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Swallowtail Butterfly)는 만들어진지 오래된 영화다. 95년도의 러브레터이후 1년만에, 그러니까 96년에 발표된 이 영화 스왈로우...는 형식상 러브레터와 2001년에 만들어진 릴리 슈슈의 모든것의 교차점에 서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는 분명히 현실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환상속의 이야기이지만, 그 환상이 반사해서 보여주는 현실의 느낌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아직도, 96년으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감독의 마음에서 떠나지 못하는것 같다. 이와이 슈운지 혹은 이와이 슌지. 그의 작품속에 보여지는 삶이란 그런것이다. 안타까움.
이 영화를 설명할때 러브레터와 릴리 슈슈의 모든것을 빼놓고 설명하기란 참으로 어려울것 같다. 러브레터 이후 1년만에 갑자기 이런 심각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 감독의 의도가 무엇인지 그때는 정확히 설명하기 힘들었으리라. 물론 이 영화로 이와이 슌지라는 감독의 영화색깔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2001년 릴리 슈슈의 모든것통해 마무리 되었다고 볼 수 있을것 같다.
러브레터---스왈로우 테일---릴리 슈슈의 모든것. 이 연작처럼 보이는 영화는 무엇을 말함인가?
[이와이 슈운지-환상과 현실사이의 경계에 선 관조자]
러브레터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는 분명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모았고, 많은 이와이 슌지 매니아를 만들어 내었다. 안타까운 사랑, 절절함, 그리고 확인되는 잊혀진 사랑. 아름답다 못해 그 화면만으로도 눈물짓게 만들것만 같은 영상미. 그래서 이와이 슌지는 영상미의 마법사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단일극장 개봉을 통해 300만이라는 엄청난 관객을 모은 일본 젊은 영상세대의 우상이 되었다.
그러나, 애초부터 러브레터가 감독의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일본의 북해도 어느 곳...이렇게 시작되는 러브레터의 아름답기만 한 사랑이야기는 실제로는 없는 허구이야기이다. 그런 완전한 환상에서 시작하는 또다른 영화가 스왈로우...이다. 역시 미래의 일본 어느 도시. 엔화에 대한 꿈때문에 일본 도시로 흘러들어온 옌타운의 설정또한 환상의 어느 도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런 환상 혹은 가상의 설정은 여전해서 릴리 슈슈의 모든것에서도 이어진다. 일본의 어느 소도시를 배경으로 하고있는 이 영화도 역시 일본의 현실이 아닌, 만들어낸 환상의 장소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동경하는 락가수 릴리 슈슈와 그녀가 말하는 에테르(이 영화속에서의 에테르 설정은 가공의 것이다)까지도 물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이지매,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왜 이런 이와이 슌지의 작품들은 <환상적 공간>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
이와이 슈운지는 이런 환상적 공간안에서 사랑(러브레터) 꿈(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서정적 폭력성(릴리 슈슈의 모든것)까지의 모든것을 다루고 있다. 세편의 작품 사이에 들어있는 <4월이야기>나 데뷔작<언두 undo>는 제외해두고 보자.(이 영화들은 그 나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이번에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선상에 있다)
그것은 이와이 슌지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경계선에 서서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그 어느쪽으로 가야할지 마음을 잡지 못하는 그런 시선이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이와이 슈운지는 영화라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지만, 그 영화속에 담길 세상은 자신의 의식세계에만 머무는 환상의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즉, 몸은 현실에 있지만, 마음은 환상속의 시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영화속에서 정말 영화같은 사랑을 하는 사랑도 실제로는 어디선가 한번쯤은, 일생동안 한번쯤은 볼수 있을 만한 그런 사랑이 많다. 아니, 적어도 그런 사랑을 꿈꾸게 되는 그런 상황설정이다. 그러나, 이와이 슈운지가 바라보는 사랑(러브레터)은 그런 가정마저 무시한다. 애초부터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을 만들어내어 이 영화는 실제로 있을법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다. 다만, 관객들에게는 그런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만을 바라고 있다. 아니, 그렇게 화면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환상적 아름다움"만을 관객에서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강요는 스왈로우테일에서도 계속되어, 옌타운(이것은 아메리칸 드림, 혹은 코리안 드림 이런걸로 보면 될것 같다)들의 성공과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좌절과 죽음, 그리고 나비라는 말이 주는 것처럼 아름답지만,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그런 꿈들에 대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자세, 그 모든것이 다 환상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감독의 그러한 자세는, 아직까지도 현실속에서의 사랑에 대한 믿음과 아니면 인간 자체에 대한 믿음이 확신을 가질만큼 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어떤 뚜렷한 선악기준, 사랑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이 흔들리기때문에 자신이 바라고 있는 절대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사랑, 그리고 약하지만 무언가를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않는 그러한 꿈을 가진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믿음을, 아직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시공간에서만 표현해 내는 것은 아닌지.
