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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35-51. 레이와 7년의 놀라운 주님의 3마디 표현 2025. 1. 12.
가야할 길, 멈추지 말라는 시가 있습니다. 비가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새는 하늘을 날고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른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오른다. 인생이란 작은 배 당신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라. 오늘 그리고 이 시간을, 그리고 우리 서로 모두모두 사랑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하루하루 스치는 삶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되새기면서.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와 신년 축복 감사 서원예배를 드렸습니다. 레이와 7년을 시작한 두 번째 주일이지만 또 다시 주님의 귀한 말씀을 생생히 듣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가야할 길을 멈추지 말라는 시가 우리 가슴에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목적과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담아서 주님의 손에 올려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의 입장에서는 삶의 환경과 여건과 조건들이 시시 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소망의 빛은 한줄기입니다. 어두움과 사탄과 가로막고 날리는 것 때문에 소망이 바람 앞에 등불일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25년에는 어떠한 고난과 고통이 따르더라도 하늘을 날고, 산을 오르고,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오르려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미래를 위하여 어떤 자세와 태도로 시작을 하시고 오늘을 살아가시나요? 비가와도 하늘을 날아야 하는 새는 하늘을 날아갑니다.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오릅니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습니다.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런 과제를 위하여 쉬임없이 나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의 말씀이 놀라운 방향지시를 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과 세례 요한의 제자가운데 2명이 길을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때에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단정 지어 말을 합니다. 이 표현 때문에 두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 직접 따르게 되는데 이 때에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무엇 때문에 나를 따르려고 하느냐? 선생님,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하시는데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에서 양으로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시는데 그렇게 궁금하면 39절에서 와서 보라!!! 여러분, 와서 보라는 이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허락과 함께 이들은 예수님과 동행을 하게 되는데 이 때가 10시쯤이었습니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 이었습니다. 안드레가 형제를 찾아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니까? 항상 궁금한 것을 그냥 넘기지 아니하는 시몬이 안드레와 함께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42절,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앞으로는 게바라 하리라. 아람어 게바가 바로 반석인데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를 부른 다음 날 예수님께서 또 갈릴리로 가시다가 빌립을 만나게 되었는데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따르는 것은 와서 보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시는 일을 알아야 따르지요? 빌립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동료이었고 같은 곳에 살았습니다. 벳새다입니다. 45-46절에 빌립이 또 다시 그의 동료, 나다나엘을 찾아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하지만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와서 보지 않으면 자기의 기준에서 평가를 하게 되기 때문에 빌립이 그러면 와서 보라고 합니다. 47-50.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이보다 더 큰일을 보게 된다는 두 번째 위대한 말씀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나다나엘에 대하여 알았습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고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무엇인가 묵상을 하던 나다나엘을 보았습니다. 51.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이 것이 본문의 내용인데 여기서 예수님의 귀중한 표현 3마디가 나옵니다. 와서 보라는 말씀과 이 보다 더 큰 것을 보리라는 말씀과 하늘이 열리고 ~~보리라는 3마디 말씀입니다. 그러면 2025년에 중요한 3마디의 표현은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1. 와서 보라는 표현과 와서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오라고 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하시는 일을 목격하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뜻을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왜 보라고 했을까요? 보아야 사실인지, 거짓인지, 마술인지, 실제인지, 역사인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위한 양인지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와서 보라는 표현을 매우 중요합니다. 왜요? 메시야인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당시의 문제를 해결할 분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해결할 분입니다. 그래서 바로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다음 날 갈릴리로 가시면서 빌립을 만났습니다. 발립이 동료인 나다나엘을 찾아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이 기록했던 그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은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소개를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소개를 하고 예수님에 대하여 명확하게 말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에 보게 되었고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아이었습니다.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갈릴리와 나사렛에 대한 당시의 분위기입니다. 이 때에 빌립이 그러면 와서 보라고 합니다. 여러분, 와서 보아야 편견과 오해가 없습니다. 생각이 바뀌고 사실인 것을 알게 됩니다. 와서 보아야 따르게 되고 믿게 됩니다. 와서 보아야 내 인생의 길을 열어 갑니다. 