터 제주도까지 6번을 훑었다.
촬영 사진이 50만 컷. 재료비만 2억 원. 그릇 값이 2억 5천만 원, 사진 촬영, 출장비가 3억 8천만 원,
인쇄비용 등을 합하면 10억원이 훌쩍 넘어간다.
이 정도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만 하다. 하지만 요리책은 표지의 때깔부터 남다르다.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그 방대함과 세밀함에 혀를 내두를만하다.
쯔루가메를 출입하는 내놓으라하는 교수들도 그의 책 앞에서 부끄러워진다고 얘기 한다.
제자를 키우고자 한 그의 열정도 한 때는 ‘미쳤다’ 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장인의 밑에서 혹독히 수련하며 일을 배우는 도제식 요리학원을 연 것은 94년 말이었다.
연간 학원비가 2,500만원이 넘는 학원을 열어 4기까지 약 80명의 수강생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과정을 끝까지 마친 수강생은 단 10명이었다.
그의 수업방식에 제 발로 나간 학생들도 있었고, 퇴학당한 이들이 집단소송을 걸기도 했다.
“스승 밑에서 오만 풍파를 다 겪어가며 장인이 되어 가나는 것이 바로 도제식이야.
장인정신, 예술가 정신이 제대로 담긴 사람을 키워보려 했어. 칼을 다루는 기술만이 아니라 전인적인 예술가를 키워보려고 했지”
<그가 직접 뜬 대형 어탁. 요리사는 칼만 쓸줄 알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스스로가 일본에서 혹독하게 일을 배웠고, 요리를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에 인생을 건 그이다.
하지만 요리사가 되기 위해 그의 학원을 찾았던 학생들은
붓글씨, 어탁, 꽃꽂이까지 하려 했던 그의 교육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수강생들의 입장에선 강사진이 부실하고 커리큘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반발도 있었다.
뜻과 의욕은 넘쳤으나 식당과 학원을 동시에 경영하다 보니 생긴 시스템 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김원일 요리사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평생의 은인을 여러 번 만난 그는 남자는 배신을 하면 안 된다고 누차 얘기했다.
그런 그에게 제자들의 소송이 준 상처는 너무나 쓰디썼다.
잠을 잘 수 없어 마음을 다스리려고 시작한 붓글씨는 그의 사무실을 온통 뒤덮고 있었고,
한·중·일 베세토 국제미술전에 출품을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게 됐다.
<베세토 국제미술전에 출품할 정도라는 그의 작품들 틈에 해병대 체육복이 눈에 띈다>
당시 학원으로 쓰이던 2층은 주인 없는 조리기구들로 가득해 휑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다시 최고의 요리학교를 세우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요리에 미치게 하는가.
“혼이지. 요리라는 것은 사람의 혼이야. 음식은 곧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혼을 다 불어넣어야 되거든.
그것이 안 들어가면 요리가 될 수가 없지. 사람들이 생각할 때 어려울 것 같아도 어렵지 않다.
소금, 물, 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머지는 소재가 가지고 있는 맛을 중요시하면서 내 손으로 내 기술로 혼을 불어넣으며 도와주는 것뿐이야.”
요리는 곧 혼이라는 그는 맛과 아름다움이 기본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 두 가지를 갖고 장난치려고 하면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될 수 없는 것.
그런 그는 요즘 서점가의 가벼운 요리책이나 어설픈 식당에 대해 근심을 보낸다.
“어릴 때 누가 회초리를 들면 무서워서 오줌을 찔끔하는 경험이 있을 거야.
생선도 마찬가지야. 생선을 바닥에 확 패대기치면 근육이 수축되면서 본능적으로 정자를 배출한다고. 그럼 맛이 없어.
다들 막 잡은 싱싱한 생선만 쫄깃쫄깃 하다고 좋아하는데…
시간이 좀 지나면 사후경직 됐던 근육이 이완되면서 더 부드러워지고 맛도 더욱 풍부해지는 거야. 그 때가 가장 맛이 있는 게지.”
<학꽁치회>
그의 가게에서는 생선을 잡자마자 회를 치지 않는다. 생선의 살이 가장 맛있을 때까지 숙성을 시켜 내놓는 그의 음식.
이는 한국인의 입맛에 익숙하게 변형된 일식(日食)이 아닌 일본정통요리를 뜻하는 화식(和食) 이라고 한다.
그 길에 자신의 모든 걸 건 사나이. 미스터 초밥왕이란 만화보다 더 만화 같은 인생을 산 초밥왕 김원일.
그의 인생사의 전환점은 다름 아닌 해병대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의 큰 아들 동현이는 이미 해병대에서 복무중이며, 작은 아들도 자연스레 입대를 대기 중이다.
“주먹도 쓰고 껄렁껄렁하게 살던 내 인생은 해병대를 다녀와서 바뀌었어. 그래서 내 자식들도 보내는 것이고.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려면 엄청난 풍파를 많이 겪는데
해병대 가서 도전정신이 뭔지 해병대 정신이 뭔지 배워서 화끈하게 살라는 뜻이지.”
인터뷰가 끝날 무렵 해병대 출신이라면 언제든지 제자로 받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김원일 요리사.
단, 제대로 된 정신을 갖고 올 것이라는 단서를 잊지 않았다.
생선과 밥을 조물조물 거리더니 투박한 접시 위에 초밥을 탁탁 올려놓는다.
일본 왕에게 진상된다는 특제 간장에 살짝 찍어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이 맛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쫄깃하면서도 너무나 부드러운 육질 사이로 탱글탱글한 밥알이 씹히더니,
고추냉이의 알싸한 맛과 함께 어느새 생선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몇 번 씹고 넘길 수 없는 그 풍부한 맛에 씹고 또 씹는다.
이 맛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맛있다는 말보다 이 맛을 더 잘 표현할 말은 없을 것 같다.
<그의 가게에는 내노라 하는 유명인사들의 사인이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며칠 후 인터뷰 원고를 정리하다보니 일전에 먹었던 그 초밥 맛이 떠오른다.
내가 씹고 있었던 것은 그냥 생선과 고추냉이와 밥 알갱이가 어우러진 초밥 덩어리가 아니었다.
요리에 미친 한 남자가 초밥에 담아낸 35년 외곬인생의 혼을 씹고 있었던 것이다.
글 / 사진 : 김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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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존경합니다!
대단하심니다,,해병대정신으로,,,
외길인생 김원일선배님 대단하십니다 부대마크를 보니 포병출신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