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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9장 1~5절/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일/하나님이 하시는 일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의 눈을 열어주신 이 사건은 단순히 소경이 보게 되었다는 기적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믿음에 관한 매우 중요한 진리를 우리에게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영적으로 이 사건을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그릇된 신앙의 형태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본문은 예수를 믿으면 소경이 눈을 뜬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바로 모든 소망 없는 죄인들, 자기 자신이 소경이라는 것 조차도 알지 못하며,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묘사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죄인들을 향해서 빛으로 오셨습니다. 소경에게 비추어진 빛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빛으로 오셔서 ‘나 왔다’고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보지 못하는 눈을 열어 빛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다는 것이 복음서의 설명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내가 빛이니까, 나를 보고 믿으렴’하고 설명하셔도 우리는 ‘어디, 어디요?’하면서 볼 수 없는 소경된 자들이라는 것이고, 그 눈을 열어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빛이 온다 한들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경이 되어 보지 못한다는 것은 영적인 소경됨 즉 인간의 죄성의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어주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설명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하는 것이 복음서의 요지입니다. 이 핵심을 놓치지 말고 본문을 살펴야 합니다.1. 일반적 편견: 죄와 고난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은 많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일으켰습니다. ‘왜 저렇게 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도 날 때부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을 보게 될 때,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태생적으로 그렇게 된 경우가 아니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된 경우에도 질문을 하게 됩니다마는 그것은 그래도 그 당사자와 관련을 갖기 때문에 조금은 쉬운 부분입니다. 가령, ‘그 사람, 죄를 많이 져서 그래’하며 자기 식으로 쉽게 대답합니다. 그러나 ‘날 때부터’ 그랬다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 사람 자신이야 어머니 뱃속에 있었는데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런 소위 ‘천형’을 받는가 하고 생각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은 것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랍비여, 이 사람의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이렇게 죄가 고난과 연결된다고 생각한 것은 단지 유대인들만의 사고방식은 아니기에, 우리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무슨 고난이 닥치든지, 좋지 않은 일이 특별한 이유 없이 일어나게 될 때 우리의 사고가 자동적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그런 방식입니다. ‘뭘 잘못했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가정에서는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자 수년 동안을 부모가 자신들의 결혼 전의 죄까지도 생각하고 찾아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 자식을 통해서 자기에게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는 부모를 만나 본 적도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이 고난이 죄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찾아온 것이라는 대전제에 있어서는 분명한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이 다 직접적으로 어떤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는 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요한복음 5장에 나온 38년 된 병자는 38년 이전의 자신의 죄로 인하여 그 병을 얻게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를 고쳐주신 후에, 그를 만나서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요 5:14). 그러나 죄와 고난에 대한 이런 한 가지 공식을 가지고 모든 사건에 대입을 하는 것이야말로 영적으로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아까 그 부모처럼 자기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는 평생 그 죄의 형벌이 아닌 죄책감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판단도 그 사람에 대한 영적 고문처럼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경 곧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무지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에 썼듯이 ‘관점’이란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관점을 형성하게 되면 얼마나 자유함을 얻게 되며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잘못된 섬김의 형태들이 진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목회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모르겠습니다.2. 관점1: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가지 관점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3). 이것은 하나의 공식을 알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매우 새로운 관점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통해서 뭔가를 하시려고 하신다는 것, 즉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은 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소경되어 난 것은 어떤 특정한 죄 때문만이 아니고 그렇다고 우연히 발생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인에서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 제자들의 사고에 주님께서는 목적에서 문제를 찾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물론 이것도 하나의 공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분명히 있으셨기에 그것을 허락하셨으며, 그러므로 이 일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은 없다’라는 말을 들으실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선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인형극이 생각난다고 할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는 관점을 새롭게 해줄 것입니다. 내 자식이 이렇게 된 것, 암에 걸린 것, 교통사고를 당한 것, 좋지 않은 일을 당한 모든 것들이 다 내 죄 때문이거나, 재수가 없어서 생긴 일이거나 한 것이다. 