와서 보아야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오사 보아야 문제 해결의 열쇠가 누구에게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레이와 7년을 어떻게 풀아 가야 할지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 현장에 오지 않고 보지 않고 말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해와 사실 왜곡과 편견을 가지고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와서 보면 알게 됩니다. 와서 보아야지요. 왜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전하는 가장 기본 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먼저는 와서 보라는 표현입니다. 사영리를 설명해주어도, 은혜를 말씀해 주어도, 복을 받게 된 이유를 설명해도 와서 보지 않으면 그 것으로 끝입니다. 와서 보아야 시인을 하고 따르게 되고 은혜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와서 보게 되면 결론이 나옵니다. 어떤 결론을 입니까? 인정을 받게 되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와서 보라는 표현은 제자를 부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의 메시지입니다. 가서 보니까? 빛을 보게 되고 영광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소망을 마음에 품고 전진하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방법이 무엇입니까? 목표와 목적을 이루어야 할 태도는 무엇입니까? 와서 보는 것입니다. 현장이 중요합니다. 경험이 되고 노하우가 축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의 근원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걸어간 인생의 법칙이 있었습니다. 노아가 그렇고, 아브라함과 리브가의 인생 법칙이 있고, 이삭과 야곱의 인생 법칙도 같았습니다. 요셉도 그렇고 모세도 가서 보았습니다. 다윗도 가서 보았기 때문이고 에스더도 가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와 베드로와 바울이 와서 보라고 합니다. 노아는 인생이 하찮게 느껴질 때는 나 한 사람의 힘으로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해할 수 없을 때에도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항상 복이 된다는 것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요셉은 삶이 계획한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주신 꿈을 기억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을 느끼고 주저하게 될 때에 망설이지 말고 현재의 안전지대에서 박차고 나왔습니다. 왜요? 와서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주신 약속과 주신 잠재력을 믿고 한계를 뛰어 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와서 보았습니다. 어두움의 끈질긴 협박과 유혹까지도 와서 보고 대응을 했기 때문에 52일 만에 위대한 예루살렘 성과 성곽을 중건 했습니다. 바울은 고향 다소로 낙향하여 11년간 말씀과 성령의 음성 속에서 새로운 체험을 통하여 안디옥 교회를 세웠고 결국에는 로마까지 복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베드로는 헛수고의 빈 그물 같은 인생의 상황에서 와서 보기를 결정적으로 두 번씩이나 한 것 때문에 처음과 마지막의 위대한 사도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레이와 7년과 미래를 위하여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하나요? 비가와도 하늘을 날아야 하는 새는 하늘을 날아야 합니다. 눈이 쌓여도 가야할 곳이 있는 사슴은 산을 올라가야 합니다. 길이 멀어도 가야할 곳이 있는 달팽이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길이 막혀도 가야할 곳이 있는 연어는 물결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오늘 내가 가야할 곳이 있다면 태풍 불어도 거친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와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뜻을 이룹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두 번째는 더 큰 일과 더 큰 역사를 보리라. 여러분, 와서 본 것 때문에 놀라운 사역에 동참하고 동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 보다 더 큰 일과 더 큰 역사를 볼 것이라고 합니다. 인정을 받은 것 때문에 주님과 동행을 하는 것도 은혜이지만 주님이 하시고 주님이 내게 주시는 더 큰 일과 더 큰 역사를 만들어 가는 믿음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47-50.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 여러분, 이 보다 더 큰 일과 역사를 어떻게 보고 이 능력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시작이 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와서 보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와서 보면 이미 반은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시작은 이어져야 합니다. 시작하는 것이 없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와서 보고 선포를 들어야 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고 얼마나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각색 병에 걸린 사람들이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 해방이 되고 치유가 되었는지를 경험하고 그 것이 나의 것으로 공유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큰일과 큰 역사는 와서 보라는 시작이 없이는 경험이 되지 않습니다. 체험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격적 인물은 나다나엘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사람은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때에 나다나엘이 무엇을 생각했을까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 나사렛은 빈민 시골 구석진 동네이었습니다. 나다나엘의 편견은 예루살렘 쯤 되어야 인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영적으로나 율법적 지식이나 도덕적으로나 나름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에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나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그 나무아래 있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기대하는 이상세계입니다. 미4:4은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 하셨느니라. 무화과 나무아래서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이 소망이고 기대입니다. 이런 사람이 이스라엘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이스라엘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나사렛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나다나엘의 편견과 이전의 생각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을까요?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발견한 것입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에게 발견되어 졌습니다. 나다나엘은 여태껏 자신이 본 것과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이었습니다. 그 것을 가지고 살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본 것과 아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멀리서도 나를 보시고 나를 아는 분이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무너졌습니다. 시139 1-4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주님은 이미 나를 알고 계셨습니다. 