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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들은 이용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결국 오프에서 정치판을 장악하는 데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죠~
제가 예전에 퍼왔던 정치달인님의 글에 다 있습니다! 희생한 만큼 보상받겠다는 게 뭐가 잘못된거냐? 이것이 바로 민주당 난닝구와 전대협 386 이해찬 계열이 공통적으로 반응하는 지점입니다.
참여계는 이런 게 없죠~
그래서 미래의 대안은 될 수 있지만 현재의 상황에 적합하지는 않습니다. 왜? 대한민국은 아직도 '초인'을 기대하거든요. 노무현에 열광했던 참여계조차도 노무현을 초인으로 여기길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유시민을 거쳐 안철수로 넘어갔던 것이죠. 그리고 분열해 버렸습니다. 이 상태론 참여계의 정치적 역할은 끝난셈이죠
그랬기 때문에 유시민은 손을 놔버린 겁니다. 참여계의 안철수 쏠림에 브레이크를 걸 수도 없고 걸지도 못하고 걸지도 않은 것이죠~ 대안이라고 여겼던 참여계 태반도 관성에 의해 움직이는데 뭘 더 바라겠습니까?
현재의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착한 박정희'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정치 사회적인 의제에 목소리를 내길 꺼리게 된 것이죠~ 저 한사람으로는 어찌할 수 없으니까요.
사실 이것이 유시민이 냉소적으로 반응하는 핵심 이유입니다!
진짜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노무현이 초인이어서 지지한 게 아닙니다. 그가 정책적 오류를 범하더라도 그것조차 과정으로 회피할 수 없는 맥점으로 겪고 넘어가야 오류를 수정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거라 믿었던 겁니다. 노무현이 무오류라는 게 아니라 오류를 범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았고 인정하고 고뇌했기 때문에 지지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고민하고 노무현을 지지한 사람들이 별로 없죠~ 합리와 감성의 적절한 조화라는 부분이 바로 여기서 공감대 형성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니 적지 않은 참여계가 안철수에게 넘어간 거죠~
박정희와 노무현 결합이면 오히려 강점아니냐? 어쨌든 참여정부 베꼈으니 안철수도 괜찮다 식이죠
정리합니다! 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세가집니다.
첫째는 남이 하든 내가 하든 불륜은 불륜입니다. 그걸 구질구질하게 변명하지도 뻔뻔하게 뭉개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압니다. 나와 남에게 다른 잣대를 대지 않습니다. 근데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사는 건 바보짓이죠~! 그래서 그는 바보가 된 겁니다.
둘째 그는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었습니다. 사람 위에 군림하지도 사람을 함부로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역시도 대한민국에서는 바보짓입니다! 라인이 없으니 세력을 만들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마지막 셋째로 그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실천하고 책임졌습니다. 이 역시 대한민국에서는 바보짓입니다. 떠받들고 추앙할 지도자가 아닌 존재는 폐기대상이죠~ 지도자는 도그마적 카리스마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숭배할 이유가 생기는 거죠~ 박정희가 그랬고 김일성 김정일이 그랬으며 이건희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이러니 대한민국에서 노무현이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는 스스로 몸을 던진 겁니다...
이 흐름과 맥락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곳은 대한민국에 오직 단 하나 여기 밖에 없습니다!
역사에는 공짜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던 노무현은 맥점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했습니다. 그게 노무현의 힘이었죠. 여기에 뻔뻔함과 학벌과 도그마를 갖추게 되면 이른바 좌파들이 환호했을 겁니다. 이것이 이른바 착한 박정희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제3의 길을 고집했죠! 이게 핵심입니다! 제3의 길...! 이 길을 걷겠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한 곳은 대한민국에서 바로 여기 노하우업 밖에 없습니다.
이 나라의 선택지는 둘 중 하나입니다. 빨갱이가 싫어서 박정희, 미국 추종이거나 박정희,미제가 미우니 김일성, 김정일 추종~ 이것이 대한민국을 양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지역적 기반이 결합해서 전라도는 빨갱이 타령 경상도는 박정희 찬양으로 굳어진 것이 대한민국의 정치현실입니다.
물론 디테일로 들어가면 조금 달라지긴 합니다~ 김대중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져서 각자도생으로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민주당은 지역적 토대를... 대형노조를 통해 노동중심성을 등에 업은 통진당은 세력적, 계급적 토대를 갖고 있죠. 이들이 엎어치고 메치면서 공동의 적인 박정희, 전두환과 경상도, 미제에 맞선 역사가 대한민국 정치사죠.
아프로만님이 억하심정과 이왕 베린 몸만 알면 대한민국 정치 마스터한다고 지적한 것이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거부하고 제3의 길을 모색했던 게 노무현이었고 그래서 그는 죽어야 했습니다.
헌데 이런 속내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다보니 또 다시 새로운 초인 찾기로 빠져서 유시민에서 안철수로 갈아탄 것이 참여계의 현주소죠. 이래서 믿을 놈 하나 없다는 한탄이 나오는 겁니다!
이용당할 준비가 된 것도 모자라 빤스벗고 안철수에 달려간 이들.. 그들이 참여계입니다!
