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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로스 톨도스의 어린 소녀 에바 두아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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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후안 도밍고 페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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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트레이디가 된 영부인. 에바 페론 - 그녀는 부자들에게는 야멸차게 대했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언제나 넉넉한 이웃이었다. 여성권익 향상을 도모했으며 동시에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에 여성들로 하여금 복종하도록 강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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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는 국민들에게 놀라운 인기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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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페론은 여성들에게 남성의 권위에 순종할 것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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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의 죽음은 전 아르헨티나 국민들의 깊은 애도 속에서 한달간 국장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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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타와 포퓰리즘(popula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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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지닌 강점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달아야했다. 그녀는 자신의 미모가 가장 강한 무기임을 알았다. 그녀는 삼류 배우나마 배역을 따기 위해 남자들의 품을 전전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초원에서 방목되는 육류와 곡물 수출에 힘입어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1869년 이후 아르헨티나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6.9%의 높은 수준이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전체 도시들 가운데 뉴욕 다음의 대도시를 자랑하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만 하더라도 아르헨티나의 국민 1인당 GNP는 스페인·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보다 높았고, 독일이나 베네룩스 3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엄마찾아 삼만리>에서 볼 수 있듯이 유럽 대륙 그 중에서도 특히 이탈리아에서 많은 이민이 유입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유럽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은 그냥 가족만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문화와 사상까지도 함께 신대륙 아르헨티나에 가지고 들어왔는데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등이 그것이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아르헨티나에서는 노동운동과 그동안 대지주들에 의해 억눌려 있던 민중들의 요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페론주의의 등장과 아르헨티나
1916년 집권한 급진 시민당의 이폴리토 이리고옌 대통령은 최저 임금제 실시·최대 노동시간 제한 등 소외 계층을 위한 복지제도의 확충을 위해 노력했고, 이런 정부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좀 더 많은 조건을 들이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대륙의 전쟁과 미국의 참전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는 친독(親獨)적 중립을 지켰다. 후안 페론은 1930년대 이탈리아 주재 아르헨티나 대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하면서 당시 유럽에서 발흥하고 있던 파시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1943년 6월4일 「통일장교단」이라고 자칭하는 민족주의적 성향의 군부내 소장파 장교들과 함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후안 페론은 군사 정권 아래에서 대통령이 수 차례 교체되는 가운데 국방부 장관·노동부 장관·부통령 겸 노동복지 장관 등을 거치면서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자로 성장했다. 정부의 여러 직책을 역임하면서 그는 국가사회주의(Staatssozialismus)의 한 갈래(독일의 나치당도 같은 맥락이다)라고 할 수 있는 페론주의의 기초를 닦았다. 에바가 후안 페론을 만난 것은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 25세 때 그녀보다 나이가 2배 가량 많았던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한 동안 밀히를 즐기다가 곧 두 사람만의 은밀한 방을 구해 장기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에바는 힐러리가 빌 클린턴에게서 미래의 대통령 싹수를 발견한 것처럼 후안 페론에게서 미래의 아르헨티나 대통령을 보았다. 그리고 힐러리가 그랬듯이 자신의 연인이 출세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아르헨티나 군사정부의 친독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미국은 전쟁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의 반정부 진영을 고무하면서 민정 이양을 요구하도록 했다. 그 결과 파렐 발카르세 정권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강경파였던 후안 페론을 구금한다. 후안 페론이 연금당하자 타고난 미모와 달변을 가진 에바 페론을 비롯한 페론의 추종 세력들은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페론 석방운동을 벌였고, 밤낮없이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사주하여 마침내 노조 총파업을 유도해내면서 후안 페론을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준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서준 정부(情婦) 에바에게 새삼 사랑과 신뢰를 느낀 후안 페론은 죽는 날까지 함께 하기를 맹세하고 결혼한다.