그렇기에, 최신작 릴리 슈슈의 모든것에서 감독은, 이지매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친구였으나 이지메의 대상으로 전락한후,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강간하는 친구들을 도와주는 남학생, 원조교제를 강요받다 자살하는 여학생, 그리고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는 모습까지도 너무나 아름답기에 눈물날 정도로 아름다운 화면안에 넣은 폭력성이 무엇을 말하는것인지. 너무나 서정적이고 아름답기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마저도 꿈속을 걷든 나른하고, 그저 시간이 지나면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아직도 감독은 그러한 정도의 세계밖에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 공중을 부유하는 나비의 시선과 절망]
이름도 모른채 옌타운에 들어와 살게된 어느 소녀. 애벌레란 의미를 지닌 이름을 갖게 되고,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과의 아름답고 행복한 시절. 그리도 닥쳐온 어려운 시기. 그 행복한 시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러나, 그 모든것을 지키려고 죽어간 사람을 불태우면서 던져버리는 엔화(돈).
그녀는 나비를 가슴에 문신을 한다. 문신을 하면서 왜 나비 문신을 하게 되는지 나비의 시선을 느낀다.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제비꼬리 나비. 그 나비의 시선속에서 몸을 팔던 엄마와 공중에 부유하면서 소녀에게 잡히지 않으려던 나비, 도망치던 나비를 창문틀에 끼어 죽인 소녀의 손길은, 다시 가슴에 문신을 새기면서 나비를 부활시킨다.
하늘을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나비. 그러나 하늘을 나는 것을 제외하면 나비에게 무슨 힘이 있을까? 바람만 불어도 어딘가로 휙 날려가버릴것 같은, 바람이 조금만 세도 날개가 찢어질 것 같은 그런 나비. 그리고 무심한 힘도없는 어린 소녀에게 죽음을 당하는 나비가 왜 그 나비를 죽인 소녀의 가슴에 다시 피어나는 것일까?
중국으로 다시 쫓겨나게 될줄 알았다가 어이없이 풀려나온 남자가 기쁨에 뛰어가면서 본 자신의 나비.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자신이 진정 사랑했던 여자의 가슴에 새겨져 있던 나비. 갑작스런 사고로 죽어도 밀입국자 신분인 옌타운이기에, 죽은후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 나비를 새겨넣었던, 어떻게 보면 스타가수가 되어 성공한 옌타운인 연인을 지켜주려는 마음을 갖게 해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
그녀의 가슴에 나비가 새겨져있고, 숨을 쉴때마다 날개짓을 하는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그것만큼 그 남자에게 행복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영화 결말에서, 인기 절정의 가수였던 그녀는 결국 옌타운의 낡고 쓰러져가는 집으로 돌아와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위해 죽어간 남자는 불길에 몸을 태우고 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했던 소녀는 불길을 향해 돈을 집어던진다. 헤어졌던 오빠(야쿠자)와 여동생(가수)을 연결해주는 소녀는 그가 그토록 찾던 물건을 건네준다.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정보가 담긴 마이웨이 테잎을.
그리고, 그 야쿠자는 자신을 암살하려고 기다리는 저격수들 사이로 차를 타고 떠난다. 그 남자가 저격을 당해 죽었을까? 그런것은 이제 의미가 없다. 소녀는 그 야쿠자를, 죽어가는 자신을 살려준 그 야쿠자를 사랑(남자로서가 아닌 사람으로서)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그리워하는 여동생과의 연결고리를 던져주었다. 삶에는 그렇지만, 그런 연결고리로도 해결되지 않는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운명속에서도 인간에게는 꿈이 있다는 것.
우리는 이 아게하라 불린 소녀의 운명이 궁금해진다. 행복했던 시절을 잃고 사람을 떠나보낸 그녀가 겪어야할 앞으로의 삶은 어떤 것일까?
감독은, 몇년이 지나 이 답을 우리에게 준다. <릴리 슈슈의 모든것>에서 처럼, 자신을 억누르던 그 모든것을 향한 분노와 충동이 가져온 살인을 통해, 이 소녀의 삶이 어떻게 되었음을. 릴리 슈슈...에서 살인을 저리른 학생은, 자신이 좋아하던 릴리 슈슈의 음악을 들으면서 바람이 가득한 푸른 논에서 음악에 묻힌다. 그 소년에게는 더이상의 억압도, 괴로움도, 슬픔도 없다. 죄책감도. 그 소년의 삶처럼, <스왈로우 테일>이 가슴에서 숨쉴때마다 팔락거리며 날개짓을 하는 소녀도 괴로움도 슬픔도 없이 살아갈 것임을 우리는 짐작한다.