이래서는 죽은 노무현만 불쌍하고 박박 기어댕긴 유시민만 불쌍합니다. 그저 유구무언일 따름이지요
고미생각 / 2013-01-25 - http://cafe.daum.net/knowhowup/Dnqf/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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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의당 참여계를 말해주마 [남군]
" 이들은 이용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부제: 참여계 활용론
노파심에 전제를 달아둡니다. 이 글은 진보정의당 내 계파 분란 이딴 글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진보정의당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한 글입니다
1. 진보정의당에서 참여계라 불리는 사람들의 정체
가. 계급적 정체성
이런 계급(응?!?)
계급이라는 표현이 스스로도 우습고 어색합니다만 풀어서 써 보자면 소득 수준과 직업에 따른 정체성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들은 소득에 따른 분포로 보자면 중산층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제 직업 구성은 전문직종과 사무직, 자영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대다수 입니다.
의사, 약사, 수의사, 대중소 기업 회사원, 법조계, 출판, 기자, 식당주인, 술집주인, 치킨집주인, 택시영업, 교강사, 학생 등등등 정말 폭넓고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합니다만 흔히들 우리가 좁은 범위의 '노동자'라고 규정하는 블루칼라, 즉 공장노동자의 비율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아 물론 없지는 않겠지요. 제가 이들의 명단을 가지고 있는게 아니니까요.)
이들은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자신이 동의하는 의견에 조용히 동조할 뿐입니다. 더불어 상대방에 대한 높은(심각한) 수준의 비판에도 쉽게 동조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장기간의 사회생활을 거쳐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므로 인간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비판을 피하는 일종의 비판 회피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소득적, 직업적 스펙트럼에 따른 이들의 관심분야는 현재 진보정의당 게시판을 분석해 보면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현재 노동계 최대 현안인 해고노동자 문제 등(쌍용차 등)에 대한 글의 조회수나 댓글 수를 확인해 보시면 다른 사안에 비해 현저히 조회가 낮고 댓글 수가 떨어집니다. 쉽게 말해 관심이 적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런 진보정의당의 노동중심적 방향성을 심각하게 비판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노동계의 문제가 당연히 비상식적으로 돌아가고 있고 고쳐져야 할 문제라고 여기며 당연히 우리당이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당 지도부의 모든 관심이 노동계의 현안(실제로는 공장노동자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을 때 한 두 번씩 볼멘소리를 할 뿐입니다.
단, 볼멘소리에서 끝날뿐 더 심각하게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그들'만 노동자 아니다. '우리'도 노동자다 좀 같이 신경써 줬으면 좋겠다 수준이지요.
만약 이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을 가진다면 이들은 조용히 당을 떠날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과 맞지 않는 경우 상대를 비난, 비판하기보다 스스로 '절을 떠나는 중'이 되기를 선택하는 성향을 보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이들의 직업적 분포 경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나. 지역적 정체성
태어난 고향, 거주하고 있는 지역 또는 근무하는 직장 등은 한 인간의 다양한 지역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건이지만 이번 글에서는 이들이 현재 거주하는 곳을 지역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이들의 지역은 일부 행정지역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즉, 경상도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고, 전라도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동자'로 분류되는 블루컬러 직업군이 '근무지(공장)'를 중심으로 하는 일부 지역 집중의 지역 정체성을 보인다면(예를 들면 울산) 이들은 지역 분포가 전국적입니다.
실제로 이들은 온라인에 익숙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에 좁은 지역으로 국한시킬 수 없는 지역적 분포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퍽 아름다운 지역주의 투표(빌어먹을~!)
쉽게 말해 이들은 전국 곳곳에 사는 이런저런 시민들이며 페북, 트위터, 웹게시판 이런 데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키보드워리어로 변신할 때도 있습니다.)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장점이 더 많은 부분입니다. 참여계의 전국적 분포와 온라인 친화적 성향은 지역주의 정당이 우리나라의 정치계를 양분하고 있는 이 상황에 유일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조금 더 글의 뒤쪽으로 미루어 놓겠습니다.
다. 심리적(감성적) 정체성
인간의 감성은 매우 고정적인 자원입니다. 실제로 한 인간의 감성은 한번 결정되면 쉽사리 변하지 않으며 이성과 다른 체계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움직이는(행동하게 하는) 주요 원인은 이성보다는 감성입니다.
즉,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그 사람의 행동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참여계의 심리적 지향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귀요미 노무현
이들(참여계)의 감성 키워드의 맨 앞머리에 있는 것은 '노무현'입니다. 노무현의 인생 역정(정치적 역정을 포함한 그 외의 부분까지)은 매우 중요한 이들의 심리적 지향점입니다. 이들의 이성과 감성의 괴리는 여기서 일차로 드러납니다. 노무현은 이미 이들을 마음으로 움직였기에 노무현이 정책적 실수를 범한 경우도 이들은 머리로는 그것을 알아도 노무현을 버리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어떤 면에서는 이들의 '역린'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노무현에 대한 이들의 심리적 지향을 거스르는 사건이나 발언에 대해서 이들은 폭발력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슬픈 유시민
두 번째 감성 키워드는 유시민입니다. 유시민은 합리적입니다. 그러나 감성적입니다. 실제로 매우 노무현과 유사한 특징을 보입니다. 합리적인 감성은 장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노무현의 합리 지향은 국가 수반이라는 위치에서의 정책적 판단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라크 파병과 한미FTA 추진을 합리적 국익 우선 정책으로 '판단'한 부분이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하려고 아내를 버리라는 말입니까!', '이쯤 되면 막가자는 말이지요?' 등의 그의 발언에서 노무현은 지극히 감성적인 판단을 보여줍니다.
