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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17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제5주일)
그리스도 – 새로운 의식
렘31:31~34; 히5:5~10; 요12:20~33
앤소니 드 멜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브라질 해안 먼 곳에서 땟목 위에 몸을 의지한 채 목마름으로 죽어가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갈증으로 목이 타들어 갔지만, 자기들이 그 위에서 표류하고 있던 그 물이 바닷물이 아니라 마실 수 있는 담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강쪽에서부터 강물이 워낙 거세게 떠밀려 와서 바다에서도 2마일에나 걸쳐 담수가 흐르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이 떠 있던 바로 그 물은 먹을 수 있는 담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드 멜로는 말합니다. “삶은 잔치입니다. 그런데 비극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행복과 사랑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대부분 전혀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최면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깨어나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새 마음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사물을 새로이 바라보십시오! 사실 ‘그 나라는 여기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드 멜로의 얘기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본령입니다. 오늘 이 드 멜로의 말을 예수님 버전으로 바꾸어 보면,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갈릴리에서 선포하신 첫 일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란 본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 회개한 사람들, 새 마음으로 갈아입어 사물을 새로이 바라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의식”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에는 <브릿 하다샤> 즉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가 오면,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카랏티 브릿 하다샤>.”라고 합니다. 그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오던 때에 세운 언약과는 다른 언약입니다. 모세가 받은, 돌판에 새겼던 그 언약이 아닙니다. 이제 율법은 돌판에 새겨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슴 속에 넣어지고(<브 키르밤>즉, “가장 깊은 중심에”), 마음 판에 새겨질 것입니다(<알 립밤>즉, “심장에”). 그래서 이제 이웃이나 동포끼리 “하나님을 알아라” 하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작은 자부터 큰 자까지 모두, 하나님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신탁이 내립니다.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허물을 용서받고 그 죄가 다시는 기억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깨어난 사람, 과거가 좌지우지 할 수 없는 사람, 새 마음을 입어 사물을 새로이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전에 살고 행하던 옛 언약, “옛 것”에서 벗어나 새 언약, “새로운 의식”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말씀은 예레미야서31장에 있는데요, 예레미야서30~31장은 하나의 독립된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을 예레미야의 “작은 위로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본디 예레미야는 유다가 바빌론에게 멸망하기 직전,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책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의 전체 내용은 아주 급박한 파멸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끓는 솥이 북쪽에서부터 넘쳐흐르고”(렘1:13), “모든 땅은 황무지가 되고, 모든 성읍은 폐허가 되어”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고(렘4:7) 예고됩니다.
이렇게 임박한 심판 예언의 책인 예레미야서 가운데서 예레미야서30~31장에는 예레미야서 전체 내용과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신탁이 선포됩니다.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예언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때가 오면 포로로 잡혀갔던 백성(나의 백성<암미>)이 다시 그들의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이제 다시 너희는 나의 백성<암미>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엘로헤켐)이 될 것이라는 소식입니다. 이 신탁은 심판의 시간이 지나면 포로생활이 끝나게 될 것이라는, 자동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변화, 즉 크로노스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 그 아래 흐르는 이 신탁의 핵심은 이제 때가 차서, 즉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 새로운 의식이 나타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새로운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주님을 알아라”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이 <야다>는 지식적인, 정신적인 앎이 아닙니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어 주체가 객체를 파악하여 이해하는 앎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주체가 되어 하나님을 나의 머리로 파악하는 그런 앎이 아닙니다. 오히려 <야다>는 부부가 잠자리를 하여 서로 알게 되듯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앎입니다. 이때의 의식은 <새로운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본디 바탕을 알아차리는 의식이며, 그 본디 바탕과 분리될 수 없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이 가장 너그럽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져 있으며 사랑으로 따듯하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이 상태를 얼핏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의식입니다. 오늘 예레미야서 본문에서는 사람들이 누구나 이런 “새로운 의식” 가운데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주님을 알아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어쩌다 경험하는 한 순간의 상태로 경험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의 변하지 않는 의식 단계로 경험하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작은 위로의 책”에 이어지고 있는 예레미야서33장 14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나 주의 말이다. 보아라,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유다 가문에 약속한 그 복된 약속을 이루어 줄 그 날이 오고 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이 나오지요. “그때 그 시각이 되면, 한 의로운 가지를 다윗에게서 돋아나게 할 것이니, 그가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이러면 “다윗에게서 돋아나는 의로운 가지”가 누군지 알겠지요? 예, 나중에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지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의식”을 가진 새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란 바로 “새로운 의식”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거꾸로, 새로운 의식은 바로 “그리스도 의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아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머리로 생각으로 경험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하나 되어 아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안다는 것은 하나님만 따로 떼어 아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따로 떼어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일치적인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교회에, 신앙에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일상, 일거수일투족에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과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삶이 분리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어디에나 하나님은 계신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현존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 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
