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나더 라운드’에서 무기력했던 마르틴은 술을 통해 활기를 되찾는다. 엣나인필름 제공
✺ [漢詩를 영화로 읊다] 술 한 잔 마시는 이유
何處難忘酒(하처난망주),
어느 곳에서든 술 잊기 어려워라,
衰齡謝事歸(쇠령사사귀).
나이 들어 벼슬 그만두고 돌아왔거늘.
傷鴻思戢翼(상홍사집익),
상처 입은 기러기는 날개 접으려 하고,
老驥不任鞿(노기불임기).
늙은 말은 재갈의 속박 버티지 못한다네.
林壑無人過(임학무임과),
숲 골짜기엔 지나는 사람없고,
雲途有夢飛(운도유몽비).
구름 같은 벼슬길은 꿈속에나 날아간다.
此時無一盞(차시무일찬),
이럴 때 술 한 잔 없다면,
奈此送殘暉(내차송잔휘)?
어떻게 이 석양 녘 보내랴?
-‘어느 곳에서든 술 잊기 어려워라(하처난망주 何處難忘酒)’
6수 중 네 번째 수, 효백락천(效白樂天) 유호인(兪好仁, 1445~1494)
실패에 좌절하고, 세상에 분노하는데 술 한잔도 없다면…
시인은 말을 더듬었지만 뛰어난 시적 재능으로 성종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세파에 시달리다 어느덧 장년이 됐다. 3·4구의 날개 펴길 두려워하는 상처받은 기러기와 재갈을 견뎌내지 못하는 늙은 말은 각각 소식(‘杭州牧丹開時’)과 굴원의 시(‘離騷’)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자신을 상징한다. 이제 시인은 찾는 이조차 없는 고적한 처지가 돼 벼슬은 꿈에서나 바랄 일이 됐다. 마지막 두 구는 “이럴 때 술 한 잔 없다면”이란 백거이 시의 표현을 따와 자신의 상황을 얹었다.
백거이의 ‘권주’ 시에는 ‘어느 곳에서든 술 잊기 어려워라’ 외에도 ‘차라리 와서 술이라도 마시는 것이 낫네(不如來飲酒)’라는 제목의 연작시가 더 있다. 이들 시에선 성공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미끼를 문 물고기나 등불에 다가가다 타버리는 나방처럼 사람을 파멸시킨다며 화를 다스리려면 마음속 칼을 갈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술을 소재로 한 영화는 많지만 토마스 빈터베르그(Thomas Vinterberg, 1969- )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2022년)는 색다르다. 마르틴은 과거 촉망받던 교사였지만 지금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무기력한 중년이다. 그는 인간이 혈중 알코올농도 0.05%를 유지하면 적당히 창의적이고 활발해진다는 심리학자 스코르데루의 가설을 동료로부터 듣고 자신에게 이를 적용한다. 그리고 음주를 통해 활력을 되찾는다. 한시에서 현실적 고민을 풀어내기 위해 술 한 잔의 필요성을 제시한 것보다 더 적극적인 음주 예찬이다. 하지만 영화는 음주의 부정적 결과도 함께 비춘다. 마르틴과 동료들은 음주를 통해 일시적으로 행복을 찾지만, 과도한 음주는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술은 안 마시는 것보다 절제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러나 실패에 대한 좌절감과 세상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기 어렵다면 술이라도 마시는 편이 낫다. 백거이는 “차라리 와서 술 마시고, 눈감고 몽롱하게 취하는 편이 낫다(不如來飮酒 合眼醉昏昏)”(‘不如來飲酒’ 네 번째 수)라고 했다.
✵ 兪好仁(1445~1494)의 본관은 고령. 자는 극기, 호는 임계(林溪) · 뇌계. 아버지는 음(蔭)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4년(성종 5) 식년문과에 합격하여 봉상시부봉사가 되었다.
1478년 사가독서(賜暇讀書:조선 시대,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던 일)를 했으며, 1480년 거창현감이 되었다. 이어 공조좌랑·검토관을 거쳐, 1487년 노사신 등이 찬진한 〈동국여지승람〉 50권을 다시 정리해 53권으로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뒤 홍문관교리로 있다가 1488년 의성현령으로 나갔으나, 백성의 괴로움은 돌보지 않고 시만 읊는다 하여 파면되었다. 1490년 〈유호인시고(兪好仁詩藁)〉를 편찬했다. 1494년 장령을 거쳐 합천군수로 나갔다가 1개월도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시·문장·글씨에 뛰어나 당대의 3절로 불렸다. 특히 성종의 총애가 지극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외관직을 청하여 나가게 되자 성종이 직접 시조를 읊어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저서로 〈임계유고(林溪遺藁)〉가 있다. 장수 창계서원, 함양 남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토마스 빈터베르그(Thomas Vinterberg, 1969- ) 감독의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2022년)
71회 칸 영화제의 포스터에 사용되었던 장 뇌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 중/
2016년 8월 4일의 덴마크 코펜하겐 뉘하운 운하/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Soren Kierkegaard)/
삶의 권태 한 가운데에 있던 마틴
고등학교 종업파티의 마틴/ 체육교사이던 톰뮈가 코치하던 유소년 축구팀/
한바탕의 폭풍이 지나간 후/ 술이 아닌 삶이 축제다
✺ 何處難忘酒 / 白居易(772∼846)
其一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長安喜氣新 (장안희기신) 장안에서 신바람 새롭던 날
初等高第日 (초등고제일) 첫 번에 과거에 우등 급제하여
乍作好官人 (사작호관인) 졸지에 좋은 관직을 얻었나니
省壁明長榜 (성벽명장방) 중서성 벽에는 합격 방문 붙었고
朝衣穩稱身 (조의온칭신) 조복은 편안히 몸에 꼭 맞았네
爭奈帝城春 (쟁내제성춘) 서울의 봄을 어찌할거나
其二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天涯話舊情 (천애화구정) 아득히 헤어졌던 벗을 만나 정담을 나눌 때
靑雲俱不達 (청운구부달) 청운의 꿈을 둘 다 이루지 못하고
白髮遞相驚 (백발체상경) 백발이 갈아드니 서로가 놀라는구나.