유시민 또한 이와 유사한 측면을 보여줍니다. 복지에 대한 유시민의 시각과 대선에 대한 그의 판단들을 훓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복지'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나 그 방법에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면이 있음을 드러내는 그의 발언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더내고 덜받는' 국민연금 개혁안을 욕먹으며 추진한 그의 판단은 유시민의 합리 지향적인 면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유시민의 지극한 합리지향성은 심지어 지지자들에게도 불편하게 비춰질 때도 많습니다.
'아니 우리당이 복지를 주장하는 이 마당에 보편복지는 실현불가능한 현실이다.'라는 발언을 어떻게 할 수가 있는 것인가요? 이런 것들은 유시민이 이리저리 재고 따지고 나서 이성적 판단이 설 때 발언하는 합리주의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좀 심하다고까지 볼 수 있는 유시민의 합리지향적 성향은 '유빠'와 '안티'를 동시에 양산하는 바탕이 되기에 이릅니다.
해맑은 유시민
하지만 유시민은 또 지극히 감성적입니다. 멀게는 항소이유서로 유명하던 시절 '전대갈의 개들' 발언과 노무현 탄핵 당시 그의 울부짖는 사진, 서거 정국에서의 담배 한 개비, 통진당 폭력사태 당시 심상정을 감싸던 모습 등, 유시민도 노무현처럼 지극히 감성적입니다.
심상정 쉴드 유시민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노무현과 유시민의 카리스마(그다지 좋아하는 단어는 아니지만)는 이 지점에서 이들에게 폭발력을 가집니다. 합리성과 감성의 묘한 조화 말이지요. 이들, 참여계는 바로 이 지점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심리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들은 인간관계의 스킨쉽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직장 친구, 동네 친구, 동기 동창들과 술마시고 수다떨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깁니다.
또 민주적 방식에 물들어서 수직적 조직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당 게시판에 의원이나, 당 지도부가 직접 작성한 글(의원실, 보좌진 등이 올린 글 제외)이 올라올 때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반응 토론하며 어색해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수평적 소통에 민감합니다. 지도부는 말 그대로 지도부인 것이지 나보다 높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들은 조직의 수직적 구조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라도 내 옆에서 호흡하기를 원합니다. 이들의 이러한 면은 권위주의를 내던진 노무현 시절부터 익숙해져 왔습니다.
MB를 넘어 박근혜 시대에 이들이 좌절하는 이유는 노무현 시절과 같은 탈권위 시대를 다시 맞지 못할 불안감에서 기인합니다.
결론적으로 이들 참여계는 합리를 중시하지만 중요한 지점에서는 감성으로 움직입니다.
라. 집단 정체성(출신)
이들의 기존 소속 집단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노사모
(2) 시민광장
(3) 촛불 및 각종 커뮤니티
(4) 비주류 운동권
(5) 아무 단체나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람
(1)에서 (5)까지를 살펴보면 뭔가 공통점이 느껴지지 않으십니까? 네. 간단합니다. 이익단체도 아니며 적극적 목소리를 내는 단체도 아닙니다. 어찌보면 연예인 팬클럽에 가까운 것이 사실입니다. 아니면 팬클럽만도 못하게 '나는 가수 누구 좋아해' 정도의 수준이기까지 합니다.
그냥 시민 참여
사실 이들의 정체는 정치는 그냥 별 관심없이 살던, 그냥 시민입니다. 이들의 집단 정체성은 심리적 정체성과도 닿아 있습니다. 그냥 그냥 살다가 어떤 계기로 마음이 움직여서 말 그대로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참여계 입니다. '참여당' 출신이라 참여계 아니냐? 하시지만 '참여당'도 이런 그냥 시민들이 '참여' 했기에 출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 참여당이라는 정당단체가 먼저인 것이 아니고, '마음이 움직여 참여한 그냥 시민'이 먼저인 것이지요. (더 이전에 개혁당 시절도 비슷할 것입니다. 단, 개혁당에 대한 경험은 없으므로 이 부분은 단지 추측입니다)
어떤 단체가 아니고 그냥 직장 다니며 사는 그냥 사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이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출퇴근을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며 절대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서지 않습니다. 그래서 눈팅 입니다. 다들 소시민이라 그냥 봅니다.
누군가 자신의 생각을 대신해주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에 동조하기는 하지만 보통은 가입인사만 하고 조용히 있거나 이조차도 안하기도 합니다.
직장다니며 시간날 때 당 활동하는(사실 놀면서 한다) 성남시지역위원회 임시 대표 '햇살처럼'
대표적인 '그냥' 시민
하지만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적극적으로 움직입니다. 자신이 지지하거나 동조하는 대상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적극적으로 주변 지인들을 통해 여론 형성 활동을 시작합니다. 어찌보면 아이돌 팬클럽과 거의 동일한 양상입니다.