예수님은 이런 새로운 의식을 가지신 분이었고, 이런 새로운 의식, 그리스도 의식을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얼마만큼 그리스도의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란 이런 새로운 의식에 초대된 사람이고, 이 의식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그리스도 의식은 우리가 다다라야 할 목표가 아니라, 누려야 할 경험이 됩니다. 우리는 이미 그 의식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 위에 표류하고 있었지만 이미 담수 위에 있던 사람들처럼, 그저 그 물을 마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갈증으로,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알려주시려 오셨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오늘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초입에 일어난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때 각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아 순례의 길에 올라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모여 들었는데, 거기엔 이방인이었던 그리스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 유월절 명절 기간에 고난을 받고 십자가형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 사람 몇이 예수님을 뵙고 싶다고 제자 빌립에게 말했고, 이렇게 소개된 그리스 사람에게 예수님은 뜬금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 그런 다음, 우리가 다 아는, 아주 유명한 말씀을 하시지요,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떤 생각이 드나요? 이 말씀은, 종종 “너 하나 죽으면, 너 하나 희생하면 모든 일이 조용해지고 잘 될 거야~!” 라는, 희생과 이타심을 종용하는 문구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비장하게, “그래 나 하나 죽지 뭐~!” 라는 자기학대적인 상황에서 이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매우 억울한 희생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먼저 직시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깊은 수준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순간 보고 있는 우리는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순간 자신에게서 이 보잘 것 없음을 보면서 마음 쓰고 아파하며 절망합니다. 우리는 늘 나 자신이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상처를 입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비난하기도 하고, 이런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깊이 원해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보잘 것 없음을 이리저리 감추고 괜찮은 나로 포장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 초라하게 달라붙어 있는 보잘 것 없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하기는커녕, 떼어버리려고 하고, 미워하고, 부끄러워합니다.
깊은 수준에서 자기 자신에게 존중감을 갖고 자신의 가치를 보는 사람도 가끔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사실, 자기를 용서한 사람, 자기의 보잘 것 없음을 받아들인 사람, 자기의 그림자를 수용한 사람이지, 완벽하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괜찮다고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수준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너 자신의 그 보잘 것 없음을 진정한 너 자신인 줄 알고 쩔쩔매며 전전긍긍하며 살지 말고, 그 보잘 것 없고, 연약하고, 한계 많은 너를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라는 땅에, 밭에 묻으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면 “본래의 너 자신”을 보게 되고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새로운 의식, 그리스도의 의식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로만 드러나게 되는 의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첫 번째 “자기 목숨”이란 그 “보잘 것 없는 자기”를 진짜 자기로 아는 목숨인데, 이 자기를 스스로 고수하고 지키고 스스로 어찌 해보려는 사람, 즉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잃게 될 것이요, 그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 즉 그 “보잘 것 없는 자기”를 스스로 어찌해 볼 수 없음을 알고, 그 자기를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의탁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누리는 것이지요. 이것이 새로운 의식, 그리스도의 의식으로 사는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가장 중요한 일은 현 상태를 정직하게 직시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드린 대로,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이 있는데, 돼지우리에서 굶주려 죽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입니다. 직시하되 판단하지 않고 직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것을 죽을 듯이 피하고 있습니다. 아빌라 데레사가 말하지요? “이 사실을 백안시 하는 사람은 거짓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최고의 진리이신 하나님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린다고요. 이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겸손이라고요.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 보잘 것 없음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하나님 사랑의 경험은 우리의 보잘 것 없음, 우리의 무력감을 우리가 깊이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죽음으로 경험됩니다.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처럼 느껴지지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깊이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새로운 의식이 열린다는 역설을 말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영광이 된다는 역설이요, 죽음이 부활로 이어진다는 역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이 역설을 우리의 신앙으로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밀알의 역설을, 십자가의 역설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 보잘 것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라 내거나 떼어버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보잘 것 없음을 가리고 있는 그 껍데기를 자기로 알고 살고 있는 우리가, 그 껍데기를 들추고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나를 받아들이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가장 깊은 수준에서의 상담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보잘 것 없는 나를 사랑하시고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 사랑에 의지하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감싸여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수준에서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더 깊은 수준에서 하나님 사랑의 힘을 체험하도록, 더 깊은 수준에서 십자가의 능력을 체험하도록, 우리 자신을 열어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토마스 키팅 신부님의 글 한 토막을 한번 묵상해 보겠습니다.
당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있는 그 자리에서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이 공격적이거나, 탐욕스럽거나, 겁이 많거나, 소심하고 수동적이라면,
매 사건이 일어기 전에, 일어나는 동안에, 그리고 일어난 후에,
당신의 감정을 살펴보십시오.
단 비난이나 수치심이나 분노나 낙담과 같은 감정적 반응을
동반하지는 말고 그대로 지켜보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의 결점과 한계에 대해 작업하시도록 맡기십시오.
그저 그것들을 인정하고 그것들과 함께 머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직접 고치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지켜보고, 그것들을 느끼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면,
그것들의 위력과 과장된 역할이 점차 줄어들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현존하는 당신 존재의 중심으로 계속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신체의 느낌과 감정을 만나고 환영하십시오.
지금 이 순간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음과 비참함을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 우리가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은 수준에서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음을 비난하고 거부하는 대신, 그것을 가리고 위장하는 대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내어 맡기게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 많은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