페론은 1946년 2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54%의 지지를 얻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페론은 기존의 지지 세력이던 군부·교회는 물론 노동조합의 지지까지 확보하고, 노조 지도자 등 각 부문별 이익 집단의 대표들을 각료로 기용하는 등 집권 초기 강력한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페론은 집권 후 페론주의를 내세우며 외국자본의 추방, 기간 산업의 국유화 등을 추진하며 자립노선을 추구했다. 또한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동 입법 추진, 노동자 생활 수준 향상,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이었다. 그는 취임 후 5개년 계획을 수립, 공공사업·교육 개혁·사회 개혁 등을 추진했다.
에바 페론·페론주의의 영광과 실패
페론의 정책은 대외 자립·공업 발전·사회 정의 추구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독립 이후 아르헨티나의 주요 산업이었던 농·축산업에 의존하던 아르헨티나 경제의 체질을 개선하고, 공업화를 추진하여 진정한 경제 자립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페론은 외국인 소유의 철도·전화 회사들을 국유화하고, 1947년 7월에는「경제독립」을 선언하면서 모든 외채를 청산했다. 페론이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는 노동입법을 추진한 것도 그 이면에는 노동자 계급의 소득 향상을 통해 내수를 진작시켜 아직 미약한 수준의 국내 공업 발전을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페론이 집권 초기에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주요한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식량 수요 증가로 농축산물의 수출이 늘어나면서 벌어들인 외화 덕분이었다. 이런 호황 속에서 추진된 개혁 입법들은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의 입김 속에서 추진된 일들이었고, 노동자와 여성, 빈민들은 그녀를 성녀로 떠받들기 시작했다. 이 아름답고 총명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우호적인 그녀에게 열광했고 적극적인 지지와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러나 페론의 공업화 정책은 레닌이 러시아에서 추진했던 중공업 정책과 달리 수입 대체 전략에 기초한 경공업·소비재 위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본재 수입의 증가로 외환 사정을 다시 악화시키고 말았다.
이런 위기 속에서 페론주의와 아르헨티나는 점차 독재의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1948년에 이르자 페론은 자신의 정치 이념을 「정의주의(Justicialismo)」라고 포장하면서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하고 임기를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반대 세력에게는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1951년에는 「정의주의 학회」라는 것을 만들어 정권 홍보에 나서도록 하기도 했다. 에바 역시 자신에게 쏟아지는 대중의 사랑을 이용하여 남편과 자신을 포장해나갔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을 즉흥적으로 선사하기도 했다. 에비타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어서 학교, 병원, 고아원을 단기간에 전국에 건립했고, 그녀의 이름을 딴 병원 기차가 의료장비를 싣고 전국을 누비면서 무료 진료를 실시했다. 또한 에비타 재단은 지진 등 재해를 당한 나라에 거금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나라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일본도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적 정책 덕분에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고 이런 위세를 등에 엎고, 심지어는 초등학교에서 매주 페론 부부를 찬양하는 글짓기 숙제를 하도록 했으며, 스페인어 수업 시간에는 에바의 자서전을 교재로 채택하도록 하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에서 퍼스트 퍼슨을 꿈꾼 에바 페론
에바 페론은 단순히 퍼스트레이디로서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데 상징적 존재에 그치지 않고, 정계의 핵심 요직에 올라 명실상부한 권력 2인자에 오르고자 애썼다. 1951년 대선에서 유권자의 67%의 지지를 얻어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재선되자 노동자총연맹 등의 단체가 에바 페론을 부통령 후보로 옹립하려다 군부와 마찰을 빚었다. 부통령 지위에 오르고자 했으나 군부의 반대로 실패하자 대신에 정부의 주요 요직을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신의 정적이 되었거나 그럴만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비밀리에 체포·고문하여 심지어는 감쪽같이 사라지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독재의 칼날을 휘두를수록 이들 부부는 점점 더 자신들을 조여오는 반항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군부를 강화함으로써 권좌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군부도 이들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그 첫 번째 징후는 1951년 9월 군부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드러났다.
