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가니스탄피랍사태와 종교
지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아프간피랍사태는 종교가 어느 정도까지 잘못될 수 있는지, 종교가 개인이나 국가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해 주었다.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생생하게 지켜본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야기한 기독교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한국개신교회의 오만과 독선에 치를 떨며 자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교회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1. 사람을 존중하는 종교
건전한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기독교는 사람에 대한 신의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불교에서 말하는 제도 중생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니 종교는 분명히 사람의 존엄성에 기초한다. 그러나 종교가 변질되어 불건전해지면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종교가 사람을 지배하게 되며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형국이 된다. 이 배후에는 반드시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있다.
정부가 여행 자제를 권고한 위험지역에 평신도로 구성된 선교단을 파송한 것은 인명을 경시한 처사이다. 더구나 일부 참가자들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교회는 이를 획인하지도 않았으니 말할 것도 없다. 기독교에서 선교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과거 구미에서는 구소련에도 선교사를 파송했으니 선교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단기선교라는 명목으로 평신도를 무리지어 여행 보내듯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위험지역에 파송되는 선교사는 선교의 효율성과 본인의 안전을 위하여 언어, 문화, 의료, 건축, 교육에 이르기까지 장기간 특별한 적응훈련을 받는다. 그런데 교회는 왜 평신도들을 무리지어 위험지역으로 보내고 있는 것일까? 그 저의가 자못 궁금하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국교회가 되찾아야 할 것들'이란 발표회에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장 이정익 목사는 위험지역 선교에 대하여 『선전효과 극대화를 통해 신자를 늘리려는 마케팅』이라고 비판하며 『단기선교팀들이 타종교국가의 중심지에서 집단적으로 찬양하거나 이른바 '땅 밟기'식의 시위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한겨레 2007. 09. 14) 결국 이벤트식의 단기선교 프로그램의 이면에는 국내 신도 수 감소로 말미암아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여 교권을 강화하고 교세를 확장하겠다는 일부 교회지도자들의 정치적 의도가 감춰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교황권 강화를 위해서 성전聖戰이라는 미명美名 하에 수많은 신도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몰았던 중세의 십자군 전쟁을 연상케 한다.
일부 잘못된 종교지도자들은 사람의 종교적 취약성을 이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시 건전한 종교도 이들의 손에 의해서 개인과 가정의 상식적인 행복을 파괴하고 국가적으로 심각한 손해를 입히는 위험한 도구로 이용 될 수 있다. 종교는 양날의 칼과 같다. 현실 세계에서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여 정신적 안정을 도모하고 행복의 질을 높여주지만 정 반대의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올바른 종교생활을 하려면 건전한 종교를 선택하는 것은 물론 건전한 종교지도자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건전성의 기준은 얼마나 사람을 존중하느냐에 있다.
2. 이웃을 존중하는 종교
기독교는 이웃 사랑의 종교다. 이는 기독교의 가치를 높이는 최고의 교리다. 기독교 경전은 이웃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당신 뿐 아니라 당신의 이웃을 위해서도 목숨을 바치셨다. 그러니 여러분이 좋다고 생각해서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는다.』
건전한 종교는 타인에 대한 배려에 결코 인색하지 않다. 불교가 말하는 자비慈悲 역시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마치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살피듯이 중생을 연민하고 애정을 쏟는 것이 바로 자비의 원뜻이니 무엇이 다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을 비롯한 일부 종교인들의 종교적 이기주의가 도를 넘고 있다.
