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존의 단군 임검 초상
- 머리에 관(冠)도 없이 시골 영감처럼
묘사함..
◀1995년
증산도에서
새로
복원한
단군임검 어진
-아시아의 중심국가인 조선 통치자로서의 면모를 나타내는 면류관과 용포..
1. 단국의 역사
1) 우리는 보통 반만년(5000년)역사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자랑스런
반만년의 역사라고 그런데 반만년의 역사를 이야기
해 달라면 자신있게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외국인들도 한민족은 5000년 역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2000년밖에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단군의 역사가 빠져 있습니다.
(47대 2096년이 빠져 있습니다.)
환국으로 부터는 9000년이므로 실상은 7000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2)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였던 조선은 단국조선의 정신을 계승하는 의미이다.
고구려의 정신을 이어 계승하여 태조왕건이 고려라 한 것처럼
3) 참성단 마리산에서 천제를 모셨다.
지금도 천국체전때 성화를 채취하는 곳이다.
세상사람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왜 마리산 참성단에서 성화를 채취하는지를.."
4) 북한지역의 단군묘 발견
{영조실록(英祖實錄)} 에는 1739년 5월 23일과
1763년 4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영조가 평양감사에게
단군묘를 잘 보수 관리할 것을 명령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5) 비파형동검(고조선의 대표적인 동검)-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의 영토와 비파형동검의 출토지역이 일치함
6) 1990년부터 고등학교교과서에 단군왕검이 서기전 2333년건국했다고 인정
그런데 47대로 이어지는 단군의 통치계보는 잘라먹었다.
그리고 준왕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이 아니라. 번조선의 마지막왕입니다.
7) 제13세단군 홀달천제 50년에(서기전1733년) 다섯 개의 별이 서로 한군데로
모인 오해성 결집현상에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1993.9.30)
-시사저널 서울대 박창범교수
8) 단군신화는 16년 2개월 동안 조선사(朝鮮史) 편찬업무에 관여해온 일본인
학자 금서룡(今西龍)은 [단군고檀君考]라는 단군신화설을 만들어
역사 왜곡에 앞장섰다
9) 檀君은 神話아닌 우리國祖-- 원로 문헌 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
조선일보 특별기고 -〈조선일보 1986년 10월9일(목)자〉
2. 배달의 역사
1) 우리는 지금도 스스로 배달의 민족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환웅의 배달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2) 배달의 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열두번째 막내아들-태호복희
3) 배달의 14세 자오지(慈烏支) 환웅천황 : 치우(蚩尤)천황
4) 신교에서 국조삼신을 모시던 건물을 환웅전이라 했다.
불교에서 석가를 모시면서 대웅전이라 하였다.
5) 최치원의 난랑비(鸞郞碑) 서문
"국유현묘지도(國有玄妙之道)하니 왈풍류(曰風流)라"
6) 환웅천황께서는 환인으로부터 제세핵랑군3000명을 거느리고
홍익인간, 광명이세,제세이화의 건국이념을 받았다.
단군의 건국이념이 아니라, 배달국의 건국이념이다.
3. 환국의 역사
1) 석유환국(昔有桓國)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2) 조선왕조실록 세조 7권 도가사서에
삼성기(上)-안함로
삼성기(하)-원동중
를 회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이다.
3) 12환국중에서 수밀리국문명
메소모타미아지역에 5,500여년전 서양문화의 뿌리인
수메르 문명이 있었다.
수메르인들은 동방에서 왔고
검은 머리의 용모(Black Headed People)
한국어계통인 교착어인 수메르어를 섰다.
종교문화는 지구랏으로 제천단과 같은 모양이다.
4) 환은 환하다. 광명문화의 상징
5) 우리는 강(江)의 어원은 가람이다.
일본에서도 강을 가와(河)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목포도 "나이아가라"라합니다.
여기에서 가라는 강이란 말입니다.
6) 미국의 인디언문화를 살펴보면 우리의 시골문화와 너무나 비슷하여
놀란다고 합니다. |
첫댓글 확실하진 않습니다만..단군이 지금 알고있는 참성단에서 제를 올렸다는 말은 허구일 가능성이 높지요..
함부로 말해 죄송하지만...제가 강화도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잘 압니다만..당시에 강화도까지 와서 제를 올리려면 엄청난 수고와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겁니다.. 조류가 들쑥날쑥해서요.. 일찍이 다리가 놓인 것은 그때문입니다.. 당시의 선박에 의지했다기엔 좀...
아, 일찍이 다리가 놓였다는 것은 정부가 들어서고 말입니다.. 게다가 참성단의 존재를 규명해주는 자료 자체가 무신정권 이전엔 없었다는 점도 의심스럽습니다... 당시에 강화도에 정부가 천도한 것과 묘하게도 겹치죠...
아마 당시의 정치집단은 강화도에 역사적 필연성을 부여하고 싶었을겁니다..제는 보통 가장 높은 산에서 하는 경우가 많으니 마리산이 이용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지요..하지만 막상 와서 보시면 아시겠지만...마리산은 대단한 산이 아니예요.. 강원도 가보니 그보다 크고 웅장한 산은 얼마든지 있더군요..
게다가 당시의 수도와 더 가깝고 접근하기 용이한 백두산이나 금강산을 무시하고 굳이 먼 섬까지 올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여러모로 생각하니까 이상한 점이 많죠..? 강화도에서 나고 자랐던 저로서는 처음엔 무척 받아들이기 힘든 의견이었지만 이젠 조심히 생각해본답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