전후 호조를 보이던 농축산물 수출도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자국의 농축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미·영 등이 아르헨티나산 농축산물의 수입을 제한하고, 아직 선진국들과 경쟁할 만한 단계에 오르지 못한 아르헨티나의 공업 수준과 경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에서 중공업 중심 전환 과정의 혼선 등이 가중돠면서 자본재 수입이 증가되면서 외환 사정은 더욱더 나빠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르헨티나를 어렵게 만든 것은 과거 식민지 시절부터 뿌리깊었던 지배 계급의 유럽 문화 선호 경향(라틴 아메리카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도 이들의 유럽 문화 선호 경향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심지어 아르헨티나의 뒷골목에서 건달들이 추던 탱고는 오히려 본고장이랄 수 있는 아르헨티나에서는 오랫동안 상류층에 의해 배척되던 음악(춤)이었으나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키자 역수입되어 지금은 아르헨티나 상류층이 즐기는 음악이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탱고 음악이 원래 태동 당시부터 지니고 있던 상류 계급에 대한 풍자와 조롱 등의 반문화적인 요소들은 철저히 배제되고 거세되었다.)과 함께 골수까지 배인 사치와 무책임, 정치인들의 무능과 부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아르헨티나 국민과 함께 고통을 나누려 하지 않았고, 페론 정권의 시혜적인 사회복지 정책은 개혁적이어야 할 노동자들을 당장의 달콤한 사탕발림에 마비되도록 했고, 그들을 중독시켰다.
혹자는 에바 페론의 진보적 여성 정책들 -여성 노동자의 임금 인상 및 여성 시민적 지위 개선, 친권과 혼인에서의 남녀 평등의 헌법 보장, 이혼의 권리를 명시한 가족법 추진, 여성의 공무담임권 획득 등 - 을 통해 아르헨티나의 여성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그녀가 일조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바 페론이 반드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 그녀는 여성 운동 확장과 여권 신장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면서도, 결국 그렇게 해서 달성된 결과물들을 자신의 남편인 후안 페론에의 충성으로 귀결시켰다. 그녀는 틈만 나면 여성 당원들에게 이렇게 강론했다.
"여러분, 남자는 지성을, 우리 여성은 감성을 투쟁에 바쳐야 합니다. 지성과 감성을 모두 합하여 보다 정의롭고 보다 행복한 최상의 조국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페론 장군을 우리는 적극 지지해야 합니다. 우리 여성은 남녀 모두 뭉쳐야 하기 때문에 남자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그녀의 이런 여성운동은 결국 가부장적 권위에 복종하는 여성상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고, 자기 자신이 그런 전형적인 모델이고자 했다. 국가사회주의 하에서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한 운동은 종종 이런 모순을 빚어내곤 한다.(나치 정권 하의 독일에서 벌어진 일들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저물어가는 에비타의 영광, 꺼지지 않는 신화
일명,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바 페론을 표현하는 말 중에서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라는 말보다 그녀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를 아르헨티나의 독재에 봉사하였고, 노동자·빈민계급을 마취시킨 악녀라고 비난하기에는 실제로 그녀가 행한 수없이 많은 초인적인 봉사와 헌신들이 모두 거짓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녀는 가진 자에게는 더할 수 없이 표독한 영부인이었지만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자상한 나라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들이 그녀의 이런 모순된 삶의 동력을 그녀의 출생과 살아온 경로가 순탄치 않았고 그 와중에서 그녀 역시 가진 자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가슴에 아로새긴 탓이라고 보고 있다. 그녀는 다른 대통령의 영부인들이 그러했듯이 단순히 의전행사의 들러리 역할에 멈추지 않았고, 후안 페론을 대통령의 직위에 오르게 했으며 그를 여러 차례의 정치적 위기에서 구해냈고, 그의 정치 철학의 상당수를 입안해낸 장본인이었다.