2. 참여계의 정치적 스탠스
참여계는 굉장히 폭넓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기에 현재 지지정당을 확고히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 새누리'의 공통성향만을 보일 뿐 세부적으로 접근하면 '친민주'인 경우도 상당하며 '정의당 당원'인 경우가 있고 아무 당적도 없는 사람도 많습니다. 정치와 완전히 떨어져 '괴리'된 것은 아니나 한발짝쯤 떨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날라리(?!?)
'귀차니즘' '날라리' 등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경우도 상당하며 '의식화'되지 않았음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의식화 되지 않았지만 참여를 주저하지는 않습니다. 정치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정치에 관심을 놓지는 않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화'가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면 대부분 자신이 필요성을 느껴서 자발적인 '공부'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80년대 운동권처럼 누가 위에서 가르쳐 준 의식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념', '주의', '사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의 개별 판단이 첨가된 형태로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더불어 자신이 공부한 것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론이 가능합니다. '획일적 의식화'가 아닌 '개별적 의식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론 상대방의 의견이 합리적으로 자신을 이해시켰다면 자신의 견해를 수정할 줄 압니다.
정치적으로도 이러한 자세는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그 어떤 '단체'에도 참여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만 그 '단체'가 자신이 원하는 측면과 맞지 않기 때문에 '참여'를 '주저'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3. 지역주의 양당 체제의 대안으로서의 생활 정당
인간 생활의 코어는 '먹고사니즘'입니다. 그리고 일정한 자본을 가져서 생활이 여유로운 사람이 아닌 이상 이 '먹고사니즘'의 코어는 당연히 '일하는 것' = '노동'이 됩니다.
즉, 시민이라함은 '노동해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의 다른 말이 아닙니다. 이는 곧 '노동중심 정당'과 '생활주의 정당'이 서로 배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보정의당의 '노동중심성' 방향은 '생활주의 정당' 방향의 코어입니다. 정치공학은없다 님의 비유를 빌려 사용해 보자면 '생활주의 정당'이라는 튀김옷을 벗겨보면 '노동중심성'이라는 코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약간 핀트가 어긋나는 부분이 생깁니다. 현재 진보정의당의 핵심 해결 과제중 하나로 생각되는 '쌍용차 노동자 문제'를 예로 들면 쉽습니다. 즉, '쌍용차'로 대표되는
'공장노동자의 노동'에만 집중되는 듯한 분위기 때문입니다. 쌍용차라는 집단 공장 노동자의 문제만이 '노동'이 아닙니다.
가사도 노동이다!
'쌍용차 공장노동자의 노동' = '사무직의 노동' = '소규모 자영업자의 노동' = '비정규 아르바이트의 노동' = '가정주부의 가사 노동' = '가정의 육아 노동'을 모두 같은 값으로 여기고 이 모두를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든 노동을 등가로 볼 때 비로소 '생활주의 정당'이라는 방향성이 빛나게 됩니다.
모든 형태의 노동자의 모든 형식의 노동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노동'이 곧 '생활'이 됩니다.
'노동'이 '생활'이 될 때 우리당은 모든 시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상황이 되면 '이념'과 '표'가 괴리되어 나타나는 '선거 때 표구걸'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들, 참여계는 이 상황에 활용성이 매우 매우 높습니다. 귀차니즘, 날라리즘으로 점철된 이들은 자신의 생활과 관련 없는 부분에서 관심도가 매우 떨어지지만 피부에 와 닿는 '내 생활'과 관련된 부분에는 폭발력이 엄청납니다.
이들의 폭발력은 여론형성 능력입니다. 그것도 온라인과 지역을 아우르는 여론형성 능력이 있습니다. 앞서 정체성 부분에서 조금씩 언급했지만 이들의 전국적 분포는 지역 여론 친화력과 다른 말이 아닙니다. 게다가 온라인 활동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합니다. 이들은 친구들과 술먹고 같이 놀기 좋아하는 보통 사람들이며 이런 보통 사람들이야말로 사실 지역 여론의 핵심입니다.
'노동'과 '생활'의 등가 공식이 정의당의 바탕으로 이루어졌을 때 '대중적 진보정당'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낼 수 있습니다.
짧게 요약적으로 표현하면
(1) '대중'의 구성원은 대부분이 '노동'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이들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피부로 와 닿을 때 정치적 목소리를 낸다.
(2) 참여계는 그들의 정체성, 정치적 스탠스로 볼 때 정치를 외면하지 않는 활용성 높은 '대중'이며 지역 여론형성 능력을 가진 '집단(?)'이다.