그것은 좀더 성숙된, 소녀가 아닌 여인 혹은 사람의 삶이겠지만, 괴로움도 슬픔도 없는 삶이 주는 절망감을 어떻게 표현할까? 애벌레가 나비가 되면 아름답고 자유로워 질 것 같지만, 그것이 실은 더 깊은 괴로움과 슬픔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렇게 이와이 슈운지는 절망도 노래하고 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노래 - 이와이 슈운지의 슬픔]
러브레터, 스왈로우 테일, 릴리 슈슈...이 모든 영화에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나온다. 이들 영화는 모두 2가지 이상의 이야기 축을 가지고 이루어진다. 후지이 이츠키들의 이야기였던 러브레터, 위조지폐 자료가 들어있는 마이웨이 테잎이 둘러싼 소녀, 가수, 야쿠자들의 얽히 이야기를 가진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 릴리 슈슈와 이지메 이야기가 교체되는 릴리 슈슈의 모든것. 이 영화들은 상영시가도 길면서, 섬세하게 인물의 심리를 따라 간다.
러브레터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따라갔지만, 스왈로우, 릴리슈슈 모두 대사를 줄인채 인물의 행동과 음악과 배경화면만으로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의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을 표현해낸다. 사랑도 물론.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을 보여주는 화면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놓치기 쉬운 것도 이와이 슈운지의 영화이다.
그러나, 영화의 결론은 한결같다. 도서대출카드 뒤에 그려져있던 소녀 후지이 이츠키의 초상화, 뛰어가면서 눈에 들어온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가 그려진 커다란 간판, 음악을 들으면서 논에 파묻혀 바람을 맞는 살인범 소년의 모습. 그렇게 잊혀졌거나 혹은 상처받은 영혼이 받은 희망의 노래. 그것이 영화의 결말장면이다.
그런, 결말 장면에서 보여지는 것은 분명 <희망>이지만, 그 희망이라는 감정이 생기기까지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 주는 깊은 슬픔을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런지. 그래서 희망을 보고 극장을 나오면서도 마음 한구석 깊이 남아있는 씻어내기 어려운 감정. 그것은 바로 이와이 슈운지의 깊은 슬픔인것 같다.
이와이 슈운지에서 중심을 이루는 인물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그 어떤 사람도. 심지어 눈부신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4월 이야기>에서 마저도 주인공들은 사랑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간신히 시작하는 모습만 보일 뿐.
감독은 아마도, 지나간 사랑을 그려내는 작업은 할 수 있었지만, 아니면 사랑을 시작하려는 모습까지만 보여줄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 사랑을 만들고 가꾸어가는 모습은 그려내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 그런 이야기를 그려낼 수 없어서 그런 영화를 만들지 않는 것은 아닐것이다.
아마, 감독의 개인적 경험상 사랑을 고백할때까지의 그 과정만을 그려내는 것, 아니면 절망속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데뷔이후에도 그 이상의 진전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감독의 내면 깊은 곳의 슬픔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영화마다 느껴지는 영화 밑바닥에 기본으로 깔린 슬픔은 감독이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것 같다.
[결말 - 공중에 부유하는 나비]
스왈로우 테일의 압권은 소녀를 바라보는 나비의 시선이다. 사실 그 시선은 소녀의 시선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시선이 두 개로 나뉘어 서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깊은 슬픔속의 내 자신의 모습속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는 것이다. 소녀는 나비를 죽임으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잃어버렸고, 그것은 이름조차 없는 자신의 존재을 만들어 내었다. 그녀는 이제 오로지 자신의 시선으로 밖을 바라볼 수 밖에 없으며, 그 눈으로 어둡고 슬픈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그렇게, 이름조차 없는 애벌레같은 존재에서 가슴에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의 날개짓이 되는 숨쉬기를 통해, 그녀는 이제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과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을 하나로 만들어 세상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정말 소녀가 아닌, 애벌레가 아닌 성충인 스왈로우 테일 버터플라이가 되어 자신의 희망을 찾아 날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공중에 떠 있다. 부유. 그리고 어디로 갈것인지는 감독도 모른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난다. 그녀가 자신이 죽인 나비처럼 죽어갈지 혹은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그녀와 함께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