에바 페론은 국가의 퍼스트레이디로서 수많은 일들을 초인적으로 처리해갔다. 수없이 많은 모동자, 빈민, 여성들을 만났고,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었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동시에 그들을 조직화하여 남편의 정치적 동지가 되도록 했다. 그러나 하늘은 에바 페론의 영광을 시기했을까, 계속되는 아르헨티나 경제 상황의 악화는 더이상 소외계층의 근본 모순은 방치한 채 임시방편의 사회복지정책으로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그리고 이런 악조건 하에서 고군분투하던 에바 페론은 1952년 척수백혈병과 자궁암으로 쓰러지고 만다. 이때 그녀의 나이 34세였고, 후안 페론을 만난지 10년만의 일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큰 국장으로 한달 간 성대히 치러졌다.
「페론주의」의 「상징」이었던 에바가 사망하자 후안 페론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되었다. 후안 페로은 어려워진 국내 정세를 외교의 강화 및 외자 유치를 통해 풀려고 했다. 그는 1952년 5월 「라틴아메리카 노조기구(ATLAS)」를 결성하며 페론주의를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수출하고자 했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가톨릭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사실 라틴 아메리카에 해방신학만 존재한다고 믿으면 큰 착각이기는 하다. 라틴 아메리카는 또한 보수신학의 본고장이기도 하다.) 페론은 가톨릭교단이 노동문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부에 비판적이던 성직자들을 체포했다. 그러나 에비타마저 사라진 와중에 후안 페론의 이런 조치들은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정권 장악 이후 줄곧 추진하던 경제 자립 노선을 포기하고, 1955년 광공업 분야에 대한 적극적인 외자 유치 전략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런 급작스러운 외자 유치 전략은 외자가 도입되면 자신들의 입지가 불리해질 것을 염려한 노동자들의 불안을 자극해 폭동이 벌어진다. 해군 항공기가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등 믿었던 군부마저 페론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그리고 1955년 9월 로나르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하여 스페인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쿠데타 이후에도 사그라들 줄 모르는 에비타의 신화를 두려워 한 군부는 그녀의 시신을 훔쳐 멀리 이탈리아로 옮겼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페론주의자, 노동자들과 여성들이 군부에 압력을 넣어 그녀의 시신을 당시 마드리드에 망명 중이던 후안 페론에게 넘기도록 했다.
무책임한 지배 계급과 군부 독재에 떠밀려 표류하는 아르헨티나
후안 페론은 비록 실각했지만, 그것으로 아르헨티나 정치 상황이 안정을 되찾게 된 것은 아니었다. 페론주의의 실체는 결국 "실질적으로 지배 계급이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한 채 국부를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권익을 옹호하는 듯한 정책"이었다. 본질적으로는 점차 고조되는 노동자들의 의식을 잠시 동안의 사탕발림으로 피해보자는 것이었다. 페론이 실각한 뒤로도 아르헨티나의 정치인들은 페론 시대의 손쉬운 인기영합정책을 버리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페론과 에비타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다. 아르헨티나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기는 했으나 그들 자신도 앞으로의 아르헨티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나가야 할 지에 대한 비전은 갖지 못했다.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 노동자와 빈민 등 소외 계층은 '성녀 에비타'에 대한 신화를 덧칠해갔고, 아르헨티나의 정치인들은 에비타를 끊임없이 이용하려 들면서도 동시에 그녀를 부담스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 잇따라 들어선 군부 정권들은 이웃한 경쟁국인 브라질의 군사정권이 개발 독재를 통한 경제적 성공을 이룩하자 자신들도 그러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브라질의 성공이 잠시였듯이 아르헨티나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비전도, 산업기반도, 노동자들을 흡입할 수 있는 매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남미에도 혁명의 기운이 북돋아지기 시작하며 쿠바 혁명에 고무된 많은 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좌우익간의 격렬한 소요가 거듭된다. 베트남전의 깊은 수렁에 빠진 미국 역시 이런 남미의 분위기에 위기 의식을 느꼈고, 결국 1972년 11월 78세의 페론이 50여만 명의 지지자들에게 열렬한 환호 속에서 귀국하게 된다. 이듬해 9월 대통령 선거에서 후안 페론은 62%의 높은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고, 에비타 사후에 재혼한 그의 부인 이사벨 페론은 부통령이 되었다. |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라틴아메리카사(하권)/ 강석영 지음/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9년판 -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개별적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대한교과서의 책답게 낯익은 활자체와 교과서적인 편집, 저술이 펼쳐진다. 라틴아메리카의 통사를 살피는데는 괜찮은 책이다.
