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____김익회
봄의
변신
김익회
희희희喜喜喜,
내 이름은
봄이고 나의 모태는 자연의 섭리입니다. 동토凍土에 머물다가 혜풍에 쏘여 태어났습니다. 얼어붙은 산야는 새 생명의 물결로 가득하고 벌 나비가 넘실대는 동정童貞입니다.
샛노란 산수유, 이름 감춘 꽃들과 개나리 진달래가 속살을 내밀고 얼굴을 붉힙니다.
나는
희망이고 시작의 전령입니다. 겨우내 잠든 넋을 흔들고 약동의 기운을 배달합니다. 회색 대지에 연두색 물감을 풀어놓고 흐드러진 꽃들이 속살거립니다. 사람들은
나를 계절의 여왕이라고 칭송하며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을 내 품에 맡겼습니다. 시인들은 윤색된 시구詩句로 나를 예찬합니다.
T.S 엘리어트는 “4월은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 피우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며
나를 잔인하다고 했습니다. ‘잔인’은 봄을 시샘하고 연모하는 미문美文이 아닐까요.
나는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빌미로 여기餘技를 즐기고 나는 하얀 일기장에 푸른 꿈을 키워갑니다.
내 나이 3개월이 되든 어느 날, 내 신체에 이상이 생깁니다. 야들야들한 연둣잎이 훈풍에 쏘여 억새지고 꽃자리에 열매가 열립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소낙비로 변하고 부드러운 햇살은 땡볕으로 변해 이글거립니다. 춘색을 즐기던 사람들은 그늘을
찾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낯선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청년으로 성장합니다.
여기가
어디냐고 조물주에게 물었습니다. “하하하夏夏夏, 네 이름은
여름이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다. 너는 화려한 꿈속에서
상춘객을 맞는 봄처녀로만 살 수 없단다. 열매를 맺어 종족도 보존하고 땀 흘려 만물을 성장시켜야 자연의
질서가 유지된다.”고 일러줍니다. 나는 영원한 봄이고 싶지만
자연의 섭리를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농작물에 강렬한 햇볕을 쪼이며 여름역할을 열심히 해냈습니다. 땀의 위력을 처음 느꼈습니다. 여름은 녹음방초綠陰芳草, 불타는 정열이고 야망입니다. 이렇게 3개월을 여름 영토에서 생활하던 어느 날입니다.
호호호好好好,
미소를
지으며 금풍을 타고 가을 나라에 왔습니다. 염열炎熱이 내리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고향에 온 것처럼 가슴이
설렙니다. 청산은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물들고 오곡백과는 황금물결로 출렁입니다. 길섶엔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고샅길에 들국화가 숨어서 핍니다. 귀뚜라미
청승소리에 날밤 새우고 가을은 자꾸만 깊어갑니다. 그리운 이에게 엽서라도 한 장 띄우고 싶고 시집 한
권 들고 정처 없이 방랑하면서 여수旅愁에 젖고 싶습니다.
가을은
공허까지 품을 줄 아는 철학을 지녔습니다. 나는 가을에서 밀레의 만종을 만나고 감사와 겸손을 배웁니다. 한 때를 풍미하던 화려한 단풍은 마음을 비우고 시를 토하며 조락凋落합니다. 가을은
풍요와 사색을 안고 바통을 넘깁니다. 세월이 유수라 했던가요. 여유와
낭만을 만나 3개월여 단꿈을 꾸던 어느 날입니다.
허허허虛虛虛,
무채색
미소를 띠고 삭풍에 휩싸여 겨울나라에 왔습니다. 나는 온기를 빼앗기고 속옷까지 벗겨져 전라全裸가 되었습니다. 발을 동동동冬冬冬 구르며 얼어죽을까 봐 겁이 났지만 얼마 후 냉정을 되찾았습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요. 내 사랑하는 피붙이마저 다 보내고 분주한
삶에서 풀려난 무욕대안無慾大安의 노년이 되었습니다. 삭막한 한파 속에서 벗고도 아름다울 수 있는 비움의
지혜를 터득했습니다.
하얀
솜이불이 나의 언 몸을 덮어줍니다. 겨울은 편안하고 따뜻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 이치입니다. 안으로
숨쉬고 침묵으로 웅변하는 새로운 씨앗을 안고 나는 겨울잠에 들어갑니다. 동면은 잠자는 것이 아닙니다. 인고를 안고 새로운 생生을 틔우기 위한 조용한 투쟁입니다. 이렇게
시작도 끝도 없는 사계가 무변無邊의 세월과 동행을 반복합니다.
어느
날, 나는 언 땅을 비집고 새롭게 봄으로 태어날 것입니다. 내
육신이 계절 따라 변신해도 나의 본분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봄은 축복이고 만물의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김익회 / 『현대수필』로 등단 했으며 수필집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섬에서 쓴 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