(3) 따라서 표 구걸하지 않는 대중 지지 정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이들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여기에 개인적 의견을 사족으로 덧붙이면 민주당에서 '친노/비노/반노' 노,노,노를 갈라 당패권 싸움을 하고 있을 때(실제로 노무현의 영향력이 아직도 절대적이기 때문) 노무현을 감성적으로(이성과 합리가 아니다) 이해하고 지지하는 대중들(참여계 포함)은 감성에 상처를 받습니다. 감성적으로 상처받은 이들인 치유할 곳을 찾게 됩니다. 이 때 정의당이 이들의 감성적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노무현의 공과 과를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특히 '노무현의 공' 부분을 강조하여 이들을 치유해야 하겠지요. ('노무현의 과' 부분은 이미 이들 스스로도 끊임없이 아파하는 부분입니다)
4. 지금부터의 미래
아름다운 미래!!!! 소년 코난...
중요한 것은 '현재'로 부터 시작되는 앞으로의 미래입니다. 이들 중 정의당에 이미 입당한 경우 스스로를 '정의당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당원'될 또 다른 이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진보정의당은 준비되어 있는 이들이 정의당으로 참여할 간단한 계기 하나만 만들어주면 됩니다. '생활밀착형 대중정당' 방향을 강화하고 이들이 참여할 여지를 넓혀주고 활용합시다.
이들은 이용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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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 이들과 사민주의
한참 글을 쓰고 있을 때 게시판에 사민주의 토론이 활발해서 덧붙여 봅니다. 이들 참여계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우선 감성을 수반합니다. 스웨덴, 핀란드의 사민주의를 모델로 보고 감성적으로 우선 '오~ 괜찮은데' 라는 식의 감성으로 반응합니다. 그 후에 사민주의의 필요성이 점점 피부로 와닿자 이제 스스로 공부하기 시작합니다.
일차로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이차로 필요에 의해 공부합니다. 그리고 토론을 거쳐 그제서야 한개의 개인 이념으로 정착합니다. 물론 이 과정 속에서 다양한 문제점들을 발견하여 반박도 하지요.
다만 결론이 합리적이라면 합리적 결론에 따릅니다. 감성과 합리에 의해 완벽 장착된 이념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가장 큰 무기가 됩니다. 이게 올바른 이념 정착의 과정이 아닐까요?
기본적으로 '진보'에 동의한 '진보정의당의 참여계'는 평등의 이념에 동의합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자지만 모든 결정을 시장논리에 맡기는 신자유주의자는 아닙니다.
자유주의자지만 어려운 이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평등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복지를 위한 증세에도 동의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에게 사민주의가 장착될 때 강력한 지역 여론 형성층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이념도 맹목적으로 추종하거나 거부하지 않습니다.
'생활'에 좋은 변화를 가져다 줄 이념이라면 적극적으로 동의할 것입니다. 물론 사민주의의 깃발을 내세우는 데 주저하는 참여계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이념을 이념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안 될 것이라고 속단하고 무작정 반대하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할 만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는데 도전! 한번 해봅시다.
■ 글쓴이: 남군 / 2013-01-25 14:57:37
진보정의당 당원게시판 - http://www.justice21.org/9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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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여계에 없는것 4가지 = 1.지도, 2.나침판, 3.콤파스, 4.기록.
*잘하는 것= 그저 사람좋고 잘 놀기
이용당하는 것도 자랑이냐?
지금까지 제가 했던 얘기들은 노하우업에서 꾸준하게 글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시는 내용입니다. 흐름과 맥락을 따라가면 충분히 눈에 보이는 부분이기 때문이죠.
유시민이 국가란 무엇인가?를 저술하면서 진보세력을 견인하려고 했던 진짜 의도라던지,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 노무현이 바랐던 진보의 미래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부분들.. 이미 우리 노하우업에서 다 설명했던 얘기들이 고대~~~로 다 들어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흐름과 맥락이 중요한 겁니다. 띄엄띄엄 읽거나, 정확한 목표 의식없이 무조건 많이 닥치는 대로 읽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생각하고 결론을 맺게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이걸 파악할 때는 절대로 자신의 생각으로 <왜곡해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철저히 상대방의 기준과 관점으로 그 사람의 '흐름과 맥락'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 과정을 거친 다음에야 비로소 자신의 기준과 관점을 적용하여 '판단'을 해야 하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엉켜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이러니 이 나라에서 대화와 토론이라고 하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지요.
둘째는 앞에서 말씀드린 과정을 거친 후에 정리된 것들을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말과 글'로 바꿀 수 있느냐입니다.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식과 생각.. 스스로 정리하지 못한 지식과 생각은 절대로 내 것일 수 없습니다. 시험과 출세에서는 써먹을 수 있을지언정 이런 과정을 거치지 못한 읽기는 그냥 문자 해독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이는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인 '다치바나 다카시'라는 사람이 쓴 '도쿄대 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라는 일갈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학벌이 좋고 머릿속에 지식이 많으면 뭐합니까? 떠먹여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니 저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 안타깝게도 일본을 롤모델로 삼으려 안달난 우리나라 수구우파들 역시 저 길을 답습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저하' 현상 역시 일본을 고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쉽지 않습니다. '과거제를 통한 신분상승'이라는 '판타지'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있어 사농공상의 분류와 차별은 '사회적 유전자'로 각인된 부분이 무척 크기 때문이죠.
그래서 뜻있는 분들이 현재 진행하고 계시는 '느림보 학교' 프로젝트에 저 역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정치로 정치를 바꿀 수 없다면, 문화와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 유전자를 바꾸려는 시도라도 해봐야 합니다.
