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무대는 경북 봉화군 청량산 자락이며 3년간에 걸쳐 촬영을 하여 경북 북부지방의 4계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영화의 등장인물과 주인공은 셋이며 그 외에는 주인공의 이웃들이 조연으로 등장하여 분위기를 돋운다. 70중후반의 노부부와 나이가 마흔이 넘은 수소 한 마리가 그 셋이다. 이 영화는 수소를 중심에 두고 노부부가 양옆에 포진하여 펼치는 삼각관계이면서 삼위일체 구조의 영화이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열여덟 살 때 결혼하여 평생을 청량산 자락에서 농사를 지으며 9남매를 성가시켰다. 그 세월 중 40년을 우리의 주인공 수소와 함께 하였다. 봄이면 수소가 논밭을 갈아 씨 뿌리고 가을이면 수소가 수레를 끌어 수확을 하였다. 그리고 수소가 만들어내는 퇴비로 전답을 비옥하게 가꾸었다. 할아버지는 수소를 위해 논밭에 농약을 뿌리지 아니하고 그 볏짚으로 쇠죽을 끓여 정성을 다해 돌봐 주었다. 할아버지가 읍내에 외출했다가 거나하게 술이라도 한잔 하면 수소는 저 혼자서 산촌 집까지 주인을 태우고 오기도 했다. 할아버지에게 수소는 든든한 일꾼이자 친구같은 존재였다. 힘든 일을 할 때는 막걸리도 나누어 마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세월은 청량산 넘어가는 구름처럼 빠르게 흘러 할아버지는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고 수소도 서른살을 넘기게 되니 둘 다 기력이 달리고 걷기조차 힘들어 지게 되었다. 이때에 대단한 입심으로 이 영화의 내래이션을 주도하는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몰아 부친다.
우리도 농약 뿌리고 소를 팔자는 것이었다. 성화에 못 이겨 마침내 수소를 팔고자 우시장에 갔던 할아버지는 자신 생각에 터무니없는 가격을 부르자 다시 수레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수소를 팔러가는 아침 할머니가 여물 많이 먹으라며 작별인사를 하자 수소는 살짝 눈물을 보인다. 작별이 아쉬웠던 모양이다.
그 후 할아버지는 새끼 밴 암소 한 마리를 사서 송아지를 한 마리 낳게되는데 이 암송아지는 젖 먹을 때만 어미에게 가고 어미보다 수소를 더 따르고 젊고 뿔이 잘 선 암소는 할머니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힘없는 수소를 뿔로 받으며 박대를 한다. 힘이 빠져 걷기도 힘든 수소는 점점 설 땅이 없어지다 어느 날 마침내 일어서지도 먹지도 못하고 주저앉아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코뚜레와 워낭(방울)을 낫으로 잘라내며 좋은 곳으로 가라고 하는데 순간 소의 눈이 커지며 주인을 응시한다. 행복했다는 신호였으리라. 수소는 뒷산에 고이 묻혔고 그 자리에 봄날엔 민들레가 노랗게 피었다.
이상이 개략적인 영화의 줄거리인데 워낭을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매우 다의적이다. 그 소리가 있으면 生이요 없으면 死이니 생사의 표시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죽음의 순간 워낭을 떼버린 것이다. 코뚜레나 워낭이나 속박, 구속의 상징이다. 아무리 힘센 소도 코뚜레의 고통을 이길 수 없고 워낭 소리는 주인의 지배권 아래서 탈출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탈출을 포기한 수소는 워낭으로 인사를 하고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배가 고파도 흔들고 반가워도 성이 나도 워낭으로 감정과 의사를 표시한다. 주인도 외출에서 돌아올 때 멀리서 워낭소리만 들어도 안심하고 반가운 것이다. 또한 분실 시 식별번호 같은 역할 하기에 제대로 된 소도둑이라면 바로 원앙을 떼거나 교체를 해야 다소 할 말이 있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들에게 워낭이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우리의 목에도 보이지는 않지만 워낭 하나씩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는 자식이기도 사업이기도 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내 존재를 알려주고 숙명이기도 하면서 벗어버리고 훨훨 날아가 버리고 싶은 것 말이다. 그래도 워낭이 딸랑딸랑 울려야 한다. 그래서 수소처럼 노란 민들레꽃이라도 피워야지.
영화 내내 어린 시절 고향모습과 농부들이 오버랩 되어 ‘60년대의 공간으로 타임머신을 탄 기분이었다. 황소야 좋은데 가거라, 나중에는 사람으로 오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