멀리서도 나를 아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발견되어졌습니다. 벌거벗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허물을 지적하지 않고 내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참 이스라엘이며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상세계와 행복을 누리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레이와 7년, 2025년에 더 큰 일과 더 큰 역사를 보게 됩니다. 더 큰 일과 더 큰 역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과 거룩한 나라와 주님의 소유된 존재로서 더 큰 일과 역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레이와 7년이 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세 번째는 하늘 문이 열리고 모든 삶과 과정에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과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응답과 도우심과 책임지심의 놀라운 것들을 경험하고 체험하고 보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고 끝까지 믿음과 신앙으로 살게 됩니다. 요12;20-24절에 유월절 명절을 맞이하여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왔고,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이 몇이 있는데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이런 간청을 빌립에게 하는데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을 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님께 가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러면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처음 사역의 시작과 이 본문이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처음은 사역의 시작이었고 이 본문은 예수님의 사역에 일어 날 마지막 부분을 상징하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3-1. 헬라사람들이 빌립에게 갔습니다. 왜 갔을까요?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이 헬라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입니까? 알렉산더 대왕의 헬라제국에 점령되었던 이스라엘은 그때부터 예수님 당시에 이르기까지 헬라, 그리스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종교를 유대교로 개종한 뒤 유대인들과 동일하게 율법을 준수하며 절기를 지키려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던 헬라사람들 입니다. 그들 중에 몇 명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복잡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을 직접 뵙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인맥도 없었기 때문에 12;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헬라사람들은 왜 빌립을 찾아가서 만남의 징검다리가 되어 줄 것을 요청했을까요? 왜 빌립이어야 했을까요? 빌립이라는 헬라식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빌립은 헬라문화 배경에서 성장했고 헬라사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었습니다. 빌립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따뜻한 맘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연고가 없던 헬라 사람들이 혼잡한 군중 틈에서 예수님께 접촉하기 위한 가장 적합한 소개자로 빌립을 선정했습니다.
3-2. 빌립이 안드레에게 갔습니다. 헬라 사람들의 청탁을 받은 빌립이 곧장 예수님께로 달려가지 않고, 다른 제자들도 아닌 안드레에게 가서 그 사실에 대하여 의논하고 도움을 요청했을까요? 같은 고향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이었던 안드레가 12제자 중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동시에 같은 벳세다이었습니다. 같은 고향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가는 것이 더 용이할 텐데도 왜 동생 안드레를 찾아가서 상의했을까요? 연결자이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는 누구보다도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를 지닌 연결자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그의 형 베드로를 예수님과 만나게 했습니다. 안드레의 심성은 오병이어 사건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해질 무렵 빈들, 허기에 지친 사람들을 보며 제자들은 얼른 흩어지게 해서 각자 마을로 가서 사먹게 하자고 건의를 드렸지만 그들을 긍휼히 여긴 주님은 의도적으로 빌립에게 물으셨습니다. 요6;5-7,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음식을 살 만한 가게도 없고, 있다고 한들 살 돈도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빌립은 한 눈으로 보기에도 장정만 5천명 이상 되는 것을 간파한 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합니다. 모인 사람들에게 일정부분 비용을 부담케 하더라도 200 데나리온이나 부족하게 될 것이라는 빌립의 대답을 옆에서 듣고 있던 안드레가 조용히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한 소년이 갖고 있던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들고 주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가 보기에도 그것은 분명 해결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허기진 채 그냥 돌아갈 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14;14-16,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자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합니다. 너희가 해결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연결고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안드레는 그 주님의 심장으로 살았습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현장에서 긍휼한 심령으로 주님과 사람을 이어주는 탁월한 연결자 안드레를 등장시켰습니다. 안드레는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소망을 갖고 세례요한을 따랐던 사람이었고, 용기와 결단을 갖고 나사렛 청년 예수의 첫 제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단 한 번도 우월성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앞서는 형 베드로에 대해서도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안드레의 관심은 눈에 보이는 이익이 아니라, 주님이었고, 이 땅 가운데 임하실 하나님의 나라이었습니다. 자리보다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야 할 이유와 헤쳐 나가야 할 이유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늘 문이 열리고 보게되는 놀라운 역사를 얼마나 사모하십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침에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와서 보고, 더 큰 역사를 드러내고 2025년 일 년 동안 계속해서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과 내리락 하는 환상을 보시는 이 3가지의 역사가 나타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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