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이 일 조차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실 것이 있으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가지고 계시며 그 목적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포괄적인 관점입니다. 이것이 어떤 죄 때문이다라고 이해하는 것은 포괄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령, 어떤 것이 여러분의 죄 때문에 일어난 것임이 명백해서 여러분이 그 고난으로 말미암아 죄를 회개한다고 해봅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그냥 죄 때문에 일어난 형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며 하고자 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관점이 포괄적 관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죄 때문에 일어난 병이었지만, 그 병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이 관점을 놓치지 마십시오.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말입니다. 그것이 명백한 죄의 결과로 치르게 하시는 대가든지, 우연처럼 여겨지는 문제든지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여러분 인생과 가정과 일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고 믿음을 취한다면 여러분은 그 일들 속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평안을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첫 번째 관점입니다.3. 관점2: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곧 끝난다.두 번째 관점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곧 끝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긴박성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루를 낮과 밤으로 만드셨다는 것은 참 놀라운 아이디어입니다. 해가 밝을 때 일을 하게 되어있고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지면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도록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자,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전반적으로 뒤집고 살아갑니다. 전깃불을 발명해서 해 떨어진 밤에도 불을 켜고 일을 합니다. 그래서 쉼이 없고 잠이 없어집니다. 요즘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들으면 비웃을 것입니다. 그때는 에디슨이 전깃불을 발명하기 전이라 그 말씀이 먹혔지만, 이제는 안 통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단지 하루의 시간을 잘 선용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우리가 죽음이라는 인생의 밤으로 들어가기 전까지의 시간을 가리켜 낮이라고 했다는 것을 안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밤에는 불 켜고 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죽은 후에 관 속에서 일할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조금 주의 깊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이라는 단어는 영적 의미로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밤은 주님께서 붙잡히셔서 제자들이 주님을 놓치게 되는 때를 직접적으로 지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지나 승천하심으로써 육신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묘하게도 의도적으로 단수 대명사와 복수 대명사를 함께 사용하고 계십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라고 할 때, 나와 우리를 섞어서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시던 일, 바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제자들도 해야 한다는 말씀이며 이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하나로 묶어줄 뿐 아니라, 제자들이 감당해야만 하는 일이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하시지만, 14:12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예수님의 경우에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일들을 다 지상에서 이루셔야 합니다. 그 시간은 무한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과 더불어 함께 지낼 때 그들이 해야 할 일들이 분명합니다. 그 시간은 곧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라, 제자들 역시 한 사람, 한 사람 순교의 제물이 되어서 주님께 돌아가기까지 그들에게 주신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은 낮이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시간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90년이란 시간을 똑같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밤이 올 것이라는 것은 알고 삽니다. 그 밤이 오는 시간을 우리에게 정확하게 가르쳐주지 않으신 것을 인해서 저는 참 감사합니다. 그 시간을 알았더라면 사람마다 그 남은 시간만을 세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슬픔을 살아야 할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반대로 우리는 그 밤이 올 것을 알면서도 서서히 죽어가는 삶이 아니라, 마치 그 날이 언제 오려나 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마치 영원을 살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으로써 우리네 인생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시간으로 주어져있다고 가르쳐주십니다. 죽음이 찾아올 때, 그것을 여유롭게 맞이하는 사람은 극히 적습니다. 준비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것은 때가 아직 낮일 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준비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것보다 복된 것이 있을까요? 중요한 것은 살아있을 때 얼마나 누리고 호강했냐가 아닙니다. 준비된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설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두번째 관점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곧 끝납니다. 언젠가 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 언젠가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보장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있는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언젠가 여러분이 생각하셨던 언젠가를 보기 전에 죽음이 더 먼저 여러분에게 찾아올 때, 밤이 올 때, 이 말을 기억하는 것 보다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4. 관점3: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다.이제 우리는 세 번째 관점으로 옮겨갑니다. 그것은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의 눈을 뜨게 해주신 이 사건을 해석하는 관점입니다. 이 사건을 성경은 기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표적입니다. 단순히 miracle 이 아니라 sign 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차이입니까? 