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실린 백제 건국 설화에
미추홀(彌鄒忽)이란 지명이 나온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태어난 비류와 온조 형제는
이복형제 유리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자 추종세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비류는 미추홀에 도읍을 정했다.
미추홀은 물이 짜고 땅이 습해 살 만한 곳이 못 돼 비류는 후회 끝에
죽고, 백성들은 위례성에 자리 잡은 온조에 합류했는데 그후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했다는 것이다.
미추홀은 ‘물의 고을’이라는 뜻이다.
문학산 중턱엔 옛부터 내려왔다는 '우물'이 있다.지금도 약수로 쓰인다
문학산 일대가 도읍지터로 추정된다. 정상에는 백제시대 석축산성
'문학산성' 이 있다.
문학산하면 10여년 전만해도 화산이 자주 오르던 산이다.
미추홀 이후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고구려 때의 매소홀현(買召忽縣) 혹은 미추홀
신라 때에는 소성(邵城)이라 고쳤다.
소성하면 막걸리 소성주를 떠울리게하고
소성주하면 인천을 대표하는 막걸리
대표 주자 이영구 사장이 그 중심에 서 있다.
미추홀 뒤에 경원군(慶源郡)이었다가 인천으로, 다시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가,다시 인주 (仁州),인주군 등 등으로
인천 남구의 명칭이 7월1일부터 ‘미추홀구’로 바뀌었다.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했다고 한다.
남구가 애초 인천 남부지역 전체를 관할했지만 행정구 분할로
남동구와 연수구가 떨어져 나간 뒤엔
인천 중심부만 남아 이름과 맞지 않는 데다 지역 정체성을
찾아 볼 수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동서남북의 방위식 지방자치단체 이름(동구,서구,남구,북구,중구)을
고유명사로 바꾼 것은 남구가 전국 최초다.
인천 남부경찰서와 남부소방서도
각각 미추홀경찰서와 미추홀소방서로 바뀌었다.
인천 시민들의 역사문화 정체성이 깨어나고 있음인가 싶기도하다.
청원이 아버지 모시며 딸 하나 아들 둘 코흘리게 부터 키워
시집 장가 보내며 30년 동안 이웃과 정답게 살던 제2의 고향 남구
숭의동 집,처음 집들이 할 때 동창들이 찾아와 잔치를 벌였던
그 시절이 참 좋았다.한창 시절이었으니까
정원 한 켠 장독대 옆 석류나무 열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小暑
잠시 고향집 생각에 젖어 본다.
제2의 고향 남구, 그 명칭은 역사 속으로.....한 편으론 섭하다.
* 한국 지명 사전(이민우 지음) 참조
첫댓글 소성은 소성소주에서 찾지 마시고 우리 교가의 한구절" 소성에 정기 감돌고~~" 에서 찾는 것이 어떨가요.
미추홀의 변천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사시든 마을 이름이 바뀌면서 오는 허전함을 나도 같이 느껴봅니다.
고등학교 다녔을때 쯤인가 미추홀이란 잡지를 본 기억이 납니다.
친구들과 집들이 같이한 정다운 추억이 생각난다 하시니 저도 반디불같은 추억이 그때를 그립게 합니다.
그제 전국 노래자랑을보니 인천 미추홀 구 라고떠서 좀낯서런는데 옛 남구군요
지금은 막걸리하면 소성주를 즐겨마시지만 실은 우리고교시절 즐겨부르던 교가 가사에
소성에 정기감돌고 바다에... 소성이란 뜻도모르고 불러대던 생각이나고 그뜻을 안지
얼마안된다 참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