그렇게 '깨어있는 시민'의 숫자를 늘려가면서 그것을 '세력화'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쩌면 노무현이 바랐던 '제 3의 길'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사회적 유전자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아프로만님께서 두고두고 써먹으시는 '독설 내지는 극언' 중에 이런 게 있죠.
'반만년 식민종속 유전자에 각인된 사대주의 족보놀음 훈고쟁이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그놈의 사대주의, 그놈의 족보타령 없이는 대화가 안되는 것들이라는 건 보수고 진보고 가릴 것이 없는 대한민국 지도층의 고질적인 문제라는 겁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것 또한 노무현이 가고자 했던 제 3의 길이죠.
이에 대한 방향은 김동렬님이 정확히 제시했습니다. 상부구조를 점해서 시야부터 확보하라! 역할게임의 함정에 빠지지 마라! 진단은 정확한데 처방에서 삼천포로 빠지니 문제일 뿐이죠.
상부구조라고 하니 거창하고 어렵게 느껴지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삼각형'만 떠올리면 간단합니다. 누워있는 정삼각형을 세워봅니다. 그러면 꼭지점 하나가 맨 위로 올라오겠죠. 그 꼭지점의 위치에서 아래에 놓인 두 꼭지점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상부구조입니다. 이걸 가능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바로 제가 제시한 '읽기의 기본'을 지키는 것이죠.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 어떤 거창하고 어려운 '담론'이라고 할지라도 결국은 '기본'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기본을 제대로 알고 지키고 실천하기만 해도 절반 이상은 먹고 들어갑니다.
이걸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고속성장을 해버린 것이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나마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근대화 시간이라도 벌어서 낫다지만 우리나라는 정말 너무도 빨리 '급속성장'을 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부작용과 후유증을 치르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것이죠. 바로 그래서 역사에 공짜는 없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너무도 빨리 '급속성장'을 해버렸습니다. = ' 느림보 ' 라는 의미가 그래서 와 닿는 군요
커뮤니티의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부분에서 빛이 나는 것이죠. 흐름과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소통'을 하게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관된 흐름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방금 아프로만님께서 올리신 글도 지금 제 글과 댓글을 쭉 읽으신 분들이라면 한 호흡으로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게 바로 진짜 '소통'의 힘이고, 진정한 위력입니다! 이게 막혀 있으니 대한민국이 이 모냥, 이 꼴이지요!
의식화 보다는 자발적 열정의 '날라리', 와 '노라리' 인 거는 참여계가 맘에 듭니다.
문제는, '방향성' 개념이 없다는 거지요. 방향성을 '의탁' 하는 성향이 고질병입니다.
하여간 '방향성' 무개념 이거는 한국 어디가나 개념 부족 입니다
"방향성을 의탁하는 '성향'이 고질병이다!" 정곡!!
스스로 판단하고 고민하는 유연함을 가진 '날라리, 노라리' 이건 정말 큰 장점입니다. 그런데 이 장점을 못살리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방향성을 '그냥 의탁'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걸로 '만족'하고 안주해요. 그게 왜 문제가 되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 본인들이 정치문제에 책임까지 질 수는 없거든요. 게다가 본인들은 프로 정치자영업자들이 아니니까 그쪽 사정까지 다 속속들이 알 수도 없고 알기도 힘들어요. 그러니 의탁할 수 밖에 없죠. 어쩌면 구조적으로 봤을 때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일이라고 인정하고 넘어가더라도 최소한 믿을만한 사람을 보는 '기준과 안목'은 있어야지요. 그런데 그게 왔다리 갔다리 해요. 노무현과 유시민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안철수'는 절대로 선택지에 없어야 논리와 합리에 맞는 것인데, 이런 기준과 방향 감각이 없어요.
심지어는 노무현 유시민이 왜 그렇게 정치판에서 고전할 수 밖에 없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까지 안철수에게 휘둘리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연출됩니다.
이게 바로 방향성에 대한 안목과 인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로 결국은 도돌이표입니다. 기본부터 챙기자, 진보 이전에 직립부터 합시다! 좀!
[끝으로, 시민광장의 동력은 자금력도 OFF동원력 아닌, 'ON 이라는 쉬원 참여방식을 통한 자발적 참여'라는 기본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무극이아빠 http://www.usimin.co.kr/70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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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무극이아빠 본인부터 저것이 되기 어려운 분 입니다
[ 정모날에 모여 술한자 하고 번개 모임하고 하면 무엇이 바뀔까요?그냥 우리 끼리 모여 있으면 세상이 절로 변할까요?/ 참사람 http://www.usimin.co.kr/70931 ]
이게 사실 지금껏 '시민광장' 이거든요
"ON 이라는 쉬운 참여?" ON 개념이 없습니다. 노빠들 공통점이 뭐냐면
- 만나서 얼굴 보는 순간 맘이 통해서 그냥 봄눈 녹듯 해소될 걸 게시판에서 왜 글로 들추나? -
http://m.cafe.daum.net/knowhowup/_memo/752
참여계를 두고서 제가 '지도 / 나침반 / 기록' 도 없다고 하니까, 무투님이 "기록은 있죠" 했지만. 아니요 '기록' 도 없었습니다. [참여넷 http://www.chamyeo.net ] 에서 '기록수집' 도 최근에야 겨우 눈뜬겁니다.
