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쓰는 편지
kch_35@hanmail.net 강철수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 철수 씨, 그대가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아마 삶이 그런대로 넉넉해져 자신을 살펴볼 만한 여유가 생긴 다음일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삐 사느라 그럴 겨를이 도통 없었을 테니까요.
그대에게 내 존재를 확실하게 알려준 사건을 기억하시는지요. 서리가 내린 늦가을, 뒤꼍 감나무에는 주홍색 감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수채화인 양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감을 따려는 그대와 만류하는 내가 부딪쳤지요. 저리도 아름다운 경치를 허물고 감을 따 봐야 값으로 치면 불과 몇만 원에 불과할 게 아닙니까. 앞으로 몇 달 동안 저 고혹적인 경치를 보면서 얻는 행복감은 그보다 몇백, 몇천 배는 더 될 것입니다. 입으로만 배부르게 하는 게 아니고 눈으로도 배부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째 모르시나요. 내 긴 넋두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감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지요.
그대가 내 뜻을 뭉갤 때도 있지만 흔쾌히 따라준 적도 있습니다. 아마 그때가 문화센터 3년 공부에도 등단을 못 해 끌탕을 하고 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아침나절 그대가 세면대 앞에서 칫솔을 문 채 어느 신생 잡지사에서 물질적인 도움을 주면 곧바로 등단시켜 주겠다는 제의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러다 정말 큰 일 나겠다 싶어 후딱 내가 나섰지요. “새꺄, 정신 차려!” 벽력같은 속 고함과 함께 꿀밤 한 방이 그대 관자놀이에 꽂혔지요, 좀 과격했지만 그 덕(?)으로 그대는 6개월 후 최고 권위의 잡지에 당당하게 등단할 수 있었습니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고작 6개월을 참지 못해 일을 그르칠 뻔했던 그대의 조급함도 얘기해 봅시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다는 고담처럼 항상 몸보다 마음이 앞서가지요.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매듭이 진 노끈을 차분히 풀지 못하고 가위로 싹둑 자르곤 했습니다. 경망스러워 보인다는 아내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수화기를 집어 들곤 하지요. 하지만 그 느긋하지 못한 성정이 그대의 사업 마당에서는 도리어 도움이 되었다지요. 그곳에서는 기회가 오면 좌고우면 뜸을 들일 게 아니라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낚아채야 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그대의 조급함은 태생적이 아니라 사업을 하면서 몸에 밴 후천성이 아닌가 합니다.
어느 한의사가 소양인(少陽人)이라 진단하며 내린 ’해로운 음식‘ 표에 오로지 충성을 바치는 그대의 순진함에 연민의 정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고기, 갈비찜 같은 쇠고기 음식을 먹으면 안 되고 스테미나 식품이라는 장어구이도 사양해야 합니다. 계란과 닭고기도 금지, 육류로는 오직 돼지고기 한 가지만 먹을 수 있습니다. 빵을 비롯한 밀가루 음식과 우유 버터 치즈 같은 유제품도 먹지 않아야 합니다. 거기다 영약 중의 영약(靈藥)이라는 인삼도 멀리해야 하고 술, 커피, 꿀에다 감과 오렌지까지도 사절입니다.
그게 집에 있을 때는 별 불편이 없지만 모임에 나갔을 때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오래된 모임에서는 배려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난감하지요. 깨작거리는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복스럽게 먹습니다. 절반가량만 먹었는데도 그 ’해로운 음식‘표에 터부 주술(呪術)이라도 걸려있는지 속이 부글부글, 결국 약국에 가야 합니다. 맛난 음식을 많이씩 남기는 그대를 두고 그쪽 동네에서는 소식(小食)의 끝판왕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지요.
빵과 버터, 치즈가 주식인 러시아로 문학기행을 갈 때는 마른 누룽지와 일인용 밥솥을 갖고 가는 촌극도 연출했습니다. 그러기를 20여 년, 그동안 ’별종‘이라거나 ’건강 염려증 환자‘같은 놀림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늙마에 온다는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성인병도 없고 또래들보다 더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대에 대한 내 연민의 정을 거두겠습니다.
