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어났다 [임지은]
아침에게 발견되지 않으려고 장롱 안에 숨었다
내가 나라는 사실이 숨겨지지 않았다
벽을 문지르자 덩어리 같은 것이 만져졌다
밀실 안에서 반죽이 부푸는 방식으로
나는 두 명이 되었다
깜짝 놀라 철제 손잡이를 돌리면
문 밖에는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오늘은 어떤 나로 외출할까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어떤 나는 속눈썹을 붙이고 외출을 했다
어떤 나는 안경을 쓰고 도서관에 갔다
어떤 나는 지하철에 가방을 두고 내렸다
나는 매일 다른 장소에 내가 아닌 나와 마주쳤다
자주 너답지 않아, 라는 말을 들었다
나다운 게 뭐지? 생각하는 동안 나는 다섯 명이 되었다
말투라던가
웃을 때 입모양
음료 안에 생각을 젓는 속도
빠르게 타인이 되어가는 나와 우리들
나는 충분히 나인 척 했어
난 거의 내가 될 뻔 했어
난 제발 나인 척 좀 하지 마!
우리는 아프게 찔러대는 포크의 기분을 갖게 되었다
팔과 다리가 섞인 채로 밥을 먹었다
토론은 너무 고단했기에
종종 식탁 위에서 잠이 들었다
나는 식탁 위에 엎드린 나를 단단히 뭉쳐
꿈속으로 데려갔다
하얀 종이 위에 우리는 눈사람으로 서 있었다
지루함에 얼굴이 녹아내릴 때까지
만들고 부수길 반복하며
공기가 차가워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고
장롱 안이었다
철제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두 손엔 이상할 만큼 핏기가 돌지 않았다
바닥에는 하얀 종이 뭉치들이 굴러다녔다
나는 가끔 편의점이나 서점에서 목격되었지만
얘기를 나눠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나였지만 누구도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 현대시학, 2016, 2월호
* 국민학교 친구중에 연락하는 친구는 한명.
중학교 친구중에 연락하는 친구는 없다.(이건 아마도 서울의 특성 때문일 거다.)
고등학교 친구는 밴드에 묶여 그저 삼,사십명정도 된다.
대학교 친구는 과 동기로 삼,사십명
써클 친구로 그저 열댓명.
직장은 수백명 되지만 그속에서 나를 찾기는 어려울 것 같고
카페나 블로그에서 어렵게 십수명 찾을 수 있을 게다.
장롱안에 숨은 나를 여기저기서 발견한들 그게 나일 수는 없을 터.
이 나이에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갈 수도 없고
나는 다른 얼굴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장롱속에 숨겨둔 나는 그나마 나에 가까운.
이것이 '나'야,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단 하나라도 발견되기를!
첫댓글 나도 거의 내가 될뻔 했어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나로부터 도망쳐 내달리고 있는 내가 보이는거야
내가 거의 다될뻔 했는데
그건 내가 아니었던거야
설핏 비추인 얼굴을 감추고 마는 나
나 아닌 척하고 산 게 모여서 '나'가 되는 것 같습니다.
내 디엔에이는 번호가 28262373820이야! 그게 나야.
내 영혼의 무게는 영점 이일구오팔팔그램이야! 그게 나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사람들은 귀신같이 나를 알아보지만 정작 나는 나자신을 모르고 살아가죠.
귀신같은 그들을 통해 어렴풋이 나를 알아보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