지금껏 회원중에 기록용 '블로그' 하나 제대로 갖거나, 어떻게 기록이 이용되는 것인지 개념가진 회원이 없었던 겁니다.
일회성으로 여기저기 사이트나 페북에 [신변잡기 식 신앙 간증] 만 난무하고, 잡변식 만남후기 뿐 입니다
'깨시민' 이 '유시민 의탁' 이었던 겁니다.
만나면 그저 서로 좋은 사람들. 이고.
안철수도 걍~ 좋은 사람 이구요
뭐? 방향감도 없는 겁니다.
우선 '트위터' 에서부터 참여계는 그야말로 <주막 강아지>처럼 여기 저기서 걷어채입니다.
민주계 친노들 보세요 예전 기록들 척~ 척~ 갖다 디밀어요. 다른 계파 정파분들도 불로그 창고같은 기록 저장소 하나씩은 꽉 잡고 있어요.
공개적으로 가져다 디밀 컨텐츠 없는 유일한 부류가 참여계들에요. 비공개 페이스북에만 끼리끼리 모여서 옹기종기 정신승리 로 위안하고 있어요
그냥~ 인간성 좋은 '몸빵' 들 이에요.
. - 난닝구 > 경동파 > 하더니 안철수 에게도 휘둘려?
쓸개 빠진 것도 참여계 내력이에요 그러니 진이 빠지죠
유시민 은퇴 하니까 그냥~ 아노미 였던 겁니다.
회자되는 [깨시민] 이 노무현 언급한 "깨어있는 시민" 지칭하는 줄 알았어요. 노하우업 타이틀에도 걸어놓은 겁니다.
근데 요즘 알고보니 깨시민에서 '시민' 이 유시민 그 부류를 놀리는 은어였더군요. 오죽 한심 했으면.. 차암.. 딱한 노릇 입니다
[멘붕] 에서 조금 벗어나니까, 이른바 소위 '리그' 를 모색하는 기운이 이곳 저곳에서 움트는 데요..
길게 보고 갑시다.. 차근 차근.. 쉬엄 쉬엄.. 기본부터.. 기록 부터,, 창고정리 부터... 방향은 거기서 나오는 거에요.
블로그 하나 제대로 건사하는 참여계를 못 봣어요. 자기 컨텐츠도 없는 겁니다
한다는 게 숨기좋은 페이스북 동굴속으로 파고 들다가 끼리 끼리 연고 끊어지니까 지리멸렬...
그러니까 나오는 말이 [네이버 밴드] 로 모여라? 어이구....
그저 만나면 사람좋은 몸빵님들..
아프로만님의 한줄 코멘트에 제가 좀 엉뚱한 소리를 댓글로 단 것처럼 보였을텐데요. 그 이유가 무엇이었냐면.. 무극이 아버님을 비판하신 참사람님의 글이 링크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극이 아버님이 갖고 있는 오류와 문제에 대한 건 이미 노하우업에서 충분히 짚고 넘어갔으므로 저까지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생략한 것이죠. 그런데 실은 참사람님의 글이 더 큰 문제입니다. 삼천포로 빠진 글의 전형적인 형태거든요. 문제제기는 제대로 해놓고 해법 제시에서 길을 잃어 버린 겁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긴 댓글로 참사람님 글에 토를 단 것입니다.
"민주당 중심이 아닌 민란 시즌2로 양대당 구도를 만들자?"
이게 그렇게 쉽게 가능했다면 유시민이 <실패>를 선언하고 직업정치를 그만 둘 이유가 없었죠. 제가 누누히 말했습니다만 대중들은 노무현을 사랑하지만 노무현의 꿈, 노무현의 한을 풀어주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왜? 그 길은 결국 죽는 길이니까요.
진리를 실천하는 길의 끝에 결국 죽음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겠다.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오로지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예수의 죽음은 바로 이를 실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이 예수의 죽음을 가로막고 오히려 정반대로 해석하게 만들고 있죠.
정치판으로 달려나가면 세가지 장애물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나는 <지역>이요 하나는 <조직 혹은 세력>이며 나머지 하나는 바로 <본전>입니다.
내가 정치판에 뛰어들어 결국 <희생>을 하더라도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을 받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길이고 우리의 운명입니다. 근데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하기 힘들죠. 우선 생존해야 하고 가족들도 먹여 살려야 합니다. <초심>이 바뀌는 것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 패러독스, 딜레마를 깬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민란 시즌2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 길의 끝이 뻔히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부활신앙의 핵심은 <변화>이지 <소생>에 있지 않습니다. 변화란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과도 비슷합니다. <깨우침>을 얻어서 예전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것, 그렇게 나 자신의 삶을 바꾸어 나가는 것, 예전과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살아가는 것.. 그렇게 <관성>을 극복하는 것 그것이 참된 <부활>입니다.