건전한 종교인이라면 자신의 결정과 행위가 이웃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웃이란 가족을 비롯한 모든 사회구성원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 국가와 세계를 포함한다. 아프간 사태는 여행 자제를 권고하는 국민의 정부를 무시하고 안전을 염려하는 가족을 무시함으로써 이웃을 배려하지 않는 종교적 오만과 독선을 그대로 드러냈다. 결국 저들의 행위는 가정의 행복을 파괴하고 대내외적으로 막대한 국익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무장단체들의 납치행위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많은 종교들이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다. 기복신앙이란 구복求福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앙형태를 뜻하는데 여기에서 복은 다분히 세속적이고 주관적이다. 이들의 신앙적 행위는 오직 자신을 위한 것일 뿐 이웃에 대한 배려는 없다. 따라서 과정이야 어떻든지 자신이 만족하는 결과를 얻으면 그만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가족조차도 안중에 없다. 건전한 종교는 ‘이웃과 함께하는 행복’을 추구한다. 이는 타인에 대한 이해와 양보 그리고 희생으로 비롯된다. 이런 것들이 보이지 않는 종교는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
3.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는 종교
기독교 경전에는 신앙생활을 일컬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 했고 티베트 불교의 성자 ‘달라이 라마’는 ‘마음에 있는 나쁜 점들을 제거하고 좋은 점들을 북돋워서 마음을 길들이는 것이 곧 명상수행’이라 했다. 이는 도덕적 가치를 존중한다는 것이요 이 또한 이웃 사랑과 더불어 종교의 가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다.
사태가 발생하자 해당교회는 파송 목적이 선교가 아니라 봉사라고 주장하는 등 여론의 질타를 피하기 위한 거짓말과 변명을 계속했다. 여론에 떠밀리다시피 사과성명을 냈지만 인질들이 구출되자 위험지역선교를 계속하겠다는 저의를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일시적인 면피용 사기극이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희생자를 순교자로 산자를 영웅으로 만들며 교권강화에 이용하기 시작했다. 아프간 사태는 종교인들의 부정직한 행태를 보여주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최근에 세상을 온통 떠들썩하게 만든 유명 인사들의 학력위조에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한 여인의 학력위조에서 비롯된 비리사건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종교단체와 관련 대학의 인사들이 줄줄이 거론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정직은 도덕의 기초다. 양심을 속이며 검은 것을 희다하고 쓴 것을 달다고 우기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고려할 가치조차 없다. 종교의 현실적 존재목적은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며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다. 너희는 빛과 소금이라는 기독교 경전의 가르침이 곧 이에 대한 교훈이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종교는 무가치하다.
도덕적 가치에 기초하는 고상한 인격은 건전한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의 현실적 목표다. 그것은 곧 신의 성품을 닮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땅의 종교인들 중에는 오랜 종교생활에도 불구하고 또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으면서도 도덕적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자가 많다. 종교적 성숙도는 고상한 인격과 비례하며 이는 도덕적 삶을 통해 증명된다. 결국 종교의 건전성은 높은 도덕적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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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가지는 순기능은 특별하다. 삶의 갈등과 고뇌를 믿음으로 승화시켜 개인의 삶이 편안해지고 이 땅에 신의 거룩한 성품이 전파되어 대중의 마음이 순화되는 이 엄청난 일은 결코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잘못된 종교는 개인과 사회에 암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따라서 종교를 평가하는 데는 냉정한 이성적 기준이 필요하다. 그 기준은 어려운 학문이나 신비적인 경험에 있지 않다. 단지 그 종교가 사람과 이웃과 도덕적 가치를 얼마나 존중하는가에 있을 뿐이다. 이 글은 특정 종교를 비난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다. 아프간피랍사태를 지켜보면서 더 이상은 개인이나 국가가 잘못된 종교나 종교지도자들에게 기만당해서는 안 되겠기에 몇 자 적은 것이다. 아울러 일부 다인들의 행태가 잘못된 종교지도자들과 닮은 점이 많다는 점도 글을 쓰게 된 이유 중에 하나임을 밝힌다.(월간 Tea & People 2007. 10 기고)
첫댓글 옳은 말씀 입니다~! 올해 읽은 한스 요하임 마츠의 릴리스 컴플렉스 극복하기에서도 종교적으로 지나친 근본 주의에 빠지는 행동 엮시 릴리스 컴플레스의 전형적 표상이라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