二十年前別 (이십년전별) 이십 년 전에 헤어져서는
三千里外行 (삼천리외항) 삼천 리 밖을 떠돌았다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以敍平生 (하이서평생) 무슨 수로 평생의 마음을 풀어보나
其三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朱門羨少年 (주문선소년) 부귀하나 젊음이 부러울 때
春分花發後 (춘분화발후) 춘분날 온갖 꽃이 활짝 피어난 뒤
寒食月明前 (한식월명전) 한식날 달이 밝기 전에
小院回羅綺 (소원회라기) 정원에는 비단옷 여인이 배회하고
深房理管弦 (심방리관현) 깊은 방 안에서는 악기를 조율하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爭過艶陽天 (쟁과염양천) 화창한 봄날은 다투듯 지나가리
其四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霜庭老病翁 (상정노병옹) 서리 내린 뜰에 늙고 병든 사람
闇聲啼蟋蟀 (암성제실솔) 어렴풋한 소리로 귀뚜라미 우는데
乾葉落梧桐 (건섭낙오동) 마른 잎은 오동나무에서 떨어지는구나
鬢爲愁先白 (빈위수선백) 귀밑털은 수심에 먼저 희어지고
眼因醉暫紅 (안인취잠홍) 얼굴은 취하여 잠시 붉어지는데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計奈秋風 (하계나추풍) 무슨 수로 가을바람을 어찌해보나
其五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軍功第一高 (군공제일고) 전쟁에서 이룬 공이 제일 높을 때
還鄕隨露布 (환향수노포) 고향에 돌아감에 승전보가 따르고
半路授旌旄 (반노수정모) 거리는 반이나 깃발로 덮여있네
玉柱剝蔥手 (옥주박총수) 거문고 발에 고운 손 다 벗겨지고
金章爛椹袍 (금장란심포) 금장은 두루마기 위에 눈부시구나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以騁雄豪 (하이빙웅호) 무엇으로 영웅호걸의 회포를 풀까
其六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靑門送別多 (청문송별다) 청문에서는 송별이 잦을 때라네
斂襟收涕淚 (렴금수체누) 옷깃 여미고 눈물 훔치니
簇馬聽笙歌 (족마청생가) 말들도 생황소리에 귀 기울이네
煙樹灞陵岸 (연수파능안) 파릉 언덕 나무는 안개에 싸이고
風塵長樂坡 (풍진장낙파) 장락궁 비탈에는 흙먼지 이네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爭奈去留何 (쟁나거류하) 떠나고 머무르는 마음 어찌하리오
其七
何處難忘酒 (하처난망주) 어떨 때 술 없으면 괴로운가
逐臣歸故園 (축신귀고원) 쫓겨 귀양갔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
赦書逢驛騎 (사서봉역기) 사면 조서 가져온 역마를 맞이하니
賀客出都門 (하객출도문) 축하하는 손님이 도성 문을 나오네
反面瘴煙色 (반면장연색) 얼굴 반은 거무스름 병색이 짙고
滿衫鄕淚痕 (만삼향루흔) 옷에는 가득 고향 그린 눈물 자국
此時無一盞 (차시무일잔) 이럴 때 한 잔의 술이 없다면
何物可招魂 (하물가초혼) 무엇으로 떠나는 혼을 불러오랴
―'어떤 자리서 술을 잊지 못할까(何處難忘酒)’ 백거이(白居易·772∼846)
술이 좋아 마시면서도 애써 술 마실 명분을 찾아내려는 건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듯하다. 기왕 마시는 술이지만 명분이 그럴싸하면 마음의 부담도 덜고 혹여 있을지 모를 주변의 눈총도 피할 수 있어서일 것이다. 하물며 서로 아득히 멀리 이별했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와 옛정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누군들 시인의 이 권주가에 공감하지 않으랴.
‘어떤 자리서 술을 잊지 못할까’는 7수로 이루어진 연작시. 옛 친구와 회포를 푸는 경우 외에 시인은 어떤 때 술 생각이 간절할 것이라고 상정했을까. 장원 급제하여 관복을 입고 장안을 누빌 때, 전공(戰功)을 세운 영웅이 군사를 이끌고 금의환향의 행차에 나설 때, 병든 노인이 서리 내린 뜰에서 외로이 소슬한 가을바람을 느낄 때, 조정에서 쫓겨난 신하가 도성을 떠나 눈물로 낙향의 길에 오늘 때 등 다양한 경우를 내세우고 있다.
이백, 두보에 못지않은 시명(詩名)을 떨쳤던 백거이, 취음(醉吟) 선생이라는 호(號)에 걸맞게 음주시(飮酒詩)에 관한 한 오히려 두 사람을 능가할 정도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만 이백의 음주시가 호탕한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면 두보의 그것에는 불우한 삶 속에서 악전고투했던 침울한 분위기가 투영되어 있고 백거이의 음주시에는 달관과 유유자적의 정취가 물씬 배어난다.
"인생은 예상한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 ‘어나더 라운드(Another Round)’(2022년) 영화 속 명대사
[출처 및 참고문헌: < 동아일보 2023년 02월 16일(목)|문화 [漢詩를 영화로 읊다〈53〉술 한 잔 마시는 이유(임준철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 동아일보 [이준식의 한시 한 수] ,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2020-10-30 >Daum · Naver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