부활을 <육신의 부활, 소생>으로 치환시켜버린 통에 오늘날 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과 정확히 반대로 가고 있는 겁니다. 아프로만님의 말씀대로 예수가 의미가 있는 것은 <소승>이 아닌 <대승>적 차원으로 봐야 합니다. 진리를 독점하고 관성 속에 갇히는 것을 거부한 것.. 그게 예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소승적 차원과 측면>에서 보면 예수는 유대교와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유대교의 핵심은 아프로만님 말씀마따나 <멤버쉽> = 선민의식입니다. 그 선민의식의 틀을 깨버린 것이 바로 예수의 <복음>입니다. 유대교가 갖고 있던 선민의식, 진리의 독점이라는 관성을 깨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보이고 진리라고 선포한 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얘기들은 결코 <장사>가 안됩니다. 진실을 말해줘도 대중들은 <외면>합니다. 그러니 대중이 원하는 <환상>을 심어줘야 종교는 살아남습니다. 그게 기독교와 불교가 <개인적 영달을 위한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이유입니다.
결국 대중이 <각성>하지 못하면 종교도 정치도 결코 진보하지 못합니다. 왜? 그게 다 커뮤니티에서 일어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대중이 각성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최소한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판단해서 얘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책임을 지면 됩니다.
이것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인은 대중과 집단이라는 허상에 숨어서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되는 겁니다. 스스로의 몫을 고민하는 <책임의식>과 <부끄러움, 염치>를 탑재한 집단이 되어야 정치는 비로소 진보의 길을 가게 될 겁니다. 이게 안되는 상황에서는 그 어떤 정치적 권모술수나 방법론도 결국엔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내적변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적변화가 일어나야 자신을 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게 되어야 비로소 <자존감>이 제대로 확립됩니다. <돈>과 <권력>이 <자존감>을 만들어준다고 여기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실로 <부활의 삶>이요 <진보의 삶>입니다.
결국은 내 안에 <존엄>을 되찾아야 합니다. <존엄>으로 스스로를 바로 세우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 마음을 뺏기게 마련이죠. 이에 대한 <각성>이 있어야 커뮤니티도 비로소 <변화>를 맞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정치로 정치를 바꿀 수 없다'는 제 진단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겁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내 말과 글에 <책임>을 진다는 것..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확실히 그렇죠. 전문적인 칼럼리스트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어떤 식으로 책임을 지느냐? 너무 막연하지 않나? 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함에 있어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관성>과 <일관성>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공론장에서의 <토론 자세>에 대한 것도 살펴야 합니다. 일단 간단히 언급하자면 '열린 마음'으로 주변의 소리를 경청하되 줏대없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 것.. 입니다. 다시 말해 판단의 <기준>을 확고하게 세우라는 말입니다.
판단의 기준을 확고하게 세울 것, 그리고 그 기준을 이리저리 바꾸지 말 것.. 단 내가 틀렸다고 생각이 되면, 그리고 그것이 확실하다면 그것을 인정할 것..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을 <모욕>으로 여기지 말 것.. 창피하면 창피한 대로, 부끄러우면 부끄러운 대로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챙길 것..
이것이 일반인들이 자신의 말과 글에 책임지는 방법입니다. 걸핏하면 삭제를 하는 행동은 그래서 책임성 있는 행동이 아닌 것이죠.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것, 그리고 그 부끄러움을 그대로 감수하는 것 이것이 바로 책임성있는 행동의 기본입니다.
'태초에 부끄러움, 염치가 있었다.' - 아프로만 창세기.
잘못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는 것은 자존감이 제대로 확립된 사람이어야 가능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스스로에 대한 모욕이나 공격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이게 제대로 될 리가 없죠. 그러니 책임지지 않으려고 대중의 대세 속에 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앞에서 말씀드렸던 <일관성>과 <관성>의 차이라는 포인트가 등장합니다. 조만간 포스팅을 올려서 차분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을 높게 잡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낭만으로 정치할 순 없습니다. 역사엔 공짜가 없으므로 중간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전진해야 합니다. 머리에는 이상과 목표를 바라보되 발은 현실을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유시민이 "정치란 짐승의 비루함과 비천함을 견디는 것"이라고 정의한 겁니다. 이 말을 그저 우와~ 멋있다 라고 감탄만 했을 뿐.. 이게 진정 무슨 뜻인지, 이걸 어떻게 실천하는 건지 고민한 번 안해본 사람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참여계입니다.
유시민 노무현을 사랑하기만 할 뿐 그들을 사는 것에 대한 개념은 없는 겁니다. 이게 문예반이에요~ 현실에 대한 무감각과 도피! 이러니 당위성에만 매달리죠
그래서 제가 얼마전에 미투 커뮤니티의 문예반에게 독설 한번 날렸다가 큰 사단이 난 적이 있었죠~ 어쨌든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참여계의 개념이 이렇게도 박약할 줄 작년 대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죠..
이러니 이해찬, 민평련 계열이 만만하게 보는 겁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죠. 자신의 존엄은 남이 찾아주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지켜야죠! 이걸 못하고 있다는 게 참여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러니 밴드 찾고 폐쇄 커뮤니티 찾아서 숨어버리죠. 이런다고 우리나라 정치현실이 달라집니까? 에휴...