기적은 자연 안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건은 분명히 기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지금 일어난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뭔가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실재가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는 sign 이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표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된 이유다라고 설명하시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것은 기적적인 일도 있고 혹 기적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것이 언제나 기적이어야 합니까?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은 바로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표적이 된다면 어떨까요?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삶일까요? 내가 지금 견뎌야만 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표적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게 여기실까요? 내게 찾아온 이 고통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표적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늘 우리 자신이 초점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기도 속에, 우리의 신앙 생활 속에 나 자신이 주인이 되고 나 자신이 중심에 서서 있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힘이 없고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 세월과 상관없이 중심 없는 껍데기와 같은 것이 되곤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집요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요구합니다. 네가 주인이 되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주인이시다라고 말입니다. 네가 중심에 서면 안 되고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이 마지막 관점을 여러분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견지하십시오. 이게 신앙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무슨 일을 겪고 계십니까? 지난 주일에 저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녀에게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30년 동안 그 아들은 어머니의 가슴에 못을 박았고, 그 눈에 피눈물이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30년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셨습니다. 모니카는 사랑하는 아들 어거스틴이 저렇게 방탕아가 된 것은 저 예수 안 믿는 아버지의 잘못 때문이냐, 나의 잘못 때문이냐를 따지면서 한탄하며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닙니다. 그녀의 기도는 이 사건이, 이 긴 과정이, 방탕아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돌아와서 이천 년 교회사 최고의 신학자가 되게 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 되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의 회심은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당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든 형편, 혹 여러분 자신이 내가 짊어져야 하는 가시라고 여겨지는 모든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관점을 견지하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내가 그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아니라 표적이 되기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를 구하십시오. 이것이 성도가 가져야 할 합당한 관점입니다.5. 교훈과 적용저는 말씀을 마치면서 에베소서 5:15~18에서 바울 사도가 주신 권면을 드리려고 합니다.1) 기회를 놓치지 말라.바울 사도는 엡5장 16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했습니다. 이 말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관점은 늘 지금이 기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어리석은 부자는 부자가 되어 큰 재물을 모은 후에 이제부터 즐기겠다고 했지만, 그에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밤이 갑자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 일찍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 때가 아직 낮이매 라고 하는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에게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때가 악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나 절망적인, 소망이 없을 만큼 나쁜 시대에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시대는 우리 편이 아닙니다. 시대는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때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2) 주의 뜻을 이해하라.바울 사도는 엡5장 15절에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7절에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말씀합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을 피하고 지혜를 얻는 길입니다. 성경은 단순하고 무식한 것을 칭찬하지 않습니다. 뱀은 언제나 좋지 않은 동물로 성경에 등장하지만, 단 한 번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입니다.(마10;16) 하나님은 지혜로울 것을 명하십니다. 그 지혜는 하늘에서 난 지혜,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5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말씀합니다. 꾸짖지 않으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여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머리가 나빠서 나는 주의 일을 못했다고 핑계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리석은 것은 게으르고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성도가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등한히 하면서 주의 뜻을 이해하도록 지혜를 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명확하게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낮이고 일할 수 있는 때에 그렇게 하십시오.3)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마지막으로 바울 사도의 권면은 엡5장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아닙니다. 기회에 강한 사람, 머리가 좋아 계산이 빠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마지막 권면은 이 모든 일은 영적인 일이라고 못을 박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서 우리는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악한 세대에서 성령의 충만이 없이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는 일에 쓰임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 주님,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사, 악한 세대에 그리고 때가 아직 낮일 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데 쓰임 받는 성도들, 교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