나란히 나란히, 정리 정돈 잘하다가 낭패를 본 것도 한번 짚어봅시다. 책상 위의 필통, 사발시계, 자판들이 깍듯하게 제 자리를 지켜야 하고 서랍 속의 이런저런 것들도 항상 ’차렷!‘, 자세로 있어야 합니다. 사업을 할 때도 창고 정리를 직접 챙겼습니다. 광고 사진을 찍어도 좋을 만큼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오케이(OK) 사인이 나갔습니다. 다른 이들이 공장을 차리는 등 사업을 확장할 때도 그대는 악성 거래처를 정리하고 부실채권을 폐기하는 등을 통해 도리어 몸피 줄이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덕분에 아이엠에프(IMF) 위기도 별 탈 없이 넘길 수 있었지요.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고희(古稀), 일흔 나이를 앞둔 정리 정돈은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 유품을 정리하면서 가장 난감해한다는 앨범 여러 권을 먼저 불사르고 애지중지하던 일기장들도 없앴지요. 임대료를 받던 상가들도 정리했습니다. 남은 세월이 한 줌 햇살이다, 싶어서였습니다.
한데, 그 햇살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앨범을 그냥 두었더라면 새 식구가 된 손주며느리들에게는 집안의 역사 교과서가 되었을 것이고 일기장이 있으면 글쓰기의 소재 찾기에 큰 도움이 되겠지요. 상가를 비롯해 돈 될 만한 모든 것을 정리해 금융기관에 맡기고 유유자적 살고 싶었습니다. 오늘처럼 제로 금리 시대가 올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요. 요즘 자식들이 챙겨주는 용돈을 손사래 시늉 한번 없이 넙죽넙죽 받는 가련한(?) 처지가 된 것은, 오직 그대가 정리 정돈의 달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대가 사람을 사귀는 과정을 보면 민망할 때가 참 많습니다. 서너 번 만난 후라고 하지만 상대방이 묻지도 않는데 어째 자신의 신상을 발가벗기듯 미주알고주알 꺼내 놓습니까. 조실부모했다. 노점과 행상을 하면서 학교에 다녔다. 8년 동안 충청도에서 장돌뱅이를 했다. 우리 집 식구는 열 몇이다. 그런 것들이 무슨 자랑거리라도 되는 줄 아시는지요.
상대가 괜찮은 사람이라 판단되면 우물쭈물 망설일 게 뭐 있습니까. 내가 벗으면 상대방도 벗게 마련,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 허물을 튼 진정한 친구가 되고 말지 않던가요. 친구 얻기가 식은 죽 먹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계제가 되면 온 몸을 던져서라도 붙잡아야 합니다.
그대의 말에 수긍이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침마다 카톡으로 안부를 주고받는 분이 80여 명에다 가끔 전화나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사람도 20여 명이나 되지요. 그중 절반쯤의 친구들과는 만날 때마다 가볍게 포옹을 하거나 등허리를 ’철썩!‘, 때려도 좋을 만큼 막역한 사이가 아닙니까. 나이 들면 친구 많은 게 가장 복되다 했습니다.
’바른 생활 사나이‘, 그대가 왕년에 들었던 자랑스러운 별칭이었습니다. 술, 담배 안 하고 근검절약, 한눈팔지 않고 사업에만 열중하는 모범적인 남자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컸기에 ’생활력이 강하다, 사막에 버려져도 살아남을 사람‘ 이라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대에게도 그런 얘기를 하는 분이 더러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야겠다는 목표를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좌우에 펼쳐진 일상의 아기자기함을 거의 다 놓쳐버렸지요. 아이들을 데리고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걔들이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입학식이나 졸업식에 참석한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습니다. 놀이 문화와도 담을 쌓았지요. 등산 하나 빼고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화투, 당구, 낚시, 수영, 골프에 문외한이고 노래도 젬병, 춤은 더 어림도 없습니다. 목표에는 도달했지만 잃은 것이 너무나도 많은 ’상처뿐인 영광‘, 맨손인 듯 허허로운 그대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잡지사에서 요구하는 분량이 다 되어 마무리해야겠습니다. 그대가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서 살고자 하는 현실주의자라면 나는 보다 나은 세상, 꿈을 향해 발돋움하는 이상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 당연히 부딪치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그대와 나는 큰 다툼 없이 서로 양보하며 이제껏 잘 살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충분히 그러리라 믿습니다. 그대와 나, 우리들의 앞날을 위해 목청껏 “으라차차!” (에세이21 2021년 봄호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