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주일설교
본문: 히 11:1-6
제목: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히11:1)
바라는 것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믿음으로 그것이 곧 이루어질 것으로 실상으로 붙드는 것이요
보이지 않지만 믿음은 그것을 보이는 증거로 붙드는 것이다.
주님 주신 소망과 약속을 실상으로 증거로 붙드는 것이 믿음이다.
소망은 확신으로 붙들어야 하고 자랑스러운 것으로 붙들어야 한다.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붙잡으면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소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성경에 기록되어 약속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의 영원한 소망에 비추어서 살아 생전에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약속하고 있다.
믿는 자에게 소망이 없다면 그것은 그 영혼에 닻이 없어 수시로 요동하는 것과 같다.
환경에 따라 요동하고 욕망에 따라 요동하게 된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시요, 그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그 하나님이 복음으로 약속하신 것에 영원한 소망을 두어야 한다.
소망은 이루어지기까지 인내가 필수이다.
그래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하신다.
소망의 인내에,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함께 한다.
믿음은 확신과 자랑으로 역사해야 하고, 사랑은 수고와 희생이 따라야 한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소망의 가나안은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고난과 연단을 거쳐 요단을 건널 때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으로 홍해를 건넜지만,
그것이 구원과 소망을 보장하지 않았다.
광야에서 고난을 인내하며 성품의 연단을 이루어야 했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지만,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힘써 자기 의만, 자기 소견에 옳은 것만을 추구하다가 광야에서 멸망하고 말았다.
요단을 은혜로 건넌 2세대와 그후의 세대는, 이스라엘 전 역사는,
고난의 인내와 연단에 순종하지 않다가 가나안에서 멸망을 당하였다.
홍해를 건너도, 애굽과 옛 사람은 여전히 속에서 살아 있고,
요단을 건너도, 애굽과 옛 사람은 여전히 속에서 살아서 그것을 버리지 않고 고집하였다.
믿음의 사람으로 고난의 인내와 연단 없이 소망을 이룬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는가?
애굽과 옛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 벗어버려야 한다.
다음 두 구절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실천에 옯겨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속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고 이스라엘과 같은 운명이 되고 만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2-2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모세는 공주의 아들이라는 특권을 버렸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2.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증거를 받는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진화론이 과학의 이름으로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믿음이 아니면, 받아 들일 수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는 것은 믿음만이 아멘 할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경이 다 믿어질 때에라야 진화론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흙으로 지으시고 영을 불어 넣으셨다는 것도 믿을 수 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원죄가 유전되고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믿음이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도 믿을 수 없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역사를 믿을 수 있다.
또한 믿음으로 만이 하나님의 증거를 받게 하고 얻게 한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
하나님이 그의 제사와 제물을 받으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가 가인에게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고 있다. 최초의 순교자이었다.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하나님의 증거를 받았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다.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다.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순종하여 갈 바를 아지 못하고 나아갔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였다.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었다.
이들은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
이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 예루살렘 성이다.
우리도 믿음으로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고 산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이 땅에서도 믿음으로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그 사명은 이 땅에서 이루어야 할 기업이요 소망이다.
이 땅에서 이룬 사명과 기업에 따라 영원한 천국에서 상을 받는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과 소망을 확신하고 자랑하며 끝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이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쌓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대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환자와 죄수들을,
마음과 뜻을 다하는 하나님 사랑으로,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교회부터가 아니라, 고아와 과부,나그네,환자,죄수들을 위한 복지시설부터 지어야 한다.)
초대교회와 같이 발도인 공동체와 같이 위그노 교회들과 같이
그들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대로 순종하여 살았고,
그 굳건한 믿음과 이웃 사랑의 실천에 사람들은 감동하였고 그 매력에 끌려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로 몰려 들었다.
사랑과 삶이 전도였고, 빛과 소금의 삶이 선교였다.
그들은 전도나 선교를 강권하거나 앞세운 적이 없었다.
그들은 순전한 말씀대로 살았고 그 삶과 변화된 성품이 교회를 성장하게 하였다.
우리도 어서 속히 초대교회의 믿음과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교리와 신조의 지성주의(율범주의) 무덤(늪)에서 나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3.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반드시 두 가지를 믿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역사하신다는 것,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 보이지 않지만 뜻과 섭리 가운데 공의와 정의로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신다.
그것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하나님의 복과 저주가 판가름 난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에게 반드시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이를 믿지 못하니까, 낙심하고 포기하고 배교하고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를 때, 상을 주시니까 인내를 온전히 이루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급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일하셔서 섭리 가운데 역사하신다.
인내가 발효하기까지 하나님은 기다려 열매를 맺게 하신다.
모세는 40년을 광야생활의 인내와 연단으로 기다려야 했다.
초대교회가 강조한 최고의 덕목인 인내는 그 정의가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인내는 ‘사건들을 통제하지 않고, 걱정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절대로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장사속이다.
걱정에 사로잡혀 낙심하고 포기하는 것,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는 것은 인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주시는 사건들을 내가 콘트롤할려고 하는 것 또한 인내가 없는 탓이다.
인내가 온전해지고 발효하기 시작할 때 열매는 맺어지고 주님의 상은 복으로 주어진다.
장사하는 집,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교회들의 잘못된 죄악들은
초대교회의 믿음과 실상에 비교될 때에라야 확연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애굽을 버린 적도 없고, 옛 사람을 버린 적도 없는 기독교 왕국의 역사는 종을 쳐야 한다.
성경도 사명은, 바울과 같이 지극히 큰 계시로, 모세와 같이 출애굽 사역으로,
다윗과 같이 왕권의 역사로 이루시게 할 사명이요 소망이다.
바울은 계시를 받은 지극히 커서 너무 자만하지 않도록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
성경도 사명은 지극히 큰 계시이며, 육체의 가시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해야 한다.
모세의 출애굽 사역은 유대교회 로마교회 개혁교회 현대교회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 애굽에서
출애굽하는 능력과 기적이 필요한 것이다.
다윗의 왕권은 예루살렘과 시온산의 성지를 다시 세우기 위한 것이다.
이 사명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로 믿자.
이 소망을 확신하며 자랑하며 흔들림 없이 끝까지 굳게 잡자.
초대교회와 발도인 역사를 보며 참 교회는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를 알고 실천하자.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로 주님이 증거하시고 상 주시는 자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