에바 페론 연구 재단 - 에바 페론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하는 에바 페론 연구 재단 사이트이다. 많은 전기적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영문)
에바 페론 페이지 - 에바 페론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만나볼 수 있는 사이트이다.(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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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창녀이자 천한 성녀로 불리기도 했던 에비타. 그러나 그녀에게 허락된 지상의 시간들은 그리 길지 않은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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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페론의 복귀는 일시적인 평온은 가져왔으나 그 역시 아르헨티나의 오랜 부패와 왜곡된 경제 구조를 개혁할 수 있는 역량은 가지지 못했다. 그의 집권기간 중에도 소요와 폭동은 계속되었고, 결국 1974년 7월1일 페론은 사망하고 만다. 부통령이었던 그의 아내 이사벨 페론은 결국 세계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란 명예로운 칭호를 얻기는 했으나 애초에 그녀에게 어떤 정지적 식견이 있으리 만무했다. 이사벨 페론은 후안 페론의 전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의 시신을 대통령궁에 옮겨 놓으며 자신이 에바 페론의 계승자임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고자 했으나 그녀는 에바가 아니었다. 결국 1976년 라파엘 비델라 장군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이사벨 페론 정권은 21개월 만에 붕괴하고 만다. 다시 한 번 페론 정권을 붕괴시킨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당시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 불어닥친 레드 헌트(Red Hunt)에 앞장서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투옥하고 학살하여 아르헨티나 민중을 침묵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군사정권 기간 중 살해되었거나 실종된 사람의 수는 최소 1만명을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민을 침묵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나 군사 정권이 사회 체제를 개혁하거나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지는 못했고, 이런 내치에서의 어려움을 외부의 성공으로 돌리고자 했던 아르헨티나 군부는 경제적 위기에 빠진 영국 정부와 대처 수상이 포클랜드를 수비할 능력이 없다고 오판한 나머지 1982년 포클랜드를 침공한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의 암묵적 지원을 등에 엎고 전쟁에 나서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리한다. 패전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은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민정 이양에 나선다. 1989년 대통령 선거에서 개혁파 페론주의자를 자처하고 나서 당선된 사울 메넴 대통령은 신자유주의를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양 내세우며 외채 탕감을 위해 아르헨티나의 수많은 국영 기업들을 해외 자본에 팔아치운다. 그러나 메넴이 팔아치운 아르헨티나 국영기업들을 통해 벌어들인 외화는 아르헨티나의 국고를 채우지 못했고, 정치인들의 개인금고로 들어가고 말았다. 아르헨티나 대다수 국민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를 헤매고 있는 동안 아르헨티나의 특권 계층은 해외 금고로 빼돌린 자금을 이용하여 별장을 치장하고 해외여행을 통해 사치품을 사들였다. 이 모든 원인이 에바 페론과 페론주의에 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에비타 에바 페론의 아름다운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아르헨티나는 새로운 개혁에 나설 수 있는 시간을 잃어 버렸고, 뒤이어 들어선 군사 정권들은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엄청난 유혈을 강요하여 개혁의 동력이 될 비판적 세력들을 궤멸시켜 버렸다.
이사벨 페론 정권이 붕괴한 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에바 페론의 시신을 레콜레타 공동묘지의 가족 묘역으로 옮겼다. 에바 페론이 죽은 뒤 24년만에 찾은 평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